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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소설의 계보학 - 탐정은 왜 귀족적인 백인남성인가
계정민 지음 / 소나무 / 2018년 1월
평점 :
8.1
범죄소설에 문학적 시민권을 줘야 한다는 아주 인상적인 서두에 끌려 읽게 된 책이다. 추리소설을 좋아해서 이론적으로 접근하는 글을 종종 접했지만 이 책처럼 근원적인 부분에서부터 접근하는 경우는 처음 본 것 같다. 모든 소설은 범죄를 다루고 있음에도 종래의 범죄소설이나 추리소설은 대중적 인기를 겨냥한 싸구려 엔터테인먼트 소설이란 오명을 벗지 못하는 것에 관해 저자는 꽤나 인문학적, 역사적 근거를 들며 반박을 펼친다. 간단히 말해 주변에서 왜 추리소설 같은 걸 읽냐고 핀잔 같은 걸 들어본 사람이라면 공감이 갈 수밖에 없는 내용이리라고 기대됐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딱 서두까지만 흡입력이 있었고 본문은 쉽게 읽히지 않았다. 이 책에서 다루는 작품들은 전적으로 영국의 산업 혁명을 기준으로 역사에 모습을 드러낸 영국 추리소설과 미국에서 흥한 하드보일드물이다. 둘 다 내 취향과는 거리가 먼 작품들이다. 나는 영국 추리소설은 물론 일본 추리소설, 나아가 북유럽 추리소설까지 다룰 줄 알았는데 이렇게 영국과 미국 얘기만 하다 끝낼 줄은 몰랐다. 셜록 홈즈나 필립 말로를 좋아한다면 읽는 맛이 있었겠지만 난 그 두 시리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내가 다른 생소하기 그지없던, 이름도 처음 알았던 고전 추리소설에 얼마나 관심이 가겠는가.
그나마 셜록 홈즈의 대표 단편은 몇 편 접해봐서 그 부분에 관해서는, '탐정은 왜 귀족적인 백인남성인가' 라는 파트는 재밌게 읽혔다. 당대 사회적인 분위기를 집약적으로 드러낸 존재가 탐정인데 그들의 모습은 전형적으로 기득권을 대표하는 존재로 표현됐다. 책의 저자가 젠더를 많이 언급해서 나도 비슷한 방식으로 말하자면, 요즘 '맨스플레인'이란 단어로 집약시킬 수 있는 남성의 모습이 탐정으로 승화되는 경우가 많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여성을 구하고 타락한 이세계의 존재를 상대로 - 주로 인도인들 - 승리를 거두는 경우가 많아 시대상을 짐작할 수 있던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확실히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게 괜히 있는 말이 아니구나 싶었다.
원래부터 범죄소설은 늘 저평가를 받아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책의 서두가 준 인상과는 달리 본문은 그렇게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아서 생소하다면 꽤나 생소했다. 추리소설의 순수한 문학적 가치를 역설하기 보단 당대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텍스트란 점에 주목한 것은 읽는 이에 따라 좀 실망스러울 수도 있는 부분이겠다. 특히 추리소설하면 빠질 수 없는 존재인 탐정이 지금 기준에서 보면 부정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데에 거부감을 표할 사람도 있을 듯하다. 이건 비평적으론 흥미로운 요소지만 때론 그렇게 비평적으로 추리소설을 바라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 의견에 동의한다. 솔직히 뭘 이렇게까지라는 생각이 드문드문 들었다.
하지만 서두에서 저자가 밝혔듯 우리 주변의 무수한 대중 문화는 충분히 다양한 시각에서 해석했었지만 유독 범죄소설은 그런 시각을 적용하지 않았다. 이 책이 저자의 바람대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리라고는 솔직히 좀 회의적이게 되지만 이렇게 '계보'라고 명명하는 책이 나온다는 게 썩 고무적인 일이라는 것만큼은 인정하고 싶다. 남다른 시선을 전문적으로 풀어내는 글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귀중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영문학에 식견이 있는 사람 중에 이 정도로 범죄소설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렇게 생각하면 더욱 귀중하기 이를 데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