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8.7







 소설집에 대한 감상을 남기는 것만큼 까다로운 일도 없다고 생각한다. 수록작들의 공통점을 아우르는 감상을 내놓고는 싶은데 그게 잘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다로움을 김애란 작가는 모르지 않았는지, 지난 번에 읽은 <바깥은 여름>도 그렇듯 이 소설집의 제목도 수록작의 제목 중 하나가 아닌 별개의 단어로 제목을 지었다. 비행운. 이 단어를 들었을 때 당연히 비행기의 자취를 따라 생기는 그 구름인 줄로 알았다. 하지만 비행운非幸運, 행운과 반대되는 의미였다니... 참 재미난 언어유희라 생각됐다. 그런데 비행운은 불행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 것 같다. 이는 비행기가 지나간 뒤에 생기는 그 구름을 연상시키는 언어유희의 덕일 것이다. 행운과는 반대지만 또 그 나름대로 구름만큼 높은, 어딘지 높다랗다는 그 느낌이 퍽 희망적이기도 하다.

 내가 학생 때 김애란 작가가 특강을 하러 왔었는데 그때 '져도 이긴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 바로 문학의 묘미라는 이야기를 한 바 있다. 이 말은 곧 삶이 비극적이더라도 그 안에서 또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우리의 모습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로 이해했는데 작가의 이 말은 여전히 유효하게 다가왔다. 참고로 이 책은 작가가 그 말을 한 해와 같은 년도에 출간된 책이다. 그러니까 작가의 말이 이토록 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일 테지.



 '너의 여름은 어떠니'


 김유정문학상을 수상한 작품. 작가가 자주 다루곤 하는, 아버지나 전남친에게 배신을 당하는 주인공의 이야기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것도 무척이나 현실적이고 피부에 와 닿는 소재를 통해 주인공의 배신감을 효과적으로 묘사해냈다. 그런데 주인공이 상처를 받을 대로 받았지만 다르게 보면 좋은 결말이라고 본다. 미묘하게 미련이 남아있는 주인공이 자신의 마음을 다소 충격적인 일을 겪고서라도 정리할 수 있었으니까. 미련을 가질 필요도 없다는 걸 확인했으니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 아닌가.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이 작품은 연극으로 먼저 접했는데, 그땐 작품의 제목이 뭔 의민지 짐작할 수 없었다. 작중에서도 택시 운전사인 주인공이 밤에 운전하면서 노랠 듣는다는 묘사가 나오는데 명확하게 이래서 이런 제목일 것이라고 딱 부러지게 결론이 나오질 않았다. 그래도 굳이 시도를 해보자면, 밤에 택시에서 혼자 노래를 듣노라면 어김없는 떠오르는 후회스런 과거에 쉽게 헤어나오지 못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담아낸 게 아닌가 하는데 그렇게 확신이 서진 않는다. 뭐, 해석이란 게 꼭 확신을 갖자고 하는 건 또 아니니까 상관은 없다만.

 이 작품에서 특히 좋았던 건 사이가 어색하기 이를 데 없는 잘 나가는 조카와 주인공의 만남이다. 택시 운전사와 손님으로 만난 둘의 어색해 미칠 것 같은 묘사가 주인공의 비참함을 극대화한다. 김애란 작가의 섬세함이 돋보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비참함은 그렇게 극적이고 대단한 순간에만 피어나는 게 아니란 것. 당연하지만 좋은 통찰력이다.



 '호텔 니약 따'


 해외 여행을 통한 비일상적인 경험과 인연에 대해 이래저래 좋은 기억이 있는 나는 이 작품에서 우여곡절을 겪는 주인공의 모습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수록작 중에서 가장 극적인 이야기라 여겨졌는데 만약 표제작을 정한다면 이 작품의 제목으로 짓더라도 나쁘지 않았을 듯하다. 그나저나 이 책에선 유독 공항이라든지 해외를 소재로 다룬 작품이 많이 수록된 것 같다. 그러면서도 작가의 과장되지 않은 감수성이랄지 작풍이 그대로인 건 또 놀라운 일이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호텔 니약 따'의 경우엔 어떻게 영감을 받고 쓴 작품인지 읽는 내내 궁금했다. 작가도 어느 정도 비슷한 경험을 한 것일까.



 '서른'


 이 작품도 연극으로 먼저 접했다. 나도 어느덧 나이가 서른이란 숫자에 가까워져 주인공의 심정이 더욱 내 일처럼 다가왔다. 이 책에선 '서른' 말고도 나이만 먹었지 별다른 성과 없이 구질구질한 모습을 보이는 인물이 화자로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 모든 인물의 처지를, 그들의 굴욕적이고도 패배감이 짙은 심정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문장은 이 작품에서 나오지 않았나 싶다.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서른'은 어떻게 보면 가장 희망과 거리가 먼 작품이겠다. 참 서글픈 게 뭐냐면, 주인공의 처지가 같은 세대인 내가 봤을 땐 그렇게 유별나게 비극적이란 생각이 안 든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타인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로도 읽히는 것은 뛰어난 문학만이 갖고 있는 특징이겠지만 이 작품에선 그게 너무 과했다. 어떻게 보면 결론 없는 아픔을 거론한 것일 뿐인 느낌도 들어 뒷맛이 안 좋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책의 제목이 그렇듯 '서른'도 단지 불행하단 말로 귀결되는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우리는 슬픔이랄지 이별 같이 안 좋은 사건을 돌아보면서 더욱 망가지기도 하지만 때론 더욱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서른'의 화자의 편지는 공허하게 읽히지는 않는다. 그게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화자는 자신이 왜 편지를 쓰는지, 자신의 편지가 상대에게 닿을 것인지 알지 못하면서도 편지를 쓰는 것일 터다.



https://blog.naver.com/jimesking/221021426306

 이건 연극 <서른> 포스팅.



https://blog.naver.com/jimesking/221044161156

 이건 연극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포스팅.

그런데 감동적인 음악을 들으면요, 참 좋다, 좋은데, 나는 영영 그게 무슨 노래인지 알 수 없을 거라는, 바로 그 사실이 좋을 때가 있어요. - 147p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 297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희생의 시스템 후쿠시마 오키나와
다카하시 데쓰야 지음, 한승동 옮김 / 돌베개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8.3







 일본 근현대사 속에서 소외받고 차별을 당한 지역과 관련된 책을 종종 접했는데 이번처럼 후쿠시마와 관련된 책은 처음 읽어봤다. 후쿠시마는 우리나라 사람을 비롯해 전세계적으로 3.11 대지진으로 인한 원전사고 때문에 도저히 모를 수가 없는 곳일 것이다. 일본 정부가 후쿠시마에서 터진 그 사고를 수습하는 과정이나 애당초 후쿠시마에 원자력 발전소를 세운 것부터가 문제가 많았다는 등의 이야기는 일찍이 모르던 바는 아니었다. 그 나라가 어떤 사건에 대해 수습이나 대처를 함에 있어서 문제가 많다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그로 인한 후폭풍이 아주 중대해 가볍게 훑고 넘어갈 사안은 아닌 지라 이렇게 부족하지만 책으로 읽게 됐다.

 도대체 후쿠시마에는 어쩌다 원전이 생기게 됐는가. 그리고 이 질문과 더불어 비슷한 선상에서 오키나와는 일본에게 어떤 식으로 희생을 당했는가. 이러한 질문들을 통해 저자는 일본이 근대사에 들어서부터 나라를 얼마나 그릇되게 운영해왔는지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개인적으로 2부의 오키나와 이야기는 메도루마 슌이나 후지메 유키 등이 쓴 저서에서 워낙에 잘 다뤄졌기에 상대적으로 이번 책에서의 내용은 그렇게 새로울 게 없었지만, 1부의 후쿠시마 이야기와 연계되면서 좀 신선하게 다가온 측면도 있었다. 상술한 두 저자의 글에는 일본 본토라는 타자가 오키나와 같은 소수의 집단을 어떻게 이용해먹었는가에 대해 얘기하는데 이 책에선 자국에 대한 자아비판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자아비판엔 짜릿함이 느껴졌는데, 이는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치부를 드러내는 것은 상대나 상황을 막론하고 쾌감을 자아내는 법이니까.


 저자가 후쿠시마 출신이기 때문일까, 고향에 대해 얘기하는 1부의 내용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정부의 감언이설 때문에 후쿠시마에 원전을 두게 된 경위를 정치/경제적으로 살펴보고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일본 정부의 몰염치함은 읽는 나도 화나게 만들었다. 혹자는 억측이나 음모론으로 일축할 수 있겠으나 내가 봤을 땐 그건 아닌 것 같다. 자기 고향에 대해 얘기하는 것치곤 객관적으로 얘기하려는 태도도 그렇고, 무엇보다 고향을 등지고 도쿄로 상경한 것에 대한 저자 혼자만의 자책감이 감정적이면서도 이해 가능한 수준이라서 제법 신뢰가 갔다.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건 원전사고와 같은 재앙을 두고 사람들이 '하늘의 벌'이니 뭐니 하면서 기존 자연 현상에 대해 지들 입맛대로 떠들어대는 모양새를 지적하는 부분이다. 이에 대해선 할 말이 좀 있는 게, 옛날 고3때 경기권에 있는 대학의 종교철학과에 면접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이런 질문이 나왔다. 3.11 일본 대지진이 신의 심판이라 생각하는가. 나는 '우리가 한국인이라 옛날부터 일본한테 악감정이 있어서 그렇게 보는 거지, 지진 자체는 자연 현상이므로 우리가 신의 심판이냐 아니냐고 떠드는 것은 오만한 일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이따위로 부끄럽게 떠들어대는 게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 아니었는지 저자는 짧지 않은 분량을 할애해 옛날에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부터 시작한 일본 특유의 포장이나 미화를 낱낱이 파헤쳐본다. 도대체 그게 왜 그렇게 잘못된 일인지 다양하고 관점에서 자세하게 살펴보기에 읽는 입장에서 속이 다 시원했다. 어떻게 보면 희생의 시스템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 책의 주제와 약간 동떨어진 감이 있는 부분이었지만, 어떤 현상을 바라보는 저자의 자세를 엿볼 수 있어 글의 완성도 그 이상의 만족도를 얻을 수 있었다.


 당장의 국익에 눈이 멀어 오히려 피해를 받는다면 그보다 더한 막장이 있을 수 없겠다. 그것도 모자라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고통을 겪어야 할 후쿠시마, 오키나와 사람들의 처지를 상상하노라면 그저 한숨이 나오는데, 이 책이 어디까지나 사고가 터진 원인에 대해서 살펴볼 뿐인 것을 생각해보면 더욱 암담하기 그지없다. 물론 원인을 살펴보는 게 정말 중요한 일이긴 하나, 현재 일본은 저런 자아비판도 소용 없을 것 같은 수준의 행보를 질리지도 않고 이어나가고 있어 그저 아연해질 따름이었다. 책을 읽은 시기와 무관하게 일본이란 나라에 연민이 느껴졌다. 다른 건 몰라도 정치에 관해선 일본은 정말로 후진국이지 않은가.

누가 희생당하는가. 누구를 희생시키는가. 그것을 결정할 권리를 누가 갖고 있는가. 과연 우리는 국가, 국민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희생해야 할 1할 쪽에 자신을 포함시켜도 좋다는 것을 국가 위정자들에게 승인해 준 적이 있는가. - 186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뭉크 뭉크 ㅣ 다빈치 art 1
에드바르드 뭉크 지음, 이충순 옮김 / 다빈치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9.3







 책 제목이 꼭 날림으로 지은 듯하지만, 수록된 글들을 전부 뭉크가 썼다는 걸 생각하면 파격적일지언정 이상한 제목은 아닌 것 같다. 아마 뭉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읽을 수밖에 없는 책일 텐데, 생전에 글 좀 쓴다고 평가를 받은 뭉크이기에 이 책이 상당히 기대됐다. 물론 대부분이 일기거나 편지라서 어느 정도 완성도를 감안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뭉크 자신부터가 후대에 이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읽히리라 상정하고 쓴 글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우울하지만 섬세하고, 타인과의 관계에 어려움을 토로한 뭉크라면 지금 자신의 글이 이렇게 읽혀서 누가 왈가왈부하는 게 심히 불편함을 토로할 것 같지만... 어쨌든 뭉크의 팬이라면 의미있는 책이란 건 분명하다. 개중에는 뭉크가 쓴 단편이나 우화도 있으니 이래저래 눈여겨볼 만하다. 다른 건 몰라도 그의 그림이 있기에 완성도가 문제되지 않는다. 문제가 될 리가 없지.


 내가 읽은 책이 20년 전에 출간됐던 지라 노르웨이어 표기 같은 부분들이 좀 아쉽지만 - 사실 뭐가 정확한 노르웨이어 표기인지 나도 잘 모르므로 이렇게 얘기하는 게 웃기긴 하나 근래 읽었던 뭉크 도서들과 비교하면 아무래도 차이가 좀 난다. - 생각보다 편집이 깔끔했는데 특히 뭉크가 생전에 그린 그림이 정말 빼곡하게 실려 있어 눈이 즐거웠다. 뭉크가 일상의 순간마다 영감을 받아 그렸던 그림들이 바로 바로 소개되니까 그림의 생동감이 더욱 배가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정작 텍스트에 눈이 잘 안 갔던 것도 사실인데 이는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전문 소설가나 수필가가 썼다면 얘기가 달랐겠지만, 생전에 소설가들과 교류를 나눴을 뿐인 뭉크이기에 이만한 수준으로 필력을 구사하는 게 오히려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의 우울한 글이 별로 취향에 안 맞았던 나도 이렇게 말할 정도인데 그렇지 않은 사람에겐 얼마나 인상적일지 생각해보면 함부로 무시할 수준은 못 된다. 개인적으론 우울한 화자가 등장하는 현대 일본 소설에 비견될 정도였다. 다른 화가가 쓴 글도 이 정도일까? 한 번 찾아봐야겠다. 이쯤 되니 뭉크를 비롯한 여러 화가들의 작품 세계나 일생을 알아보고 싶어졌다.


 어쨌든 뭉크를 다루는 책은 가급적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주 읽으려고 하는데, 그런 책들 가운데서도 이 책만큼 의미가 있는 책도 없을 듯하다. 뭉크의 글들이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전에 뭉크 연구가인 아르네 에굼이 쓴 뭉크 전기 역시 짤막하면서도 인상적이었다. 내가 다른 책에서 접했던 뭉크의 일생이나 작품에 대한 얘기를 놀라울 정도로 잘 정리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으로 뭉크의 이야기를 처음 접했어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뭉크가 쓴 글과 그의 인생을 잘 연결시켰을 것 같다. 혹시 찾아볼 수 있으면 이 사람이 쓴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쉽지 않아 보이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원더풀 라이프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송태욱 옮김 /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 201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8.9







 동명의 일본 영화를 찍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본인이 썼던 각본을 그대로 소설화한 작품이다. 따라서 그 영화의 원작 소설이라 부를 수 없을 듯하다. 오히려 영화 원작 소설이라 해야겠지. 하지만 이 작품처럼 감독이 소설을 쓰는 경우는 처음 봤다. 보통 다른 작가를 쓰던데... 서두에서 감독은 영화와 소설의 서술 방식의 차이에 대해 언급하면서 언뜻 이 소설이 영화와 사뭇 다른 인상을 주리란 인상을 심어준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런 인상은 읽을수록 크게 옅어진다.

 내용은 사실상 영화를 그대로 옮겼을 뿐이며, 다만 이야기의 중심 인물이랄 수 있는 시오리의 심리가 세세하게 묘사된다는 정도의 차이는 있다. 뭐, 영화의 내용이 워낙 좋아서 그대로 옮긴다는 게 딱히 흠잡을 부분은 아니나 굳이 이렇게 큰 차이가 없는데 뭐하러 소설까지 읽어야 하나 싶었던 것도 사실이다. 일전에 읽은 <태풍이 지나가고>는 영화와 소설의 인상이 달랐었는데 이 작품은 그렇지 못해서 아쉬웠다. <태풍이 지나가고>를 소설화할 땐 다른 작가와 협업했는데 아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이 작품을 소설을 쓰면서 뭔가 깨달은 바가 있었는가 보다. 작품의 각본을 썼는데 소설까지 썼던 건 욕심이 아니었는지...


 이야기나 설정은 여전히 울림이 있어 좋았다. 일본 특유의 경어로 서술되는 문체가 어색했지만 의외로 작풍과 어울리는 맛이 있어 크게 신경 쓰이진 않았다.

 아무래도 등장인물이 워낙 많고 소설의 분량은 짧은 지라 상대적으로 영화에 비해 심심한 감이 있었는데, 영상미나 배우들의 연기 없이 묘사만으로 그 많은 캐릭터들의 '행복한 기억 찾기'를 그리는 건 좀 벅찼던 듯하다. 만약 영화가 아닌 소설을 먼저 읽었다면 이 부분에서 더 강한 불만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이전에 본 영화 속 장면을 떠올리며 읽은 거니 따라가기 편했지, 그렇지 않았다면 가뜩이나 이름도 헷갈리는데 - 의도적인지 몰라도 인물들의 이름이 다들 평범했다. 노린 건가? - 누가 무슨 얘길 하고 있는지도 몰라 적잖이 헤맸을 것만 같다.

 소설의 내용을 비롯해 캐릭터 설정, 주제의식 등이 워낙에 영화와 닮아서 작품의 외형에 대해서만 말하게 된다. 경어로 이뤄진 문체 때문인지 영화보다 더 우화적이었던 게 인상에 남지만 표면적인 대사는 영화와 그야말로 판박이라 감흥이 덜했다. 나처럼 소설은 영화와 뭔가 다르지 않을까, 아니면 소설이 영화의 세계관을 더 확장시킨 걸까 기대하는 사람이라면 굳이 이 소설을 읽지 않아도 된다는 걸 명심했으면 좋겠다. 물론 영화의 지대한 팬이라면 이런 말은 무시하고 결국 읽겠지만 그래도 이 점을 꼭 염두에 두길 바란다.



 작품의 내용에 대한 감상평은 이 포스팅으로 대체한다.


https://blog.naver.com/jimesking/221189852654

 

난 그때 자기 안에서 행복한 순간을 필사적으로 찾았어. 그리고 50년이 지나 어제야 비로소 나도 다른 사람의 행복에 참가했다는 사실을 안 거야. 그건 무척 멋진 발견이었어. - 252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바이바이, 엔젤 - 라루스가 살인 사건 ㅣ 야부키 가케루 시리즈
가사이 기요시 지음, 송태욱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8.1







 작가의 작품은 처음 접하지만 이름은 상당히 낯익었다. 일본 추리소설계의 저명한 평론가이자 저술한 몇몇 작품이 추리소설로서 꽤나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사쿠라바 가즈키나 요네자와 호노부 같은 작가들을 메인 스트림에 추천한 위인이란 걸 어렴풋이 들었기 때문이다. <바이바이, 엔젤>은 무려 45년 전에 출간된 저자의 데뷔작이자 현상학 탐정 야부키 가케루가 등장하는 시리즈의 기념비적인 첫 번째 작품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독자들의 평이 그닥 시원찮아 보여 읽기 전에 의아하면서도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도 호불호가 갈린다기에...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절대 가볍게 펼쳐들 만한 작품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추리소설의 탈을 쓴 사상서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는데, 설명적이고 관념적이기론 둘째 가라면 서러울 교고쿠 나쓰히코나 나카지마 라모 - 설명적인 것으로만 치면 기시 유스케도 포함시킬 수 있겠다. - 같은 작가의 작품은 가독성이 무척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내가 너무 과장하는 걸까? 40년 전 소설답게 사건의 양상은 크게 신선할 것 없는 와중에 작품의 서사를 감싸고 있는 관념의 깊이, 철학의 두께가 초장엔 흥미로울지언정 전개를 거듭할수록 몰입도가 떨어져 왜 이 작품이 그토록 호불호가 갈렸는지 이해가 되고도 남았다. 아니, 이렇게 어렵게 읽히는 추리소설은 꽤 오랜만이었다. 우스겟소리지만 작가는 물론이고 번역가도 자기가 무슨 말을 번역하고 있는지 알기는 한 걸까 싶었다.


 개인적으로 책의 편집에 의한 옥의 티를 지적하고 싶다. 작품 본편의 사건, 범인이 연쇄살인을 저지른 내막에는 작가의 자전적인 요소가 강하게 가미됐는데 문제는 책에서 소개되는 저자의 약력만 보면 이 자전적 요소를 대충이라도 파악할 수 있어서 결말의 놀라움이 반감된 감이 있었다. 굳이 책의 첫 장에 저자를 그토록 길게 소개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자전적인 요소가 가미된 것 자체는 문제삼을 것이 못 된다. 사건의 배경인 프랑스 파리의 역사적 맥락을 간과하면 범인이 밝히는 동기가 뜬금없는 경향이 있지만 작가가 자전적 요소를 제법 매끄럽게 녹여냈기에 이 정도면 자전적인 소설의 모범이라 부를 만하다. 하지만 그걸 대놓고 홍보한 게 김빠진다는 거지. 그렇기에 만약 이 소설을 진지하게 읽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책의 첫 장에 소개된 저자의 약력은 안 보고 읽기를 바란다.

 이 책을 진지하게 읽을 생각이 있는 사람에 한해서 말하는데, 앞서 언급했듯 절대 가벼운 기분으로 읽지 않기를 바란다. 평소에 철학이나 사상을 다루는 책에 관심이 있다거나 내성이 있다 자부하는 사람이라면 도전해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단지 책의 외면적인 요소, 연쇄살인과 머리 없는 시체 같은 본격 추리소설다운 소재에 이끌려 읽겠다면 한번 더 고심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게 흥미를 추구하며 읽기엔 사건의 전개와 해결은 평범하고 문장과 주제의식은 난해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야부키 가케루가 그토록 주창하는 '현상학'이란 걸 쉽게 설명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몇 문장으로 쉽게 말할 것을 인물들이 기본적으로 서너 장에 걸쳐 장광설을 펼치는 통에... 아무튼 상당히 인내심이 필요한 작품이란 걸 꼭 염두에 뒀으면 좋겠다.


 냉정하게 말하건대 순전히 추리소설적으로만 봤을 땐 아주 만족스런 작품이진 않았다. 사건 전개가 평범하고 구태의연한 감도 있고 탐정역을 맡은 야부키 가케루를 비롯한 주위 등장인물들, 범인까지 너무 성향이 비슷해 읽는 맛이 떨어진다. 가령 제아무리 야부키 가케루가 어려운 말만 써댄다 하더라도 그 내용을 요약해주거나 딴지를 거는 발랄하기 그지없는 캐릭터가 - 예를 들면 '교고쿠도' 시리즈의 에노키즈 같은 캐릭터. - 한 명이라도 등장했으면 그 긴 장광설을 읽느라 쌓인 피로가 간간이 풀렸을지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무겁거니와, 막판에 다다라선 야부키 가케루도 귀여워 보일 정도의 겉만 번지르르한 말이나 쏟아대는 범인까지 등장해 정신적 피로가 거의 극에 달하게 돼 여러모로 뒷맛이 개운치 않은 채 책장을 덮게 된다. 위에서 어떻게 들렸는지 모르겠는데, '그야말로 추리소설의 탈을 쓴 사상서'라는 말엔 조금도 과장이 섞이지 않았다. 아, 첨언을 해보겠다. 뒷맛이 개운치 않았지만 완독해냈다는 사실에 뿌듯하기도 했다. 내가 이 어려운 책을 다 읽다니, 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려운 소설은, 말그대로 어렵다는 개성 때문에 함부로 저평가하고 싶지 않기도 하다. 추리소설이건 추리소설의 탈을 썼건 뭐건 어쨌든 추리소설의 형태로 진지하게 어렵게 쓰는 것은 쉽지도 않으면서 특별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출간된 당시 일본에선, 이렇게 '뭔가 있어 보이는' 작품이 꽤나 신선한 나머지 높이 평가한 것 같은데 지금에 와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모르긴 몰라도 추리소설 평론가가 쓴 추리소설이라 그런지 뭐가 달라도 달랐다. 작가가 꿈꿨을지 모를 추리소설과 사상의 결합이 아주 절묘했다고 보긴 힘드나 이토록 진지하기 짝이 없는 소설을 썼다는 점, 그리고 적어도 추리소설과 사상 중 한 마리 토끼는 제대로 잡았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이 시리즈의 다음 작품이 국내에 출간됐던데 그 작품도 읽어볼 생각이다. 역자가 말하길 후속작에선 서사가 더 발전했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그보다 더 후속작이 끌리는 이유가 있다. 탐정 캐릭터인 야부키 가케루가 꽤 독특한데 이렇게 그림으로 그린 듯한 철학자 탐정은 가히 천연기념물급이었다. 때문에 본작에서도 이 양반이 등장하는 장면만을 집중하면서 읽었을 정도인데 그런 만큼 다음 작품에서의 행보도 궁금하다. 그와 더불어 야부키 가케루와 기묘한 관계로 그려지는 나디아도 독특한 캐릭터인 지라 솔직히 작중에서 펼쳐지는 철학/사상 대결보다 이 둘의 관계에 더 눈길이 가기도 했다. 후속작에선 이런 요소들이 어떻게 이어질 것인지 너무나 기대된다. 추리소설은 캐릭터만 잘 만들면 기본 이상은 한다는 게 마냥 우스겟소리는 아닌 모양이다.



 p.s 진짜 여담인데 왜 책의 제목이 영어인지 모르겠다. 불어로 <아듀, 앙쥬>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작품 배경이 파리인데...

순교자야말로 고리대금업자보다 타산적으로 자신의 소유물에 매달리지. 고리대금업자가 쌓아 올린 금화를 천한 웃음을 띠고 어루만지는 것처럼 순교자는 자신의 정의, 자신의 신을 두루 혀로 핥아. - 379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