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량의 상자 5 - 완결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시미즈 아키 그림 / 삼양출판사(만화)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9.2 







 부끄러운 얘기지만 원작의 내용이 잘 이해가 안 갔던 터라 만화로 읽는 것을 고대했다. 그림이 동반되면 이해하기 수월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만화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교고쿠도의 장광설과 특유의 뜸들이는 추리, 교차하는 서술 등은 여지없이 버거웠다. 덕분에 원작을 읽으면서 이해하지 못했던 게 그렇게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반부의 충격적인 장면들이 선명하게 그려진 걸 보노라니 내 독해력이 문제였다기 보단 내 빈약한 상상력이 걸림돌이었음을 깨달았다. 이는 곧 '망량'에 고혹되기란 여간 쉽지 않은 일이란 반증이겠지. 

 사건 당사자들과 더불어 독자들까지 혼란스럽게 만든 작품의 복잡한 전개는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심하게 갈릴 것이다. 다 읽고 나니 버릴 장면은 없었고 오히려 장면이 모자라다는 생각마저 들었으나 그럼에도 나는 초반부에 특유의 지루함과 높은 문턱 때문에 마냥 좋은 말을 하기가 꺼려진다. 이는 전술했던 장면이 모자라다는 생각과 일맥상통한 부분이다. 설명을 요하는 무수한 감정선들을 정말로 교고쿠도의 설명으로 대체할 따름이라 읽는 내내 집중력의 한계에 직면했었다. 그놈의 추리소설적인 연출을 의식한 탓에 작품의 내용이 필요 이상으로 엽기적이고 이해 불가한 영역으로 자리매김된 느낌이다. 이 소동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들이 인과응보에 따라 파멸을 맞이하지 않았더라면 일말의 여운도 없이 불쾌함만이 감돌았을 것이다. 


 확실히 교고쿠 나츠히코의 스타일은 호불호가 많이 갈리긴 한다. 이렇게 만화로 2차 창작이 이뤄진 게 신기할 만큼 그의 작품 세계는 마니악하다. 소재도 소재지만 인물들의 입으로 전개되다시피 한 진행도 문제다. 작품의 여러 문제적인 인물들 대다수가 그 내면이 직접적으로 묘사되기는커녕 교고쿠도의 입으로만 까발려져 오히려 상상력이 차단당하는 기분도 들었다. 이래서야 작가의 기괴한 상상력이 강제로 주입당하는 꼴이나 다름없어 독자마다 마음 속으로 얼마만큼 준비가 됐느냐에 따라 만족도가 천차만별로 갈릴 듯하다. 

 나는 최근에 <광골의 꿈>을 읽어서 그런지 이 작품은 상대적으로 괜찮게 읽혔다. 처음엔 지루하고 끝에 가선 엽기적이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이야기와 주제의식이 마음에 든 덕분이다. 참 복잡하고 먼 길을 돌아가지만 결국 이 작품은 '선'을 넘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로 엽기적일 수 있는지 보여주면서 함부로 '선'을 넘어선 안 될 것을 독자에게 권한다. 작중에서 교고쿠도는 '선'을 넘은 사람들을 두고 '피안'으로 갔다고 표현하는데 이 표현은 교고쿠도 특유의 지극히 지적이고 사려 깊은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실상은 법으로 재단할 순 없어도 윤리적으로 접근하면 구분이 명확해지는 온갖 종류의 죄악이 등장하므로 진짜 저렇게는 살지 말아야지 라는 다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저렇게 살고 싶어도 살 수는 없겠구나. 


 그와 동시에 <우부메의 여름>에서도 강조된, 이른바 환상적인 것을 대하는 이 작가의 자세는 여전히 인상적이었다. 환상적이고 비과학적인 것을 단순히 그 이유만으로 싸잡아 비판하지 않고 그런 요소들, 가령 오컬트 같은 요소가 인간 개개인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지 여부로 접근하는 것이 퍽 공정하게 들렸다. 현대에 와선 과학은 그야말로 새로운 종교가 돼 그와 반대되는 것들은 척결의 대상으로 삼다시피 하는 경향이 있는데 오랜 시간에 걸쳐 인간과 함께 한 민간 신앙, 유사 과학의 위력을 과소평가하지도 경시하지도 않는 교고쿠 나츠히코의 인문학적 소양은 확실히 본받을 만하다. 소설을 꼭 인문학 책처럼 집필하는 것은 문제지만...;; 

 그림을 그린 시미즈 아키 작가의 노고 역시 언급해야겠다. 원작을 어시스트들에게까지 정독시킨 다음 작업에 들어간 이 만화가가 이룩한 결실은 가히 괄목할 수준이었다. 기괴하고 엽기적이고 난해한 특성까지 완벽히 재현하면서 '교고쿠도' 시리즈의 특징 중 하나인 캐릭터들의 골때리는 매력을 정교하게 재현한 건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소설을 읽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약간 과한 언행을 보이는 캐릭터들이 시미즈 아키의 손을 통해 그야말로 호랑이에 날개를 단 격으로 살아 숨쉬듯 재탄생했다. 그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 원작의 팬은 물론이거니와 이 만화로 교고쿠 나츠히코의 작품 세계를 처음 접하려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난 소설 <우부메의 여름>이 입문작으로 가장 적합하다 생각하지만 만화 <망량의 상자>도 그에 못지않게 입문작으로 괜찮다고 본다. 시리즈의 팬들이 이구동성으로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원작을 바탕으로 한 만화니까. 그리고 그 명성에 절대로 누를 끼치는 만화가 아니니까 말이다. 

설령 엉터리 주문일지라도 효력이 있으면 진짜가 되는 겁니다. - 4권 제7화



행복해지는 건 간단하거든.

인간을 그만둬버리면 되는 걸세. - 5권 제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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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서 날개라 해도 ㅣ 고전부 시리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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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최근 잇달아 내가 애정하던 시리즈들에 실망을 하는 것 같다.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를 시작으로 교고쿠도 나츠히코의 '교고쿠도' 시리즈, 그리고 요네자와 호노부의 '고전부' 시리즈의 최신작이 기대에 못 미쳤다. 기대가 너무 큰 탓이었을까? 항상 '기대가 큰 탓에' 라고 둘러댔지만 이 작품 <이제 와서 날개라 해도>는 실망한 이유가 명확하기에 딱히 변호하지 않으려고 한다. 아마 내가 이 작품으로 시리즈에 입문하고자 했더라면 - 시리즈 여섯 번째 책으로 입문하려고 할 가능성이 극히 적긴 하지만. - 이 시리즈의 매력이 대관절 무엇인지 알지 못했으리라 단언한다. 

 일상 미스터리 계열의 작품이므로 세계관이나 작중 다뤄지는 사건이나 수수께끼의 종류가 여타 추리소설에 비해 시시하긴 했어도 이 책에 수록된 단편들은 이 정도면 대놓고 추리소설이 아닌데? 싶을 정도로 밋밋한 내용들이 많았다. 일반적인 추리소설의 기준에서 밋밋하다 뿐이지 시리즈 자체적인 기준에서는 어떠냐고 물어도 별로 좋은 소리는 해주고 싶지 않다. 캐릭터의 과거나 내면을 들여다봄에 있어서 시리즈 내적으로는 꽤나 의미 있는 내용이 많았으나 분량의 한계 때문인지 이야기 자체가 뜬금없이 시작되거나 급작스럽게 끝나버려 캐릭터들의 고뇌가 와 닿는 경우가 적었다. 특히 표제작인 '이제 와서 날개라 해도'는 지탄다의 고민과 일탈이 너무 전조 없이 대두되고 모호하게 끝맺어진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나름대로 표제작에 걸맞게 중대한 사건이 발생해 가독성이 좋았지만 이 경우엔 추리가 분량을 지나치게 잡아먹은 감이 있어서... 전작에서 추리와 이야기를 적절히 융합했던 그 만듦새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작가의 다른 단편집을 읽었을 땐 이런 느낌을 못 받았는데 이 시리즈의 단편은 유독 약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상술했듯 캐릭터의 과거가 집중 조명돼 시리즈의 팬으로서는 어느 정도 읽을 만한 가치가 있었으나 시리즈의 팬들을 제외한 다른 독자들, 가령 이 작품으로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할 수도 있는 독자들을 매료시킬 만한 만듦새엔 확실히 미치지 못했다. 시리즈에 호감이 없는 독자라면 다른 건 몰라도 이 소설을 빈말로도 좋은 추리소설이라 얘기하진 않을 것이고 심하면 속았다고 고개를 저을 독자도 있을 터다. 

 물론 추리소설이냐 아니냐가 그렇게 핏대 세워야 할 만큼 중요한 논쟁거리가 아니긴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무의미하다고 여기기엔 수록작들이 엄연히 추리소설이라는 정체성을 지향하고 있으므로 독자인 나 역시도 추리소설적인 관점에서 이 소설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간단히 말해 이 책이 전체적으로 갈팡질팡하다 이도 저도 아닌 경우에 속하는 범작과 졸작의 기로에 놓였다는 것이다. 조금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팬이 아니었다면 완독을 포기했을 것이다. 애당초 팬을 위해 집필된 듯한 책이었으니 완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만...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저평가하는 책이 바로 팬 서비스에 치중한 후속작이기에 읽는 내내 작가에게 실망감을 감추기 힘들었다. 



 '상자 속의 결락' 


 책의 구성상 첫 번째로 수록되기에 딱 어울리는 가벼움을 겸비한 이야기였다. 한 마디로 큰 감흥이 없었다. 호타로의 추리력은 여전히 비범했지만 그가 답을 찾을 수 있도록 작가가 던진 힌트가 독자 눈에 뻔히 보여 전반적으로 가벼운 마음으로 읽고 끝낼 수 있는 이야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거울에는 비치지 않아'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캐릭터인 마야카는 이 책의 수록작 중 두 개에서 화자이자 주역으로 등장한다. 다른 고전부원에 비해 미묘하게 비중이 적었던 터라 팬으로서 반가운 부분이었다. 이 이야기에선 왜 마야카가 시리즈 초창기에 호타로를 그토록 삐딱하게 바라봤던 이유가 드러나는데 시간이 좀 오래 걸렸지만 마야카가 자신의 오해를 완전히 바로잡을 수 있어서 보는 내가 다 기분이 좋았다. 마야카의 성실하고 올곧은 자세와 호타로 특유의 타인의 시선에 개의치 않는 면모는 어딘지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그게 사건의 진상이나 추리 장면보다 더욱 인상적이었다. 



 '첩첩 산봉우리는 맑은가' 


 이 책에서 유일하게 애니메이션화됐다고 한다. 에니메이션에서의 그 에피소드도 그렇고 이 수록작도 그렇고 다소 억지로 사건을 전개시키는 느낌이 들어 어딘가 석연찮게 읽혔다. 호타로가 평소답지 않게 주체적으로 수수께끼를 풀려고 했던 동기가 너무 사소하고 의외라 느껴서 그런 걸까? 지탄다는 감동했다지만 나는 유난을 떤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뭐, 이 시리즈에선 그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긴 하지만... 



 '우리 전설의 책' 


 전편에서 암시했던 마야카의 '만연' 동아리 탈퇴 사유가 드러나는 이야기다. 정말이지 답도 없는 동아리 내의 알력 다툼, 파벌 싸움을 저런 식으로 회피하다니, 상당히 통쾌한 결말이란 생각이 들었다. 전개가 지루했으나 그나마 내가 좋아하는 마야카가 화자로 나와 그런대로 몰입하며 읽을 수 있었다. 



 '긴 휴일' 


 호타로가 에너지 절약주의자가 된 계기가 드러난다. 과거에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걸 깨닫는 일련의 과정이 솔직하고 일목요연하게 묘사됐다. 개인적으로 나도 매사에 환멸을 느끼는 면이 있어 호타로의 감정선에 공감이 많이 갔는데 막판에 작가가 호타로의 누나의 입을 통해 '에너지 절약주의'를 택한 호타로를 위로해서 여운이 제법이었다. 그 나이대에 어울리는 사건과 깨달음이 디테일 있게 그려진 것도 깨알 같은 재미를 안겨줬다. 



 '이제 와서 날개라 해도' 


 이야기에 담긴 감성은 좋았지만 위에서 말했듯 지탄다의 일탈이 너무 전조 없이 대두됐고 더군다나 전편에서의 기억이 희미하면 그녀의 고민의 무게가 와 닿지 않는 등 이래저래 불친절할 정도로 뜬금없는 이야기인 지라 생각보다 큰 감흥이 일거나 하지 않았다. 이야기는 좋은데 구성이 별로라... 참 안타까운 경우라 할 수 있겠다. 

넌 앞으로 긴 휴일을 맞이하는 거야. 그러면 돼. 푹 쉬어. 괜찮아. 쉬는 동안 네 심성이 바뀌지 않는다면......

분명 누군가 네 휴일에 마침표를 찍어줄 테니까. - 323~32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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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녀와 달과 꽃을 품은 물의 요정 - Extreme Novel
노무라 미즈키 지음, 최고은 옮김, 타케오카 미호 그림 / 학산문화사(라이트노벨)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6.9 







 시리즈를 너무 띄엄띄엄 읽다 보니 이 외전이 너무나 뜬금없고 맥빠지게 읽혔다. 전편에서 어마어마한 떡밥을 뿌리고서 새삼 여름방학 에피소드를 되돌아본다는 게 연출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었는지 가닥이 잘 안 잡혔는데 이는 전적으로 시리즈를 띄엄띄엄 읽은 내 탓이라 할 수 있다. 기억하기론 이 작품에서의 몇몇 전개가 나중에 나비효과처럼 심상찮은 후폭풍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은데 확실치 않다. 당장 다음 작품을 언제 읽을지 가늠이 안 되는 마당에 과연 그때 가서 이 작품에서의 떡밥이 기억이 날는가 모르겠다. 

 첫 등장부터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전형인 것 같은 캐릭터 히메쿠라를 내세운 스토리는 좋았고 주제의식도 나쁘지 않았는데 전반적으로 이야기의 전개가 지루하고 시리즈의 개성이 희미해 읽는 맛은 덜했던 작품이다. 주요 소재가 되는 고전 문학의 매력도 어필이 되지 못했고 몇십 년 전 과거에 있었던 비극의 진상도 황당한 감이 있어 감동도 덜했다. 약간 작위적인 해피엔딩이라 여겨지는 것도 문제였으나 내가 봤을 땐 그것보다 그런 반전을 토오코가 척척 추리해내는 연출 - 토오코 자신은 추리가 아닌 문학소녀로서 '상상'을 해봤을 뿐이라고 오그라드는 대사를 해대지만;; - 이 문제였던 것 같다. 추리소설 중에는 먼 과거로부터 내려진 수수께끼를 탐정이 논리적으로 해결하는 서사가 종종 있고 '문학소녀' 시리즈의 경우 오히려 그런 서사를 자주 다뤘지만 이번엔 유독 흥미가 떨어졌다. 너무 먼 과거라서 그랬나, 맨날 비슷한 플롯이라 지겨워서 그랬나, 아니면 과거 이야기가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도 유별난 참극인 터라 몰입이 되지 않은 것인가... 뭐가 됐든 결말에 이르러서도 기분이 시원스럽지 못했다. 


 어떤 식으로든 자유를 갈망하는 캐릭터는 문학에서 굉장히 흔한 유형의 캐릭터이고 그렇기에 일찍이 묘사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묘사됐기에 이 작품에서 히메쿠라의 사정이나 과거사의 인물들의 이야기도 썩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나름대로 잘 만든 설정이지만 내가 더 이상 라이트노벨의 무드란 것에 기대가 없어서 그런지 아무런 신선함도 느끼지 못했다. 아무리 외전이라지만 본편만으론 매력이 떨어지는데... 이 외전의 무슨 의미가 있었는지는 다음 권을 보고서 판단을 유보해야겠다. 

 드디어 다음 권이 마지막 권이다. 원래는 작년에 다 읽으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올해까지 질질 끌게 됐다. 빨리 다 읽어버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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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의 분위기
박민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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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박민정 작가의 출세작, 최신작이 모두 수록된 대망의 소설집을 드디어 읽었다. 일찍이 인상 깊게 읽었던 '세실, 주희'와 '모르그 디오라마', 그리고 표제작인 '바비의 분위기'가 기억에 남는다. 그밖에 다른 작품들은 기대에 못 미쳤으나 만듦새나 공통된 주제의식은 높이 살 만했다. 아쉽게도 패턴이나 주인공의 캐릭터성이 비슷했던 게 조금 마음에 걸리는데, 페미니즘을 주제로 한 문학이 은근히 획일적인 경향이 있다는 주장의 슬픈 반증이란 생각도 든다. 이 발언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특히 박민정 작가의 경우는 꽤 다양한 시도를 보이는 작가이므로 이런 평가가 부당하다고 여겨질 수 있겠지만, 국경 밖 사례와 인물들을 통해 조명한 여성 문제가 처음엔 신선하다가도 매 단편마다 조금씩 반복되고 닮아있으니 끝에 가선 질리게 됐다. 같은 소설집의 수록작들이므로 공통점이 있는 건 그러려니 했지만, 대신 이 다음 작품들을 주목해봐야 할 듯하다. 이 다음에도 비슷한 패턴을 반복한다면 매너리즘을 의심해봐야 한다. 이것이 내 쓸데없이 과한 기우이길 바란다. 



 '세실, 주희' 


 이 작품은 내가 처음으로 접했던 작가의 작품이기도 하다.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서 처음 접했고 아마 이번이 세 번째 읽은 것일 텐데 읽을 때마다 감탄스럽다. 다른 작품에 비하면 주제의식이 꽤 뻔하게 읽히지만 오히려 그 단선적인 구조가 마음에 든다. 소위 문학 좀 한다는 사람들이 숨기는 것이 훨씬 세련된 것이라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드러낼 때는 확실히 드러내는 것도 능력이라 생각한다. 그런 내 평소 지론에 대단히 잘 부합하는 소설이 바로 '세실, 주희'였다. 

 맹목적인 반일 감정을 앞세우지도 않고 반대로 친일적인 내용도 없다. 국가 감정을 조장하지 않고 서로가 자기 아는 범위 안에서만 개념적이고 남들에게 폭력적일 수 있는 이 시대의 아이러니를 잘 강조했다. 아무래도 내가 한국인이므로 세실이 상대적으로 탐탁지 않게 비쳐질 만했으나 내가 봤을 때 주희도 나름의 딱한 사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이 가지 않았다. 세실을 향한 은근히 탐탁치 않아 하는 속내가 그다지 모범적으로 보이지 않은 탓이다. 이 정도면 양반이라 생각이 들다가도 작가의 주제의식, 서로 평행선을 달리는 사람들의 관계가 과연 괜찮은가 하는 질문을 떠올리면 끝까지 수동적인 주희도 결국엔 작가이 비판 대상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그런 주희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그걸 의미했던 것도 같고. 


 '모르그 디오라마' 


 사진과 영상 기술의 발달로 인한 여성 폭력의 교묘한 진화에 대해 심도 깊게 들여다본 작품. 주인공이 과거에 당한 일이 정확히 무엇인지 살짝 모호하게 묘사된 게 답답했지만, 또 무언가 큰일을 당한 것치고 은근히 멀쩡하게 대학 나오고 회사까지 다니네 싶었지만, 사실 그렇게 말도 안 될 정도로 험한 꼴을 당해 회생 불가능한 상처를 입었음에도 숨기고 사는 사람들이 이 세상엔 정말 많지 않을까 하는 반문이 들기도 했다. 죽어서도 구경거리로 전락한 파리의 모르그 거리의 시체들처럼 사진과 영상 기술 특유의 대상을 영원히 박제시키는 듯한 기능은 사람에 따라서 정말 위험한 무기로 악용될 수 있음을 다시금 명심하게 만들었다. 요즘 세상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소재와 접근 방식이란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바비의 분위기' 


 사실 이야기의 전개 방식이나 주인공의 심리 묘사는 크게 새로울 게 없었지만 특유의 정신 나간 설정과 분위기, 그리고 개연성 때문에 뒷맛이 씁쓸하면서 강렬했던 작품이다. 여성을 인간이 아닌 하나의 판타지의 대상으로 대하는 남자가 전공을 살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다는 대목은 쓴웃음을 넘어 소름을 끼치게 만들었다. 같은 남성이 보기에도 역겨운데 여성분들은 오죽할까. 새삼 여성분들이 느끼는 공포감이 무엇인지 실감이 갔다. 혐오해 마땅한 쓰레기가 죗값을 치르지 않고 오히려 인정 받는 세상, 그게 어쩌면 진정한 공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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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4-01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별 관심없이 제쳐두었던 책인데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광골의 꿈 - 하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김소연 옮김 / 손안의책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7.5 





 스포일러 : 거의 없음 


 전편 <망량의 상자>보다 한층 더 난해해진 시리즈 3편이다. 돌이켜 보니 <우부메의 여름>은 꽤 괜찮은 입문작이었구나 싶다. 종교의 폐해, 전근대적인 가치관에 시달리는 사람들이란 기본적인 맥락은 그대로인데 취향 좀 타는 일본의 요괴 설화와 짜증날 정도로 울적한 심성의 캐릭터들의 향연, 사건의 가닥이 잡히지 않으면서 형이상학적 얘기만 해대는 전개 때문에 몇 번이고 포기할 생각을 했다. 코믹스로 먼저 접하지 않았더라면 이야기의 반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코믹스는 꽤 괜찮았는데. 

 그렇게 좋은 방식의 독서는 아니라 생각하지만, <우부메의 여름>을 제외한 교고쿠도 시리즈는 시미즈 아키의 코믹스판을 먼저 접하고 원작을 읽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시각적인 정보에 기대지 않고서는 인물들의 장광설을 - 교고쿠도 혼자서 떠드는 1편이 훨씬 나았다. - 견디기 힘들 테니까. 후반부에서 이런 전개가 있으리란 기대 없이 과연 몇 명의 독자들이 이탈하지 않을 수 있으려나? 일본 독자들은 그래도 자국의 요괴 이야기가 나오니 덜 난해할 수 있겠지만 한국의 독자들은 경우가 다르다. 온갖 마니악한 내용들로 점철돼서 이걸 번역한 역자가 우러러 보일 정도다. 


 출연이 상당히 늦긴 했지만, 게다가 입을 떼자마자 이야기를 한참이나 돌려서 말하는 통에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지만 - 교고쿠도는 다 필요한 작업이라고 말하지만 그 말이 나올 때마다 기바슈에 빙의해 교고쿠도의 목을 졸라버리고 싶었다... - 멘탈이 붕괴되는 캐릭터들의 모습과 반전이 드러날 때의 연출 덕에 은근히 읽는 맛이 나쁘지 않았다. 코믹스의 연출이 훨씬 멋들어졌지만 원작도 그에 못지않았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아무튼 지금껏 쌓아온 수수께끼를 어쨌든 명쾌하게 해결해 추리소설의 구색은 갖춘 것이 참으로 다행으로 여겨졌다. 전편과 마찬가지로 애당초 이런 혼선이 벌어진다는 게 너무 작위적이고 우연에 기댄 감이 적잖았지만 그렇게 문제 삼고 싶지 않다. 이 세상에는 일어날 수 있는 일만 일어나는 법이라고 교고쿠도가 늘상 강조하는 거니까, 그러려니 해야지 뭐. 

 그나저나 이 시리즈를 계속 읽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다음 작품인 <철서의 우리> 상중하 세 권으로 이뤄졌다. 두 권도 벅찬데 세 권이나 이 난해한 세계관을 따라갈 자신이 없다. 사람들이 <광골의 꿈>을 분기점으로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더 읽을 것인가, 그나마 좋은 기억을 안고 이탈할 것인가. 고민 좀 된다. 나는 답을 유보한 채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려고 한다. 이 작가는 '교고쿠도' 시리즈 말고도 유명 문학상을 받은 걸출한 작품을 많이 집필했던데 그 중 한 작품을 골라야겠다. 아마 <웃는 이에몬> 아니면 <엿보는 고헤이지>가 될 듯하다. 그 작품들은 괜찮으려나 모르겠네. 이 작품들도 겁난다. 


 p.s 자꾸 코믹스 얘기하는 게 좀 그렇긴 한데,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고 또 까다롭지만 오히려 원작을 초월할 정도로 깔끔하고 인상적인 연출을 선보였던 게 떠올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시미즈 아키라는 만화가는 정말 대단한 작가가 아닐 수 없다. 어마어마한 독해력을 가졌거나 팬심이 대단하거나, 둘 중 하나거나 아니면 둘 다겠지. 

구제는 항상, 하는 쪽이 아니라 받는 쪽이 문제인 걸세. 사람은 사람을 재판할 수는 없지만, 구할 수는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 해서 구원받는다면, 그것 또한 신의 의지겠지. - 하권 23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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