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변호사 고진 시리즈 5
도진기 지음 / 황금가지 / 2016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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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참 함정이 있는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아마 현직 판사였던 시절, 작가가 법정에서 겪은 온갖 환멸을 드러낸 제목인 건가 싶어서 괜히 특이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정작 본 작품의 사건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벌어졌다는 것을 제외하면 생각보다 평이한 양상을 보였다. 최근에 읽은 작가의 작품인 <가족의 탄생> - 최근이라고 해도 벌써 3년 전이다. - 도 이 작품처럼 통속적이고 외견만 보면 평이한 사건으로 시작되는데 특히 이번 작품 같은 경우엔 법정물이라서 더 그렇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명색이 시리즈의 주인공인 고진이 변호사고, 작가도 법조인인데 법정물은 이번 작품이 처음이었다. 법정물이란 장르는 신기할 게 없지만 도진기 작가가 쓰는 건 처음 봐서 사뭇 기대가 됐다. 일찍이 이 작가가 법정을 배경으로 한 창작물을 보기 힘들다는 이유로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실과 다르기 때문이라고 했던 만큼 다른 건 몰라도 법률에 대한 고증에 대해선 불안할 것이 없었다.


 처음으로 법정에 선 고진, 상대 검사는 그간 고진의 전적을 떠올려 본다면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위인이지만 사건이 여러모로 변호인에게 불리한 구석이 있어 난항이 예상된다. 하지만 변호란 곧 방어, 진범을 잡아야 하는 사건 수사가 아닌 의뢰인의 무죄 판결을 이끌어내기만 하면 충분한 터라 고진은 의심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차근차근 분명하게 승소에 다가간다. 이는 어떻게 보면 소극적인 태도라 할 수 있기에 작품의 전개는 은근히 잔잔한데 고진의 취향이자 신념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전개였다고 볼 수 있겠다.

 최근 우리나라에 리메이크돼 방영 중인 일본 원작 드라마 <리갈하이> - 리메이크작을 보려고 했더니 주변에서 뜯어 말리더라. 반드시 실망할 것이란다... - 에서 다뤄진 법조인, 특히 변호인의 딜레마에 통달한 인물이 바로 고진일 것이다. 법의 생리, 한계를 알 만큼 아는 고진은 본래 그 점을 이용해 뒷세계에서 이름 좀 날렸을 정도로 시니컬하기 이를 데 없는 인물인데 우연한 책임감 때문에 '어둠의 변호사' 개업 이래 처음 법정에 출두했더라도 그의 철학이 흔들릴 일은 없었다. 그래서 고진은 법정에서 초반엔 소극적으로, 중반부엔 어울리지 않게 무기력하게, 후반부엔 매우 파격적으로 행동하는데 이런 장면들이 어떻게 보면 무난하게 흘러가는 이 작품에서 한 줄기 빛과 같은 것이었다.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의 의뢰인을 전폭적으로 신뢰할 생각이 없는 철저한 합리주의자인 고진이기에 가능한 모습이었다.


 작중 사건의 배경이 내가 실제로 가봤던 블라디보스토크라서 내심 기대하고 읽었지만 의외로 작품에선 장소에 대한 매력을 어필하지 않는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장면은 별로 길지 않은 등 이른바 여행 미스터리의 쾌감 같은 건 전무해서 이럴 거면 왜 굳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배경으로 썼을까 싶었는데 다 읽고 나니 막판에 고진이 밝혀내는 범인의 거대하고 황당한 규모의 트릭을 위해서 선정된 느낌이 다분해 일단 의문은 남지 않았다. 다만 장편보단 오히려 단편에 어울리는 성질의 트릭이었던 것과 더불어 특유의 황당함 때문에 독자도 같이 추리하기 힘들었던 건 좀 아쉬운 부분이었다. 추리소설답게 막판까지 쉽게 결말을 유추할 수 없고 긴장감과 기대를 이끌어내는 연출은 경험이 쌓인 작가답게 능숙했지만 만듦새 자체는 약간 위태로웠다.

 범인의 동기도 마찬가지다. 이번 작품은 작가의 초기작과 비교하면 대단히 드라마가 강조된 편으로 흡사 만화 김전일이 떠오르기도 했다. 아주 전문적인 문인은 아닌 탓인지 캐릭터 설정이 스테레오 타입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단점은 여전하나 - 특히 여성 캐릭터의 묘사나 쓰임새는 젠더 감수성이 예민하다고 자부하는 독자라면 거슬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 그만큼 알기 쉽고 선명해서 작가가 노렸을 감동과 여운이 일정 수준 이상 안겨지긴 했다. 하지만 고진이 입을 빌려 그걸 일일이 설명하는 장면은 구태의연해서 내심 질리는 마음도 없지않아 들었다. 사람의 속내를 거의 발가벗기듯... 어쩌면 이 때문에 고진이 법정에서 진범을 밝히길 꺼렸던 게 아닐까 싶었을 정도라 약간만 독자의 해석에 기댔어도 좋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래도 함정이 있는 제목 덕에 작품의 여운이 강조돼서 괜찮았다. 이 이상 제목의 함정을 강조하는 건 스포일러가 될 테니 입을 다물겠지만... 초기작부터 시니컬함으로 일관하던 작가가 이 작품에서 드라마와 감동에 치중하는 변신을 선보여 결과적으로 신선한 작품으로 남게 됐다. 조금씩이지만 작가가 변화를 추구하는 모습이 솔직히 불안한 한편으로 보기 좋다. 전업 작가도 아닌데 이렇게 정력적으로 집필하시다니, 분야를 막론하고 참 모범으로 삼을 만한 모습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치 변호사용 상식이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정말 그렇게 믿는 걸까요? 아니면 단지 그가 돈을 지불하는 의뢰인이기 때문에 그러는 걸까요? 그 이성이 확률의 편에 선 이성입니까? 뻔한 범죄자를 변호한다는 여론과 양심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혼자만의 신념이라는 장막 뒤로 숨는 건 아닐까요? - 16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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