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하는 여자 - 과학이 외면했던 섹스의 진실
대니얼 버그너 지음, 김학영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13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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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최근에 영화 <피아니스트>를 보고 성욕, 특히 여성의 성욕에 관심이 가 이 책도 읽게 됐다. 참고로 방금 언급한 <피아니스트>는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그 <피아니스트>가 아닌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작품을 가리킨다. 두 작품 다 비슷한 시기에 칸 영화제의 걸출한 상을 받아서 사람들이 많이 헷갈려하는데 내용은 완전히 다르다. 무엇보다 내가 언급한 작품의 원제는 '피아노 치는 여자'다. 내가 봤을 땐 이 제목이 작품의 내용을 더 함축적으로 담아내고 있다고 본다. 피아노 연주의 경지에 달한 주인공은 음대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며 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지만 그럼에도 억압된 성욕을 주체하지 못해 결국 구덩이에 빠지는 게 그 작품의 주된 내용이다.

 좀 과격한 표현이란 건 인정하는데, 적어도 여성에 한해서 성욕이란 어느 문화권에서건 비슷한 무게를 갖고 있는 것 같아 그렇게 표현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일전에 나는 남성에게 성욕이란 필요악이지만 여성에겐 성욕이 있다는 걸 들키거나 스스로 자각하는 것만으로도 수치이자 심한 경우엔 여성 전체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거나 극단적으로는 인간 실격 취급을 당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건 좀 다른 예시인데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 <사요나라 사요나라>에선 이런 경우가 등장한다. 학생 시절에 한 여자를 윤간했던 남자들은 성인이 돼서 안정된 생활을 하거나 과거의 치부가 드러나도 주변에서 '혈기를 이기지 못했다'는 식으로 순화된 반면 정작 피해자인 여성은 사회는 물론 가족들한테까지 외면을 받고 비참하게 산다. 비단 소설만의 극단적인 묘사로 치부할 수 없다는 건 어째서일까? 


 위의 소설에서처럼 서로간의 합의가 없는 폭력 행위일 뿐인 강간, 윤간의 경우에서도 피해자인 여자는 손가락질을 당하는데 하물며 성욕이 있는 여성은 어떨까? 서로의 합의가 전제된다면 제아무리 뒤틀린 성욕이건 관계를 가져서 행복하다기만 하면 남이 함부로 왈가왈부할 수 없음에도 지금까지의 우리 인식은 그렇지 못했다. <욕망하는 여자>는 여성의 성욕에 대해 얘기하면서 우리가 그간 성욕을 어떤 식으로 생각해왔었는지 간접적으로 비판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여성에게 성욕이 없다는 것은 집단적인 세뇌이며 여성의 성욕과 그 크기를 과소평가하는 것은 곧 여성을 벼랑으로 내모는 것과 다름없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아마 그 벼랑의 이름은 자괴감일 테지.

 여성도 성욕이 있다, 라는 말은 어쩌면 남성이 믿고 싶은 그릇된 성적 판타지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축할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내가 굳이 이 자리에서까지 '어쩌면'이라고 하는 이유는 나 역시 성욕이 있는 남성이라서 이 책의 내용을 더 잘 받아들일 뿐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책에서 다루는 예시들, 욕망하는 여성들의 이야기의 수위는 상상 이상이었다. <피아니스트>도 수위가 세긴 했지만 그래도 픽션이라 그런대로 흘러 넘길 수 있었지만 이 책에서의 일화들은 과장이 있을지언정 전부 실화다. 유독 마조히즘에 주목한 것 같다는 인상은 지울 수 없지만 그래도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여성의 성욕은 좀 더 보편적이고 확실히 과소평가됐구나 싶었다.


 어떤 페미니즘 책에서 성애 소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나 이 분야의 본좌라고 할 수 있을 <O이야기>가 '다 떠나서 여성은 복종하길 원하는 존재라는 남성의 판타지를 충족시킬 뿐'이라는 구절을 읽은 기억이 난다. 사람마다 인식하는 페미니즘의 기준은 다르고 각각 어느 정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로 성욕을 터부시하는 페미니즘은 근본적인 의미에서 여성의 목을 조르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게 내 지론이다. 물론 성욕은 남성이나 종래의 남성중심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많이 악용됐고 그 피해는 극소수를 제외하면 온전히 여성의 몫이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성욕이란 남성에게도 여성에게도 기본적으로 쾌락이란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아마도 <욕망하는 여자>도 남성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킬 뿐이라는 의견이 있을 것 같아 선수를 치겠는데, 결국 이 책도 데이비드 버스의 <욕망의 진화>가 그랬듯 반복적이고 일화들을 열거해 피로하게 읽히지만 적어도 내가 읽어낸 지점은 바로 이 질문 때문에 꽤나 의미 있게 읽혔다. 이 질문, 그래서 성욕이 뭐가 그렇게 나쁘단 건가?

 원래 저자가 돌려 말하는 편인 건지, 이 분야 사람들은 원래 시원시원하게 말을 안 하는 것인지, 아니면 번역의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마치 여운을 주려는 소설처럼 이 책의 저자도 - 그러고 보니 엄연히 과학 도서임에도 꼭 소설처럼 읽히긴 했다. - 사람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를 남기고 글을 마친다. '그래서 성욕이 뭐가 그렇게 나쁘단 건가?'란 질문도 내가 읽어낸 질문일 뿐 실제 저자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 어쨌든 이 책은 과학 도서라서 저자는 여러 욕망하는 여자들을 소개하며 여성에게도 성욕이 있다는 걸 입증하려고 했지, 그 이후에 성욕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받아들이는 건 전적으로 독자들의 몫일 것이다.


 결국 나는 이 책의 저자가 이뤄낸 과학적 성취와는 무관하게 내가 듣고 싶은 말만 적당히 간추려 나만의 판타지를 공고히 다진 것에 불과한지 모른다. 이건 비단 이 책만이 아닌 다른 책이나 영화를 볼 때도 자유로울 수 없는 부분이며 이는 앞으로도 스스로 꾸준하게 경계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해야 할 말은 해야겠다. 책에 등장하는 일화 속 여성들은 그 성욕으로 하여금 저자를 비롯한 여러 사람에게 충격을 주긴 했어도 적어도 행복해보였다는 점이다. 안정된 직장의 여성, 가정이 있는 여성, 충분히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이지만 잠자리에서만큼은 은밀한 성적 판타지를 실현하길 원하는 것이다. 나는 이게 행복한 인생이라 느껴졌고 만약 그 속에 불행이 있다면 자기 성욕을 털어놓지 못하는 답답함 때문에, 그리고 자기 성욕을 감당할 상대를 아직 못 만났다는 애처로움 때문일 것이다. 근데 이건 누구나 마찬가지 아닌가? 여성만이 아니라 사실 성욕은 누구한테나 마찬가지로 행복한 것이고 불행한 것이지 않은가.

 여성에게 있어 성욕은 드러내놓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미국도 그런데 우리나라는 오죽할까. 다른 건 몰라도 나는 여성에 대한 저러한 잣대가 심히 불공평하고 얼마나 걸릴지 몰라도 없어져야 할 전근대적 가치관이라고 여긴다. 물론 말은 이렇게 하지만 여성이 성욕이 있음을 어떤 식으로든 알려지는 게 위험한 일이란 건 인정한다. 자신의 신체적, 혹은 사회적 지위를 동원해 '먹잇감'을 노리는 남자가 많기에 욕망하는 여성의 존재는 엄청난 혼란을 야기시킬 수 있다고 나 역시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성욕을 언제까지 덮어둘 수 있겠는가. 금방 말했듯 얼마나 걸릴지 몰라도 욕망하는 여자가 특기할 만한 존재로 여겨지지 않는, 말 그대로 성욕이 누구한테나 평등한 사회 분위기가 형성돼야 할 텐데...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읽은 책의 존재는 중요하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욕망의 진화>보다 더 후대에 전해져야 할 책이 아닌가 싶다.

성적인 사람, 즉 어떤 사람이 성욕을 드러내도 괜찮다는 것은 사회가 부여한 하나의 자유를 의미하며 그러한 자유는 여성보다는 남성의 것이다. - 33p




과학적 확신이 됐든 신이 내린 확신이 됐든 이렇게 소녀와 여자들은 느껴야 할 감정마저도 주입받고 있다. - 6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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