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침과 기도
시자키 유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8.0 






 


 세계 곳곳을 무대로 펼쳐지는 이색 추리소설 단편집을 읽었다. 여행자인 주인공을 내세워 낭만적인 세계관을 그리면서도 잔인하고 엽기적인 사건을 다루는데 묘사되는 동기들이 너무 특이한 탓에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재밌게도 독자들의 감상평을 살펴보면 수록작들의 완성도에 대한 전반적인 감상은 대동소이한데, 일반적으로 첫 번째 수록작이 최고이며 두 번째 수록작은 급이 떨어지고 마지막 수록작은 개별 작품으로는 시시하지만 책을 마무리하는 에필로그적인 성격은 봐줄 만하다고 독자들은 입을 모은다. 나 역시 동의한다. 

 내가 약 10년 전에 이 책을 읽고서 포스팅을 작성할 때 '최고 수준'이라는 표현까지 썼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다시 읽은 지금에 와선 다소 과찬을 하지 않았나 싶다. 지금은 컨셉이 독특하고 만듦새가 준수한 추리소설 단편집 정도로 생각한다. 아무래도 수록작들의 재미의 기복이 있는 데다가 그나마 괜찮았던 작품들도 두 번째 접하니 약간 지루한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행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사이키가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자신의 꿈과 이상이 훼손될 대로 훼손되는 모습은 요즘 시국과 겹쳐서 생각하니 더욱 공감이 가 안타깝기 그지없었지만, 그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마지막 수록작을 집필한 작가의 노림수가 너무 노골적이라 오히려 감동이 반감된 감이 있다. 그래도 데뷔작을 이 정도로 쓴 것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이 작품 이후로 일본에서도 소식이 없어 작가의 다른 작품 세계를 확인하지 못해 아쉽기 그지없다. 



 '사막을 달리는 뱃길' 


 막판의 반전이 처음엔 놀랍긴 해도 약간 따로 놀지 않은가 싶었지만, 생존을 위해 인간성을 버린 범인의 추악함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 중 하나란 생각에 미치자 몇 없던 단점마저 상쇄됐다. 의중을 알 수 없던 범인의 동기가 충격적이면서 어느 정도 설득력 있던 것도 좋았고 이 작품집의 컨셉을 제대로 전달하는 등 첫 번째로 수록되기에도 아주 적합한 작품이 아닐 수 없었다. 낙타를 사막을 달리는 배니 돌고래라 표현하는 게 약간 구태의연했지만 그런대로 낭만이 있어 은근 감미롭게 읽혔던 게 기억에 남는다. 



 '하얀 거인' 


 사실 중반부까지는 이 작품이 제일 흥미진진했지만 그놈의 얼렁뚱땅인 결말 때문에 기분 잡쳤다. 너무 성의 없게 마무리를 지은 게 아닌가? 사이키와 그 친구들의 캐릭터성, 스페인의 시골 마을을 아름답게 묘사한 글귀 정도가 이 작품의 얼마 안 되는 성과이리라. 다른 건 몰라도 추리소설로는 낙제점을 줄 수밖에 없다. 차라리 시작부터 별로던가, 기대를 배신해서 더욱 괘씸했다. 



 '얼어붙은 루시' 


 사이키의 시점과 번갈아가며 다뤄지는 화자의 시점이 지루하게 읽혔으나 결말에서 눈이 뜨였다. 바로 직전의 수록작과 정반대의 매력이 있어 다행이었다. 바로 다음 수록작의 무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작중 러시아의 폐쇄적인 분위기가 잘 살아난 것도 재밌는 지점이었다. 범인의 광기를 설명하는 것 이상의 효과가 있었다고 본다. 



 '외침' 


 사람들이 이 작품을 첫 수록작과 더불어 좋게 평가하던데 오히려 난 이 작품 속 범인의 동기가 약간 뻔한 구석이 있어 무난하게 읽혔다. 다만 제목이 주는 절박함과 좌절스러움이 배어든 결말은 인상적이었다. 그 장면을 묘사함에 있어서 원시 부족의 폐쇄성이나 전근대적인 가치관을 조롱하는 기색이 없던 것까지 좋았다. 이 작가의 사람으로서의 됨됨이가 돋보였다. 



 '기도' 


 위에서 거듭 강조했듯 단일 작품으로서의 완성도는 떨어지지만 - 그래도 '하얀 거인'보다는 낫다. - 조금 분량이 긴 에필로그라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읽을 만하다. 여운이 있고 앞선 수록작들의 내용을 언급해 반가움도 든다. 작중에서 반전이랍시고 나온 내용이 하나도 놀랍지 않아서 구성을 근본부터 다시 짜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뭐, 이 정도면 무난한 에필로그라는 생각도 든다. 사이키를 향해 '그래도 여행은 계속 되어야 한다'고 작가가 위로를 건네는 것에 성공했으니까 말이다. 

‘빈곤‘. 그 말만큼 하찮게 들리는 것은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빈곤은 대지 깊숙이 새겨져 있었다. - 26p



판타지란 현실이 뭔가를 계기 삼아 모습을 약간 바꿔 보여주는 표정이라고. 그게 세계의 규칙이지. - 93p



성인이라는 것과 성인이라 불리는 것은 다릅니다. 성인이라는 칭호 따위가 없어도 사람은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 186p



아무리 불합리해도 현실은 잔혹하고, 아무리 기도해도 마음은 통하지 않아. 상식은 손쉽게 산산조각 나지. 영원히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죽이는 인간도 있고, 서로 이해한 인간을 죽이는 녀석도 있어. 그게 현실이야. - 34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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