유리기린
가노 도모코 지음, 권영주 옮김 / 노블마인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9.4







 추리소설은 의외로 범용성이 상당해서 다루지 못할 소재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럼에도 상극인 소재도 있지 않나 싶다. 개인적으로 '소녀'라는 키워드가 그렇다고 보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데뷔작 <방과 후>가 동기에 있어서 독자들의 의견이 갈렸던 것처럼 - 그 작가의 다른 작품도 동기가 늘 논란의 중심인 것 같지만... - 일본 문학에서 소녀에 대한 정의나 쓰임새는 대체로 위태롭기에 불가사의한 존재에서 벗어나질 않는 것 같다. 위태롭다느니 불가사의하다느니, 그래봤자 거릴 두는 말들인 것 같아 별로 와 닿지 않는 표현 같은데 그도 그럴 것이 소녀라고 다 같은 소녀가 아니니까 일반화하기 애매하지 않은가. 그런데 단지 추리소설에서 등장한 일부 소녀들의 모습을 보고 우리가 그들을 확대 해석하는 게 아닐까. 추리소설은 물론이고 일본 문학을 접할 때마다 늘 드는 생각이다.

 피해자든 가해자든 목격자든 소녀가 개입하거나, 아니면 아예 여고가 배경이면 명쾌함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추리소설이 방향을 잡기 어려워 하는 것 같다. 이번에 읽은 <유리기린>에서 그걸 확실히 느꼈다. 책의 제목과 동명의 동화를 쓴 여고생이 살해당한 사건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연작 소설인 이 작품의 대부분의 이야기가 소녀의 불가사의함에 초점을 두고 있다. 아, 오해는 마시길. 각각의 미스터리는 복선이 충실해서 추리하고 해결하는 과정이 꽤 탄탄하니까. 중요한 건 이런 미스터리를 만들어낸 당사자들의 심리인데 이게 좋게 말하면 독특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이해 불가한 것일 터다. 그리고 나는 좋게 말하고 싶다.


 소녀라는 존재에 필요 이상으로 의지해 미스터리를 얼렁뚱땅 해결하는 건 원치 않는데 이 작품에선 소녀의 심리를 굉장히 예리하고 설득력 있게 풀어내 제법 감탄스러웠다. 각각의 연작의 제목이 시사하는 주제의식이 무척이나 선명해서 살짝 석연찮았던 심리 묘사도 그럴싸하게 다가왔다. 아마 이 작품에서의 난제는 주어진 단서를 통해 진상을 규명하는 것이 아닌 주어진 단서를 통해 규명된 진상이 일반적인 상식으론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는 점일 것이다. 한마디로 궁극의 'Why done it?'을 자랑한다고 할 수 있겠는데 - 물론 'How done it?'도 출중하다. - 그렇게 드러난 진상이 그렇게 억지스럽지 않다는 게 신기하고 다행이었다. 물론 이것도 다 개인차가 있을 것 같지만 적어도 작가의 글빨 때문에 분위기가 탁월하단 것만은 부정할 수 없을 듯하다. 이거야 원, 추리소설이 아니라 성장 문학이라 칭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니. 그것도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받은 작품이 말이다.

 작중에서 인용되는 안도 마이코의 동화를 비롯해 일본의 동요, 혹은 동물에 대한 잡지식 등이 유난히 인상적이었는데 각각의 요소가 각 소설에서 상징하는 바가 꽤 커서 작품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 십분 도움이 됐다. 이게 은근히 효과를 거두기 까다로운 기교라고 생각하는데 작품의 아기자기하고 환상적인, 그야말로 동화적인 컨셉과 잘 맞물리는 인용들이라서 더 인상적이었다. 가끔 인위적이고 끼워맞추는 듯 얘기하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추리를 해나감에 있어서 꽤 효과적인 연출이기에 오히려 추리소설의 정체성을 확고히 다졌던 것 같다.


 다양한 캐릭터, 전개 등 연작 추리소설로는, 그리고 일상 추리소설로도 더할 나위 없던 작품이었다. 어느 정도 취향을 탈 내용이긴 하지만 추리소설이 이렇게 색다르면서도 본분에 충실할 수 있단 걸 보여줬다는 점은 분명 인정할 만하다. 조금 솔직히 말하면 가장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드러난,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의 내막이 너무 초월적인 감정선으로 점철된 것과 일러스트레이터 노마와 작품에서 탐정역을 맡았던 진노 선생의 러브라인이 뜬금없었던 게 좀 걸리지만 나머진 다 괜찮았다.

 최근에 읽은 작가의 작품이 - 주로 초기작들 - 기대에 못 미쳐서 기분이 좀 그랬는데 이 작품을, 가장 처음에 접한 작가의 작품을 오랜만에 다시 읽으니 오히려 더 감명 깊게 읽혔던 것 같다. 안도 마이코 또래일 때는 잘 와 닿지 않았던 감정선이 지금은 다르게 읽히다니, 역시 당사자일 때 모르던 것들이 지나고 나면 알게 되는 것인가. 아무튼 예전에 읽은 작품이 처음보다 지금 더 재밌게 읽혀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역시 작가가 성장한 게 맞았군.

하지만 적어도 타인의 행동이나 운명에 어떤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는 건 오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심해져서 남의 생사를 자기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다고 믿는 인간이야말로 진짜 살인자가 되는 게 아닐까요. - 21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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