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삐삐와 닐스의 나라를 걷다 - 문화와 역사가 함께하는 스웨덴 열두 도시 이야기
나승위 글.사진 / 파피에(딱정벌레)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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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북유럽에 대한 나의 관심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특히 노르웨이 여행을 다녀온 후부턴 그 관심이 더 지극해진 것 같다. 그렇게 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드, 하물며 아이슬란드와 관련이 있는 책을 종종 찾아읽는데 이번처럼 스웨덴만을 살펴보는 책은 처음 읽어본 것 같다. 내가 아는 스웨덴은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의 배경이라는 것, 노벨 문학상을 수여하는 나라, '북유럽의 패자'라는 것 외엔 없다. 어쩌면 그 '북유럽의 패자'라는 수식어가 좀 부담스러워 그간 스웨덴과 관련된 책은 잘 찾아보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책에서도 언급되는 내용이지만 스웨덴은 성공적인 복지 국가라는 이면에 자국을 위해 굉장히 이기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나라다. 다이너마이트나 구리 등 압도적인 산업으로 부를 축적했지만 정작 세계대전 때 중립을 표방하면서 사실상 나치의 만행을 방관하거나 도움을 주기도 했으니... 안 그런 나라가 어디 있겠냐만 오늘날의 선망 어린 이미지가 무색하게 스웨덴도 죄 많은 국가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무고한 나라란 없지만 말이다.

 '북유럽의 패자'라는 수식어는 내겐 좀 다른 식으로 와 닿는데, 특히 문화적인 측면에서 스웨덴은 주변 국가들에 비해 월등한 유명세를 누린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지 않나 싶다. 나처럼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은 '밀레니엄' 시리즈를 시작으로 수많은 노르딕 누아르 작가의 고향으로 눈에 익은 나라이며 우리 부모님 세대는 '말괄량이 삐삐'의 나라로 유명할 것이다. 이외에도 찾아보면 스웨덴이 배출한 문화 컨텐츠 캐릭터가 많은데 그중 이 책에서 중점적으로 등장하는 닐스도 한 명일 것이다. 스웨덴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셀마 라겔뢰프의 <닐스의 모험>의 주인공인 닐스의 발자취를 따라 걷자는 게 이 책의 주된 내용이다.


 짧게나마, 수박 겉 핥기로라도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의 실제 배경으로 여행하는 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지 알기에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밝히는 작의가 그렇게 와 닿을 수 없었다. 저자 나승위 씨는 스웨덴을 이해하기 위해 <닐스의 모험>을 읽은 것이니 나완 순서가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인문학적인 시각으로 스웨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책의 내용은 제법 알찼다. 물론 프롤로그에서 공헌한 것처럼 스웨덴을 알아가는 과정이 뜻대로 척척 이뤄지지 않았지만 스웨덴 입장에서 이방인인 작가기 최선을 다해 공정하게 쓴 책이지 않은가 싶다. 때론 온정적으로, 필요할 땐 비판적으로. 잠깐 여행을 다녀오는 것이 아닌 그 나라에서 살고 있기에 쓸 수 있는 깊은 내용들이었다.

 스웨덴의 이모저모를 시간 순이 아닌 공간을 배경으로 살펴보는 게 무엇보다 흥미로웠다. 덴마크와의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백성들의 삶, 스웨덴 각지의 고성에 얽힌 미스터리한 이야기들, 바사 왕을 비롯한 스웨덴 역대 왕들의 행적이나 구리, 철강 사업에 관한 스웨덴 전체의 이익과 손해 등 다루는 이야기가 꽤 많았다. 작가는 이 모든 이야기에다가 약 백 년 전에 세상에 등장한 <닐스의 모험>의 주인공인 닐스의 시선으로 바라보곤 하는데 그 시간 사이에 많이도 변화한 스웨덴의 모습은 격세지감이란 말이 절로 나올 정도라 시사하는 바가 컸다. 복지 국가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스웨덴이 역사의 길목마다 저질렀던 실책이나 그 실책을 만회한 여러 행적들은 배울 점이 많았다. 다른 나라를 공부한다는 것은 조국을 돌아보는 것과 같다. 그 말을 의식하고 나면 이 생소한 나라가 그저 생소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나한테 노르웨이가 그랬듯 작가한테는 스웨덴이 그런 나라였는지 스웨덴에 대한 진한 애정이 전해졌던 게 독자 입장에서 무엇보다 즐거운 일이었다. 아주 당연하게도 이 책을 읽으니 나 또한 스웨덴에도 가고 싶어졌다. 참, 이 세상엔 가보고 싶은 나라가 많기도 하네.


 아쉬운 건 내용의 주가 되는 작품인 <닐스의 모험>을 읽지 않아 책의 전개가 단편적이었던 면이 없지않았단 것인데 이는 작가의 잘못이 아닌 미리 책을 접하지 않은 내 탓이 크다. 물론 그 책을 읽지 않아도 작가는 친절하기에 내용 이해에 지장은 없다. 단지 모종의 반가움, 잔재미가 덜했던 게 아쉬웠다는 얘기다.

 두 번째로 아쉬운 건 책의 분량이다. 스웨덴 남부에서 중부까지 다루고 있는데 하는 김에 북부까지 다루는 게 어땠을까 싶었다. 그렇게 되면 분량이 제법 길어지겠지만 저자의 글솜씨라면 다 읽을 용의가 있다. 어쩌면 <닐스의 모험>의 내용이 북부를 배경으로 펼쳐지지 않아서 이 책도 더 전개될 수 없었던 건지 모르지만 아무튼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다. 저자의 다른 저서를 읽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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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미터 그리고 48시간 ㅣ 낮은산 키큰나무 17
유은실 지음 / 낮은산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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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옛날에 읽은 조디 피코의 소설 <마이 시스터즈 키퍼>에서 의학 지식이 풍부한 주인공이 등장한다. 기껏해야 중학생 정도 나이대의 주인공은 언니의 병 때문에 자신의 줄기세포, 골수 등을 제공해왔기에 자연스럽게 의학 지식이 풍부해지게 됐다. 참 조숙하지만 어떻게 보면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이들을 찾아가는 병이 특히 그렇다. 병은 그 자체만으로도 당사자를 일상과 철저히 분리시킬 수 있다. 이는 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가는 인간에게 치명적이다.

 이 책의 저자 유은실 씨는 실제로 그레이브스병을 앓았는데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갔다가 자신과 동일한 병을 앓고 있는 한 소녀를 보고 이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저자는 주변에서 그 병으로 인해 작가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고, 신이 작가로 만들기 위해 병을 준 거라는 등의 말을 들었다는데 설령 그렇다 해도 아프지 않은 게 제일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고 후기에서 밝혔다. 분명 병은 자신의 지난 삶과 앞으로의 삶을 생각하게끔 해주기에 인생에 있어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될는지 모른다. 하지만 병이 주는 고통이 그런 식으로 무턱대고 좀 지양해야 할 듯하다. 저자가 밝힌 말들은 병에 걸리거나 장애가 없는 나도 충분히 공감이 됐다. 한편으로 어쩌면 나도 병에 걸린 사람을 보고 뭔가 단정적으로 '좋은 일이 있으라고 병이 생긴 거겠지'하고 말을 건네진 않았는지 돌아보게 됐다. 만약 그랬다면 실례도 그런 실례가 없었겠다.


 이 작품의 포인트는 그레이브스 병보단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해 방사성 요오드 치료를 받고 난 뒤의 48시간에 있다. 한마디로 병을 치료하기 위해 피폭을 당해햐 하는 이 선택은 주인공으로 하여금 적잖은 감정의 소용돌이로 밀어넣는다. 성인인 내가 들어도 방사성 요오드니 뭐니 하는 이름 자체부터 거부감이 드는데 안 그래도 가정사가 평탄하지 않아 예민하기 이를 데 없는 사춘기 청소년에겐 충격 그 자체일 것이라 예상됐다. 지금껏 그레이브스 병을 보고 '그레이브스 씨'니 뭐니 부르면서 애써 밝게 지내왔는데 난데없이 피폭을 당해야 한다니, 애증의 관계라고 부르기도 힘든 이 병을 떨치기 위해 주인공은 방사성 요오드 치료를 결심한다. 그런데 치료를 받고 48시간 동안 타인과 2미터 거릴 유지하며 지내야 한다는 말에 주인공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홀로 지내기로 한다. 엄마나 지금 자신과 따로 사는 아빠나 할머니의 도움 없이.

 간혹 주인공이 좀 이타적인 구석이 돋보일 때가 있어서 몰입이 잘 안 될 뻔한 적이 있었는데 작가가 심리 묘사를 섬세하게 해준 덕분에 큰 어색함 없이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주인공은 마다하지만 기어코 도움을 주는 친구들이나 가족의 존재는 참 뭉클했고 방사성 치료를 받고 꼭 가출하는 것 같은 모양새로 48시간을 보내는 주인공의 여정도 신선해 읽히기는 빠르게 읽혔다. 소설 전체의 분량이 짧은데 그걸 감안하더라도, 또 주인공 심리가 한두 마디로 설명될 만큼 단순하지 않음에도 말이다. 작가가 오래 구상한 통찰이 돋보이는 대목이 아닌가 싶다.


 그렇기에 짧은 분량은 좀 아쉽다. 48시간이란 제한이 있긴 하지만 그 48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이야기에 적절한 살을 붙인 작가이기에 더 길게 썼어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다. 간혹 주인공과 친구들의 관계는 더 깊이, 혹은 그 이전부터 단서를 붙였더라면 주인공과 가족들의 관계처럼 인상적이었으리라 본다. 방금 말했듯 가족 이야기는 꽤 인상적이었다. 주인공이 매사 자기 탓을 하고 방사성 치료라는 엄청난 중대사를 겪는 중에도 병적으로 타인에게 폐를 끼치기 싫어하는 모습이 불안정한 가정사가 영향 때문이란 건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어디에도 주인공의 잘못은 없지만 엄마 아빠의 서늘한 관계는 아이를 괜히 주늑들게 만든다. 나도 충분히 경험해본 일이기에 십분 이해가 됐다. 주인공의 성격을 드러내는 요소가 병이라면 그 성격을 형성한 요소는 엄마 아빠의 관계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청소년 소설은 특히나 성장에 주목하는 성격이 강하다. 이 작품도 그런 맥락에서 봤을 때 두 가지 성장을 이뤄서 바람직한 청소년 소설이라 볼 수 있다. 첫 번째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어쨌든 방사성 치료를 받아 앞으로 주인공의 몸이 좀 괜찮아질 것이란 여운을 남기고, 두 번째로는 주인공이 보다 이타적인 삶에서 자신을 생각하는 자세를 가지게 되면서 이야기가 끝난다는 것이다. 사람에겐 다 저마다의 성장 양상이 있는 것이다. 꼭 병이 있었기에 성장을 했다고 할 순 없겠지만 그 안에서 주인공이기에 할 수 있는 만큼 자신만의 성장을 한 것 같아 참 보기 좋았다. 식상하지 않고 진지하게, 괜찮은 청소년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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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의 침묵 ㅣ 블랙 캣(Black Cat) 11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지음, 이미정 옮김 / 영림카디널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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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일전에 인드리다손 작가의 <저체온증>을 읽었을 때 제목과 작풍의 온도차에 감명을 받은 바 있다. 작품의 배경인 아이슬란드며 인명이나 지명 등 생경하다 못해 차가운 듯했지만 실상 그렇게 따뜻한 소설이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작가가 추리소설을 쓰는 방식은 굳이 북유럽을 넘어 세계의 여느 추리소설가들과도 판이했는데 이번에 읽은 <무덤의 침묵>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작가는 주변에서 모국인 아이슬란드를 배경으로 추리소설이 써지겠냐고, 그 나라에선 범죄 발생률이 매우 낮지 않느냐고 질문을 받는 모양이던데 이에 작가는 작품으로써 우문현답을 해보인다. 범죄만으로 추리소설은 귀결되지 않는다, 라고.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이와 같은 소설은 쓰지 못할 것이다.

 저번에 읽은 <저체온증>에 비해 이 작품에선 레이캬비크라는 배경이 좀 더 선명히 그려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이슬란드의 수도지만 인구 밀도가 현저히 낮은 그 도시에서 약 반 세기 전에 벌어졌을지 모를 살인의 전모를 밝히고자 하는 이 소설은 다분히 감정적이고 다분히 아이슬란드라는 배경의 특성에 기인해 그만큼 특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너무나 생소한 나라인 아이슬란드가 역사 속에서 어떻게 발걸음을 내딛었는지, 그리고 청정에다 조용하고 범죄율이 현저히 낮다는 대외적인 국가 이미지 이면 속에서 누가 피눈물을 흘렸는지 그려낸다.


 거두절미하면 작품의 흡입력은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전개 특성상 눈길을 잡아끄는 맛이 부족하고 에를렌뒤르의 개인사의 비중이 많은 분량에 걸쳐 할애되기 때문에 은근히 집중이 잘 안 된다. 이야기의 본편이나 에를렌뒤르의 개인사나 너무 암울하기 짝이 없어 쉽사리 페이지가 뒤로 넘어가지 않았던 것도 크게 작용했을 터다. 전개도 느린 편이고 사건의 전모도 여러 시점으로 전개되느라 이미 다 밝혀져서 결말 자체도 그리 궁금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긴 좀 그렇지만 가정폭력이란 소재 자체는 수위나 깊이가 무색하게 식상한 감이 있어 솔직히 말해 아이슬란드 배경이란 특이사항이 없었으면, 무엇보다 <저체온증>에서 받았던 좋은 기억이 없었다면 끝까지 읽기를 주저했을 것이다.

 <저체온증>도 그랬지만 이 작품은 추리소설로썬 확실히 이질적이란 생각이 든다. 이런 식으로 작품 세계를 구축한 작가의 고집이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주인공은 사건의 해결까지 이 이야기를 쫓아야 하는 이유를 독자들에게 그렇게 논리적으로 어필하진 못하는데 그럼에도 계속 읽게 된다. 아이슬란드가 먼 나라긴 하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우리랑 크게 다를 것 없기 때문일까. 그렇다 보니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고 기본적으로 사람은 생각하는 게 다 거기서 거기라는 게 참 틀린 말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제아무리 아이슬란드가 외따로 떨어진 섬이라지만 그곳에서의 드라마는 어째 낯설지가 않았다.


 요 네스뵈의 소설에 대해 얘기하면서 어떤 문학 작품이 작가의 고향이나 작중 등장하는 배경에 크게 영향을 받는 게 장점일 수도 있고 단점일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런데 노르웨이는 우리나라한테 있어 참 생소한 나라라 그런지 저런 요소가 엄청난 강점으로 다가온다고 얘기했었는데 인드리다손의 아이슬란드를 배경으로 한 소설도 마찬가지였다. 서서히 도시의 모습을 갖춰가는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드러난 사회 문제의 일각이, 우리가 차마 몰랐던 아이슬란드 역사 속 영국군의 존재감 등이 아주 다른 나라 일처럼 들리지 않는 것 이전에 아이슬란드가 어떤 나라인지 알게 되는 효과가 지극했기 때문이다. 때론 한 편의 소설을 읽는 게 어떤 나라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만들기에 아주 용이하단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 넘어가기엔 작중에서의 가정폭력 묘사의 수위가 꽤 센데, 그 수위가 정신적으로 괴롭히는 수준에서의 수위라 더욱 잔혹하게 다가온다. 그 밖에도 에를렌뒤르의 개인사도 처절하기 그지없는 등 분위기 하나는 정말 제대로다. 어떻게 보면 이런 분위기가 결말에 다다랐을 때 어떤 식으로든 가라앉거나 해소되기에 추리소설의 사건다운 사건을 그리지 않음에도 묘한 쾌감이 남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렇게 보면 작가의 말마따나 추리소설은 범죄에 국한되지 않는 소설이 맞는 것 같다. 범죄에 비견되는 갈등과 사건이, 해묵은 감정이 사라진다면 그 역시 추리소설다운 사건 해결이지 않은가.


 <무덤의 침묵>이나 <저체온증>이나 아직 내 수준에 비해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의 작품이란 느낌은 들지만 그럼에도 계속 접해보고 싶은 작가다. 다음엔 <저주 받은 피>를 읽어볼까 하는데 이 제목도 심상찮아 보이지만 작가가 어떤 작풍을 구사하는지 알기에 괜한 선입견은 갖지 않으려고 한다.

가정폭력 사실에 대해서 묻고 싶은데요.

영혼을 살해하는 범죄를 일컫는 편리한 말이죠. 그게 진정 어떤 일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쓰는 순진한 말 말예요. 평생 동안 영원한 두려움에 떨며 사는 인생이 어떤지 아세요? - 27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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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노블로 읽는 모파상의 전쟁 이야기
기 드 모파상 원작, 디노 바탈리아 지음, 최정수 옮김 / 이숲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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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모파상의 작품 중 보불전쟁을 시간적 배경으로 두고 있는 8편의 단편 소설이 수록된 책이다. 8편의 소설이 그래픽 노블로, 이른바 만화화됐는데 만화도 엄연히 예술의 일각이라 대우하는 유럽에서 저명한 만화가라고 하는 디노 바탈리아의 각색이 들어갔다기에 꽤 기대됐다. 모파상의 작품들을 좋아하기도 하고 만화가의 명성도 제법이라서 그야말로 그래픽 '노블'의 퀄리티가 당연히 기대됐는데 그 기대는 반은 충족됐고 반은 빗나갔다.

  만화는 텍스트와 그림의 조합이란 점에서 굉장히 가치 있는 장르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사람들이 소설이나 영화에 비해 만화를 너무 저평가하는 건 아닌지 늘 생각하곤 한다. 만화의 장점이라고 하면 소설과 마찬가지로 지면을 통해 전개됨에도 읽기 쉽다는 점이 클 것이다. 그리고 온전히 텍스트에 집중하는 소설과 달리 만화에선 그림을 통한 색다른 연출을 시도할 수 있는 것을 우린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단순히 소설과 같은 내용 전개에 그림만 삽입한 정도라면 그건 만화가 아니라 일러스트가 빼곡히 들어찬 소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내 지론이다.


 이 책은 만화답게 모파상의 원작 소설을 시각적으로 보다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정작 읽는 내내 소설에 삽입된 무수한 일러스트에 말풍선을 달았을 뿐이라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었다.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 원작 소설의 문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데 인물들의 대사를 제외하면 거의, 아마도 소설의 전문 그대로 전개돼서 생각보다 만화를 읽고 있다는 느낌은 잘 들지 않았다. 그림체도 비교적 선이 연하고 특히 인물들의 이목구비가 명확치 않기에 더더욱 소설의 문장들이 돋보일 수밖에 없었는데 치명적인 단점까진 아니지만 만화라는 장르의 이점을 잘 살린 것 같지 않아 아쉽지 않을 수 없었다.

 수록작들의 구성은 나쁘지 않았다. '두 친구'나 '비곗덩어리'처럼 여러 번 읽은 작품도 있었고 이번에 처음 읽은 작품도 있었다. 이렇게 전쟁이라는 하나의 테마로 한 작가의 선집을 읽으니 퍽 신선했는데 전쟁이 벌어지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면모를 볼 수 있어 나름 흥미로웠다. 부끄럽게도 작중의 시대적 배경인 보불전쟁에 여간 무지한 게 아니라 역사적 맥락은 거의 모른 채 읽었지만 작품들은 사전 지식의 유무 없이도 이해가 가능한 보편적인 감정선을 다루고 있어 감상함에 크게 저해되지 않았다. 그냥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프로이센한테 크게 패했구나 정도로만 알아도 충분하다.


 읽고 나서 전체적으로 모파상을 입문하려고 읽기엔 좀 부족한 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모파상의 소설들은 짤막해서 독해의 난이도가 높지 않기에 굳이 만화의 가독성을 빌리지 않아도 되고 무엇보다 위에서 말했듯 이 책은 만화의 연출보단 원작의 연출과 텍스트를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어서 기왕 읽는다면 역시 원작을 먼저 접하는 게 나을 것이다. 독특한 컨셉의 선집이란 메리트가 있지만 선집이라고 해도 모든 작품의 완성도가 고른 것은 아닌 만큼 그렇게 큰 기대를 할 정도는 아니었다. 모파상을 좋아한다고 했지만 정말 작가의 모든 작품을 다 좋아하는 건 아니니 하는 말이다. 한마디로 모파상을 처음 접하거나 좋아하는 독자가 아니라면 일독을 권하기 약간 망설여지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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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자금이 없습니다
가키야 미우 지음, 고성미 옮김 / 들녘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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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꼭 에세이를 연상시키는 제목의 이 소설은 얼핏 단순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부부가 둘 다 구조조정을 당해 백수가 됐는데 집안에 경조사가 겹겹이 겹쳐 저축해둔 돈이 바닥을 드러낸다. 말 그대로 노후자금이 없는 상황에서 노년에 접어들고 있는 주인공 아츠코가 날마다 불안에 떨고 불투명한 미래에 한숨을 짓는 게 이 소설의 전반적인 내용이다. 이렇게만 말하면 이 소설은 그다지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을 터다.

 실제로 소설의 본편은 생각보다 암울하고 답답했는데 흡입력은 괄목할 수준이었다. 가히 오쿠다 히데오에 뒤지지 않을 정도였는데 작품의 몰입도며 일상을 묘사하는 미친 섬세함이 특히 그랬다. 그렇다고 문체가 아주 비슷한 건 아니다. 두 작가에게 공통적으로 유머러스한 면이 있지만 오쿠다 히데오는 순수한 웃음이라면 가키야 미우라는 작가가 그리는 웃음은 씁쓸한 웃음 쪽에 가깝다.


 일본 소설을 읽다 보면 일본이 참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 혹은 멀지만 가까운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 이런 거리감이 우리나라에서의 일본 문학이 누리고 있는 인기의 무시할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나는 우리 가족의 지난 모습과 나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한국과 일본이 분명 정서가 판이한 데가 있음에도 이 소설의 주인공 아츠코의 심리 묘사는 결코 낯설지 않았다. 시누이와의 갈등, 결혼식과 장례식에 거금을 들이는 것에 진땀을 빼는 것, 어떤 환상도 없는 부부 생활에 수시로 분통이 터지는 것 등이 무척 현실적이고 공감이 갔다. 작품의 주인공과 독자인 나 사이에 공통점이 실상 전무하다는 걸 생각하면 참 놀라운 일이다.

 이렇게 한국 독자로서 공감이 가는 한편으로 역시 일본은 한국과 다른 나라라는 생각이 드는 지점도 분명히 있었다. 다른 게 아니라 체면을 차리는 문화에 있어선 일본은 확실히 독보적인 구석이 있다. 작중에서 경제 수준이 평범하거나 조금 유복한 정도인 아츠코의 가족이 딸의 결혼식과 시아버지의 장례식 때 울며 겨자 먹기로라도 낸 금액은 상식을 초월한다. 적당히 계산해도 한화로 1억은 족히 넘었을 것이다. 작중에서 장남의 며느리란 이상하게 불리한 이유로 이 모든 금액의 지출을 책임지게 된 아츠코는 금방 말했듯 울며 겨자 먹기로 저금을 깨야 했는데, 이건 뭐 지옥인 걸 알고서 들어가는 것과 다름없어서 보는 내가 다 착잡했다. 백 번 양보해서 딸의 결혼식이야 그렇다 쳐도 장례식이 그렇게 돈을 잡아먹는 것은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언제부터 돈을 많이 들이는 게 곧 성의를 보이는 것과 같은 말이 됐단 말인가.


 설상가상 딸의 결혼 생활은 불안하게만 보여 아츠코의 걱정은 끊길 줄을 모른다. 딸의 어머니로서, 시누이를 견제하는 올케로서, 시어머니에게 있어서 아무래도 눈치가 보이는 며느리로서 아츠코의 자아는 순서만 바뀔 뿐 아츠코를 괴롭게 만드는 것은 결국 매한가지다. 그런 아츠코가 유일하게 자기 속내를 시원히 토로할 사람은 그녀가 취미로 듣고 있는 꽃꽂이 수업에서 만난 사츠키 뿐이다. 이런 사츠키와의 인연은 후반부의 어떤 사건과 이어지게 되는데...

 읽기 전엔 이런 소재, 이런 주인공으로 이야기가 흥미로울까 싶었지만 막상 읽어보니 이보다 우리 주변의 일상적인 이야기가 없어서 술술 읽혔다. 보편적인 주제지만 그 이야기를 우리 시대의 중년의 여성의 시선으로 풀어나가니 퍽 애잔했다. 위에서 말한 아츠코가 자신의 여러 자아 때문에 이래저래 손해를 감내하고 된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는데 부분부분 아츠코의 주관이 개입되긴 했지만 객관적으로도 아츠코가 떠안은 책임이 범상치 않았다. 그런 점에서 이야기의 몰입을 끊김없이 끌어갈 수 있어 참 적확한 주인공 설정이었다고 생각된다. 우리 주변의 모든 일상적인 일들, 고민, 약자에 대한 사려 깊은 작가의 시선을 느낄 수 있는 설정이라 꽤나 인상적이었다.


 사려 깊은 작가라 그런지 예상과 달리 해피 엔딩으로 끝내는데 그 과정이 은근히 현실적이었던 것도 마음에 들었다. 얼핏 급조된 듯한 느낌도 있었고 몇몇 캐릭터에 있어선 캐릭터 붕괴가 의심되기도 했는데 다르게 보면 이 이야기는 결국 아츠코의 주관적인 시선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라서 갑자기 성격이나 태도가 변하는 캐릭터들의 모습이 당연하다면 당연하겠구나 싶었다. 아츠코가 자신은 옛날부터 저축하며 검소하게 살았고 허세나 체면을 중시한 적이 없다고 늘상 말했지만 주변의 평가는 사뭇 달랐던 것처럼, 또 아츠코의 아들이 자기 주변 친구를 보면 우리 가족은 부자 같다고 느끼는 것처럼 자신과 타자에 대한 평가를 늘 상대적이기 마련이니까.

 그렇기에 언제부터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 채 막장을 달려가는 것 같아 불안하기 짝이 없었던 소설의 내용이 최후반부에선 해피 엔딩으로 이어졌던 건 납득이 갔다. 미래가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예측 불허하다는 것을 시사하기에 가장 행복한 형태의 결말일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제목의 문장은 좀 다르게 다가온다. 노후자금이 없습니다. 그래서 뭐, so what? 왠지 당당함이 느껴지지 않은가.


 작가의 책이 국내에 많이 소개됐던데 다른 책도 찾아봐야겠다. 이런 좋은 작가를 모르고 지냈다니, 오랜만에 전율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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