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텀 ㅣ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9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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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이 작품을 결말까지 읽은 나로선 이 시리즈의 후속작이 2편이 남아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지경이다. 언제나 고통을 동반하는 행보를 보인 해리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유독 가혹하기 이를 데 없는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이 작품의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를 당했는데 - 바로 다음 작품 <폴리스>의 등장인물 소개를 읽다가 그야말로 봉변을 당했다;; - 알고 봐도 충격적이긴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결과만이 아니라 그 과정까지 접하니까 더 충격적이었달까. 이번에야말로 노르웨이를 떠나려던 해리를 다시금 돌아오게 만든 일련의 사건들은 예외없이, 그리고 상상을 초월하는 비극으로 치달았다.

 시리즈 3편에서 어린애로 등장한 올레그가 충격적이게도 작품이 시작되자마자 살인 용의자로 등장하는데 격세지감이란 말도 쑥 들어갈 정도로 심각한 사안이라 남은 500페이지의 전개가 심히 불안했다. 가뜩이나 마약 밀수에 손을 댄 파일럿 토르와 살인사건의 피해자인 구스토의 시점이 해리의 이야기와 병행해 혼란스러움이 가시지 않는 마당이란 걸 생각하면 이 작품의 오프닝은 실로 가관이었다. 진짜 요 네스뵈는 방심할 수 없는 작가다.


 시리즈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후속작이 전작의 신선함을 따라오지 못한다는 실망감은 어쩔 수 없이 커지는 것 같다. 바로 전에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가 형사' 시리즈가 완결작에서 결국 그런 느낌을 받았고 이 '해리 홀레' 시리즈도 완결이 머잖은 이번 작품에서 비슷한 느낌을 줬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의 완성도는 신섬함 이전의 문제가 아닐까 싶을 만큼 산만한 수준이라 개인적으로 실망이었지만 그래도 결말 덕에 아이러니하게도 뒷맛이 개운했다. 상당히 더러운 기분을 느낄 만한 결말이었지만 그렇기에 작품이 되려 신선했던 것이다. 아주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파격이라 할 수 있겠는데 참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예 이 작품으로 시리즈를 처음 접한다면 다른 감상이 나올지 또 모를 일이지만, 애석하게도 다른 독자들이 이 작품으로 시리즈를 처음 접할 일은 거의 없을 듯하다. 보통 이 시리즈를 입문한다고 하면 보통 주변에서 <스노우맨>이나 <레드브레스트>, 혹은 <박쥐>를 권할 테니까.

 그 말처럼 이 작품을 펼쳐들 독자들은 거의 시리즈의 오랜 팬들일 것이 틀림없다. 만약 <스노우맨>부터 시작해 <레오파드>를 거쳐 이 작품을 읽었다고 해도 대체로 3권째 접한 셈일 텐데, 그런 독자들한테도 이 작품 속 해리와 라켈, 그리고 올레그가 보이는 유사 가족의 모습은 사람에 따라선 심금을 울릴 것이다. 나 역시 이야기가 산만한 와중에도 이들 가족의 얘기가 심상찮게 다가왔는데 그래서 구스토의 이야기가 더욱 안중에도 없었는지 모르겠다. 다시 읽어보면 인상이 달라질지 모르지만 구스토의 이야기는 단순히 폰트를 바꾸는 이상으로 눈길을 끌 요소가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왜 그렇게 안 읽혔던 건지...


 전작과 달리 이 작품은 온전히 오슬로에서만 이야기가 전개된다. 해리가 자기 집 안방처럼 드나들던 베르겐도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이전의 '오슬로' 3부작만큼은 아니지만 다시금 오슬로가 주요 배경으로 다뤄진 셈인데, 꼭 그 도시를 마약과 범죄의 온상지로 그려서 여러모로 충격이었다. 오슬로는 직접 가본 사람으로서 꽤 좋은 인상을 안겨준 도시였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작가가 취재를 좀 했는지 유독 마약 범죄의 세계관을 탄탄히 묘사하던데 독자를 반쯤 질리게 만들었다면 반 이상은 성공한 것이리라. 개인적으로 마약 범죄에 그 어떤 호기심도 없었기에 읽기 힘들었지만 실생활에서 마약이란 걸 접할 일이 전혀 없음에도 마약의 폐해를 잘 전달했다는 측면에서 성과도 제법 거두지 않았나 싶다. 적어도 북유럽 추리소설이 사회 고발에 목적을 둔다는 점을 생각하면 장르의 주제의식에 대단히 잘 맞는 작품이었다고 볼 사람도 있겠다.

 복지 천국인 노르웨이도 결국 범죄가 판을 치는 동네임을 지속적으로 어필한다는 점에서 이 시리즈는 역시 의미가 남다르다고 본다. 얼마 전 <기생충>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그 많은 쾌거를 달성한 것엔 우리나라 사회의 그늘을 깊이 있게 묘사한 덕택이 클 것이다. 물론 봉준호 감독 말마따나 그 작품의 각본을 국가를 대표하기 위해 쓴 것도 아니고 그 영화 속 사회의 모습이 픽션 속이나 우리나라만의 문제도 아니다. 내가 주목한 점은 스스로에게 솔직한 이야기는 얼마나 불쾌하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낸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새삼 '해리 홀레' 시리즈도 비슷한 맥락에서 글로벌한 명성을 얻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저 먼 노르웨이의 범죄 이야기에 열광하고 다음 이야기를 주목하는 이유는 그 나라의 그늘을 묘사한 게 신선하면서 아주 남 얘기 같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아들>을 제외하면 요 네스뵈의 소설을 '해리 홀레' 시리즈로만 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작가의 다른 작품도 한 번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작품에서의 노르웨이의 모습이 궁금하다.


 이 작품의 바로 다음 작품인 <폴리스>와 아직 출간되지 않은 작품에서 무슨 이야기가 또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 가늠이 안 된다. 바로 위에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어야겠다고 말했지만 아마 그 일은 이 시리즈를 다 읽은 다음에 성사가 될 것 같다. 대체 몇 년이 지난 뒤일는지... 당장 이 소설도 2019년 안에 읽겠다고 했었는데 지켜지지 않은 걸 보면 시간이 생각보다 더 걸릴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p.s 핑계일 수 있겠는데 작품의 내용은 결말의 스포일러 때문에 차라리 다음 작품에서 언급하는 게 여러모로 편할 듯하다. 누가 들어도 핑계인 것 같지만.

어쩌면 그래서 다들 사진을 찍는 거겠지.

우리가 행복했다는 거짓 주장을 뒷받침할 거짓 증거를 마련하려고. 살면서 잠시나마 행복한 적이 없다고 하면 견디기 힘드니까. 어른들은 애들한테 사진 찍을 때 웃으라고 하고 자기네 거짓말로 끌어들여. 그렇게 웃으면서 행복을 가장해. - 127~128p




부모가 자식을 지키려고 싸우는 걸 자기희생이라고 한다지만 알고 보면 자기 자신을 지키는 거야. 똑같이 복제된 자기를. 그러니 도덕적 용기가 필요한 게 아니오. 그저 유전자의 이기주의일 뿐이야. - 162~16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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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막이 내릴 때 (저자 사인 인쇄본) ㅣ 재인 가가 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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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근래 들어 몇 년간 접해온 시리즈의 완결작을 많이 읽었는데 그 어떤 시리즈도 내게 '가가 형사' 시리즈 이상의 묵직함을 안길 수 없었다. 이 작품으로 완결되는 '가가 형사' 시리즈는 내게 아주 의미가 있는 시리즈다. 내가 처음으로 내 돈 주고 사서 읽은 추리소설이 바로 이 시리즈에 속한 <붉은 손가락>이었다. 난 지금도 추리소설이라고 하면 셜록 홈즈나 명탐정 코난을 떠올리는 사람들에게 그 소설을 꼭 추천하곤 한다. 그만큼 작품에 짙게 밴 휴머니즘은 고등학생 시절의 나에게 좋은 의미로 큰 충격을 줬고 그 특유의 휴머니즘은 다행히 후속작에서 빛이 바래지지 않았다. 오히려 짙어지면 짙어졌지.

 정확히 10번째 작품으로 가가 형사의 이야기를 완결을 낸 작가의 심정은 나의 허전한 심정과는 가히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다. 알기론 가가 형사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데뷔작 이전에 쓴 소설에서부터 등장한 캐릭터이고 이후 작가의 기념비적인 작품에 여러 번 등장시킬 정도로 남다른 애착을 가진 캐릭터인 듯하다. 때문에 그런 캐릭터를 굳이 완결이라면서 작별을 고할 필요가 있었는지 읽기 전부터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로서는 좀 더 깔끔하고 여운을 남긴 채 마음 속에서 떠나보내고 싶었던 걸까? 솔직히 궁금하지 않은가. 2010년에 드라마화를 거치면서 캐릭터의 인기도 꽤 올라갔는데 굳이 완결을 해야 했던 이유가 있었던 걸까?


 나는 여전히 히가시노 게이고를 좋아하지만 그가 요즘 들어 매너리즘에 빠지고 있다는 생각은 역시 지울 수 없다. 아니, 바꿔 말하자면 다작의 폐해가 이제서야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 문학상도 많이 받고 인기도 건재하지만 갈수록 예전의 실험적인 정신은 엿보기 힘들어졌다. 이야기꾼으로서 솜씨는 원숙해졌지만 감정에 호소하는 일이 잦아졌고 엄연히 추리소설가로서의 패기도 있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좀 더 폭넓은 작품 세계를 - 나쁘게 말하면 두루뭉술한, 얼렁뚱땅이려나. - 지향하는 것 같아 요즘은 잘 찾아 읽지 않는다. 그럼에도 히가시노 게이고는 내게 소중하며 일종의 빚을 진 작가이지만 10년 전과 달리 그 정도가 덜해졌음은 내게 있어 무시할 수 없는 변화일 것이다.

 잠시 요즘 히가시노 게이고에 대한 나의 의견을 적어봤는데 - 그의 신작이 성에 안 차는 것도 문제지만 과거의 작품이 개정돼 출간하는 것도 내심 못마땅한 일이다. 물론 사정은 이해한다만. - 그 심정은 고스란히 요번에 읽은 <기도의 막이 내릴 때>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앞뒤는 맞지만 필요 이상으로 크고 복잡한 서사는 한눈에 잘 안 들어오고 당장 전작인 <기린의 날개>보다 도입부의 흡입력이 약했으며 감정에 호소하는 부분도 적잖다. 개인적으로 감정에 호소하는 부분은 이 작품의 경우에는 크나큰 장점이라 생각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호응을 이끌어내지 못할 것 같고 작가의 다른 작품에선 비판 요소가 됐기에 아주 긍정적으로 볼 수만은 없었다. 이야기가 참 슬프고 전달하는 바도 남달랐고 가가 형사의 마지막 이야기에 걸맞게 무게도 있었음에도 이렇게 작품 외적인 이야기를 계속 하는 이유는 온전히 작품 내적인 부분만 바라보기엔 작가의 존재감이 내게 너무나도 크기 때문일 것이다.


 조심스럽게, 그리고 건방지게 말하자면 히가시노 게이고는 작가로서 매너리즘에 더 빠져버리기 전에 가가 형사와 조금 더 안정적인 형태로 작별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슬픈 생각이 들었다. 너무 돌려 말하는 것 같은데, 간단히 말해 시리즈를 완결하는 작품으론 기대에 못 미쳤다는 게 이 작품에 대한 나의 전반적인 인상이다. 이는 어쩌면 일본 소설, 특히 나이 좀 지긋한 일본 소설가들의 이야기에 지친 탓일 수도 있겠단 생각도 든다. 작중에서 묘사되는 등장인물 태반이 일본인 특유의 죄책감, 원죄 의식을 갖고 있고 그로 하여금 개연성을 해결하려 하니까 갈수록 피로해지지 뭔가. 그렇다고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얘기도 아니고 시대착오적이었던 것도 아닌데 왠지 모를 거부감이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다.

 내 감성이 바닥을 치기 때문이라고 의심도 해봤으나 같은 시리즈의 <붉은 손가락>과 <신참자>는 지금 다시 떠올려봐도 뭉클한 걸 봐선 딱히 나만 탓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닌 것 같다. 결말의 놀라움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범인의 일대기를 뒤에 몰아서 보여주기 보단 차라리 작품 전반에 걸쳐 묘사했더라면 지금보다 깔끔하고 훨씬 더 감성을 건드리는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봤다. 범인의 이야기를 가가와 가가 어머니와 연결시키기 위해 작품을 복잡하게 설계한 것 같은데 까다로운 작업임에도 베테랑 작가답게 능숙하게 해냈지만 이게 최선의 선택은 아니라고 본다.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가장 적합한 인물은 가장 크게 변화를 겪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 인물의 등장 비중이 많을수록 작품의 인상은 강해지는 법이다. 이렇게 말하면 좀 이상하지만 가가 형사의 마지막 이야기란 점을 상관 않고 그의 분량을 줄였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그래, 꼭 <악의>에서와 같이 말이다.


 이 작품은 아베 히로시 주연의 TV 드라마 '신참자' 시리즈에 속하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인물의 감정선이 중요한 작품이므로 영상화가 굉장히 기대되는데 특히 TV 드라마 시리즈가 원작의 내용을 헤치지 않으면서 결과물을 잘 뽑아냈기에 영화에 더욱 기대를 걸고 있다.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영화도 볼 예정인데 작품의 내용에 대한 감상은 그때 적어도 늦지 않을 것 같다. 내심 시리즈와 작별을 고하고 싶지 않기 때문인 걸까. 어울리지 않게 감정을 내비치자면, 여기서 작품 내용에 대해서도 얘기해버리면 허전함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다. 예상대로라고 할 것인지 의외라 봐야 할 것인지, 상당히 깔끔하게 나버린 작품의 결말 때문에 아직 내 가슴이 작품의 완결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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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
이시모치 아사미 지음, 박지현 옮김 / 살림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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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9.7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일이 흥미로운 이유는 처음 읽었을 때와 다시 읽었을 때의 느낌이 늘 다르기 때문이다. 대체로 좋게 읽은 작품은 다시 접하면 예전만큼 좋았던 적이 흔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처음 접한 뒤에 다시 이 책을 펼치는데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가 살펴보는 것은 개인적으로 참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위에서 대체로 좋게 읽은 작품이 다시 접했을 때도 좋았던 적이 흔하지 않다고 했는데 물론 반대의 경우도 적지만 존재한다. <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는 히가시노 게이고와 <용의자 X의 헌신>과 그해 여러 추리소설 랭킹과 문학상 최종 후보작에서 접전을 펼친 작품으로 국내에 소개됐다. 나는 이 작품을 막 국내에 소개됐을 적에, 정확히 말하면 내가 히가시노 게이고가 쓰지 않은 추리소설들을 막 탐독하기 시작할 때 접했는데... 참, 남다른 전개 방식과 캐릭터들이 당시의 나에겐 어색하기만 했다. 특히 범인의 동기는 여러모로 인상적이었는데 - 무려 10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히 기억이 날 정도. 이렇게 선명하긴 매우 드물다. - 히가시노 게이고도 특이한 동기를 다루기로 유명하지만 이 작품을 쓴 이시모치 아사미는 근본적인 부분에서 그 작가완 다르다. 까놓고 말해 다 읽고 불쾌함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10년이 흐른 지금 봐도, 막 추릿소설을 접할 때와는 다르게 그래도 어느 정도 식견을 넓혔을 지금에 와서 봐도 이 작품의 범인의 동기나 탐정역을 맡은 우스이 유카의 행보는 여전히 기이했다. 다시 읽으니까 보면 동기를 묻는 'Why done it?' 류의 추리소설로는 최고가 아닌가 싶은데 이유는 범인의 동기가 작중 모든 수수께끼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범인이 완전 범죄를 달성하는 것 이상으로 신경을 썼던 부분들이 도서 추리물 - 주인공이 범인 - 의 특징인 심리 묘사와 맞물려 대단한 몰입도를 자랑한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몰입하게 되던 범인의 일거수일투족은 범인의 고군분투가 무색하게 질겁할 추리력을 가진 우스이 유카에 의해 살인을 저지른 동기가 드러난다.

 예전엔 이런 추리력이 터무니없다고만 여겼는데 이번엔 다른 의미에서 감탄하게 됐다. 범인의 심리 묘사, 범인을 궁지로 모는 탐정, 변수로 작용하는 주변 인물들의 행동, 결국 드러나는 동기, 완전 범죄의 유무 등 작가가 도전해야 했던 수많은 요소가 있는데 그걸 전부 다뤄내지 않았는가. 캐릭터들이 개성적인 것과는 별개로 호감은 가지 않았던 게 흠이었지만 이 얘긴 나중에 하기로 하고, 아무튼 맡은 바를 빠짐 없이 소화한 작가를 다시 보게 됐다.


 처음 읽을 때와 가장 인상이 달랐던 부분은 이 작품이 추리소설적 완성도를 차치하더라도 동기 하나만으로도 좋은 소설이란 생각이 들더란 것이다. 일전에 작가의 소설 <물의 미궁> 포스팅에서 이 작가는 어느 작품에서건 무리수를 쓴다고 한 적이 있고 대표작인 이 작품도 예외는 아니라고 했는데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문제가 있다면 그건 무리수가 아니라 다른 부분에 있지 않은가 싶은데 이 점은 조금 뒤에 얘기하겠다.

 중요한 건 범인의 동기를 접하고 나면 불쾌하다가도, 누구나 실은 저마다의 '도덕적 결벽증'이 있지 않은가 하고 자문한다는 것에 있다. 법으로 재단할 수 없지만 자기가 생각했을 때 정말 용서할 수 없는 부류의 인간이 있는 법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좋은 방법도 많을 텐데 굳이 아주 치밀하게 계획해서 자기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죽여버린 범인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구역질이 난다.


 이때 우리는 이런 부류의 인간을 비난할 근거를 찾게 될 텐데 그 결과 자연스럽게 역지사지란 말을 떠올리게 된다. 이는 누가 뭐라 해도 퍽 좋은 일인 것 같다. 반대의 경우, 당신보다 엄격하고 고결하게 산다고 자만에 젖은 사람에게 당신은 기꺼이 목숨을 내놓겠느냐고 말이다.

 작품의 논란은 논란이라고 해봤자 어차피 답은 정해졌다고 봐도 좋을 만큼 열에 아홉은 비슷한 의견을 내놓을 것 같지만 이렇게 얘깃거리에 주목해 생각해보게 하는 것, 그러면서 스스로를 돌아보기도 한다는 게 내가 이전에 읽었을 때와 가장 다른 부분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꺼내기엔 사이즈가 큰 얘기긴 하지만 나를 포함해 주변 사람들의 도덕적 결벽증에 상처를 받거나 상처를 입힌 적이 많아 이래저래 가볍지 않게 읽혔다.


 사람들이 작품에 불쾌함을 표하는 것엔 역시 동기가 큰 역할을 차지한다. 극의 수수께끼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극의 장치이자 인간의 뒤틀린 심리를 드러내는 문학적 요소란 건 인정하지만 나 역시 불쾌하긴 마찬가지다. 물론 범인의 동기의 내용은 공감이 가건 가지 않건 순전히 호불호의 영역이라 작품의 단점이나 아쉬운 점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문제라면 범인의 동기에 대한 복선이 부족해 뜬금없었던 것이다. 범인이 지능적이면서 상상 그 이상의 또라이란 걸 짐작할 수 있을 에피소드, 과거사가 언급됐더라면 작품의 후반부가 덜 불쾌했을지 모른다. 이 점이 매끄러웠다면 우스이 유카에 대한 아쉬움도 줄어들었을 것이다.

 작중에 범인과 우스이 유카의 관계가 적잖게 묘사되는데 이게 전부 피상적인 것에 불과해 심정적으로 잘 와 닿지 않는다. 특히 범인이 우스이 유카와 결별한 계기가 너무 느낌적인 느낌이었던 터라 누구에게도 공감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공감이 가지 않는 캐릭터의 문제는 독자에게 호감을 사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작중에서 아무리 흥겹게 농담도 쳐가며 떠들어도 인물들의 모습에 크게 이입하지 못했던 듯하다. 상황과 논리에 관한 묘사는 수준급이지만 인물의 심리나 관계 묘사는 아쉬운 작가였는데 이게 사람에 따라선 강렬한 개성일 수 있지 않을까. 그야말로 호감은 가지 않지만 개성적이 셈인데, 딱 이 작품의 인상과 캐릭터들의 인상과 딱 들어맞는다. 여담이지만 내가 주변에서 받는 취급과 비슷해 남 얘기 같지가 않다...


 이런 요소완 달리 상대적으로 대중성이 높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이 이 작품을 제치고 상이나 랭킹 1위를 휩쓴 건 어찌 보면 자명한 일이었다. 다만 추리소설적 완성도만 치면 공정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는 <용의자 X의 헌신>과는 다르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작품의 몰입도나 반전은 높게 쳐주는 것 같다. 내가 봤을 땐 두 작품 다 비슷한 점도 많고 좋은 작품이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시간이 흘러 인상이 더 좋아진 <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의 손을 좀 더 들어주고 싶다.

 ......그나저나, 다른 건 몰라도 이 작품을 처음 접하고 10년이 지난 뒤의 나는 확실히 이전보다 시니컬해지긴 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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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하는 여자 - 과학이 외면했던 섹스의 진실
대니얼 버그너 지음, 김학영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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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9.1







 최근에 영화 <피아니스트>를 보고 성욕, 특히 여성의 성욕에 관심이 가 이 책도 읽게 됐다. 참고로 방금 언급한 <피아니스트>는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그 <피아니스트>가 아닌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작품을 가리킨다. 두 작품 다 비슷한 시기에 칸 영화제의 걸출한 상을 받아서 사람들이 많이 헷갈려하는데 내용은 완전히 다르다. 무엇보다 내가 언급한 작품의 원제는 '피아노 치는 여자'다. 내가 봤을 땐 이 제목이 작품의 내용을 더 함축적으로 담아내고 있다고 본다. 피아노 연주의 경지에 달한 주인공은 음대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며 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지만 그럼에도 억압된 성욕을 주체하지 못해 결국 구덩이에 빠지는 게 그 작품의 주된 내용이다.

 좀 과격한 표현이란 건 인정하는데, 적어도 여성에 한해서 성욕이란 어느 문화권에서건 비슷한 무게를 갖고 있는 것 같아 그렇게 표현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일전에 나는 남성에게 성욕이란 필요악이지만 여성에겐 성욕이 있다는 걸 들키거나 스스로 자각하는 것만으로도 수치이자 심한 경우엔 여성 전체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거나 극단적으로는 인간 실격 취급을 당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건 좀 다른 예시인데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 <사요나라 사요나라>에선 이런 경우가 등장한다. 학생 시절에 한 여자를 윤간했던 남자들은 성인이 돼서 안정된 생활을 하거나 과거의 치부가 드러나도 주변에서 '혈기를 이기지 못했다'는 식으로 순화된 반면 정작 피해자인 여성은 사회는 물론 가족들한테까지 외면을 받고 비참하게 산다. 비단 소설만의 극단적인 묘사로 치부할 수 없다는 건 어째서일까? 


 위의 소설에서처럼 서로간의 합의가 없는 폭력 행위일 뿐인 강간, 윤간의 경우에서도 피해자인 여자는 손가락질을 당하는데 하물며 성욕이 있는 여성은 어떨까? 서로의 합의가 전제된다면 제아무리 뒤틀린 성욕이건 관계를 가져서 행복하다기만 하면 남이 함부로 왈가왈부할 수 없음에도 지금까지의 우리 인식은 그렇지 못했다. <욕망하는 여자>는 여성의 성욕에 대해 얘기하면서 우리가 그간 성욕을 어떤 식으로 생각해왔었는지 간접적으로 비판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여성에게 성욕이 없다는 것은 집단적인 세뇌이며 여성의 성욕과 그 크기를 과소평가하는 것은 곧 여성을 벼랑으로 내모는 것과 다름없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아마 그 벼랑의 이름은 자괴감일 테지.

 여성도 성욕이 있다, 라는 말은 어쩌면 남성이 믿고 싶은 그릇된 성적 판타지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축할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내가 굳이 이 자리에서까지 '어쩌면'이라고 하는 이유는 나 역시 성욕이 있는 남성이라서 이 책의 내용을 더 잘 받아들일 뿐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책에서 다루는 예시들, 욕망하는 여성들의 이야기의 수위는 상상 이상이었다. <피아니스트>도 수위가 세긴 했지만 그래도 픽션이라 그런대로 흘러 넘길 수 있었지만 이 책에서의 일화들은 과장이 있을지언정 전부 실화다. 유독 마조히즘에 주목한 것 같다는 인상은 지울 수 없지만 그래도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여성의 성욕은 좀 더 보편적이고 확실히 과소평가됐구나 싶었다.


 어떤 페미니즘 책에서 성애 소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나 이 분야의 본좌라고 할 수 있을 <O이야기>가 '다 떠나서 여성은 복종하길 원하는 존재라는 남성의 판타지를 충족시킬 뿐'이라는 구절을 읽은 기억이 난다. 사람마다 인식하는 페미니즘의 기준은 다르고 각각 어느 정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로 성욕을 터부시하는 페미니즘은 근본적인 의미에서 여성의 목을 조르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게 내 지론이다. 물론 성욕은 남성이나 종래의 남성중심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많이 악용됐고 그 피해는 극소수를 제외하면 온전히 여성의 몫이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성욕이란 남성에게도 여성에게도 기본적으로 쾌락이란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아마도 <욕망하는 여자>도 남성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킬 뿐이라는 의견이 있을 것 같아 선수를 치겠는데, 결국 이 책도 데이비드 버스의 <욕망의 진화>가 그랬듯 반복적이고 일화들을 열거해 피로하게 읽히지만 적어도 내가 읽어낸 지점은 바로 이 질문 때문에 꽤나 의미 있게 읽혔다. 이 질문, 그래서 성욕이 뭐가 그렇게 나쁘단 건가?

 원래 저자가 돌려 말하는 편인 건지, 이 분야 사람들은 원래 시원시원하게 말을 안 하는 것인지, 아니면 번역의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마치 여운을 주려는 소설처럼 이 책의 저자도 - 그러고 보니 엄연히 과학 도서임에도 꼭 소설처럼 읽히긴 했다. - 사람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를 남기고 글을 마친다. '그래서 성욕이 뭐가 그렇게 나쁘단 건가?'란 질문도 내가 읽어낸 질문일 뿐 실제 저자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 어쨌든 이 책은 과학 도서라서 저자는 여러 욕망하는 여자들을 소개하며 여성에게도 성욕이 있다는 걸 입증하려고 했지, 그 이후에 성욕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받아들이는 건 전적으로 독자들의 몫일 것이다.


 결국 나는 이 책의 저자가 이뤄낸 과학적 성취와는 무관하게 내가 듣고 싶은 말만 적당히 간추려 나만의 판타지를 공고히 다진 것에 불과한지 모른다. 이건 비단 이 책만이 아닌 다른 책이나 영화를 볼 때도 자유로울 수 없는 부분이며 이는 앞으로도 스스로 꾸준하게 경계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해야 할 말은 해야겠다. 책에 등장하는 일화 속 여성들은 그 성욕으로 하여금 저자를 비롯한 여러 사람에게 충격을 주긴 했어도 적어도 행복해보였다는 점이다. 안정된 직장의 여성, 가정이 있는 여성, 충분히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이지만 잠자리에서만큼은 은밀한 성적 판타지를 실현하길 원하는 것이다. 나는 이게 행복한 인생이라 느껴졌고 만약 그 속에 불행이 있다면 자기 성욕을 털어놓지 못하는 답답함 때문에, 그리고 자기 성욕을 감당할 상대를 아직 못 만났다는 애처로움 때문일 것이다. 근데 이건 누구나 마찬가지 아닌가? 여성만이 아니라 사실 성욕은 누구한테나 마찬가지로 행복한 것이고 불행한 것이지 않은가.

 여성에게 있어 성욕은 드러내놓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미국도 그런데 우리나라는 오죽할까. 다른 건 몰라도 나는 여성에 대한 저러한 잣대가 심히 불공평하고 얼마나 걸릴지 몰라도 없어져야 할 전근대적 가치관이라고 여긴다. 물론 말은 이렇게 하지만 여성이 성욕이 있음을 어떤 식으로든 알려지는 게 위험한 일이란 건 인정한다. 자신의 신체적, 혹은 사회적 지위를 동원해 '먹잇감'을 노리는 남자가 많기에 욕망하는 여성의 존재는 엄청난 혼란을 야기시킬 수 있다고 나 역시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성욕을 언제까지 덮어둘 수 있겠는가. 금방 말했듯 얼마나 걸릴지 몰라도 욕망하는 여자가 특기할 만한 존재로 여겨지지 않는, 말 그대로 성욕이 누구한테나 평등한 사회 분위기가 형성돼야 할 텐데...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읽은 책의 존재는 중요하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욕망의 진화>보다 더 후대에 전해져야 할 책이 아닌가 싶다.

성적인 사람, 즉 어떤 사람이 성욕을 드러내도 괜찮다는 것은 사회가 부여한 하나의 자유를 의미하며 그러한 자유는 여성보다는 남성의 것이다. - 33p




과학적 확신이 됐든 신이 내린 확신이 됐든 이렇게 소녀와 여자들은 느껴야 할 감정마저도 주입받고 있다. - 6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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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소설의 계보학 - 탐정은 왜 귀족적인 백인남성인가
계정민 지음 / 소나무 / 2018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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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범죄소설에 문학적 시민권을 줘야 한다는 아주 인상적인 서두에 끌려 읽게 된 책이다. 추리소설을 좋아해서 이론적으로 접근하는 글을 종종 접했지만 이 책처럼 근원적인 부분에서부터 접근하는 경우는 처음 본 것 같다. 모든 소설은 범죄를 다루고 있음에도 종래의 범죄소설이나 추리소설은 대중적 인기를 겨냥한 싸구려 엔터테인먼트 소설이란 오명을 벗지 못하는 것에 관해 저자는 꽤나 인문학적, 역사적 근거를 들며 반박을 펼친다. 간단히 말해 주변에서 왜 추리소설 같은 걸 읽냐고 핀잔 같은 걸 들어본 사람이라면 공감이 갈 수밖에 없는 내용이리라고 기대됐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딱 서두까지만 흡입력이 있었고 본문은 쉽게 읽히지 않았다. 이 책에서 다루는 작품들은 전적으로 영국의 산업 혁명을 기준으로 역사에 모습을 드러낸 영국 추리소설과 미국에서 흥한 하드보일드물이다. 둘 다 내 취향과는 거리가 먼 작품들이다. 나는 영국 추리소설은 물론 일본 추리소설, 나아가 북유럽 추리소설까지 다룰 줄 알았는데 이렇게 영국과 미국 얘기만 하다 끝낼 줄은 몰랐다. 셜록 홈즈나 필립 말로를 좋아한다면 읽는 맛이 있었겠지만 난 그 두 시리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내가 다른 생소하기 그지없던, 이름도 처음 알았던 고전 추리소설에 얼마나 관심이 가겠는가.


 그나마 셜록 홈즈의 대표 단편은 몇 편 접해봐서 그 부분에 관해서는, '탐정은 왜 귀족적인 백인남성인가' 라는 파트는 재밌게 읽혔다. 당대 사회적인 분위기를 집약적으로 드러낸 존재가 탐정인데 그들의 모습은 전형적으로 기득권을 대표하는 존재로 표현됐다. 책의 저자가 젠더를 많이 언급해서 나도 비슷한 방식으로 말하자면, 요즘 '맨스플레인'이란 단어로 집약시킬 수 있는 남성의 모습이 탐정으로 승화되는 경우가 많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여성을 구하고 타락한 이세계의 존재를 상대로 - 주로 인도인들 - 승리를 거두는 경우가 많아 시대상을 짐작할 수 있던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확실히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게 괜히 있는 말이 아니구나 싶었다.

 원래부터 범죄소설은 늘 저평가를 받아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책의 서두가 준 인상과는 달리 본문은 그렇게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아서 생소하다면 꽤나 생소했다. 추리소설의 순수한 문학적 가치를 역설하기 보단 당대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텍스트란 점에 주목한 것은 읽는 이에 따라 좀 실망스러울 수도 있는 부분이겠다. 특히 추리소설하면 빠질 수 없는 존재인 탐정이 지금 기준에서 보면 부정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데에 거부감을 표할 사람도 있을 듯하다. 이건 비평적으론 흥미로운 요소지만 때론 그렇게 비평적으로 추리소설을 바라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 의견에 동의한다. 솔직히 뭘 이렇게까지라는 생각이 드문드문 들었다.


 하지만 서두에서 저자가 밝혔듯 우리 주변의 무수한 대중 문화는 충분히 다양한 시각에서 해석했었지만 유독 범죄소설은 그런 시각을 적용하지 않았다. 이 책이 저자의 바람대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리라고는 솔직히 좀 회의적이게 되지만 이렇게 '계보'라고 명명하는 책이 나온다는 게 썩 고무적인 일이라는 것만큼은 인정하고 싶다. 남다른 시선을 전문적으로 풀어내는 글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귀중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영문학에 식견이 있는 사람 중에 이 정도로 범죄소설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렇게 생각하면 더욱 귀중하기 이를 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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