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의 세계 - 청소년 성장 만화 단편선 ㅣ 창비만화도서관 4
라일라 외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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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의 단편이 수록돼서 기대했던 책인데 내가 기대했던 작품을 비롯해 수록작 전부가 기대에 못 미쳤다. 창비에서 펴낸 '청소년 성장 만화 단편선'에 속하는 책인데 단순히 성장 만화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좀 더 뚜렷한 키워드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그랬다면 작가로서도 뭔가 창작력을 자극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토요일의 세계'


 내가 기대했던 라일라 작가의 작품. 표제작답다고 해야 할지, 개성이나 주제의식 전달이란 측면에서 균형감 있는 전개가 돋보였지만 결국 작가의 <나는 귀머거리다>의 연장선상에 있어서 생각보다 인상적이진 않았다. 그 작품이 완결될 때는 200화는 너무 짧지 않은가 싶었는데 막상 비슷한 내용의 단편을 읽으니까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이 있듯 작가도 그걸 알기에 적당한 타이밍에 완결을 낸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토니오 크뢰거>를 소개하는 부분이나, 그 작품 덕분에 성장통을 견뎌냈다는 일련의 묘사에선 역시 클라스란 게 느껴졌지만, 이제는 일상물이 아닌 작가의 다른 작품도 궁금해진 터라 아무래도 아쉬운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청각장애인 서사가 꼭 일상물이어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작가가 한 번쯤은 도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여담이지만 '토요일의 세계'라는 제목은 진짜 잘 지었다.



 '캠프'


 이동은과 정이용 콤비의 작품은 이전에도 두 편 접했는데 그때마다 참 내 스타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고 <캠프>란 단편도 마찬가지였다. 동성애 코드가 거북해서라기 보단 전반적으로 하려는 말을 속시원하게 하지 않으려는 작풍이나 인과관계가 단번에 와 닿지 않는 초반부 등이 개인적으로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은 탓이다. 만화만이 아닌 영화처럼 다른 장르의 창작 활동도 겸해서 그런지 특유의 스토리텔링이나 감수성은 확실히 인정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냥 내 스타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건 뭐 어쩔 수 없지.

 기독교 캠프의 현실감 넘치는 묘사도 흥미로웠고 결말도 여운이 있었지만 작품의 전체적인 임팩트는 연한 편이라 돌이켜봤을 때 기억에 남는 게 없다. 그림 하나만큼은 발군이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작가 그림체가 구린 것도 아니니......



 '전학생은 처음이라'


 그림체가 상당히 '모에'한 작품인데 작품 속에 담긴 시골 학교에 대한 고증이나 통찰은 가볍지 않았다. 왠지 모에한 그림체의 만화는 한없이 가벼우리란 생각에 가볍게 읽기 마련인데 이 작품으로 말할 것 같으면 4컷 만화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나름 깊이 있게 해당 소재나 배경을 잘 그려냈다. 너무 갑자기 결말이 나버려서 허무했지만 - 수록작들 모두 분량이 정해졌던 걸까? 분량 상관없이 자유럽게 그릴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 그게 또 어느 정도는 깔끔하게 끝을 낸 것 같아 인상적이기도 했다.

 사실 그림체라고 하면 이 작품이 가장 돋보였는데, 꼭 그림체 때문은 아니지만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이런 그림체일까 싶어 궁금해졌다. 단행본으로 <풀 뜯어먹는 소리>란 작품이 출간됐던데 한 번 읽어볼까.



 '옥상에서 부른 노래'


 아주 교과서적인 성장 만화. 너무 교과서적인 나머지 창비의 여타 성장 소설이 연상되기도 했다. 아무튼 수록작들 중 작가가 소재에 대해 가장 고심하며 취재도 해가며 모종의 사명감도 품고서 무게감 있게 그린 작품일 듯한데 그래서 그런지 실제로도 작중 이야기가 묵직하게 전달이 됐다. 바로 이전 작품의 말랑말랑한 4컷 만화와는 상반된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는데 문제는 너무 교과서적이라 가독성 자체는 제일 떨어졌다. 교과서적이란 말이 잘 와 닿지 않는다면 전개가 판에 박힌 듯 흘러가 식상했다고 표현을 바꿔보겠다.

 뭐가 그렇게 식상했을까 생각해보니 작가가 자신이 취재한 내용을 너무 신경쓰느라 상대적으로 창작력이 덜 발휘된 감이 있었던 것 같다. 실제로 취재한 내용들을 참고는 하면서도 작가 본인만의 이야기로 재탄생시켰어야 했는데, 작가 후기를 읽어보니 고증은 잘 해냈을지언정 그 이상은 신경을 덜 쓴 기색이 역력해 왠지 김샜다. 단편이 아니라 장편이었다면 이런 느낌이 덜했으려나. 작가의 <반달>이란 작품이 있던데 그 작품은 어떨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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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9.7







 <GO>는 한창 우리나라에 일본 소설이 많이 소개될 때 제법 이름 좀 날렸던 가네시로 가즈키의 나오키상 수상작이다. 나오키상 역대 최연소 수상작가라는 타이틀을 가진 작가의 이 작품은 자전적인 내용이라 그런지 제목에서부터 결말까지 혈기를 왕창 내뿜고 있다. 주인공인 스기하라가 '재일'인 점을 제외하면 성장 소설, 청춘 소설의 전형을 따르고 있는데 관점에 따라선 작가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을 스기하라의 행보가 사뭇 폭력적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다. 주먹 좀 쓰고 태도도 불량하고 어른에 대한 공경심은 쥐뿔도 없다. 작중에서 말하듯 유교적인 마인드 안에선 스기하라는 상종 못할 인간이 분명하다.

 심지어 스기하라는 민족의 배신자기도 하다. 일본에서 나고 자라면서 북한을 따르는 재일 커뮤니티 속에서 스기하라 일가는 국적을 바꿈과 동시에 배신자로 낙인찍히게 된다. 용어가 은근히 헷갈려서 내가 지금 제대로 설명하고 있는 게 맞는 건가 싶은데 아무튼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 뿐이지 엄연히 살고 있는 곳은 일본이기에 스기하라는 고등학교부턴 일본인으로서 일본 학교로 진학하게 된다. 여러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일본 기준에선 아직 완벽한 일본인도 아니지만 스기하라는 여차저차 적응하며 재일과 일본 양쪽 커뮤니티를 왕복하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사유한다. 그렇게 스기하라는 겉에서만 봤을 땐 전혀 티가 안 나고 먼저 말해주기 전까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본인인 듯 일본인이 아닌 사람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주인공의 정체는 뭐냐고? 뭐긴 뭐겠는가, 스기하라는 다른 무엇도 아닌 스기하라일 뿐이다. 정말 어렵고 깊게 사유해도 결국 내려지는 답은 아주 간단하다. 굳이 인류의 피며 DNA의 기원엔 한 사람으로 귀결된다느니, 그게 아니면 사람은 물리적인 국적의 경계가 무의미할 정도로 이미 여러 피가 섞인 채 이 세상에 태어나는 존재라느니 따위의 언급은 위의 간단한 답 앞에선 전부 부질없는 것에 불과할 수 있다. 사람의 국적이나 정체성이란 게 이렇게 복잡하게 따지고 들어야 할 정도로 가치가 있느냐고 묻는 소설인 만큼 단순한 답이 나올 수밖에 없다. 스기하라의 말마따나 스기하라가 재일인지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 겉으로 티도 안 나고 한눈에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대개 좋은 소설이 그렇듯 이 소설의 매력도 글로 설명하기보다 직접 손에 쥐여주는 게 훨씬 효과적일 듯하다. <GO>는 <레벌루션 NO.3>와 함께 가네시로 가즈키의 대표작으로 꼽히는데 개인적으로 난 <GO>를 더 높게 친다.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보다 심오하고 어려운 주제의식을 빠르고 쉽게 와 닿게 만든다는 점에서 작가의 필력과 저력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인데 특히 전형적인 학원물의 특성을 따르면서도 깊이를 얕볼 수 없는 게 정말 대단하지 않았나 싶다. 솔직히 말해 주먹이 오가는 학원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그림으로 그린 듯한 매력적인 주인공이 등장하는 청춘물도 현실성을 문제삼으며 보지 않는 편이지만 이 작품은 경우가 달랐다. 어디로 튈지 모를 똘끼와 방심하면 훅 들어오는 품격은 물론이요, 특수하다면 특수할 주인공의 정체성 혼란에 일반 독자들도 감정이입할 수 있게 만드는 등 이 책의 진입 장벽은 꽤 낮은 편이다. 한마디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혈기 넘치는 재미를 선사해주는 작품이었다.


 작가가 작품 활동이 뜸해선지, 그래서 요즘 존재감이 많이 묻혔는지 이 작품이 이제 절판됐다는 게 나름 충격이었다. 잊을 만하면 더 예쁜 표지에 좋은 재질에 비싼 가격으로 다시 출간될 테지만 그래도 현재로선 절판됐다는 게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20년 전 작품에서 스기하라가 고민한 보람도 없이 일본이나 우리나라를 비롯해 어느 나라건 국적에 관란 논쟁은 답보 상태인데 이런 작품이 절판되고 잊혀진다는 게 점점 그 논쟁의 향방이 안 좋은 쪽으로 기울어지려는 전조인 것 같아 왠지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이게 괜한 기우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 다들 스기하라처럼 국적의 여부니 뭐니 하는 질문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이 작품이 절판된 거라면 작품의 만듦새와 별개로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겠다. 하지만 세상에는 사쿠라이의 아빠처럼 교양 있지만 근거도 없는 혐오 정서를 갖고 있고 그 정서를 자식들한테 주입시키는 사람이 적잖은 걸 생각하면 이 책의 절판 상태는 썩 비관적으로만 느껴진다. 부디 이 작품이 시의적절하게 재조명을 받는 날이 빨리 오길 바란다...



인상 깊은 구절


권투란 자기의 원을 자기 주먹으로 뚫고 나가 원 밖에서 무언가를 빼앗오고자 하는 행위다. 원 밖에는 강력한 놈들도 잔뜩 있어. 빼앗아오기는커녕 상대방이 네 놈의 원 속으로 쳐들어와 소중한 것을 빼앗아갈 수도 있다. 게다가 당연한 일이지만 얻어 맞으면 아플 것이고, 상대방을 때리는 것도 아픈 일이다. 아니 무엇보다 서로 주먹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그런데도 넌 권투를 배우고 싶으냐? 원 안에 가만히 있는 편이 편하고 좋을 텐데. - 65~66p


국적이라든가 민족을 근거로 차별하는 인간은 무지하고 나역하고 가엾은 인간이야. 그러니까 우리들이 많은 것을 알고 강해져서 그 인간들을 용서해주면 되는 거야. - 102p


가끔 내 피부가 녹색이나 뭐 그런 색이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다가올 놈은 다가오고 다가오지 않을 놈은 다가오지 않을 테니까 알기 쉽잖아요...... - 214p


나는 말이지, '사자'하고 비슷해. 사자는 자기를 사자라고 생각하지 않지. 너희들이 멋대로 이름을 붙여놓고 사자에 대해서 아는 것처럼 행세하고 있을 뿐이야. 그렇다고 흥에 겨워서 이름 불러가며 가까이 다가오기만 해봐. 너희들의 경동맥에 달겨들어 콱 깨물어 죽일 테니까. 알아, 너희들이 우리를 재일이라고 부르는 한, 언제든 물려야 하는 쪽이라구. - 26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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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 - 2010 제34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ㅣ 청춘 3부작
김혜나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6.8







 내가 이 작품을 9년 전에 읽었을 땐 아직 고등학생이라 그랬는지 작중 인물들의 이야기를 막연한 어른들의 이야기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시간이 흘러 작중 인물보다 나이가 좀 든 다음에 읽으니 그들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공감이 되지만 한편으론 공허하기 짝이 없는 작품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차를 두고 읽었다고 한들 왜 9년 전의 내가 이 작품에 10점 만점에 10점을 줬는지 이해가 잘 안 된다. 까놓고 말해서 야하니까 좋다고 읽어댔던 걸까? 절대 아니라고 하고 싶은데 솔직히 기억이 안 난다.

 이 소설의 성애 장면은 수위가 제법 센 편이다. 노래방을 전전하는 호스트, 속된 말로 선수인 '제리'와 가볍다고도 가볍지 않다고도 할 수 없는 관계를 이어가는 주인공 사이의 성관계가 생각 이상으로 적나라했다. 9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적나라하게 느껴지는데 작가가 이런 성애 묘사로도 용케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구나 하는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대 문학이 대체로 야한 경향이 있고 <제리>도 별 다를 바 없다고 볼 수 있겠지만, 성애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것치고 - 여러 체위를 시도하거나 강요당하는 여성의 고충을 판타지 없이 묘사한 것에서 야한 것 이상의 목적을 추구했다는 게 느껴진다. - 묘사가 너무 반복적이고 소모적이라 불쾌함을 느낄 독자가 많을 듯하다.


 개인적으론 작품의 성애 묘사가 그렇게 불쾌하지도 않았고 내심 어느 정도는 무탈히 읽어내려갈 수 있었으나 - 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지만. - 상술했듯 어렸을 때는 이런 묘사들에 눈이 번쩍 뜨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반면 지금은 그저 지루하고 공허하게만 읽혔다. 장래도 불안정하고 열정도 없는 인물들이 몸으로밖에 교감을 나눌 줄 모른다는 듯한 묘사가 상투적으로 다가왔고 주인공이나 제리나 작중에서 내내 삶의 목적이 불분명한 채 방황하는 편이라 결말에서 그들의 사이가 깨지든 뭘 어쨌든지 간에 크게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 체위로 사랑을 나눴든 어처구니 없이 헤어졌든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가독성 하나는 인정하지만 사실상 남는 건 별로 없는 작품이었다. 글쎄, 자세를 고치고 그 많은 성애 묘사 한 줄 한 줄까지 꼼꼼히 읽었더라면 뭔가 더 느껴지는 바가 더 있었을지 모르지만 딱히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 평소 지론이기도 한데, 정독을 요하는 주제에 정독을 하고 싶게끔 유도하지 못한다면 그 작품에 독자들이 꼭 의리를 다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차라리 진짜 작품 주인공과 동년배였을 때 읽었더라면 느낌이 또 달랐을 것도 같은데 내가 지금 애매하게 나일 먹어버려서 이것도 이미 해봤자 소용도 없는 후회가 돼버렸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후회되지도 않는다. 단지 9년 전에 내가 야한 것에 무지하게 환장했나 싶어 쑥스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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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 5 (무선) ㅣ 해리 포터 시리즈
조앤 K. 롤링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수첩 / 200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9.6







 '불사조기사단'은 시리즈에서 가장 길고 가장 몰입도 높은 작품으로 꼽힌다. 5권으로 분권된 두툼한 분량은 읽기 전엔 부담스럽지만 막상 책장을 펼치면 몰입도 측면에서 전작과 큰 차이가 없다고 느껴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을 원작으로 둔 영화는 역대 해리포터 영화 중 가장 러닝타임이 짧아 팬들이 불만을 터뜨렸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전편보다 훨씬 어두워진 분위기며 마법부의 뻘짓에 신음하는 해리의 심리나 음지에서 해리를 위협하는 볼트모트와 죽음을 먹는 자들의 존재감을 치밀하게 그린 원작에 비해 영화는 내가 기억하기에도 세계관의 방대함을 담아내기 벅차 보였으니까 말이다. 영화가 좋았던 점은 엄브릿지란 캐릭터를 완벽하게 구현했다는 것일 텐데, 그걸 천만다행으로 여겨야겠지?

 '해리포터' 시리즈 자체가 기본적으로 동화를 표방하는 만큼 인물의 외형이나 성격을 묘사하는 방식이 다소 유치한 감은 있지만, 반대로 보면 유치하기 때문에 오히려 상황의 심각함이 희석되는 효과가 있지 않았는지 생각해보게 됐다. 역대급 악역이라 일컬어지는 엄브릿지를 비롯한 마법부 인간들의 태만이 이번 작품에서 굉장히 중요한 소재로 다뤄지는데, 예전에 읽었을 때 황당무계하다고 여겼지만 지금 다시 읽으니 굉장히 현실적인 묘사란 생각에 쓴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무사안일주의에 젖은 나머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일리가 있는 소릴 하는 사람은 모함하거나 필요하다면 누명을 씌워서라도 배척하려는 그릇된 심리를 작가가 정말 지독히도 잘 묘사했구나 싶던 것이다.


 작중 전개가 그렇게나 씁쓸했던 데엔 마법부가 엄연히 볼드모트 일당과 대적해야 하는 조직임에도 그 역할을 온 힘을 다해 방관하려 들기 때문이 클 것이다. 이는 시간이 흘러도 사람들이 '해리포터' 시리즈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상상력은 물론이고 통찰력과 리얼리티도 뛰어나기 때문일 텐데, 특히 마법부의 무능함에 대한 묘사는 발군이었다. 사람이 무리를 지어 조직을 만든 뒤에 파벌을 이뤄 자신과 반대되는 입장의 사람을 배척하는 심리를 작가는 자신이 만든 마법 세계 안에다가 아무 어색함 없이 집어넣어 독자들과 공감대를 형성시켰다. 판타지 장르가 상상력과 더불어 현실적인 요소가 가미돼야 독자를 만족시킬 수 있다는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까 싶다.

 게다가 성장 문학의 정체성도 갖고 있는 시리즈답게 작가가 '불사조기사단'에서 해리에게 선과 악은 칼로 무 자르듯 이분할 수 없다는 깨달음을 준 것도 인상적이었다. 단순히 호그와트와 마법부는 착하고 볼드모트와 죽음을 먹는 자들 측은 나쁘다는 일차원적인 묘사가 아닌, 때론 일반적으로 선하게 여겨지는 무리에서 악한이 존재함을 시사한 게 - 그 반대의 경우도 물론 있지만 이 이야기는 후속작에서 하겠다. - 의미심장했다. 작가도 인정하는 최악의 악역 엄브릿지는 표면적으론 상당한 요직에 있는 마법부 직원이지만 근본은 인간적인 감정이 결여된 저능아다. 엄브릿지가 잘하는 것이라곤 자신과 코드가 맞는 라인을 잘 잡은 것밖에 없을 정도로 작중에서 최악의 행보를 지치지도 않고 선보인다.


 안타깝게도 현실에는 엄브릿지보다 더 교활하고 악랄한 인간이 많을 것이다. 문제는 얼핏 봐선 누가 엄브릿지인지 간파하기 쉽지 않다는 것인데, 간파하기 어려울지언정 이렇게 의심하고 고민하게 만든다는 측면에서 '해리포터' 시리즈는 지금보다 더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전작 '불의 잔'의 크라우치처럼 사람의 지위와 인성은 반비례할 수 있음을 역설한 것처럼 '해리포터' 시리즈는 마법 세계를 통해 현실 세계를 돌아보게끔 만든다. 잘 만든 판타지는 현실을 반영하며 그 판타지로 하여금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는 점은 소설을 읽는 입장은 물론 쓰는 입장에서도 퍽 고무적인 일이다. 소설은, 특히 판타지 소설은 애들이나 읽는 황당무계한 소설이란 편견을 생각하면 이 시리즈의 위상은 더욱 소중하다.


 언제 볼드모트가 마법 세계를 장악해도 이상하지 않을 폭풍전야의 상황 속에서 해리는 그전까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내몰리지만 그 와중에 해리의 학창 생활은 학창 생활대로 알차게 한다. 썸녀 초와 관계가 진전되다가 흐지부지되고 무능한 어둠의 마법 방어술 교수 때문에 해리는 자체적으로 어둠의 마법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퀴디치 경기는 물론이고 스네이프와의 특별 보충 수업까지 소화해야 했다. 몸이 열 개라도 감당하기 힘든 스케줄인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해리는 덤블도어와 해그리드, 시리우스의 안위를 걱정하고 볼드모트의 위협에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해리의 마음을 모르는 듯 불사조기사단을 비롯한 어른들은 해리가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설명도 없이 자신들의 지시를 따를 것을 부탁하기만 한다. 꼭 덤블도어 교수님한텐 다 뜻이 있을 거란 말을 - 심지어 이 말은 헤르미온느도 한다. - 덧붙이면서.

 이 책을 처음 읽을 당시에는 내가 해리와 비슷한 연배여서 그랬는지 해리의 심정이 거의 100% 공감이 갔는데, 시간이 흘러 다시 읽으니 새삼 내가 나이를 먹긴 먹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것도 안 좋은 쪽으로. 시종 어른들의 말에 불복하고 기어코 하지 말란 짓을 했다가 위험에 처하는 모습이 전과 달리 마냥 좋게 보이진 않았던 것이다. 충분히 그럴 만한 상황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어른을 불신하는 듯한 태도 때문에 한 번 큰코다쳐야 정신을 차리려나 하고 생각했던 걸 부정하지 않겠다. 충분히 합리적인 반항심이었던 것 같지만 그럼에도 해리가 어려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읽는 내내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막판에 덤블도어가 해리와 마주앉아 해리를 충분히 믿지 않은 것과 해리에게 설명을 충분히 하지 않고 닥치고 따라주길 바란 것에 죄의식을 느낀다는 대목에서 뒤통수를 맞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다른 건 몰라도 똑같이 어린 시절을 거친 어른이 지금 아이들에게 공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죄라는 말에 내 생각에 대해 재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옛날엔 해리에게 공감했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했다는 생각에 이르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꼰대가 되고 말았나 하는 불안감에 식은땀이 났다. 꼰대를 그렇게 싫어했는데 조금 나이 먹었다고 나도 꼰대가 됐을지 모른다는 의심은 불쾌함을 안겨줬다. 똑같은 작품이더라도 시간차를 많이 두고 읽을수록 감상에 차이가 난다는 걸 자주 경험해서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지만, 이번엔 제법 충격적이었다.

 앞으로 시리즈의 작품이 2편 남았다. 벌써 이렇게 됐나 싶어 아쉽다가도 앞으로 무슨 시련이 닥칠까 기대되고 두렵기까지 하다. 이미 읽은 내용임에도 이런 기분이 드는 건 너무 오래 전에 읽어서 그런 것도 있고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전과는 전혀 다른 감상이 나올까 가늠이 안 가기 때문이 크다. '해리포터' 시리즈를 다시 읽는 이유는 해리의 이야기가 다시 읽을 만큼 재밌었기 때문이지 내가 해리에 대해 전과는 다른 인상을 품는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하다면 당연한 변화인데, 시리즈를 워낙에 어릴 때 접해서 그런 건지 유독 내 심상의 변화를 체감한 게 불쾌하면서도 감내해야 하는 일종의 통과 의례로 여겨졌다. 대부를 눈앞에서 잃은 해리에 비한다면 겨우 이런 일을 두고 통과 의례 운운하는 게 웃길 수 있겠지만, 내심 나 자신에 대해 변하지 않은 사람이라 믿었던 터라 그 믿음이 깨진 게 못내 창피한 나머지 생각보다 후유증이 컸다.


 그 후유증이 아니었으면 '혼혈왕자'와 '죽음의 성물'에서 펼쳐질 해리의 모험담보다 그의 성장이 이 정도로 기대되지 않았을 것이다. 해리가 성장하는 과정을 따라가니 나도 함께, 혹은 다시 성장하는 기분을 느꼈던 것이다. 최근 들어 성장 문학은 읽을 시기를 놓치면 읽으나 마나 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던 차에 이 작품이 아주 타이밍 좋게 내 편견을 지적해줬다. 하긴, 사람이 영원히 성장을 하는 존재인 이상 성장 소설에 유효 기간이 존재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일 것이다. 대상 독자가 아동이나 청소년이라면 경우가 다르지 않나 싶었지만 '불사조기사단'을 읽으니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같은 소설이라도 언제 읽느냐에 따라 감상이 달라진다는 걸 통해 성장 문학은 두고 두고 읽을수록 더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예전에 읽은 성장 문학들을 다시 보게 됐다.



인상 깊은 구절


언제나 너희는 스스로의 생각, 혹은 용기 같은 것 없이 죽음에 맞서고 있다고 확신했지. 마치 너희가 살해당하거나, 고문당하거나 아니면 친구가 죽는 것을 보기 직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생각을 똑바로 할 수 있다는 듯 말이야. 수업 시간에는 아무도 우리에게 그런 걸 가르쳐 주지 않았어. 그런 일들을 직접 겪는 게 어떤 건지 말이야. - 2권 264~265p


피렌체는 해리가 지금까지 만난 그 어떤 인간 선생님들과도 달랐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여기는 것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에게 이 세상 어떤 것도, 켄타우로스의 지식조차도 절대 완벽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심어 주기 위해 애를 썼다. - 4권 153~154p


이 세상엔 죽음보다 더 괴로운 것이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는 게 자네의 최대 약점이지. - 5권 207p


젊은이들은 노인들이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느끼는지 이해 못하는 게 당연해. 그러나 젊은이들이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느끼는지 노인들이 이해 못한다면 그건 죄가 아닐 수 없지...... - 227~22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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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8
헨릭 입센 지음, 안미란 옮김 / 민음사 / 2010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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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페미니즘 희곡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인형의 집>을 드디어 읽어봤다. 노르웨이에서 문학하면 입센이 손꼽힌다고 하던데 그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어 개인적으로 의미있는 독서였다. 내 주변 사람들은 눈치챘을 테지만, 나의 노르웨이에 대한 선망이 보통이 아니다 보니 노르웨이제製라고 하면 괜히 콩깍지가 씌어 한 번 더 살펴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내 말에 공신력이 떨어지지 않을까 싶지만, <인형의 집>은 흥미롭게도 노르웨이에 대한 나의 애정을 차치하고 객관적으로 봐도 좋은 작품이었다.

 입센의 <인형의 집>은 뭉크가 그린 <절규>처럼 노르웨이란 나라의 이름보다 유명한 작품이라 볼 수 있는데 완독하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후반부에 노라가 자신의 남편 헬메르에게 자유를 선언하고 집을 나가는 장면은 지금 봐도 명장면이었고 여성은 물론 비슷한 처지의 모든 사람에게 귀감이 될 만했다. 특히 노라가 후반부의 선택을 결심한 계기에 대한 입센의 통찰력은 탄복스런 수준이었다. 노라의 억울함을 설득하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노라를 향한 헬메르의 태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게 인상적이었다.


 분량도 짧고 등장인물도 적은 편인 것에 비해 각 인물의 이해관계나 전사前事도 단순하지 않고 하나의 선택으로 인한 나비효과가 꽤 큰 등 상당히 치밀하게 집필된 작품이라 느껴졌다. 인물들의 심리 묘사나 캐릭터성도 입체적이라서 해석의 여지가 있는 것도 재밌었는데, 노라가 헬메르를 위해 아버지의 서명을 날조한 것이나 개과천선 중이던 크로그스타드가 한번 수틀려지자 노라를 협박하는 장면 등 현실적인 상황이 많이 그려져서 몰입도가 높았다. 노라를 비롯한 작중 등장인물들이 저마다 장단점이 있고 한계도 명확하며 누구 하나 압도적으로 억울한 입장이라거나 악인도 없었는데 이게 정말 현실적이고 공정한 설정이지 않았나 싶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여성 서사나 페미니즘 서사에 몰입하기 어려웠을 법한 나같은 남성 독자도 노라의 처지에 공감하기 용이했다고 본다. 무지의 결과든 가족을 위한 것이었든 노라가 서명 날조를 저지른 건 엄연한 죄라는 것과 노라에 대한 법의 단죄 여부도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그 논란이 이 작품의 주제의식을 살펴봄에 있어선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는 아닐 것이다. 노라나 주변 인물의 잘잘못의 여부나 누가 선인이고 악인이냐 따지는 것보다 노라에 대한 헬메르의 한결 같던 태도, 남편이 아내를 대하는 방식이 마치 사람이 애완동물 다루듯 한다는 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사실 헬메르란 인물은 남자가 보기에도 문제가 많은 인물이었다. 아내를 애완동물 취급하는 것도 문제지만 기본적으로 비열한 주제에 남의 눈은 되게 의식하는 밥맛 떨어지는 인간이잖은가. 어떻게 보면 성차별적 태도조차 빙산의 일각이라 여겨질 정도로 파면 팔수록 일그러진 심리로 똘똘 뭉쳐진 캐릭터라 좋게 보려야 좋게 볼 수 없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 이대로도 나쁘지 않지만 작품의 주제의식을 위해 이렇게 각색하는 게 어떨까 싶었다. 헬메르가 인간으로서 한없이 괜찮지만, 유독 성차별적 가치관이 거슬리는 캐릭터로 설정됐다면 노라의 심리가 더욱 극명하게 강조됐을 것 같다. 만약 그랬다면 작품 결말에 대한 논란이 더욱 가중됐을 테지만, 좋은 사람임에도 당대 사회적으로 만연한 성차별적인 분위기 때문에 아무런 비판도 없이 같은 태도를 취할 뿐이란 설정이 대놓고 밥맛 떨어지는 인간인 것보다 깊이가 있었을 것 같다.

 뭐, 이것도 2세기가 지난 뒤에 읽은 독자기에 잡을 수 있는 트집일 것이다. 헬메르가 자기 명예가 더럽혀진 것에 이성을 잃어 아내한테 폭언을 하다가 몇 분 지나 태도를 손바닥 뒤집듯 바꾼 것에 대해 이만큼 논리정연하게 비판할 수 있다는 건 당시 기준으로 무지하게 혁명적이지 않았을까? 시대를 앞서가도 굉장히 많이 앞서간 것일 텐데, 헬메르처럼 아내를 애완동물이나 노예쯤으로만 여기던 남성이 절대다수인 시대에선 입센은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 시대에도 충분히 초월했다고 생각한다.


 헬메르 같은 남자가 과거엔 절대다수였지만 오늘날엔 과연 절대 없으리라 단언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만 한정하더라도 결코 적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20대 후반인 내 또래 남자에 한정해도 단언할 수 있다. 할 수만 있다면 여자를 인형처럼 다루고 싶은 남자가 많겠지만 입센이 살던 시대와 차이가 있다면 그런 마음을 내비쳤다간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리란 걸 알고는 있다는 것이다. 근데 머리로는 알아도 가슴으로도 이해했을까?

 나는 그런 남자들하고 다르다고 얘기하려는 게 아니다. 그보다 나는 다른 얘기를 하고 싶다. 아까 서두에 노라가 집을 나가는 장면이 여성은 물론 비슷한 처지의 모든 사람에게 귀감이 될 만하다고 했다. 한국 사회에서 남자인 나는 일반적으로 소수자에 해당하지 않지만 다수와 소수의 개념은 상대적인 것이라 이러한 내 정체성이 언제까지나 영원하다고 볼 수 없다. 그리고 나한테는 남자라는 정체성만 있는 게 아니란 것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상황과 장소에 따라선 나 역시도 얼마든지 소수에 해당할 수 있으며 중요한 건 나는 변검을 하듯 평소에 여러 정체성 중 하나만 내세우지 않고 언제나 동시다발적으로 혼합된 채 산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가 누구 보고 소수자다 아니다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선을 그어 편을 가를 정도로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내가 남성임에도 페미니즘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잊을 만하면 그 가치를 되새기고 그와 관련된 작품을 찾아 읽는 이유다. <인형의 집>은 여성이라는 약자가 가정에서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지 선명히 묘사한 작품이다. 페미니즘을 얘기할 때 거론하기에 딱 걸맞은 작품이고 실제로 그 주제의식도 결코 과하지 않은 작품이었다. 고전이란 말만 듣고 고리타분하거나 지금 기준으론 초점이 엇나간 얘기를 하진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정말 괜한 기우였다. 나는 노르웨이 문학이라고 하면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나 <이갈리아의 딸들>만 떠올렸는데, 과연 입센이 이 두 작품을 가뿐히 제치고 사람들한테 명성을 떨친 이유가 있었다. 이제라도 읽었으니 다행이었다.

내게는 다른, 그만큼이나 거룩한 의무도 있어요.

나 자신에 대한 책임이에요.

(중략)하지만 나는 더 이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말로 만족할 수 없고 책에 쓰여 있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어요. 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설명을 찾아야 해요. - 118~11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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