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녀 이야기 그래픽 노블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르네 놀트 그림,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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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예전에 두어 번 도전했다가 문체의 벽에 막혀 번번이 실패했던 소설 <시녀 이야기>를 원작으로 둔 그래픽 노블이다. 만화로 접하면 좀 괜찮을 줄 알았더니, 예상과는 다르게 조금 다른 의미에서 읽기 힘들었다. 내용 이해에는 지장은 없었고 오히려 쉬웠지만 그래픽 노블 특유의 선명한 색채 탓에 작중 묘사되는 디스토피아의 막장스러움이 한층 강조돼 읽는 내내 혐오스러움이 들끓었다. 시녀들이 입는 옷의 색깔부터 정말이지 무엇 하나 혐오스럽지 않은 것이 없는 세계관이었는데, 이 모든 걸 어느 정도 완결성 있는 이야기로 집필한 원작자 마가렛 애트우드의 비위가 참 대단하게 느껴졌다. 

 당초에는 원작 소설의 후속작 <증언들>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이 작품을 다 읽으니 그 작품도 읽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도대체 무슨 연유로 이런 극단적인 디스토피아 국가가 건설됐고 어떻게 멸망했고 대관절 제목이 왜 '증언들'인지도 확인해야 직성이 풀릴 듯하다. 이야기 본편이 너무 느닷없이 결말이 나고 세계관 소개만 하다가 끝난 감이 있어서 적잖이 감질 났기 때문이다. 대충 짐작하기론 출산율 저하를 여성의 탓으로만 돌리고, 젊은 남자는 전쟁터로 보내고, 출산이 가능한 여성은 딱 봐도 생식 능력이 떨어져 보이는 소수의 늙은 남자들이 데리고 있으니 그 나라에 미래가 없음은 너무나 자명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짐작만 하기 보단 직접 생존자들의 '증언'을 통해 이 길리어드라는 막장 나라가 어떻게 붕괴됐는지 그 전말을 듣고 싶다. 


 이 작품의 세계관에서 가장 역겨웠던 부분은 여성을 철저하게 착취하는 시스템 자체보다 이 시스템이야말로 여성이 여성의 본분(=출산)에 충실할 수 있고 또 여성을 성 노리개로 삼는 이전 시대(=미국)의 가치관을 가진 남성들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는 길리어드 정권의 주장(=개소리)이었다. 주인공을 비롯한 절대다수의 여성들은 사형당하지 않기 위해 마지못해 순종할 뿐이고, 아마 절대다수의 남성들 역시 사형당하고 싶지 않아서 성욕을 억누를 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이 체제에 순종한다. 오직 힘 있는 기득권 남성만이 이전 시대의 색채가 묻어 있는 비밀 사교 클럽을 운영해 자신들만의 하렘을 만들었는데 이조차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폐쇄적인 체제에 비하면 하렘의 분위기는 활기차고 남성들도 대놓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니 그나마 덜 기만적이다는 점을 제외하면 결국 여성들의 비참함을 부각시킨다는 점에선 기존 길리어드 정권과 큰 차이가 없으니까 말이다. 

 원작 소설이 굉장히 유명하긴 하지만 사실 정확히 무슨 내용의 소설인지 몰랐었다. 소재만 들었을 땐 섹슈얼한 묘사가 없을 수가 없는 유사 성애 소설(=야설)로 생각했지만 실상은 정반대였다. 혹여나 이 작품에 어떤 식으로든 섹슈얼한 묘사가 있으리라 기대하고 읽을 생각이라면 당장 책장을 덮길 권한다. 이 책의 독자들 대부분이 여성이기 때문인지 서평을 읽어보면 감상평이 대동소이하던데 - 아마 이 부분이 <시녀 이야기>란 작품의 가장 큰 약점일 것이다. 누가 읽어도 비슷한 감상이 나온다는 것. - 남자 독자인 나는 그 감상에 공감을 하면서도 꼭 이 말을 첨언하고 싶어 목이 근질근질했다. 이런 세계는 여성은 물론이고 남성도 원하지 않는 세계라고. 한 명의 남성으로서 말하건대, 인간의 성욕을 죄악시하고 인간의 역할은 출산이 전부라고 규정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적 세계관에 좋다고 할 남성은 극히 적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다 이런 정권이 들어섰는지 궁금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무력 쿠데타가 있었다지만 그 전에 적잖은 사람들이 동의를 하고 지지해줘야 출범할 수 있는 게 정권이니까. 


 작품의 세계관도 세계관이지만 그래픽 노블의 특성상 원작의 내용을 충실하게 그려냈을 것으로 추정되는 르네 놀트 작가의 화풍 및 연출력도 인상적이었다. 성별과 계급의 차이에 따른 다양한 복장들의 색깔을 선명하게 그린 것도 인상적이었고 특히 길리어드 출범 이전의 세계는 따스하고 몽환적으로, 현재의 세계관을 아주 차갑게, 먼 미래로 추정되는 결말에서는 다시 따스하게 그린 것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원작 소설을 완독하지 못해서 비교는 못하겠지만 전반적으로 가독성이 떨어지는 주인공의 독백과 세계관 묘사를 대부분 자세하게 살리되 작가가 그림을 적절하게 넣어 읽으면서 집중력이 환기됐다. 그래픽 노블도 분량에 비해 은근히 가독성이 떨어졌지만 그 말은 곧 원작을 충실하게 재현했다는 반증이지 않을까 싶다. 덕분에 내용 이해에 원작을 읽은 독자들과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아 그래픽 노블로 도전한 보람을 느꼈다. 

 아까도 말했지만 후속작 <증언들>은 꼭 읽어볼 것이고,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나 원작 소설은 아마 보지 않을 것 같다. 드라마도 스트레스 엄청 받을 것 같고 소설은... 좀 더 내공을 쌓은 다음에 도전해도 늦지 않을 것 같다. 뭐, 고전은 어디 도망가지 않으니까. 설마 길리어드와 유사한 정권이 들어서서 분서라도 당하지 않는 이상 이 작품은 언제든 그 자리를 지키며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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