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가 웃는 순간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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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6.6 







 한 작가를 무한 신뢰하는 순간부터 나는 꼭 그 작가의 '지뢰작'을 접하는 것 같다. <염소가 웃는 순간>은 객관적으로 지뢰작이라 부를 만큼 처참한 완성도의 작품은 아니지만, 작가의 대표작 <13.67>이나 최신작 <망내인>, 은근히 빛을 못 본 단편집 <풍선인간>과 비교하면 가볍고도 가벼운 수준의 평작이었다. 작가의 데뷔작인 <기억나지 않음, 형사>보다 모자란 부분이 많았는데, 특히 산만하고 신선하지 못한 전개와 캐릭터, 나중에 가선 논리적으로 접근하지만 기본적으로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인 설정까지 눈에 걸리는 부분이 한둘이 아니었다. 가독성은 유일하게 내세울 수 있을 장점일 테지만, 흡입력이 좋다기 보다 시간을 들여 정독할 정도로 밀도 높은 내용이 아니라 그저 빨리 읽힌 것에 가까워 이걸 장점이라 봐야 할는지도 잘 모르겠다. 

 물론 내가 호러 소설을 굉장히 안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나 박하게 평하는 것일 수도 있다. 사람들이 극찬한 나홍진 감독의 <곡성>이나 아야츠지 유키토의 <어나더>도 혹평했던 나인 만큼 제아무리 찬호께이가 재주가 좋아도 그의 호러 소설이 내게 먹혀들 리는 만무할 터다. 만약 호러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에게 이 소설이 나름대로 괜찮았다고 한다면 솔직히 할 말은 없다. 내겐 어쭙잖게 느껴진 후반부의 논리적인 전개도 독자에 따라선 신선한 포인트일 수 있음을 부정하지 않겠다. 비록, 나는 독자도 논리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공정함이 부족한 소설에게 과도한 칭찬은 자제해야 한다는 주의지만, 내가 작가에 대한 애정이 이 작품만으로 바래지지 않아서 아주 헐뜯고 싶진 않다. 작가에 대한 애정이 지대한 나머지 더욱 헐뜯을 수 있는 법이지만 말이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입이 근질거린다는 것을 숨기진 않겠다. 평범함을 개성으로 내세운 주인공의 매력도 잘 와 닿지 않고 작가가 청춘물을 표방한답시고 만든 캐릭터들이 머릿수만 많지 대부분 작위적인 성격들인 터라 몰입을 방해한 적이 - 특히 버스... 일단 별명부터가... - 많았다. 뿐만 아니라 노퍽관에 얽힌 괴담이 한두 개도 아니고 무려 7가지나 돼 산만하기 그지없었는데, 일부 괴담은 제법 오싹했지만 테마파크마냥 파트별로 한 번씩 소개하고 넘어가는 게 무분별하게 소비되는 느낌이 들어서 뒤로 갈수록 실소가 나왔다. 이거 분명 호러 소설인데... 

 아무래도 내가 요즘 마음의 여유가 없다 보니 일종의 시적 허용이라 웃어 넘길 만한 요소에도 일일이 열받은 감이 있으나... 다른 건 몰라도 '이거... 뻔한데, 이상하게 재미있다! Why? 찬호께이니까!'라는 띠지의 문구가 괜히 기대감을 증폭시킨 탓인지 이렇게 실망감을 날카롭게 반응을 내비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이 작품을 집필한 작가가 마지막에 가서 쓸데없는 의미 부여를 하기 보단 끝까지 철저하게 재미를 위한 글을 쓴 덕분에 엄청난 불쾌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완성도도 떨어지는데 주제의식 내세우면서 있어 보이려고 했다면 진짜 가루가 되도록 깠을 것이다. 


 만약 찬호께이의 작품을 혹시 이 작품으로 처음 접한 사람이 있다면 작가의 다른 작품은 이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내는 작품마다 분량에 걸맞게 내용도 알차고 복선 회수나 반전도 예사롭지 않은 중화권 최고의 추리소설가임을 확인하고 싶다면 <13.67>이나 <풍선인간>, <망내인>을 접하길 간곡히 부탁한다. 제발 이 작품으로 찬호께이를 판단하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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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 이야기 그래픽 노블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르네 놀트 그림,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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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예전에 두어 번 도전했다가 문체의 벽에 막혀 번번이 실패했던 소설 <시녀 이야기>를 원작으로 둔 그래픽 노블이다. 만화로 접하면 좀 괜찮을 줄 알았더니, 예상과는 다르게 조금 다른 의미에서 읽기 힘들었다. 내용 이해에는 지장은 없었고 오히려 쉬웠지만 그래픽 노블 특유의 선명한 색채 탓에 작중 묘사되는 디스토피아의 막장스러움이 한층 강조돼 읽는 내내 혐오스러움이 들끓었다. 시녀들이 입는 옷의 색깔부터 정말이지 무엇 하나 혐오스럽지 않은 것이 없는 세계관이었는데, 이 모든 걸 어느 정도 완결성 있는 이야기로 집필한 원작자 마가렛 애트우드의 비위가 참 대단하게 느껴졌다. 

 당초에는 원작 소설의 후속작 <증언들>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이 작품을 다 읽으니 그 작품도 읽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도대체 무슨 연유로 이런 극단적인 디스토피아 국가가 건설됐고 어떻게 멸망했고 대관절 제목이 왜 '증언들'인지도 확인해야 직성이 풀릴 듯하다. 이야기 본편이 너무 느닷없이 결말이 나고 세계관 소개만 하다가 끝난 감이 있어서 적잖이 감질 났기 때문이다. 대충 짐작하기론 출산율 저하를 여성의 탓으로만 돌리고, 젊은 남자는 전쟁터로 보내고, 출산이 가능한 여성은 딱 봐도 생식 능력이 떨어져 보이는 소수의 늙은 남자들이 데리고 있으니 그 나라에 미래가 없음은 너무나 자명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짐작만 하기 보단 직접 생존자들의 '증언'을 통해 이 길리어드라는 막장 나라가 어떻게 붕괴됐는지 그 전말을 듣고 싶다. 


 이 작품의 세계관에서 가장 역겨웠던 부분은 여성을 철저하게 착취하는 시스템 자체보다 이 시스템이야말로 여성이 여성의 본분(=출산)에 충실할 수 있고 또 여성을 성 노리개로 삼는 이전 시대(=미국)의 가치관을 가진 남성들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는 길리어드 정권의 주장(=개소리)이었다. 주인공을 비롯한 절대다수의 여성들은 사형당하지 않기 위해 마지못해 순종할 뿐이고, 아마 절대다수의 남성들 역시 사형당하고 싶지 않아서 성욕을 억누를 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이 체제에 순종한다. 오직 힘 있는 기득권 남성만이 이전 시대의 색채가 묻어 있는 비밀 사교 클럽을 운영해 자신들만의 하렘을 만들었는데 이조차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폐쇄적인 체제에 비하면 하렘의 분위기는 활기차고 남성들도 대놓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니 그나마 덜 기만적이다는 점을 제외하면 결국 여성들의 비참함을 부각시킨다는 점에선 기존 길리어드 정권과 큰 차이가 없으니까 말이다. 

 원작 소설이 굉장히 유명하긴 하지만 사실 정확히 무슨 내용의 소설인지 몰랐었다. 소재만 들었을 땐 섹슈얼한 묘사가 없을 수가 없는 유사 성애 소설(=야설)로 생각했지만 실상은 정반대였다. 혹여나 이 작품에 어떤 식으로든 섹슈얼한 묘사가 있으리라 기대하고 읽을 생각이라면 당장 책장을 덮길 권한다. 이 책의 독자들 대부분이 여성이기 때문인지 서평을 읽어보면 감상평이 대동소이하던데 - 아마 이 부분이 <시녀 이야기>란 작품의 가장 큰 약점일 것이다. 누가 읽어도 비슷한 감상이 나온다는 것. - 남자 독자인 나는 그 감상에 공감을 하면서도 꼭 이 말을 첨언하고 싶어 목이 근질근질했다. 이런 세계는 여성은 물론이고 남성도 원하지 않는 세계라고. 한 명의 남성으로서 말하건대, 인간의 성욕을 죄악시하고 인간의 역할은 출산이 전부라고 규정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적 세계관에 좋다고 할 남성은 극히 적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다 이런 정권이 들어섰는지 궁금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무력 쿠데타가 있었다지만 그 전에 적잖은 사람들이 동의를 하고 지지해줘야 출범할 수 있는 게 정권이니까. 


 작품의 세계관도 세계관이지만 그래픽 노블의 특성상 원작의 내용을 충실하게 그려냈을 것으로 추정되는 르네 놀트 작가의 화풍 및 연출력도 인상적이었다. 성별과 계급의 차이에 따른 다양한 복장들의 색깔을 선명하게 그린 것도 인상적이었고 특히 길리어드 출범 이전의 세계는 따스하고 몽환적으로, 현재의 세계관을 아주 차갑게, 먼 미래로 추정되는 결말에서는 다시 따스하게 그린 것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원작 소설을 완독하지 못해서 비교는 못하겠지만 전반적으로 가독성이 떨어지는 주인공의 독백과 세계관 묘사를 대부분 자세하게 살리되 작가가 그림을 적절하게 넣어 읽으면서 집중력이 환기됐다. 그래픽 노블도 분량에 비해 은근히 가독성이 떨어졌지만 그 말은 곧 원작을 충실하게 재현했다는 반증이지 않을까 싶다. 덕분에 내용 이해에 원작을 읽은 독자들과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아 그래픽 노블로 도전한 보람을 느꼈다. 

 아까도 말했지만 후속작 <증언들>은 꼭 읽어볼 것이고,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나 원작 소설은 아마 보지 않을 것 같다. 드라마도 스트레스 엄청 받을 것 같고 소설은... 좀 더 내공을 쌓은 다음에 도전해도 늦지 않을 것 같다. 뭐, 고전은 어디 도망가지 않으니까. 설마 길리어드와 유사한 정권이 들어서서 분서라도 당하지 않는 이상 이 작품은 언제든 그 자리를 지키며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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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소년 아톰 박스세트 1~23 - 전23권 (완결)
데즈카 오사무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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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옛날부터 읽어야겠다고 생각만 했지 막상 실행에 옮기려니 쉽지 않았던 작품이다. 그만큼 연식이 된 작품이기도 하고 분량도 길어서 기껏 박스 세트를 구입해놓고 손길이 잘 가지 않았다. 결국 다 읽기까지 3주 넘게 걸렸다. 구성이 옴니버스식이다 보니 하루에 한 권 이상 읽기 힘들더군. 여하튼 여러모로 거리감이 있던 작품이지만 다 읽고 나니 기대 이상으로 배울 점이 많아서 보람이 느껴지기도 했다. 옛날 만화 특유의 유치하면서도 기괴한 느낌도 도리어 신선했고 은근히 같은 패턴이 남발되는 듯하면서도 새로이 얘기할 지점을 낳는 에피소드들이 여간 흥미로운 게 아니었다. 

 뒤로 갈수록 아톰이 가장 구식 기술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기상천외한 존재들이 등장하는 것도 재밌었고 특히 인상적인 것은 첫 번째 에피소드와 마지막 에피소드가 의외의 내용이란 것도 인상적이었다. 특히 첫 번째 에피소드는. 왜 '우주소년' 아톰인가 했더니... 이 만화가 처음 연재된 게 50년대란 걸 생각하면 평행 우주 설정은 참 신박하지 않은가 싶었다. 


 듣기로는 아톰은 일본인의 로봇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미국에서 만드는 로봇은 주로 전투용 로봇이나 채굴용 로봇인 반면 일본에서 만드는 로봇은 간호용 로봇인 것엔 다 그럴싸한 이유가 있었다. 아톰을 보고 자란 일본인들에게 로봇이란 인간과 공생하는 존재이며 그들이 인간에게 파괴당하지 않게끔 귀엽고 사랑스러운 외모를 갖고 있어야 한다고 뇌리에 각인됐다는 것이다. 이는 최첨단 기술이 집약된 로봇은 그저 인간이 누리기만 할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 다른 인간을 대하듯 똑같이 배려하고 존중하는 대상으로 봐야 한다는 논리인데 실제로 작중에서 누누이 강조되는 주제기도 하다. 

 이런 주제의식은 지금 시점에서 봐도 파격적인데, 은근히 비정하고 현실감 넘치는 세계관과 대조되게 무척 따뜻한 인간애가 돋보이는 주제의식인 터라 경우에 따라서 무척 감동적으로 느껴졌다. 예를 들면 '클레오파트라'나 '로비오와 로비에트' 에피소드처럼 자신을 만든 부모(박사)의 뜻을 거스르지 못해 악행을 저질러야 하는 로봇들의 비애가 어떤 비극을 낳고 거기다 어떤 식으로든 인과응보의 결말을 맞이해 씁쓸함이 배가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두 에피소드는 천재적인 로봇 공학자들이 자신의 손으로 낳은 로봇을 통해 분에 넘치는 꿈을 이루려거나 소모적인 감정 싸움에서 이기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작가는 이러한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과 그에 신음하는 로봇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이기심과 오만함은 모든 것을 망칠 뿐이라는 교훈을 한껏 강조한다. 


 아마 아톰을 읽은 모든 독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상 최대의 로봇'과 '청기사' 에피소드를 최고의 에피소드로 꼽을 듯하다. 전자는 단순히 배틀물로도 재밌었지만 그저 힘을 추구할 뿐인 로봇(기술)엔 미래는커녕 파멸만이 기다리고 있음을 날카롭게 시사했고 후자는 로봇의 자존감과 권리에 대해 얘기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에피소드였다. 이 에피소드는 유례 없이 인간들로부터 등진 아톰의 모습이 인간인 독자 입장에서 공감이 갔던 것이나 그럼에도 인간을 향한 아톰의 선한 마음에 큰 변함이 없는 것 등 여러 면에서 눈길이 갔다. 어떤 때는 아톰이 약간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하나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는 아톰의 처지가 고매하면서도 짠하게 느껴졌는데, 이는 반대로 말하면 인간이 바라는 로봇이란 경우에 따라선 진언도 날리는 동등한 존재가 아닌 무조건 자신을 섬기는 노예인 것 같아 어떤 면에선 인간의 한계를 엿볼 수도 있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말하지만 이 작품에선 인간이 굳이 아톰처럼 지성이 있는 존재를 만든다면 그를 대우할 때 가히 인간 못지않게 존중해야 함을 꾸준하게 강조하고 있다. 아톰을 포함해 작품에 등장하는 무수한 로봇들은 지성을 갖췄으나 인간들에게 도구로 취급당하면서 엇나가거나 오히려 인간이 그 화를 뒤집어쓰는 전개가 적잖이 묘사된다. 때론 존재 자체만으로 위험천만한 로봇은 꼭 아톰으로부터 파괴당해야만 하는 전개가 나오기도 하는데 이럴 때마다 아톰이나 파괴당하는 로봇이나 '왜 인간은 이렇게 위험한 로봇을 만들어서...' 라는 탄식을 낳는 장면은 반드시 나온다. 


 한마디로 철학적인 사유도 성찰도 없이 도구적이고 비인간적으로 기술을 발전시키고 접근한다면 남는 것은 없다는 걸 한결같이 비판한 작품이 바로 <우주소년 아톰>이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애들 보는 로봇 만화 정도로만 인식하던데 생각보다 무겁고 심오하고 서사나 장르에 관해서도 실로 역사에 남을 법한 시도가 많았던 작품이라 새삼 이 작품이 일본 만화를 넘어서 문화에서 점하고 있는 위상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울러 왜 데즈카 오사무가 만화의 신이라 불리는지도 알 것 같았다. 이토록 시대를 앞서간 인류애가 담긴 만화를 그린 작가의 다른 작품도 궁금해졌다. <불새>와 <붓다> 등 아톰말고도 대표작이 참 많던데 뭐부터 읽을지... 어떤 작품이든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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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로봇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김옥수 옮김 / 우리교육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9.6 






 아이작 아시모프의 <아이, 로봇>은 윌 스미스 주연의 동명의 영화의 원작 소설이라고만 알고 넘기기엔 참 아까운 대작이다. 후대의 모든 로봇 창작물에 영감이자 원천을 제공한 '로봇 3원칙'이 처음 등장한 전설적인 작품이면서 다종다양한 오류를 내는 로봇들을 통해 새로운 차원의 존엄성과 인권 감수성을 길러볼 수 있는 철학적인 SF 소설이자 로봇 3원칙을 근거로 로봇들의 오류 원인을 추적하는 특수 설정 걸작 추리소설집이기도 하다. '로봇 3원칙'이야 워낙에 유명하고 이전 포스팅에도 썼으니 더 하고 싶은 말이 없고, 철학적인 SF 소설이란 측면에서 보자면 어딘지 볼거리에 치중된 영화에 비해 훨씬 다양한 각도에서 로봇이란 존재의 불완전함 - 한편으론 로봇 자체는 완전무결하나 다루는 인간들이 불완전하기 이를 데 없다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 에 주목하며 미래의 로봇은 진정 어떤 모습일는지 상상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개인적으로는 책의 수록작들 대부분이 마치 추리소설적인 구조를 띄고 있는 게 참으로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첫 번째 수록작이자 레트로 휴고상을 수상한 '로비'는 소녀와 로봇과의 감동적인 우정을 그린 전형적인 로봇 소설인 것에 비해 바로 다음 수록작부터 작가의 상상력과 유머 감각이 돋보여 다소 밋밋했던 첫인상은 눈 녹듯 사라졌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수록작의 제목에 부제가 붙으면서 이번 이야기에서 어떤 반전이 등장할지 유추가 가능하다는 점이었는데, 이 제목들이 원제가 아닌 우리나라로 번역 출간되면서 바뀐 걸 생각하면 다소 불필요한 친절을 베풀지 않았느냐고 혀를 차게 됐다. 출판사가 어린이 독자를 상정하고 편집을 해서 그런가... 작품의 내용의 반전들이 지금 읽어도 신선한 부분이 있어서 의도치 않게 스포일러로 재미를 반감시킨 출판사의 편집은 은근히 아쉬웠다. 반면 수록작마다 판이한 분위기를 전부 소화하는 실감나는 작화력을 보유한 오동 그림 작가의 삽화는 가히 신의 한 수로 여겨졌다. 

 '스피디'처럼 로봇 3원칙이 서로 충돌해 기이한 행동을 하는 경우부터 '큐티'처럼 인간의 말을 듣지 않는 로봇이 헛소리까지 남발하지만 일 하나는 기똥차게 잘해서 주인인 인간 입장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방관할 수밖에 없는 경우, '허비'에서 절대다수를 만족시키는 로봇의 존재는 모순에 불과함이 드러나는 경우, '네스터10호'처럼 인간에 대한 반발심과 로봇으로서의 우월감이 지나치면 어느 정도로 위험해질 수 있는지 경고하는 경우, '바이어리'에서는 인간 못지않은 로봇의 대두, '피할 수 있는 갈등'에서는 인간을 위해 심어둔 로봇의 원칙이 도리어 인간의 목을 조르거나 사육하는 결과에 이를 수도 있다는 비관적인 전망까지 이 책에선 온갖 종류의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로봇이 3원칙을 거스를 수 없게끔 만드는 기술적인 원리는 잘 모르겠으나 그 구멍이 숭숭 난 원칙에 의해 인간이라면 저지를 수 없는 실수를 속절 없이 반복하거나 인간에게 굴욕을 당해야 하는 로봇의 처지가 웃기면서 씁쓸하게 다가왔다. 종국에 로봇은 지나치게 발달해 인간을 위한 원칙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인간을 욕보이는 고차원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이걸 자업자득이라 해야 할 지 판도라의 상자를 연 대가를 치렀다고 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할 정도로 작중 딜레마는 대부분 근본적인 책임을 인간에게 돌릴 수 있어 씁쓸함이 배가됐다. 우린 로봇의 주인인가 친구인가 아니면 종인가. 언뜻 타당해 보이는 로봇 3원칙은 실상 모든 로봇을 완벽히 통제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인간이 그렇듯 로봇들 역시 결코 천편일률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언젠가 어디에서든 로봇이 사고를 일으키는 것은 아주 필연적이라 여겨졌다. 

 이야기의 구조나 반전의 내용들도 재밌었지만 로봇의 오류를 조사하는 파웰과 도노반, 수잔 켈빈과 보거트 콤비가 작품에 깨알 같은 재미를 선사했다. 유연한 사고로 사건의 진상에 접근하는 모습, 가끔은 대재앙을 방지하고자 목숨도 거는 몇몇 장면에서 호감을 가지지 않기가 힘들었다. 이들 모두 하는 일이 비슷함에도 로봇에 대한 가치관이 각자 달라 가끔 의견 대립하는 구도 역시 흥미로웠다. 개중에 수잔 켈빈 박사는 로봇이란 존재를 사뭇 긍정적으로 여기는 캐릭터다. 그 이유로 박사는 로봇의 악행은 로봇이 악의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대부분 인간의 실수나 로봇이라는 한계 때문에 벌어지는 우발적인 사고라는 것으로 예시를 들었다. 


 작년에 읽은 카렐 차페크의 <로봇>이 로봇 소재의 A to Z를 다뤘다고 생각했는데 <아이, 로봇>에서 로봇이란 소재가 완성되지 않았나 싶다. 로봇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와 더불어 위험성도 경고하는 자세에서 연작 소설의 미덕이 영리하게 발휘됐다고 본다. 이야기의 세부적인 주제가 계속 바뀌니까 여러 형태의 이야기가 나왔을 테고 아마 장편이었으면 이런 다양한 매력을 어필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 그래서 영화가 고평가를 못 받았나? 저번에 처음 읽었을 때 영화도 다시 찾아보자고 생각했는데 4년 동안 결국 찾아보지 않았다... 언젠가 찾아보긴 해야 할 텐데 괜히 실망할까봐 두렵다. 원작을 최대한 의식하지 않고 기대 없이 보는 게 상책일 듯하다. 

하지만 선생이 알아야 할 건 로봇하고 아주 훌륭한 인간은 잘 구분할 수 없다는 사실이에요. - 30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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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의 눈빛 ㅣ 나츠메 형사 시리즈
야쿠마루 가쿠 지음, 최재호 옮김 / 북플라자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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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8.4 







 <형사의 눈빛>은 어딘지 가가 형사를 연상시키는 나츠메 형사가 등장하는 소설집이다. 야쿠마루 가쿠 작가의 작품 중에서 보기 드문 형사물로 후속작이 나올 가능성 및 드라마화될 잠재력이 충분한 작품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일본에선 동명의 드라마가 나왔다고 한다. 아쉽게도 작품 자체는 기대에 비해 재밌진 않았으나 드라마로 보면 또 느낌이 다를 것이란 생각이 든다. 몇몇 납득이 안 가는 범인의 심리가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보면 개연성 있게 다가올 것 같기 때문이다. 

 책에는 총 7편의 중단편 소설이 수록됐으며 첫 번째 수록작인 '오므라이스'와 표제작인 '형사의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나머지 수록작은 내용이나 주제의식이 전반적으로 중복되는 감이 있어서 차라리 수록작을 줄였으면 어땠을까 싶다. 개중에는 반전을 위한 무리수도 있었고 그 무리수에 개연성을 부여하고자 지지부진하게 의미 부여를 하는 어설픈 경우까지 있어서... 작가의 <악당> 같은 완성도를 기대한 나로선 적잖이 실망스러웠다. 


 수록작 전체에 녹아든 농도 짙은 휴머니즘은 부담스러웠으나 주인공 나츠메는 아주 이성적이라 묘하게 작풍에 균형감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야쿠마루 가쿠의 소설들은 아주 감정적이고 물리적인 인과응보가 어떤 식으로든 묘사되기 마련이었는데 말이다. 작가는 '형사의 눈빛'에서 나츠메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죽어 마땅한 자를 죽여버리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그게 과연 자기 자식한테까지 당연하다는 듯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옳단 말인가. 진정한 인과응보란 그런 게 아니지 않을까. 그간 비슷한 질문을 반복해온 작가답게 이 작품에선 한층 성숙한 고민을 풀어냈다. 쉽진 않지만 가해자의 진실한 참회, 반성이야말로 진정한 인과응보이자 유족이 가장 바라는 바임을 강조해 다 읽고선 따뜻한 여운이 감돈 기억이 난다. 대미를 장식하기도 하고 또 분량이 가장 많아서 그런가, 표제작이 괜히 표제작이 아니었다. 

 첫 수록작 '오므라이스'는 일본추리작가협회상 단편 부문 후보에 오른 작품이라는데 상식을 뒤엎는 반전 때문에 그만한 평가를 받지 않았나 생각된다. 무슨 야동에서나 나올 법한 막장 전개가 나와 당혹스러웠으나 작가가 진정한 반성의 의미를 강조한 덕에 막장에서 그치지 않고 씁쓸함과 애절함까지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여러모로 첫 수록작에 어울리는 작품이 아닐 수 없었는데, 여담이지만 이번 단편집은 작가의 작품 중 불쾌하든 아니든 유독 섹슈얼적인 상황 설정이 많아 이질적으로 읽혔다. 대부분 어느 정도 필요한 수준의 설정이긴 했지만 범죄의 수위나 피해자의 죽어 마땅한 부분을 납득시키기 위한 자극적인 서술 같기도 해 눈살이 찌푸려졌다. 난 이 작가가 너무 자극적으로 글을 쓰지 않길 바라는데... 다른 작품에선 또 어떨지 확인해봐야겠다. 


 이 작품의 드라마는 총 11부작이라고 한다. 분량으로 봐선 원작보다 디테일한 내용일 것으로 기대된다. 주인공임에도 과거사를 제외하면 나츠메 개인에 대한 묘사가 적은 편이었던 소설을 드라마가 어떻게 재탄생시켰을지 궁금해 찾아보려고 한다. 그리고 <고독한 미식가>로 유명한 마츠시게 유타카가 출연한다니 더 보고 싶어졌다. 원래는 형사나 야쿠자 역할로 유명한 배우라 그 드라마에선 진지한 연기를 하지 않을까 싶다. 과연 언제 보게 될는지. 

피해자의 가족들이 범인에게 바라는 것은 범인이 감옥에 가거나 무거운 형벌을 받는 것만이 아니야. 범은 스스로 자신이 범한 죄의 의미를 평생 곱씹는 것, 그리고 그것을 죽을 때까지 반성하며 살아가는 것, 바로 그걸 원하는 거야. - 42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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