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9.7







 <GO>는 한창 우리나라에 일본 소설이 많이 소개될 때 제법 이름 좀 날렸던 가네시로 가즈키의 나오키상 수상작이다. 나오키상 역대 최연소 수상작가라는 타이틀을 가진 작가의 이 작품은 자전적인 내용이라 그런지 제목에서부터 결말까지 혈기를 왕창 내뿜고 있다. 주인공인 스기하라가 '재일'인 점을 제외하면 성장 소설, 청춘 소설의 전형을 따르고 있는데 관점에 따라선 작가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을 스기하라의 행보가 사뭇 폭력적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다. 주먹 좀 쓰고 태도도 불량하고 어른에 대한 공경심은 쥐뿔도 없다. 작중에서 말하듯 유교적인 마인드 안에선 스기하라는 상종 못할 인간이 분명하다.

 심지어 스기하라는 민족의 배신자기도 하다. 일본에서 나고 자라면서 북한을 따르는 재일 커뮤니티 속에서 스기하라 일가는 국적을 바꿈과 동시에 배신자로 낙인찍히게 된다. 용어가 은근히 헷갈려서 내가 지금 제대로 설명하고 있는 게 맞는 건가 싶은데 아무튼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 뿐이지 엄연히 살고 있는 곳은 일본이기에 스기하라는 고등학교부턴 일본인으로서 일본 학교로 진학하게 된다. 여러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일본 기준에선 아직 완벽한 일본인도 아니지만 스기하라는 여차저차 적응하며 재일과 일본 양쪽 커뮤니티를 왕복하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사유한다. 그렇게 스기하라는 겉에서만 봤을 땐 전혀 티가 안 나고 먼저 말해주기 전까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본인인 듯 일본인이 아닌 사람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주인공의 정체는 뭐냐고? 뭐긴 뭐겠는가, 스기하라는 다른 무엇도 아닌 스기하라일 뿐이다. 정말 어렵고 깊게 사유해도 결국 내려지는 답은 아주 간단하다. 굳이 인류의 피며 DNA의 기원엔 한 사람으로 귀결된다느니, 그게 아니면 사람은 물리적인 국적의 경계가 무의미할 정도로 이미 여러 피가 섞인 채 이 세상에 태어나는 존재라느니 따위의 언급은 위의 간단한 답 앞에선 전부 부질없는 것에 불과할 수 있다. 사람의 국적이나 정체성이란 게 이렇게 복잡하게 따지고 들어야 할 정도로 가치가 있느냐고 묻는 소설인 만큼 단순한 답이 나올 수밖에 없다. 스기하라의 말마따나 스기하라가 재일인지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 겉으로 티도 안 나고 한눈에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대개 좋은 소설이 그렇듯 이 소설의 매력도 글로 설명하기보다 직접 손에 쥐여주는 게 훨씬 효과적일 듯하다. <GO>는 <레벌루션 NO.3>와 함께 가네시로 가즈키의 대표작으로 꼽히는데 개인적으로 난 <GO>를 더 높게 친다.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보다 심오하고 어려운 주제의식을 빠르고 쉽게 와 닿게 만든다는 점에서 작가의 필력과 저력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인데 특히 전형적인 학원물의 특성을 따르면서도 깊이를 얕볼 수 없는 게 정말 대단하지 않았나 싶다. 솔직히 말해 주먹이 오가는 학원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그림으로 그린 듯한 매력적인 주인공이 등장하는 청춘물도 현실성을 문제삼으며 보지 않는 편이지만 이 작품은 경우가 달랐다. 어디로 튈지 모를 똘끼와 방심하면 훅 들어오는 품격은 물론이요, 특수하다면 특수할 주인공의 정체성 혼란에 일반 독자들도 감정이입할 수 있게 만드는 등 이 책의 진입 장벽은 꽤 낮은 편이다. 한마디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혈기 넘치는 재미를 선사해주는 작품이었다.


 작가가 작품 활동이 뜸해선지, 그래서 요즘 존재감이 많이 묻혔는지 이 작품이 이제 절판됐다는 게 나름 충격이었다. 잊을 만하면 더 예쁜 표지에 좋은 재질에 비싼 가격으로 다시 출간될 테지만 그래도 현재로선 절판됐다는 게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20년 전 작품에서 스기하라가 고민한 보람도 없이 일본이나 우리나라를 비롯해 어느 나라건 국적에 관란 논쟁은 답보 상태인데 이런 작품이 절판되고 잊혀진다는 게 점점 그 논쟁의 향방이 안 좋은 쪽으로 기울어지려는 전조인 것 같아 왠지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이게 괜한 기우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 다들 스기하라처럼 국적의 여부니 뭐니 하는 질문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이 작품이 절판된 거라면 작품의 만듦새와 별개로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겠다. 하지만 세상에는 사쿠라이의 아빠처럼 교양 있지만 근거도 없는 혐오 정서를 갖고 있고 그 정서를 자식들한테 주입시키는 사람이 적잖은 걸 생각하면 이 책의 절판 상태는 썩 비관적으로만 느껴진다. 부디 이 작품이 시의적절하게 재조명을 받는 날이 빨리 오길 바란다...



인상 깊은 구절


권투란 자기의 원을 자기 주먹으로 뚫고 나가 원 밖에서 무언가를 빼앗오고자 하는 행위다. 원 밖에는 강력한 놈들도 잔뜩 있어. 빼앗아오기는커녕 상대방이 네 놈의 원 속으로 쳐들어와 소중한 것을 빼앗아갈 수도 있다. 게다가 당연한 일이지만 얻어 맞으면 아플 것이고, 상대방을 때리는 것도 아픈 일이다. 아니 무엇보다 서로 주먹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그런데도 넌 권투를 배우고 싶으냐? 원 안에 가만히 있는 편이 편하고 좋을 텐데. - 65~66p


국적이라든가 민족을 근거로 차별하는 인간은 무지하고 나역하고 가엾은 인간이야. 그러니까 우리들이 많은 것을 알고 강해져서 그 인간들을 용서해주면 되는 거야. - 102p


가끔 내 피부가 녹색이나 뭐 그런 색이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다가올 놈은 다가오고 다가오지 않을 놈은 다가오지 않을 테니까 알기 쉽잖아요...... - 214p


나는 말이지, '사자'하고 비슷해. 사자는 자기를 사자라고 생각하지 않지. 너희들이 멋대로 이름을 붙여놓고 사자에 대해서 아는 것처럼 행세하고 있을 뿐이야. 그렇다고 흥에 겨워서 이름 불러가며 가까이 다가오기만 해봐. 너희들의 경동맥에 달겨들어 콱 깨물어 죽일 테니까. 알아, 너희들이 우리를 재일이라고 부르는 한, 언제든 물려야 하는 쪽이라구. - 26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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