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량의 상자 5 - 완결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시미즈 아키 그림 / 삼양출판사(만화)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9.2 







 부끄러운 얘기지만 원작의 내용이 잘 이해가 안 갔던 터라 만화로 읽는 것을 고대했다. 그림이 동반되면 이해하기 수월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만화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교고쿠도의 장광설과 특유의 뜸들이는 추리, 교차하는 서술 등은 여지없이 버거웠다. 덕분에 원작을 읽으면서 이해하지 못했던 게 그렇게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반부의 충격적인 장면들이 선명하게 그려진 걸 보노라니 내 독해력이 문제였다기 보단 내 빈약한 상상력이 걸림돌이었음을 깨달았다. 이는 곧 '망량'에 고혹되기란 여간 쉽지 않은 일이란 반증이겠지. 

 사건 당사자들과 더불어 독자들까지 혼란스럽게 만든 작품의 복잡한 전개는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심하게 갈릴 것이다. 다 읽고 나니 버릴 장면은 없었고 오히려 장면이 모자라다는 생각마저 들었으나 그럼에도 나는 초반부에 특유의 지루함과 높은 문턱 때문에 마냥 좋은 말을 하기가 꺼려진다. 이는 전술했던 장면이 모자라다는 생각과 일맥상통한 부분이다. 설명을 요하는 무수한 감정선들을 정말로 교고쿠도의 설명으로 대체할 따름이라 읽는 내내 집중력의 한계에 직면했었다. 그놈의 추리소설적인 연출을 의식한 탓에 작품의 내용이 필요 이상으로 엽기적이고 이해 불가한 영역으로 자리매김된 느낌이다. 이 소동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들이 인과응보에 따라 파멸을 맞이하지 않았더라면 일말의 여운도 없이 불쾌함만이 감돌았을 것이다. 


 확실히 교고쿠 나츠히코의 스타일은 호불호가 많이 갈리긴 한다. 이렇게 만화로 2차 창작이 이뤄진 게 신기할 만큼 그의 작품 세계는 마니악하다. 소재도 소재지만 인물들의 입으로 전개되다시피 한 진행도 문제다. 작품의 여러 문제적인 인물들 대다수가 그 내면이 직접적으로 묘사되기는커녕 교고쿠도의 입으로만 까발려져 오히려 상상력이 차단당하는 기분도 들었다. 이래서야 작가의 기괴한 상상력이 강제로 주입당하는 꼴이나 다름없어 독자마다 마음 속으로 얼마만큼 준비가 됐느냐에 따라 만족도가 천차만별로 갈릴 듯하다. 

 나는 최근에 <광골의 꿈>을 읽어서 그런지 이 작품은 상대적으로 괜찮게 읽혔다. 처음엔 지루하고 끝에 가선 엽기적이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이야기와 주제의식이 마음에 든 덕분이다. 참 복잡하고 먼 길을 돌아가지만 결국 이 작품은 '선'을 넘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로 엽기적일 수 있는지 보여주면서 함부로 '선'을 넘어선 안 될 것을 독자에게 권한다. 작중에서 교고쿠도는 '선'을 넘은 사람들을 두고 '피안'으로 갔다고 표현하는데 이 표현은 교고쿠도 특유의 지극히 지적이고 사려 깊은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실상은 법으로 재단할 순 없어도 윤리적으로 접근하면 구분이 명확해지는 온갖 종류의 죄악이 등장하므로 진짜 저렇게는 살지 말아야지 라는 다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저렇게 살고 싶어도 살 수는 없겠구나. 


 그와 동시에 <우부메의 여름>에서도 강조된, 이른바 환상적인 것을 대하는 이 작가의 자세는 여전히 인상적이었다. 환상적이고 비과학적인 것을 단순히 그 이유만으로 싸잡아 비판하지 않고 그런 요소들, 가령 오컬트 같은 요소가 인간 개개인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지 여부로 접근하는 것이 퍽 공정하게 들렸다. 현대에 와선 과학은 그야말로 새로운 종교가 돼 그와 반대되는 것들은 척결의 대상으로 삼다시피 하는 경향이 있는데 오랜 시간에 걸쳐 인간과 함께 한 민간 신앙, 유사 과학의 위력을 과소평가하지도 경시하지도 않는 교고쿠 나츠히코의 인문학적 소양은 확실히 본받을 만하다. 소설을 꼭 인문학 책처럼 집필하는 것은 문제지만...;; 

 그림을 그린 시미즈 아키 작가의 노고 역시 언급해야겠다. 원작을 어시스트들에게까지 정독시킨 다음 작업에 들어간 이 만화가가 이룩한 결실은 가히 괄목할 수준이었다. 기괴하고 엽기적이고 난해한 특성까지 완벽히 재현하면서 '교고쿠도' 시리즈의 특징 중 하나인 캐릭터들의 골때리는 매력을 정교하게 재현한 건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소설을 읽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약간 과한 언행을 보이는 캐릭터들이 시미즈 아키의 손을 통해 그야말로 호랑이에 날개를 단 격으로 살아 숨쉬듯 재탄생했다. 그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 원작의 팬은 물론이거니와 이 만화로 교고쿠 나츠히코의 작품 세계를 처음 접하려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난 소설 <우부메의 여름>이 입문작으로 가장 적합하다 생각하지만 만화 <망량의 상자>도 그에 못지않게 입문작으로 괜찮다고 본다. 시리즈의 팬들이 이구동성으로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원작을 바탕으로 한 만화니까. 그리고 그 명성에 절대로 누를 끼치는 만화가 아니니까 말이다. 

설령 엉터리 주문일지라도 효력이 있으면 진짜가 되는 겁니다. - 4권 제7화



행복해지는 건 간단하거든.

인간을 그만둬버리면 되는 걸세. - 5권 제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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