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의 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8
헨릭 입센 지음, 안미란 옮김 / 민음사 / 2010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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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페미니즘 희곡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인형의 집>을 드디어 읽어봤다. 노르웨이에서 문학하면 입센이 손꼽힌다고 하던데 그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어 개인적으로 의미있는 독서였다. 내 주변 사람들은 눈치챘을 테지만, 나의 노르웨이에 대한 선망이 보통이 아니다 보니 노르웨이제製라고 하면 괜히 콩깍지가 씌어 한 번 더 살펴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내 말에 공신력이 떨어지지 않을까 싶지만, <인형의 집>은 흥미롭게도 노르웨이에 대한 나의 애정을 차치하고 객관적으로 봐도 좋은 작품이었다.

 입센의 <인형의 집>은 뭉크가 그린 <절규>처럼 노르웨이란 나라의 이름보다 유명한 작품이라 볼 수 있는데 완독하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후반부에 노라가 자신의 남편 헬메르에게 자유를 선언하고 집을 나가는 장면은 지금 봐도 명장면이었고 여성은 물론 비슷한 처지의 모든 사람에게 귀감이 될 만했다. 특히 노라가 후반부의 선택을 결심한 계기에 대한 입센의 통찰력은 탄복스런 수준이었다. 노라의 억울함을 설득하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노라를 향한 헬메르의 태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게 인상적이었다.


 분량도 짧고 등장인물도 적은 편인 것에 비해 각 인물의 이해관계나 전사前事도 단순하지 않고 하나의 선택으로 인한 나비효과가 꽤 큰 등 상당히 치밀하게 집필된 작품이라 느껴졌다. 인물들의 심리 묘사나 캐릭터성도 입체적이라서 해석의 여지가 있는 것도 재밌었는데, 노라가 헬메르를 위해 아버지의 서명을 날조한 것이나 개과천선 중이던 크로그스타드가 한번 수틀려지자 노라를 협박하는 장면 등 현실적인 상황이 많이 그려져서 몰입도가 높았다. 노라를 비롯한 작중 등장인물들이 저마다 장단점이 있고 한계도 명확하며 누구 하나 압도적으로 억울한 입장이라거나 악인도 없었는데 이게 정말 현실적이고 공정한 설정이지 않았나 싶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여성 서사나 페미니즘 서사에 몰입하기 어려웠을 법한 나같은 남성 독자도 노라의 처지에 공감하기 용이했다고 본다. 무지의 결과든 가족을 위한 것이었든 노라가 서명 날조를 저지른 건 엄연한 죄라는 것과 노라에 대한 법의 단죄 여부도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그 논란이 이 작품의 주제의식을 살펴봄에 있어선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는 아닐 것이다. 노라나 주변 인물의 잘잘못의 여부나 누가 선인이고 악인이냐 따지는 것보다 노라에 대한 헬메르의 한결 같던 태도, 남편이 아내를 대하는 방식이 마치 사람이 애완동물 다루듯 한다는 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사실 헬메르란 인물은 남자가 보기에도 문제가 많은 인물이었다. 아내를 애완동물 취급하는 것도 문제지만 기본적으로 비열한 주제에 남의 눈은 되게 의식하는 밥맛 떨어지는 인간이잖은가. 어떻게 보면 성차별적 태도조차 빙산의 일각이라 여겨질 정도로 파면 팔수록 일그러진 심리로 똘똘 뭉쳐진 캐릭터라 좋게 보려야 좋게 볼 수 없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 이대로도 나쁘지 않지만 작품의 주제의식을 위해 이렇게 각색하는 게 어떨까 싶었다. 헬메르가 인간으로서 한없이 괜찮지만, 유독 성차별적 가치관이 거슬리는 캐릭터로 설정됐다면 노라의 심리가 더욱 극명하게 강조됐을 것 같다. 만약 그랬다면 작품 결말에 대한 논란이 더욱 가중됐을 테지만, 좋은 사람임에도 당대 사회적으로 만연한 성차별적인 분위기 때문에 아무런 비판도 없이 같은 태도를 취할 뿐이란 설정이 대놓고 밥맛 떨어지는 인간인 것보다 깊이가 있었을 것 같다.

 뭐, 이것도 2세기가 지난 뒤에 읽은 독자기에 잡을 수 있는 트집일 것이다. 헬메르가 자기 명예가 더럽혀진 것에 이성을 잃어 아내한테 폭언을 하다가 몇 분 지나 태도를 손바닥 뒤집듯 바꾼 것에 대해 이만큼 논리정연하게 비판할 수 있다는 건 당시 기준으로 무지하게 혁명적이지 않았을까? 시대를 앞서가도 굉장히 많이 앞서간 것일 텐데, 헬메르처럼 아내를 애완동물이나 노예쯤으로만 여기던 남성이 절대다수인 시대에선 입센은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 시대에도 충분히 초월했다고 생각한다.


 헬메르 같은 남자가 과거엔 절대다수였지만 오늘날엔 과연 절대 없으리라 단언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만 한정하더라도 결코 적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20대 후반인 내 또래 남자에 한정해도 단언할 수 있다. 할 수만 있다면 여자를 인형처럼 다루고 싶은 남자가 많겠지만 입센이 살던 시대와 차이가 있다면 그런 마음을 내비쳤다간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리란 걸 알고는 있다는 것이다. 근데 머리로는 알아도 가슴으로도 이해했을까?

 나는 그런 남자들하고 다르다고 얘기하려는 게 아니다. 그보다 나는 다른 얘기를 하고 싶다. 아까 서두에 노라가 집을 나가는 장면이 여성은 물론 비슷한 처지의 모든 사람에게 귀감이 될 만하다고 했다. 한국 사회에서 남자인 나는 일반적으로 소수자에 해당하지 않지만 다수와 소수의 개념은 상대적인 것이라 이러한 내 정체성이 언제까지나 영원하다고 볼 수 없다. 그리고 나한테는 남자라는 정체성만 있는 게 아니란 것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상황과 장소에 따라선 나 역시도 얼마든지 소수에 해당할 수 있으며 중요한 건 나는 변검을 하듯 평소에 여러 정체성 중 하나만 내세우지 않고 언제나 동시다발적으로 혼합된 채 산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가 누구 보고 소수자다 아니다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선을 그어 편을 가를 정도로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내가 남성임에도 페미니즘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잊을 만하면 그 가치를 되새기고 그와 관련된 작품을 찾아 읽는 이유다. <인형의 집>은 여성이라는 약자가 가정에서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지 선명히 묘사한 작품이다. 페미니즘을 얘기할 때 거론하기에 딱 걸맞은 작품이고 실제로 그 주제의식도 결코 과하지 않은 작품이었다. 고전이란 말만 듣고 고리타분하거나 지금 기준으론 초점이 엇나간 얘기를 하진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정말 괜한 기우였다. 나는 노르웨이 문학이라고 하면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나 <이갈리아의 딸들>만 떠올렸는데, 과연 입센이 이 두 작품을 가뿐히 제치고 사람들한테 명성을 떨친 이유가 있었다. 이제라도 읽었으니 다행이었다.

내게는 다른, 그만큼이나 거룩한 의무도 있어요.

나 자신에 대한 책임이에요.

(중략)하지만 나는 더 이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말로 만족할 수 없고 책에 쓰여 있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어요. 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설명을 찾아야 해요. - 118~11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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