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집
기시 유스케 지음 / 창해 / 2004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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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8.8 





 스포일러 있음 


 옛날엔 식은땀 흘려가며 읽은 소설인데 10년이 지난 다음에 읽으니 무난하게 읽혔다. 내가 10년 사이에 사이코패스에 면역이 생긴 건가? 아무리 이미 아는 내용이라지만 이 정도로 무덤덤하게 읽을 줄은 몰랐다. 인면수심이라는 말도 아까운 사이코패스 범죄자가 작중 시기에 비하면 요즘엔 그리 드물지 않아서 그런 걸까? 내가 이 작품에서 공포를 느낀 부분은 보험 제도의 허점을 찔러 자기 가족조차 몰살시키는 사치코의 모습보다 사치코의 본모습을 유추하는 과정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기시 유스케의 실질적인 데뷔작이자 출세작으로 평가 받는 <검은 집>은 작가의 정수가 담긴 작품이다. 본격적으로 집필 활동을 하기 전에 보험사에서 일했던 터라 디테일이 남달랐는데 이러한 특징은 이후의 작품들의 다양한 설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설정을 향한 작가의 탐구 정신은 다시 봐도 발군인데 가끔 작가가 자신이 취재한 내용을 아낌없이 풀어내고자 전개가 너무 설명적으로 흘러간다는 아쉬움을 제외하면 대체로 유익하고 흥미로워 읽는 맛이 제법이다. 이 작품이 20년 전에 집필됐다 보니 사이코패스를 다루는 설명하는 투가 묘하게 교과서적인 것이 - 당시엔 사이코패스란 개념이 지금보다 희박할 때라 - 시대의 변화를 실감케 하는데, 여느 인문학 도서보다 입문용으로 적절하다 생각될 만한 사이코패스의 좋은 예시(사치코)가 있어 이 작품이 단순히 오락 소설 그 이상의 작품으로 느껴졌다. 


 사치코의 정체는 이 작품의 일종의 반전으로 작용하는데 소제목이 나오는 장에 스포일러가 있던 것을 빼면 - 왜 그렇게 편집을 했는지;; - 꽤 괜찮은 반전이었다고 생각한다. 반전의 내용이 의외인 것도 재밌었고 그 복선이 대단히 교묘하고 학술적으로 일리가 있어서 내심 소름이 돋기까지 했다. 사치코가 요즘에 각광을 받는 사이코패스 캐릭터들에 비하면 치밀하게 행동하는 지성도 부족하고 동물적 감각에 의존하는 단순무식함 때문에 이질적으로 느껴지긴 하지만 한편으로 이게 과장 없이 가장 현실적인 캐릭터 설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이코패스는 그 자체로 범죄의 화신이라기보단,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범죄를 효과적인 수단으로 인식할 뿐이라는 개념을 대단히 잘 나타낸 캐릭터가 아닌가 싶었다. 

 본격적으로 액션이 난무하기 전인 중반부까지는 마치 폭풍전야처럼 인물들끼리 사이코패스라는 개념에 대해 갑론을박을 하는데 이 작품을 다시 읽는 내게 있어 이 부분이 퍽 인상적이었다. 간단히 요약하면 사이코패스는 세상이 각박해지고 사람들에게 욕망 실현을 애매하기 짝이 없게 부추긴 탓에 사이코패스야말로 지금 세상에 가장 생존하기 적합한 형태의 돌연변이로 거듭났다는 논지였다. 사이코패스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다는 대단히 위험한 발언이 아닐 수 없어서 주인공은 그 논지대로라면 머잖아 우생학에 기반한 디스토피아가 재림하겠다고 비아냥거릴 정도였다. 그러자 상대는 주인공의 말을 적당히 수긍하면서도 그래봤자 사이코패스가 환경에 기인한다는 건 순진한 발상임을 주장하는데 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시련을 겪고도 신념을 잃지 않은 주인공의 여자친구의 모습과 완벽히 대비된다. 그런데 날 때부터 악인은 없다는 말을 참... 믿고는 싶은데 솔직히 어느 정도 공허하게 들린다는 것은 부정하지 못하겠다. 


 각종 보험 사기 소개 및 사이코패스라는 소재에 치중한 탓에 주인공과 주변 인물에 대한 집중이 소홀하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그 탓에 주인공 형의 자살에 얽힌 진실이나 여자친구의 올곧음이 상대적으로 뜬금없거나 빈약하게 느껴졌다. 이는 아직 소설을 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작가의 미숙함의 탓으로 보였는데, 캐릭터 설정은 그런대로 잘 이뤄진 편이니 분량을 더 할애하거나 아니면 액션 비중을 줄여서라도 내실에 충실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성선설을 믿는 캐릭터의 주장이 덜 소개된 감이 있어 이 작품이 전체적으로 사이코패스를 소개하기 위해 집필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 정도로 소재에 집중할 수 있는 작가이기에 조금 더 주제의식에 집중하지 못한 것에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막판에 그저 그런 호러 소설로 남기는 싫었는지 작가가 너무 '집'이란 단어를 강조하며 요즘 세상엔 사이코패스가 만연해졌다는 말을 주입식으로 늘어놓아서 더욱 아쉬움이 남는다... 

 사이코패스 캐릭터로부터의 추격전은 작가의 이후 작품에 비하면 긴장감이 떨어지는 편이었는데, 특히 <신세계에서>와 <악의 교전>에서 차원이 다른 공포스러움을 묘사했기에 비교가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추리소설다운 묘미가 있어서 은근히 신선했는데 이런 특성이 처음에 읽었을 땐 좋았지만 다시 읽은 지금은 그 부분만 튄다는 생각에 -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의 논리적 추리가 오히려 몰입도를 깨뜨렸다고 말하면 너무 트집일까? - 전처럼 몰입할 수가 없었다. 처음 읽었을 땐 정말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는데... 이걸 담력이 세졌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감정 이입이 둔해졌다 해야 할지 모르겠다. 


 <검은 집>은 황정민 주연의 우리나라 영화로도 유명하던데 그 영화는 어떨지 궁금하다. 평이 좋지 않아서 볼까 말까 고민이 되지만 그래도 결국엔 볼 것 같다. 과연 어떨는지... 

인간의 행동은 항상 유전 환경이라는 두 가지 인자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 100%이고 다른 한쪽이 제로인 경우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도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범죄만은 100%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은 성선설에 가까운 옛날이야기로, 일본 말고는 어느 나라에서도 통용되지 않습니다. - 24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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