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의 침묵 블랙 캣(Black Cat) 11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지음, 이미정 옮김 / 영림카디널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7.6







 일전에 인드리다손 작가의 <저체온증>을 읽었을 때 제목과 작풍의 온도차에 감명을 받은 바 있다. 작품의 배경인 아이슬란드며 인명이나 지명 등 생경하다 못해 차가운 듯했지만 실상 그렇게 따뜻한 소설이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작가가 추리소설을 쓰는 방식은 굳이 북유럽을 넘어 세계의 여느 추리소설가들과도 판이했는데 이번에 읽은 <무덤의 침묵>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작가는 주변에서 모국인 아이슬란드를 배경으로 추리소설이 써지겠냐고, 그 나라에선 범죄 발생률이 매우 낮지 않느냐고 질문을 받는 모양이던데 이에 작가는 작품으로써 우문현답을 해보인다. 범죄만으로 추리소설은 귀결되지 않는다, 라고.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이와 같은 소설은 쓰지 못할 것이다.

 저번에 읽은 <저체온증>에 비해 이 작품에선 레이캬비크라는 배경이 좀 더 선명히 그려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이슬란드의 수도지만 인구 밀도가 현저히 낮은 그 도시에서 약 반 세기 전에 벌어졌을지 모를 살인의 전모를 밝히고자 하는 이 소설은 다분히 감정적이고 다분히 아이슬란드라는 배경의 특성에 기인해 그만큼 특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너무나 생소한 나라인 아이슬란드가 역사 속에서 어떻게 발걸음을 내딛었는지, 그리고 청정에다 조용하고 범죄율이 현저히 낮다는 대외적인 국가 이미지 이면 속에서 누가 피눈물을 흘렸는지 그려낸다.


 거두절미하면 작품의 흡입력은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전개 특성상 눈길을 잡아끄는 맛이 부족하고 에를렌뒤르의 개인사의 비중이 많은 분량에 걸쳐 할애되기 때문에 은근히 집중이 잘 안 된다. 이야기의 본편이나 에를렌뒤르의 개인사나 너무 암울하기 짝이 없어 쉽사리 페이지가 뒤로 넘어가지 않았던 것도 크게 작용했을 터다. 전개도 느린 편이고 사건의 전모도 여러 시점으로 전개되느라 이미 다 밝혀져서 결말 자체도 그리 궁금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긴 좀 그렇지만 가정폭력이란 소재 자체는 수위나 깊이가 무색하게 식상한 감이 있어 솔직히 말해 아이슬란드 배경이란 특이사항이 없었으면, 무엇보다 <저체온증>에서 받았던 좋은 기억이 없었다면 끝까지 읽기를 주저했을 것이다.

 <저체온증>도 그랬지만 이 작품은 추리소설로썬 확실히 이질적이란 생각이 든다. 이런 식으로 작품 세계를 구축한 작가의 고집이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주인공은 사건의 해결까지 이 이야기를 쫓아야 하는 이유를 독자들에게 그렇게 논리적으로 어필하진 못하는데 그럼에도 계속 읽게 된다. 아이슬란드가 먼 나라긴 하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우리랑 크게 다를 것 없기 때문일까. 그렇다 보니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고 기본적으로 사람은 생각하는 게 다 거기서 거기라는 게 참 틀린 말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제아무리 아이슬란드가 외따로 떨어진 섬이라지만 그곳에서의 드라마는 어째 낯설지가 않았다.


 요 네스뵈의 소설에 대해 얘기하면서 어떤 문학 작품이 작가의 고향이나 작중 등장하는 배경에 크게 영향을 받는 게 장점일 수도 있고 단점일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런데 노르웨이는 우리나라한테 있어 참 생소한 나라라 그런지 저런 요소가 엄청난 강점으로 다가온다고 얘기했었는데 인드리다손의 아이슬란드를 배경으로 한 소설도 마찬가지였다. 서서히 도시의 모습을 갖춰가는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드러난 사회 문제의 일각이, 우리가 차마 몰랐던 아이슬란드 역사 속 영국군의 존재감 등이 아주 다른 나라 일처럼 들리지 않는 것 이전에 아이슬란드가 어떤 나라인지 알게 되는 효과가 지극했기 때문이다. 때론 한 편의 소설을 읽는 게 어떤 나라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만들기에 아주 용이하단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 넘어가기엔 작중에서의 가정폭력 묘사의 수위가 꽤 센데, 그 수위가 정신적으로 괴롭히는 수준에서의 수위라 더욱 잔혹하게 다가온다. 그 밖에도 에를렌뒤르의 개인사도 처절하기 그지없는 등 분위기 하나는 정말 제대로다. 어떻게 보면 이런 분위기가 결말에 다다랐을 때 어떤 식으로든 가라앉거나 해소되기에 추리소설의 사건다운 사건을 그리지 않음에도 묘한 쾌감이 남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렇게 보면 작가의 말마따나 추리소설은 범죄에 국한되지 않는 소설이 맞는 것 같다. 범죄에 비견되는 갈등과 사건이, 해묵은 감정이 사라진다면 그 역시 추리소설다운 사건 해결이지 않은가.


 <무덤의 침묵>이나 <저체온증>이나 아직 내 수준에 비해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의 작품이란 느낌은 들지만 그럼에도 계속 접해보고 싶은 작가다. 다음엔 <저주 받은 피>를 읽어볼까 하는데 이 제목도 심상찮아 보이지만 작가가 어떤 작풍을 구사하는지 알기에 괜한 선입견은 갖지 않으려고 한다.

가정폭력 사실에 대해서 묻고 싶은데요.

영혼을 살해하는 범죄를 일컫는 편리한 말이죠. 그게 진정 어떤 일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쓰는 순진한 말 말예요. 평생 동안 영원한 두려움에 떨며 사는 인생이 어떤지 아세요? - 27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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