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스릴러 - 스릴러는 풍토병과 닮았다 ㅣ 아무튼 시리즈 10
이다혜 지음 / 코난북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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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일전에 읽었던 <아무튼, 방콕>이 괜찮아서 다른 '아무튼' 시리즈엔 어떤 책이 있을까 둘러보았다. 그 무수한 책 중에 이 책의 제목이 단연 눈에 띄었다. 제목도 제목이지만 저자의 이름도 낯익었는데 이렇게 책으로 접하기는 또 처음이라 사뭇 기대가 됐다. 

 저자가 서두에서 밝히듯 스릴러는 명쾌하게 설명이 가능한 장르가 아니다. 워낙에 나뉘는 갈래가 다양하기에 일목요연하게 스릴러란 이렇다 하고 정의 내리기란 저자도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긴 고작 '단순히 스릴이 있고 범죄가 묘사된 소설'이라는 식의 정의를 읽으려고 이 책을 집어든 게 아닌 만큼 서두에서부터 겸손하게 스릴러의 정의 내리기를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이 더 인상적이었다. 


 이 책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은 스포일러를 최대한 절제한 다양한 작품 소개와 스릴러를 좋아한 사람들 사이의 공감대를 풀어낸 것이다. 전자에 대해 얘기하자면, 대관절 스포일러의 기준은 어디까지이며 어느 정도의 스포일러가 이로운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내가 추리소설로 독서에 입문했다 보니까 블로그를 시작할 때부터 스포일러 없이 글을 쓰는 것을 의식하게 됐는데, 책에 적혀있는 고충, 가령 스포일러에 과민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에 대한 씁쓸함 등이 퍽 공감이 됐다. 다른 장르의 독자들 사이에선 은근히 스포일러가 크게 중요하지 않은 모양인데, 반전이 참 중요하긴 해도 거기에 함몰돼 글을 읽고서 사람들에게 감상을 들려주는 재미가 추리소설 독자들 사이에서 너무 제한되는 것 같아 아쉽기 그지없다. 스포일러 없이 소개하는 것도 기술이라지만 작품에 따라선 한계가 있는 법. 너무 대놓고 악의적인 스포일러가 아니라면 좀 더 관대하게 넘어가도 괜찮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작가가 연구를 많이 한 모양인지 글에서 언급된 작품들이 하나 같이 절묘하게 소개됐다. 내가 읽었던 작품들이 거의 스포일러 없이 소개되는 것을 보고 내가 아직 접하지 못한 작품들을 거론할 때 노심초사하지 않게 되더라. 역시 괜히 유명한 사람은 아니구나 하고 감탄했다. 


 스릴러, 추리소설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눈치가 보일 때가 있다. 은근히 추리소설을 잔인하고 저속할 뿐인 소설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이 많더라. 특히 우리 부모님 세대엔 그런 인식이 만연해서 내가 막 추리소설에 빠져들었을 때 어머니와 마찰이 잦았다. 결국엔 내가 추천한 소설들,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나 <이니시에이션 러브> 같은 '추리소설 같지 않은' 추리소설을 읽고서 내가 잔인하고 저속한 소설을 읽는다는 오명을 벗을 수 있었는데, 이는 내가 어머니 아들이니까 가능했지 생면부지의 남에게 통용되는 방식은 아닐 테다. 내가 어머니에게 했던 '속는 셈치고 읽어봐라' 라는 말에 다른 사람까지 귀 기울이리라곤 기대하기 힘드니까 말이다. 

 선입견이 강하면 강할 수록 그 선입견을 공고히 하려고 하지 그 선입견을 굳이 깨려고 한 걸음 양보하는 사람은 그렇게 흔치 않다. 하물며 추리소설은 '잔인하고 저속할 뿐인 소설'이란 선입견은 일견 맞는 소리지 않나 싶을 정도로 그 이미지를 일부러 깨지 않으려는 잔인하고 저속할 뿐인 소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무턱대고 유명하거나 혹은 베스트셀러를 읽어볼 것이 아니라 자기 취향에 맞는 추리소설을 추천해줄 만한 사람을 찾아가거나, 아니면 이렇게 전문가가 쓴 책으로 감을 잡아보길 바란다. 추리소설 읽어봤는데 별로더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서점에서 가장 눈에 띄는 책을 무작정 읽어본 경우다. 내 생각에 추리소설/스릴러 장르는 아무 책이나 집어들어도 될 만큼 천편일률적인 장르가 아니므로 저런 식의 접근은 시늉에 불과하다고 추리소설 애독자로서 감히 말해보겠다. 


 이 책은 위에서 말했듯 스릴러란 장르를 아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지는 않지만 150쪽도 안 되는 짧은 분량 속에서 장르의 세부적으로 어떻게 구분되고 특징들을 다양하게 분석했다. 특히 코지 미스터리, 이야미스, 여성 작가가 쓰는 여성이 주인공인 스릴러 등에 대한 분석은 서점가에서 범람하다시피 하는 추리소설/스릴러 코너에서 괜찮은 길라잡이가 될 듯하다. 내게 새로운 내용은 없었지만 그 하위 장르들의 묘미와 요즘 각광 받는 이유, 대표작들의 소개는 제법 구미가 당기게끔 - 이미 읽은 작품도 다시 읽고 싶어졌다면 말 다했다. - 썼다. 

 아울러 스릴러 장르와 실제 잔인한 사건과의 불편한 공생 관계,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은 잔인한 심성을 좋아하리란 불쾌한 꼬리표, 왜 우리는 스릴러에 열광하는가에 대한 작가의 분석도 괜찮았다. 이 부분도 내겐 그렇게 새로운 내용은 아니었지만 스릴러의 'ㅅ'자도 모르는 사람에겐 진정성 있게 읽히길 바란다. 정말로 잔인한 걸 좋아해서 스릴러를 읽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보다 잔인한 현실에 대한 대리 만족을 위해서 읽는 사람이 더 많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 작가처럼 '내가 이렇게 스릴러에 좋아하는 것이 괜찮은 건가?' 하고 자문하는 사람 또한 있음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모든 사람이 천편일률적이지 않듯 모든 추리소설가들 역시 천편일률적이지 않다. 당연히 그들이 집필하는 작품들이 천편일률적일 리 없다. 일단은 스릴러로 명명되는 작품들이 세부적으로 들여다봤을 때 오히려 스릴러란 단어 하나로 묶기에 힘들다는 것을 설명한 것만으로 이 책은 소임을 다했다고 본다. 어설프게 정의를 내리는 것보다 이쪽이 훨씬 영양가 있었다. 한마디로 스릴러를 좋아하는 사람, 스릴러를 모르는 사람, 이제 접하려는 사람 모두에게 추천할 수 있는 책이었다. 

놀이의 도구가 신뢰라는 말은, 자칫하면 신뢰와 애정 모두를 놓치는 최악의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 48p



그래서 범죄물을 읽는다. 이해할 수 없는 악의의 정체가 궁금해서, 불가능해 보이는 범죄가 이루어지고 또 그것을 해결하는 천재적인 두뇌플레이를 보고 싶어서, 그 안에서는 언제나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서사 안에서 안전한 쾌락을 느끼고 싶어서. 하지만 ‘내가 파는 장르‘가 무엇을 소비하는지 알고는 있어야 한다. - 116p



현실이 잔인하다고 잔인한 설정을 한껏 이용하는 창작물을 즐기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 현실의 문제를 픽션의 연장으로밖에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된다. ‘픽션‘과 ‘픽션 같은‘은 전혀 다른 말이다. 픽션을 픽션으로 즐기려면 현실의 문제를 현실에서 해결하려는 책임감이 필요하다.

나는 여전히 스릴러를 좋아한다. 그 사실은 종종 나를 괴롭게 한다. 내가 ‘파는‘ 장르의 구성 성분이 무엇인지, 쾌락이 어디에서 발생하는지를 생각하는 일이 그렇다. 스릴러가 현실의 피난처로 근사하게 기능해온 시간에 빚진 만큼, 현실이 스릴러 뒤로 숨지 않게 하리라. - 13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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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바보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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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8.3 






 8년 뒤에 운석이 충돌해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동시에 죽는다는 초유의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 소설은 특이하게도 종말이 예고된 직후가 아닌 5년 정도가 지난 애매한 즈음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람들은 패닉에 빠지고 범죄가 들끓고 대책을 강구해보기도 하지만 그래봤자 운석 충돌은 기정 사실이며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기까지 5년이 걸렸다고 소개된다. 

 현재 시점은 남은 3년을 평화롭게 보내다 모두 다 같이 종말을 맞이하는 게 그나마 낫다고 다들 암묵적으로 합의한 상태이며 이 애매한 상황이 도리어 신의 한 수로 적용돼 이 작품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제는 무언가를 이루기도 포기하기도 애매한 3년, 희망을 갖는 것은 물론 절망에 빠져 하루 하루를 낭비하기도 뭔가 아까운 이 3년이란 시간을 앞두고서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인생을 찬양하거나 해묵은 감정을 풀어낸다. 소재와 분위기가 독특한 것에 비해 이야기의 담론이 식상한 에피소드도 있었고 이사카 코타로가 쓴 것치고 정교한 퍼즐식 구성의 묘미가 옅다는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다루는 주제가 종말이 아닌 인생에 초점이 맞춰진 만큼 때에 따라서 당장은 식상했던 얘기도 달리 읽힐 것으로 기대된다. 


 개인적으로 코믹스가 더 재밌었지만 코믹스에서 미처 다뤄지지 않은 소설만의 에피소드가 있어서 예전부터 원작도 읽어야지 하고 벼르고 있던 작품이다. 결혼 생활 내내 아기가 생기지 않아 기대도 하지 않던 찰나에 아이러니하게도 종말 3년을 앞두고 임신이 된 부부의 에피소드와 꿈이 좌절된 배우 지망생이 자신의 전공을 살려 이웃 사람들의 소중한 사람을 연기하며 관계를 쌓아가는 에피소드다. 분량 문제 때문에 그랬나? 이 두 작품이 다른 수록작에 비해 완성도가 떨어진다거나 몰개성하지도 않은데 코믹스에서 왜 다루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특히 부부 에피소드는 차원이 다른 감동을 선사했으며 또 결말도 좋았기에 소설로만 접할 수밖에 없는 게 못내 아쉬웠다. 무슨 연유에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코믹스에서 만족하지 않고 원작을 찾아본 보람이 있었다. 

 종말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작중에서 학교는 폐교하고 유통이나 경찰, 언론, 정치인 등의 직업은 소수의 직업적 사명감이 있는 사람을 제외하면 사실상 전 지구가 휴업 상태에 돌입했다는 구절이 씁쓸하게 읽혔다. 우리는 미래가 막연하고 불안한 한편으로 그렇기에 꿈을 꾸며 노력하며 살아가기도 하는데 미래가 차단당하면서 삽시간에 패닉에 빠질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상상해볼 수 있었다. 교육이라는 게 꼭 좋은 대학이나 좋은 직업을 얻기 위해 밟는 절차도 아닌데 종말이 머잖았다는 이유로 더는 누구도 학교에 다닐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게 왜 그렇게 씁쓸하게 느껴지던지... 우리는 미래를 의식하지 않으면 현실에선 자포자기한 채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으려는 동물이란 말인가. 이렇게 무기력한 동물이 어딨을까 싶어 '현재를 살아라' 라는 격언이 남달리 들렸다. 그래, 쉽지 않지만 어쨌든 남은 기간 동안 현재를 살아야 나중에 후회가 덜 남을 테니까. 


 작가 특유의 골때리는 사람들의 등장이 덜하고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다른 작품 속 주인공이 출현하지 않은 것 등 작가의 다른 작품과도 차별적인 구석이 많았다. 듣자 하니 작가가 처음으로 추리소설 외의 다른 장르의 소설을 집필해달라는 의뢰를 받고서 쓴 연작 소설이라고 한다. 따지고 보면 이사카 코타로가 작정하고 추리소설을 쓰는 작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보아하니 이 작품을 기준으로 다양한 작풍에 도전하게 된 건가 싶어 이 작품이 다른 의미에서 대단하게 읽혔다. 

 처음에 말했듯 군데군데 밀도가 떨어진다는 느낌도 들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추리소설을 쓰고 싶은 유혹을 잘 견뎌낸 것 같아 그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이렇게 장르적인 재미를 절제한 작품을 접하니 이후 출간작의 남다른 무게감의 원천이 마냥 타고난 것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문단은 끊임없이 노력하고 발전을 추구하는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세계인 듯하다. 

내일 죽는다면 인생이 바뀝니까?

지금 당신의 인생은 몇 년짜리 인생입니까? - 21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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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무더위 - 살인곰 서점의 사건파일 ㅣ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문승준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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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2부에 해당하는 <조용한 무더위>는 작가의 장기인 블랙유머와 서늘한 분위기, 그리고 추리소설이란 장르에 대한 애정이 유감 없이 발휘된 단편집이다. 하무라 아키라가 서점에 적을 두다 보니 전작 <이별의 수법> 때와 마찬가지로 서점과 출판계를 배경으로 사건이 펼쳐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독특한 분위기가 퍽 아기자기하게 다가왔다. 왜 진작 이런 식으로 설정을 짜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서점과 하무라 아키라는 정말 딱 맞는 궁합이었는데,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어 눈도 침침하고 탐정으로서의 능력도 미묘하게 허술하고 무엇보다 '불운함'이 이 아기자기한 설정과 맞물려 쉬지 않고 폭소를 유발했다. 그래봤자 유머는 곁가지에 불과하다지만 데뷔 때부터 코지 미스터리를 써온 작가답게 능수능란하게 잔재미를 녹여낸다. 덕분에 코지 미스터리라기엔 심각하기 이를 데 없는 사건이 다뤄짐에도 틈틈이 킥킥거리며 술술 읽어나갈 수 있었다. 



 '파란 그늘' 


 개인적으로 첫 번째 수록작이 표제작보다 더 재밌었다. 이제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하무라 아키라라지만 탐정으로서의 실력은 아직 건재함을 알린 것과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범인을 궁지로 몰아가는 소설의 절묘한 구성에 깜짝 놀랐다. 특히, 재밌긴 하나 별로 대단한 설정이라 생각하지 않았던 살인곰 서점이란 배경이 십분 활용돼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다. 하무라 아키라의 책임감 내지는 도덕성을 엿볼 수 있던 것도 인상적이었다. 



 '조용한 무더위' 


 표제작이자 작년에 나온 드라마 <하무라 아키라>에서도 다뤄진 작품이다. 허무함이 남발되는 코믹한 전개 이면에 숨겨진 서늘한 범죄 계획이 하무라 아키라의 불운과 촉으로 끝끝내 저지당하는 결말이 놀라웠다. 일본의 여름을 경험해본 사람으로서 작중에서 묘사되는 더위의 수위가 종이 너머로 십분 전해졌는데, 그 와중에도 추리소설 특유의 서늘함을 전달한 작가의 필력이 실로 절륜하게 느껴졌다. 하무라 아키라의 촉도 마찬가지다. 이 정도면 정말 명탐정이 따로 없다... 



 '소에지마 씨 가라사대' 


 시리즈 최초의 안락의자 컨셉인 것도 신기했고 반가운 캐릭터가 등장해서 반갑기까지 했다. 여러모로 골때리는 상황 속에서 최소한의 책임감과 움직임으로 사건을 무마하는 전개가 속도감 있고 좋았으며 결말도 기억에 남았다. 소 뒷걸음질 치다 쥐를 잡는다고 했던가. 탐정에게 잘못 걸리면 정말 어떻게든 죄가 탄로 나기 마련이다. '트러블 메이커'라는 하무라 아키라의 이전 별명이 오랜만에 떠오르는 결말이었다. 



 '붉은 흉작' 


 중반부의 몰입도는 그저 그랬지만 도입부와 결말이 제법이었다. 하무라 아키라가 탐정이지 정의의 사도까진 아니라는 이 시리즈의 컨셉, 혹은 작가의 가치관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결말이 마음에 들었다. 누가 자신에게 사건을 맡기려고 하면 장난하지 말라며 툴툴대다가도 막상 조사를 시작하면 자기 사전엔 적당히란 말은 없다면서 끝장을 보고, 사건이 일단락이 난 후에도 어느 정도 사후 책임에 신경을 쓴다. 이러니 이 캐릭터에 애정이 안 갈 수가 없다. 



 다음 작품인 <녹슨 도르래>는 장편이고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멘탈 붕괴 수준의 전개가 펼쳐진다고 하니 기대가 된다. 이 책을 읽으니 단편도 나쁘지 않지만 난 작가의 장편이 더 취향에 맞는구나 싶어서 - 작가의 주 종목이 단편이라는 데엔 어느 정도 동의는 하지만. - 다음 작품도 조만간 찾아 읽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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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침과 기도
시자키 유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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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8.0 






 


 세계 곳곳을 무대로 펼쳐지는 이색 추리소설 단편집을 읽었다. 여행자인 주인공을 내세워 낭만적인 세계관을 그리면서도 잔인하고 엽기적인 사건을 다루는데 묘사되는 동기들이 너무 특이한 탓에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재밌게도 독자들의 감상평을 살펴보면 수록작들의 완성도에 대한 전반적인 감상은 대동소이한데, 일반적으로 첫 번째 수록작이 최고이며 두 번째 수록작은 급이 떨어지고 마지막 수록작은 개별 작품으로는 시시하지만 책을 마무리하는 에필로그적인 성격은 봐줄 만하다고 독자들은 입을 모은다. 나 역시 동의한다. 

 내가 약 10년 전에 이 책을 읽고서 포스팅을 작성할 때 '최고 수준'이라는 표현까지 썼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다시 읽은 지금에 와선 다소 과찬을 하지 않았나 싶다. 지금은 컨셉이 독특하고 만듦새가 준수한 추리소설 단편집 정도로 생각한다. 아무래도 수록작들의 재미의 기복이 있는 데다가 그나마 괜찮았던 작품들도 두 번째 접하니 약간 지루한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행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사이키가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자신의 꿈과 이상이 훼손될 대로 훼손되는 모습은 요즘 시국과 겹쳐서 생각하니 더욱 공감이 가 안타깝기 그지없었지만, 그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마지막 수록작을 집필한 작가의 노림수가 너무 노골적이라 오히려 감동이 반감된 감이 있다. 그래도 데뷔작을 이 정도로 쓴 것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이 작품 이후로 일본에서도 소식이 없어 작가의 다른 작품 세계를 확인하지 못해 아쉽기 그지없다. 



 '사막을 달리는 뱃길' 


 막판의 반전이 처음엔 놀랍긴 해도 약간 따로 놀지 않은가 싶었지만, 생존을 위해 인간성을 버린 범인의 추악함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 중 하나란 생각에 미치자 몇 없던 단점마저 상쇄됐다. 의중을 알 수 없던 범인의 동기가 충격적이면서 어느 정도 설득력 있던 것도 좋았고 이 작품집의 컨셉을 제대로 전달하는 등 첫 번째로 수록되기에도 아주 적합한 작품이 아닐 수 없었다. 낙타를 사막을 달리는 배니 돌고래라 표현하는 게 약간 구태의연했지만 그런대로 낭만이 있어 은근 감미롭게 읽혔던 게 기억에 남는다. 



 '하얀 거인' 


 사실 중반부까지는 이 작품이 제일 흥미진진했지만 그놈의 얼렁뚱땅인 결말 때문에 기분 잡쳤다. 너무 성의 없게 마무리를 지은 게 아닌가? 사이키와 그 친구들의 캐릭터성, 스페인의 시골 마을을 아름답게 묘사한 글귀 정도가 이 작품의 얼마 안 되는 성과이리라. 다른 건 몰라도 추리소설로는 낙제점을 줄 수밖에 없다. 차라리 시작부터 별로던가, 기대를 배신해서 더욱 괘씸했다. 



 '얼어붙은 루시' 


 사이키의 시점과 번갈아가며 다뤄지는 화자의 시점이 지루하게 읽혔으나 결말에서 눈이 뜨였다. 바로 직전의 수록작과 정반대의 매력이 있어 다행이었다. 바로 다음 수록작의 무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작중 러시아의 폐쇄적인 분위기가 잘 살아난 것도 재밌는 지점이었다. 범인의 광기를 설명하는 것 이상의 효과가 있었다고 본다. 



 '외침' 


 사람들이 이 작품을 첫 수록작과 더불어 좋게 평가하던데 오히려 난 이 작품 속 범인의 동기가 약간 뻔한 구석이 있어 무난하게 읽혔다. 다만 제목이 주는 절박함과 좌절스러움이 배어든 결말은 인상적이었다. 그 장면을 묘사함에 있어서 원시 부족의 폐쇄성이나 전근대적인 가치관을 조롱하는 기색이 없던 것까지 좋았다. 이 작가의 사람으로서의 됨됨이가 돋보였다. 



 '기도' 


 위에서 거듭 강조했듯 단일 작품으로서의 완성도는 떨어지지만 - 그래도 '하얀 거인'보다는 낫다. - 조금 분량이 긴 에필로그라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읽을 만하다. 여운이 있고 앞선 수록작들의 내용을 언급해 반가움도 든다. 작중에서 반전이랍시고 나온 내용이 하나도 놀랍지 않아서 구성을 근본부터 다시 짜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뭐, 이 정도면 무난한 에필로그라는 생각도 든다. 사이키를 향해 '그래도 여행은 계속 되어야 한다'고 작가가 위로를 건네는 것에 성공했으니까 말이다. 

‘빈곤‘. 그 말만큼 하찮게 들리는 것은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빈곤은 대지 깊숙이 새겨져 있었다. - 26p



판타지란 현실이 뭔가를 계기 삼아 모습을 약간 바꿔 보여주는 표정이라고. 그게 세계의 규칙이지. - 93p



성인이라는 것과 성인이라 불리는 것은 다릅니다. 성인이라는 칭호 따위가 없어도 사람은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 186p



아무리 불합리해도 현실은 잔혹하고, 아무리 기도해도 마음은 통하지 않아. 상식은 손쉽게 산산조각 나지. 영원히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죽이는 인간도 있고, 서로 이해한 인간을 죽이는 녀석도 있어. 그게 현실이야. - 34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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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집
기시 유스케 지음 / 창해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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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8.8 





 스포일러 있음 


 옛날엔 식은땀 흘려가며 읽은 소설인데 10년이 지난 다음에 읽으니 무난하게 읽혔다. 내가 10년 사이에 사이코패스에 면역이 생긴 건가? 아무리 이미 아는 내용이라지만 이 정도로 무덤덤하게 읽을 줄은 몰랐다. 인면수심이라는 말도 아까운 사이코패스 범죄자가 작중 시기에 비하면 요즘엔 그리 드물지 않아서 그런 걸까? 내가 이 작품에서 공포를 느낀 부분은 보험 제도의 허점을 찔러 자기 가족조차 몰살시키는 사치코의 모습보다 사치코의 본모습을 유추하는 과정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기시 유스케의 실질적인 데뷔작이자 출세작으로 평가 받는 <검은 집>은 작가의 정수가 담긴 작품이다. 본격적으로 집필 활동을 하기 전에 보험사에서 일했던 터라 디테일이 남달랐는데 이러한 특징은 이후의 작품들의 다양한 설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설정을 향한 작가의 탐구 정신은 다시 봐도 발군인데 가끔 작가가 자신이 취재한 내용을 아낌없이 풀어내고자 전개가 너무 설명적으로 흘러간다는 아쉬움을 제외하면 대체로 유익하고 흥미로워 읽는 맛이 제법이다. 이 작품이 20년 전에 집필됐다 보니 사이코패스를 다루는 설명하는 투가 묘하게 교과서적인 것이 - 당시엔 사이코패스란 개념이 지금보다 희박할 때라 - 시대의 변화를 실감케 하는데, 여느 인문학 도서보다 입문용으로 적절하다 생각될 만한 사이코패스의 좋은 예시(사치코)가 있어 이 작품이 단순히 오락 소설 그 이상의 작품으로 느껴졌다. 


 사치코의 정체는 이 작품의 일종의 반전으로 작용하는데 소제목이 나오는 장에 스포일러가 있던 것을 빼면 - 왜 그렇게 편집을 했는지;; - 꽤 괜찮은 반전이었다고 생각한다. 반전의 내용이 의외인 것도 재밌었고 그 복선이 대단히 교묘하고 학술적으로 일리가 있어서 내심 소름이 돋기까지 했다. 사치코가 요즘에 각광을 받는 사이코패스 캐릭터들에 비하면 치밀하게 행동하는 지성도 부족하고 동물적 감각에 의존하는 단순무식함 때문에 이질적으로 느껴지긴 하지만 한편으로 이게 과장 없이 가장 현실적인 캐릭터 설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이코패스는 그 자체로 범죄의 화신이라기보단,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범죄를 효과적인 수단으로 인식할 뿐이라는 개념을 대단히 잘 나타낸 캐릭터가 아닌가 싶었다. 

 본격적으로 액션이 난무하기 전인 중반부까지는 마치 폭풍전야처럼 인물들끼리 사이코패스라는 개념에 대해 갑론을박을 하는데 이 작품을 다시 읽는 내게 있어 이 부분이 퍽 인상적이었다. 간단히 요약하면 사이코패스는 세상이 각박해지고 사람들에게 욕망 실현을 애매하기 짝이 없게 부추긴 탓에 사이코패스야말로 지금 세상에 가장 생존하기 적합한 형태의 돌연변이로 거듭났다는 논지였다. 사이코패스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다는 대단히 위험한 발언이 아닐 수 없어서 주인공은 그 논지대로라면 머잖아 우생학에 기반한 디스토피아가 재림하겠다고 비아냥거릴 정도였다. 그러자 상대는 주인공의 말을 적당히 수긍하면서도 그래봤자 사이코패스가 환경에 기인한다는 건 순진한 발상임을 주장하는데 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시련을 겪고도 신념을 잃지 않은 주인공의 여자친구의 모습과 완벽히 대비된다. 그런데 날 때부터 악인은 없다는 말을 참... 믿고는 싶은데 솔직히 어느 정도 공허하게 들린다는 것은 부정하지 못하겠다. 


 각종 보험 사기 소개 및 사이코패스라는 소재에 치중한 탓에 주인공과 주변 인물에 대한 집중이 소홀하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그 탓에 주인공 형의 자살에 얽힌 진실이나 여자친구의 올곧음이 상대적으로 뜬금없거나 빈약하게 느껴졌다. 이는 아직 소설을 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작가의 미숙함의 탓으로 보였는데, 캐릭터 설정은 그런대로 잘 이뤄진 편이니 분량을 더 할애하거나 아니면 액션 비중을 줄여서라도 내실에 충실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성선설을 믿는 캐릭터의 주장이 덜 소개된 감이 있어 이 작품이 전체적으로 사이코패스를 소개하기 위해 집필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 정도로 소재에 집중할 수 있는 작가이기에 조금 더 주제의식에 집중하지 못한 것에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막판에 그저 그런 호러 소설로 남기는 싫었는지 작가가 너무 '집'이란 단어를 강조하며 요즘 세상엔 사이코패스가 만연해졌다는 말을 주입식으로 늘어놓아서 더욱 아쉬움이 남는다... 

 사이코패스 캐릭터로부터의 추격전은 작가의 이후 작품에 비하면 긴장감이 떨어지는 편이었는데, 특히 <신세계에서>와 <악의 교전>에서 차원이 다른 공포스러움을 묘사했기에 비교가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추리소설다운 묘미가 있어서 은근히 신선했는데 이런 특성이 처음에 읽었을 땐 좋았지만 다시 읽은 지금은 그 부분만 튄다는 생각에 -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의 논리적 추리가 오히려 몰입도를 깨뜨렸다고 말하면 너무 트집일까? - 전처럼 몰입할 수가 없었다. 처음 읽었을 땐 정말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는데... 이걸 담력이 세졌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감정 이입이 둔해졌다 해야 할지 모르겠다. 


 <검은 집>은 황정민 주연의 우리나라 영화로도 유명하던데 그 영화는 어떨지 궁금하다. 평이 좋지 않아서 볼까 말까 고민이 되지만 그래도 결국엔 볼 것 같다. 과연 어떨는지... 

인간의 행동은 항상 유전 환경이라는 두 가지 인자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 100%이고 다른 한쪽이 제로인 경우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도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범죄만은 100%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은 성선설에 가까운 옛날이야기로, 일본 말고는 어느 나라에서도 통용되지 않습니다. - 24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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