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
이시모치 아사미 지음, 박지현 옮김 / 살림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9.7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일이 흥미로운 이유는 처음 읽었을 때와 다시 읽었을 때의 느낌이 늘 다르기 때문이다. 대체로 좋게 읽은 작품은 다시 접하면 예전만큼 좋았던 적이 흔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처음 접한 뒤에 다시 이 책을 펼치는데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가 살펴보는 것은 개인적으로 참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위에서 대체로 좋게 읽은 작품이 다시 접했을 때도 좋았던 적이 흔하지 않다고 했는데 물론 반대의 경우도 적지만 존재한다. <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는 히가시노 게이고와 <용의자 X의 헌신>과 그해 여러 추리소설 랭킹과 문학상 최종 후보작에서 접전을 펼친 작품으로 국내에 소개됐다. 나는 이 작품을 막 국내에 소개됐을 적에, 정확히 말하면 내가 히가시노 게이고가 쓰지 않은 추리소설들을 막 탐독하기 시작할 때 접했는데... 참, 남다른 전개 방식과 캐릭터들이 당시의 나에겐 어색하기만 했다. 특히 범인의 동기는 여러모로 인상적이었는데 - 무려 10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히 기억이 날 정도. 이렇게 선명하긴 매우 드물다. - 히가시노 게이고도 특이한 동기를 다루기로 유명하지만 이 작품을 쓴 이시모치 아사미는 근본적인 부분에서 그 작가완 다르다. 까놓고 말해 다 읽고 불쾌함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10년이 흐른 지금 봐도, 막 추릿소설을 접할 때와는 다르게 그래도 어느 정도 식견을 넓혔을 지금에 와서 봐도 이 작품의 범인의 동기나 탐정역을 맡은 우스이 유카의 행보는 여전히 기이했다. 다시 읽으니까 보면 동기를 묻는 'Why done it?' 류의 추리소설로는 최고가 아닌가 싶은데 이유는 범인의 동기가 작중 모든 수수께끼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범인이 완전 범죄를 달성하는 것 이상으로 신경을 썼던 부분들이 도서 추리물 - 주인공이 범인 - 의 특징인 심리 묘사와 맞물려 대단한 몰입도를 자랑한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몰입하게 되던 범인의 일거수일투족은 범인의 고군분투가 무색하게 질겁할 추리력을 가진 우스이 유카에 의해 살인을 저지른 동기가 드러난다.

 예전엔 이런 추리력이 터무니없다고만 여겼는데 이번엔 다른 의미에서 감탄하게 됐다. 범인의 심리 묘사, 범인을 궁지로 모는 탐정, 변수로 작용하는 주변 인물들의 행동, 결국 드러나는 동기, 완전 범죄의 유무 등 작가가 도전해야 했던 수많은 요소가 있는데 그걸 전부 다뤄내지 않았는가. 캐릭터들이 개성적인 것과는 별개로 호감은 가지 않았던 게 흠이었지만 이 얘긴 나중에 하기로 하고, 아무튼 맡은 바를 빠짐 없이 소화한 작가를 다시 보게 됐다.


 처음 읽을 때와 가장 인상이 달랐던 부분은 이 작품이 추리소설적 완성도를 차치하더라도 동기 하나만으로도 좋은 소설이란 생각이 들더란 것이다. 일전에 작가의 소설 <물의 미궁> 포스팅에서 이 작가는 어느 작품에서건 무리수를 쓴다고 한 적이 있고 대표작인 이 작품도 예외는 아니라고 했는데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문제가 있다면 그건 무리수가 아니라 다른 부분에 있지 않은가 싶은데 이 점은 조금 뒤에 얘기하겠다.

 중요한 건 범인의 동기를 접하고 나면 불쾌하다가도, 누구나 실은 저마다의 '도덕적 결벽증'이 있지 않은가 하고 자문한다는 것에 있다. 법으로 재단할 수 없지만 자기가 생각했을 때 정말 용서할 수 없는 부류의 인간이 있는 법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좋은 방법도 많을 텐데 굳이 아주 치밀하게 계획해서 자기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죽여버린 범인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구역질이 난다.


 이때 우리는 이런 부류의 인간을 비난할 근거를 찾게 될 텐데 그 결과 자연스럽게 역지사지란 말을 떠올리게 된다. 이는 누가 뭐라 해도 퍽 좋은 일인 것 같다. 반대의 경우, 당신보다 엄격하고 고결하게 산다고 자만에 젖은 사람에게 당신은 기꺼이 목숨을 내놓겠느냐고 말이다.

 작품의 논란은 논란이라고 해봤자 어차피 답은 정해졌다고 봐도 좋을 만큼 열에 아홉은 비슷한 의견을 내놓을 것 같지만 이렇게 얘깃거리에 주목해 생각해보게 하는 것, 그러면서 스스로를 돌아보기도 한다는 게 내가 이전에 읽었을 때와 가장 다른 부분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꺼내기엔 사이즈가 큰 얘기긴 하지만 나를 포함해 주변 사람들의 도덕적 결벽증에 상처를 받거나 상처를 입힌 적이 많아 이래저래 가볍지 않게 읽혔다.


 사람들이 작품에 불쾌함을 표하는 것엔 역시 동기가 큰 역할을 차지한다. 극의 수수께끼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극의 장치이자 인간의 뒤틀린 심리를 드러내는 문학적 요소란 건 인정하지만 나 역시 불쾌하긴 마찬가지다. 물론 범인의 동기의 내용은 공감이 가건 가지 않건 순전히 호불호의 영역이라 작품의 단점이나 아쉬운 점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문제라면 범인의 동기에 대한 복선이 부족해 뜬금없었던 것이다. 범인이 지능적이면서 상상 그 이상의 또라이란 걸 짐작할 수 있을 에피소드, 과거사가 언급됐더라면 작품의 후반부가 덜 불쾌했을지 모른다. 이 점이 매끄러웠다면 우스이 유카에 대한 아쉬움도 줄어들었을 것이다.

 작중에 범인과 우스이 유카의 관계가 적잖게 묘사되는데 이게 전부 피상적인 것에 불과해 심정적으로 잘 와 닿지 않는다. 특히 범인이 우스이 유카와 결별한 계기가 너무 느낌적인 느낌이었던 터라 누구에게도 공감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공감이 가지 않는 캐릭터의 문제는 독자에게 호감을 사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작중에서 아무리 흥겹게 농담도 쳐가며 떠들어도 인물들의 모습에 크게 이입하지 못했던 듯하다. 상황과 논리에 관한 묘사는 수준급이지만 인물의 심리나 관계 묘사는 아쉬운 작가였는데 이게 사람에 따라선 강렬한 개성일 수 있지 않을까. 그야말로 호감은 가지 않지만 개성적이 셈인데, 딱 이 작품의 인상과 캐릭터들의 인상과 딱 들어맞는다. 여담이지만 내가 주변에서 받는 취급과 비슷해 남 얘기 같지가 않다...


 이런 요소완 달리 상대적으로 대중성이 높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이 이 작품을 제치고 상이나 랭킹 1위를 휩쓴 건 어찌 보면 자명한 일이었다. 다만 추리소설적 완성도만 치면 공정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는 <용의자 X의 헌신>과는 다르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작품의 몰입도나 반전은 높게 쳐주는 것 같다. 내가 봤을 땐 두 작품 다 비슷한 점도 많고 좋은 작품이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시간이 흘러 인상이 더 좋아진 <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의 손을 좀 더 들어주고 싶다.

 ......그나저나, 다른 건 몰라도 이 작품을 처음 접하고 10년이 지난 뒤의 나는 확실히 이전보다 시니컬해지긴 했나 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