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의 바보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8.3 






 8년 뒤에 운석이 충돌해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동시에 죽는다는 초유의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 소설은 특이하게도 종말이 예고된 직후가 아닌 5년 정도가 지난 애매한 즈음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람들은 패닉에 빠지고 범죄가 들끓고 대책을 강구해보기도 하지만 그래봤자 운석 충돌은 기정 사실이며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기까지 5년이 걸렸다고 소개된다. 

 현재 시점은 남은 3년을 평화롭게 보내다 모두 다 같이 종말을 맞이하는 게 그나마 낫다고 다들 암묵적으로 합의한 상태이며 이 애매한 상황이 도리어 신의 한 수로 적용돼 이 작품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제는 무언가를 이루기도 포기하기도 애매한 3년, 희망을 갖는 것은 물론 절망에 빠져 하루 하루를 낭비하기도 뭔가 아까운 이 3년이란 시간을 앞두고서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인생을 찬양하거나 해묵은 감정을 풀어낸다. 소재와 분위기가 독특한 것에 비해 이야기의 담론이 식상한 에피소드도 있었고 이사카 코타로가 쓴 것치고 정교한 퍼즐식 구성의 묘미가 옅다는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다루는 주제가 종말이 아닌 인생에 초점이 맞춰진 만큼 때에 따라서 당장은 식상했던 얘기도 달리 읽힐 것으로 기대된다. 


 개인적으로 코믹스가 더 재밌었지만 코믹스에서 미처 다뤄지지 않은 소설만의 에피소드가 있어서 예전부터 원작도 읽어야지 하고 벼르고 있던 작품이다. 결혼 생활 내내 아기가 생기지 않아 기대도 하지 않던 찰나에 아이러니하게도 종말 3년을 앞두고 임신이 된 부부의 에피소드와 꿈이 좌절된 배우 지망생이 자신의 전공을 살려 이웃 사람들의 소중한 사람을 연기하며 관계를 쌓아가는 에피소드다. 분량 문제 때문에 그랬나? 이 두 작품이 다른 수록작에 비해 완성도가 떨어진다거나 몰개성하지도 않은데 코믹스에서 왜 다루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특히 부부 에피소드는 차원이 다른 감동을 선사했으며 또 결말도 좋았기에 소설로만 접할 수밖에 없는 게 못내 아쉬웠다. 무슨 연유에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코믹스에서 만족하지 않고 원작을 찾아본 보람이 있었다. 

 종말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작중에서 학교는 폐교하고 유통이나 경찰, 언론, 정치인 등의 직업은 소수의 직업적 사명감이 있는 사람을 제외하면 사실상 전 지구가 휴업 상태에 돌입했다는 구절이 씁쓸하게 읽혔다. 우리는 미래가 막연하고 불안한 한편으로 그렇기에 꿈을 꾸며 노력하며 살아가기도 하는데 미래가 차단당하면서 삽시간에 패닉에 빠질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상상해볼 수 있었다. 교육이라는 게 꼭 좋은 대학이나 좋은 직업을 얻기 위해 밟는 절차도 아닌데 종말이 머잖았다는 이유로 더는 누구도 학교에 다닐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게 왜 그렇게 씁쓸하게 느껴지던지... 우리는 미래를 의식하지 않으면 현실에선 자포자기한 채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으려는 동물이란 말인가. 이렇게 무기력한 동물이 어딨을까 싶어 '현재를 살아라' 라는 격언이 남달리 들렸다. 그래, 쉽지 않지만 어쨌든 남은 기간 동안 현재를 살아야 나중에 후회가 덜 남을 테니까. 


 작가 특유의 골때리는 사람들의 등장이 덜하고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다른 작품 속 주인공이 출현하지 않은 것 등 작가의 다른 작품과도 차별적인 구석이 많았다. 듣자 하니 작가가 처음으로 추리소설 외의 다른 장르의 소설을 집필해달라는 의뢰를 받고서 쓴 연작 소설이라고 한다. 따지고 보면 이사카 코타로가 작정하고 추리소설을 쓰는 작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보아하니 이 작품을 기준으로 다양한 작풍에 도전하게 된 건가 싶어 이 작품이 다른 의미에서 대단하게 읽혔다. 

 처음에 말했듯 군데군데 밀도가 떨어진다는 느낌도 들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추리소설을 쓰고 싶은 유혹을 잘 견뎌낸 것 같아 그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이렇게 장르적인 재미를 절제한 작품을 접하니 이후 출간작의 남다른 무게감의 원천이 마냥 타고난 것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문단은 끊임없이 노력하고 발전을 추구하는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세계인 듯하다. 

내일 죽는다면 인생이 바뀝니까?

지금 당신의 인생은 몇 년짜리 인생입니까? - 21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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