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부드러운 볼 ㅣ 밀리언셀러 클럽 106
기리노 나쓰오 지음, 권남희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12월
평점 :
7.4
기리노 나쓰오는 아마 일본에서 소설가로서 수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상을 수상한 몇 안 되는 작가 중 한 명일 것이다. 그렇기에 작가의 수상작만 찾아 읽는 것도 일인데 개중 나오키상 수상작인 <부드러운 볼>은 절판이 돼서 구입해서 읽기까지 시간이 제법 걸렸다. 작가 본인이 뽑은 최고의 작품, 최고의 대중 문학상을 받은 작품, 하지만 가장 이질적인 작품이었던 <부드러운 볼>은 기대와는 사뭇 달랐다.
일단 추리소설과 정반대의 소설임을 강조하고 싶다. 추리소설적인 사건은 등장하지만 관점이 완전히 다르다. 추리소설이라면 보통 사건의 해결을 염두에 두는데 이 작품은 거의 무관심으로 일관하듯 진행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사건을 해결하는지 보는 소설이 아니라 어떻게 사건 해결을 단념하는지 살펴보는 이야기라서 추리소설의 '추'자도 꺼내선 안 되리라. 스포일러긴 하지만 일단 이 점을 짚어야만 얘길 진행시킬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딱히 스포일러인 것 같지도 않다. 초반부만 대충 읽어도 작품의 결말을 확신해버리게 되니까. 근거는 없었지만, 결말에서 사건의 내막이 공개됐더라면 오히려 더 놀랐을 것 같다.
이 작가의 장기는 하드함과 문장력에 있다. 기본적으로 수위가 세고 어딘가 꼬인 심성을 바탕으로 한 인물이나 이야기를 세밀하고 그럴싸하게 묘사하는 장면이 적잖은 편이다. 대표작 <아웃>에서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 묘사력이 두드러졌고 최근에 읽은 <그로테스크>는 제목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채 처음부터 어두운 심리 묘사를 주축으로 삼는다. 이런 요소는 때론 설득력보다 섬세함이나 분위기를 평가해야 하는데 개인적으로 뛰어난 장기라고 인정하고 지금까지 감탄해왔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읽고 난 뒤, 심리 묘사만으로 작품 전체의 완성도까지 보장하긴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인공이 자신의 불륜남과 '이 사람과 함께라면 아이들을 버려도 좋다'고 생각한 직후에 그녀의 딸이 유괴되는 괴사건이 발생한다. 참으로 기가 막힌 타이밍에 벌어진 재앙에 극심한 죄책감을 떨칠 수 없게 된 주인공은 마치 정해진 수순인 것인 마냥 가시밭길을 자청하며 걷게 된다. 불륜남과는 관계를 지속할 수 없고 남편과는 사이가 껄끄러워지고 둘째 딸에겐 얼굴을 들기 힘들고... 이런 상황 속에서 4년이 흘러간 주인공은 주변 사람 모두가 포기했음에도 자신만은 딸의 생존 가능성을 포기하지 못한다.
<부드러운 볼>은 사건의 관계자 모두가 포기하더라도 혼자서만은 포기하지 않는 것, 마치 그것을 자신의 존재 이유라 여기기에 이르는 주인공의 갈팡질팡하는 내면을 그린 소설이다. 사건 초반에 드러나는 아이러니와 더불어 웃음기 하나 낄 수 없는 압도적으로 무거운 작풍이 인상적인데 딱 거기까지다. 내면에 대한 묘사가 너무 길고 지리멸렬하며 사건의 전개도 분량에 어울리지 않게 매우 더디고 분위기만 충만해 있다. 주인공 카스미와 함께 가장 비중 있다고 할 수 있을 전직 형사 우쓰미는 그 애매한 목적의식과 최후 때문에 작품을 이해함에 있어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불륜남 이시야마의 퇴장도 마찬가지고... 서두에 기리노 나쓰오의 작품 중 가장 이질적이라고 한 데엔 이런 애매한 서사의 탓이 크다. 아니, 백번 양보해서 서사가 애매할 수는 있다고 치자. 그런 종류의 소설이 존재할 수도 있고 그런 소설에 대한 수요도 분명 있으니까.
하지만 이 작품을 쓴 저자가 노렸을 터인 여운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는가 묻는다면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다. 때론 오리무중이어야 더욱 와 닿는 사건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카스미의 딸 유카에게 일어난 사건이 카스미의 죄책감과는 무관하게 그저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라면 과연 이렇게 미해결로 넘어가는 게 최선일까 싶었다. 작중에서 미해결된 거야 그렇다 쳐도, 독자까지 사건의 아무런 전모를 파악할 수 없다면 500페이지 넘게 달려온 이야기에 허무함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은 아닌지? 솔직히 말해 카스미를 비롯한 모든 캐릭터의 심리 묘사가 처음엔 집중이 되다가도 어째 했던 말 반복하는 느낌이라 몰입도가 떨어지는 마당에 결말에서 여운을 주겠답시고 사건의 전모에 대한 추측만 늘어놓는다고 납득할 사람이 몇이나 될는지 모르겠다. 작품의 분위기나 캐릭터들도 호불호가 갈리는데... 보통 이런 생각 잘 안 하지만 이 작품이 절판된 이유를 왠지 알 것만 같았다.
작가의 작품 중 가장 실망한 작품이었다. 다루는 소재들의 수위가 무색하게 꽤나 대중적인 이야길 직조할 줄 아는 작가라고 생각한 나의 인상이 많이 바뀌었다. 사실 기리노 나쓰오라면 응당 이런 종류의 소설을 쓸 법도 했는데, 이 작가라면 이보다 더 완성도 있게 쓸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이 자꾸만 드는 게 그저 아쉬울 뿐이다. 그런데 작가 자신이 최고로 뽑는 작품이 이 작품이라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보이는 것은 언젠가 소멸해요.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소멸하는 것이 슬프고, 허무해요.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보이지 않는 것을 생각해요. 마음이나 진실을요. - 155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