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막이 내릴 때 (저자 사인 인쇄본) 재인 가가 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9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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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근래 들어 몇 년간 접해온 시리즈의 완결작을 많이 읽었는데 그 어떤 시리즈도 내게 '가가 형사' 시리즈 이상의 묵직함을 안길 수 없었다. 이 작품으로 완결되는 '가가 형사' 시리즈는 내게 아주 의미가 있는 시리즈다. 내가 처음으로 내 돈 주고 사서 읽은 추리소설이 바로 이 시리즈에 속한 <붉은 손가락>이었다. 난 지금도 추리소설이라고 하면 셜록 홈즈나 명탐정 코난을 떠올리는 사람들에게 그 소설을 꼭 추천하곤 한다. 그만큼 작품에 짙게 밴 휴머니즘은 고등학생 시절의 나에게 좋은 의미로 큰 충격을 줬고 그 특유의 휴머니즘은 다행히 후속작에서 빛이 바래지지 않았다. 오히려 짙어지면 짙어졌지.

 정확히 10번째 작품으로 가가 형사의 이야기를 완결을 낸 작가의 심정은 나의 허전한 심정과는 가히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다. 알기론 가가 형사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데뷔작 이전에 쓴 소설에서부터 등장한 캐릭터이고 이후 작가의 기념비적인 작품에 여러 번 등장시킬 정도로 남다른 애착을 가진 캐릭터인 듯하다. 때문에 그런 캐릭터를 굳이 완결이라면서 작별을 고할 필요가 있었는지 읽기 전부터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로서는 좀 더 깔끔하고 여운을 남긴 채 마음 속에서 떠나보내고 싶었던 걸까? 솔직히 궁금하지 않은가. 2010년에 드라마화를 거치면서 캐릭터의 인기도 꽤 올라갔는데 굳이 완결을 해야 했던 이유가 있었던 걸까?


 나는 여전히 히가시노 게이고를 좋아하지만 그가 요즘 들어 매너리즘에 빠지고 있다는 생각은 역시 지울 수 없다. 아니, 바꿔 말하자면 다작의 폐해가 이제서야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 문학상도 많이 받고 인기도 건재하지만 갈수록 예전의 실험적인 정신은 엿보기 힘들어졌다. 이야기꾼으로서 솜씨는 원숙해졌지만 감정에 호소하는 일이 잦아졌고 엄연히 추리소설가로서의 패기도 있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좀 더 폭넓은 작품 세계를 - 나쁘게 말하면 두루뭉술한, 얼렁뚱땅이려나. - 지향하는 것 같아 요즘은 잘 찾아 읽지 않는다. 그럼에도 히가시노 게이고는 내게 소중하며 일종의 빚을 진 작가이지만 10년 전과 달리 그 정도가 덜해졌음은 내게 있어 무시할 수 없는 변화일 것이다.

 잠시 요즘 히가시노 게이고에 대한 나의 의견을 적어봤는데 - 그의 신작이 성에 안 차는 것도 문제지만 과거의 작품이 개정돼 출간하는 것도 내심 못마땅한 일이다. 물론 사정은 이해한다만. - 그 심정은 고스란히 요번에 읽은 <기도의 막이 내릴 때>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앞뒤는 맞지만 필요 이상으로 크고 복잡한 서사는 한눈에 잘 안 들어오고 당장 전작인 <기린의 날개>보다 도입부의 흡입력이 약했으며 감정에 호소하는 부분도 적잖다. 개인적으로 감정에 호소하는 부분은 이 작품의 경우에는 크나큰 장점이라 생각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호응을 이끌어내지 못할 것 같고 작가의 다른 작품에선 비판 요소가 됐기에 아주 긍정적으로 볼 수만은 없었다. 이야기가 참 슬프고 전달하는 바도 남달랐고 가가 형사의 마지막 이야기에 걸맞게 무게도 있었음에도 이렇게 작품 외적인 이야기를 계속 하는 이유는 온전히 작품 내적인 부분만 바라보기엔 작가의 존재감이 내게 너무나도 크기 때문일 것이다.


 조심스럽게, 그리고 건방지게 말하자면 히가시노 게이고는 작가로서 매너리즘에 더 빠져버리기 전에 가가 형사와 조금 더 안정적인 형태로 작별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슬픈 생각이 들었다. 너무 돌려 말하는 것 같은데, 간단히 말해 시리즈를 완결하는 작품으론 기대에 못 미쳤다는 게 이 작품에 대한 나의 전반적인 인상이다. 이는 어쩌면 일본 소설, 특히 나이 좀 지긋한 일본 소설가들의 이야기에 지친 탓일 수도 있겠단 생각도 든다. 작중에서 묘사되는 등장인물 태반이 일본인 특유의 죄책감, 원죄 의식을 갖고 있고 그로 하여금 개연성을 해결하려 하니까 갈수록 피로해지지 뭔가. 그렇다고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얘기도 아니고 시대착오적이었던 것도 아닌데 왠지 모를 거부감이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다.

 내 감성이 바닥을 치기 때문이라고 의심도 해봤으나 같은 시리즈의 <붉은 손가락>과 <신참자>는 지금 다시 떠올려봐도 뭉클한 걸 봐선 딱히 나만 탓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닌 것 같다. 결말의 놀라움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범인의 일대기를 뒤에 몰아서 보여주기 보단 차라리 작품 전반에 걸쳐 묘사했더라면 지금보다 깔끔하고 훨씬 더 감성을 건드리는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봤다. 범인의 이야기를 가가와 가가 어머니와 연결시키기 위해 작품을 복잡하게 설계한 것 같은데 까다로운 작업임에도 베테랑 작가답게 능숙하게 해냈지만 이게 최선의 선택은 아니라고 본다.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가장 적합한 인물은 가장 크게 변화를 겪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 인물의 등장 비중이 많을수록 작품의 인상은 강해지는 법이다. 이렇게 말하면 좀 이상하지만 가가 형사의 마지막 이야기란 점을 상관 않고 그의 분량을 줄였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그래, 꼭 <악의>에서와 같이 말이다.


 이 작품은 아베 히로시 주연의 TV 드라마 '신참자' 시리즈에 속하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인물의 감정선이 중요한 작품이므로 영상화가 굉장히 기대되는데 특히 TV 드라마 시리즈가 원작의 내용을 헤치지 않으면서 결과물을 잘 뽑아냈기에 영화에 더욱 기대를 걸고 있다.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영화도 볼 예정인데 작품의 내용에 대한 감상은 그때 적어도 늦지 않을 것 같다. 내심 시리즈와 작별을 고하고 싶지 않기 때문인 걸까. 어울리지 않게 감정을 내비치자면, 여기서 작품 내용에 대해서도 얘기해버리면 허전함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다. 예상대로라고 할 것인지 의외라 봐야 할 것인지, 상당히 깔끔하게 나버린 작품의 결말 때문에 아직 내 가슴이 작품의 완결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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