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ㅣ 믿음의 글들 9
엔도 슈사쿠 지음, 공문혜 옮김 / 홍성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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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영화로 한 번, 책으로만 두 번째 접하는 <침묵>이 이제 지겨울 법도 하지만, 워낙에 단순하면서도 울림이 큰 내용인 터라 쉽게 질리지 않는 것 같다. 여전히 주인공의 번민과 후반부에서의 마음가짐은 완전히 와 닿지 않지만... 아니 어쩌면 와 닿지 않기에 반복적으로 읽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배교를 했음에도 자신은 아직 진정으로 신을 배신하지 않았으며 자신만의 사랑을 실천한다는 결론은 속된 말로 '정신 승리'로 보일 수도 있으나, 절망에서 시작해 더 절망으로 끝나는 이 이야기를 끝없는 패배의 서사로 기억되지 않게끔 작가가 노력을 한 것 같아서... 내가 종교인이 아니라서 그런지 이런 작가의 모습이 참 끈질기구나 싶다가도 존경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종교인이기에 쓸 수 있는 한편으로 종교인이기에 쓰기 힘들었을 이 소설이 사람들에게 걸작으로 불리는 데엔 바로 이와 같은 논란의 결말 덕분이지 않을까 싶다.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전과 인상이 달라진 부분이 크게 두 가지 있었는데, 로드리고에게 전에 없이 인간적으로 느껴진 것과 그에게 배교를 이끌어내기 위해 갖은 수를 쓰는 일본인들이 유난히 가증스러웠던 것이다. 전에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지금도 여전히 종교인이 아니고 앞으로도 될 예정이 없기에 배교하는 심정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추측하지 모르겠지만, 종교를 말 그대로 종교가 아닌 단순히 '믿음'이라는 단어에 주목하니까 비로소 그 절망감이 얼마나 깊은지 한결 수월하게 이해됐다. 간단히 말해 나의 가치관을 부정하지 않으면 어마어마한 불이익을 안겨주겠다 으름장을 놓는 외부의 압박이 가해졌을 때 나라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겉으로 수긍한 척하겠는가 아니면 끝까지 버티겠는가. 전자의 자세야말로 현명할 테지만 사람은 비겁한 존재인 동시에 반발심 역시 지대한 터라 후자의 미련한 방식을 고집하기 마련이다. 설령 자신의 가치관이 객관적으로도 잘못됐다는 걸 스스로 인식하고 난 다음에도 그놈의 반발심 때문에 자기 입으로 '잘못했다'는 말을 내뱉는 걸 스스로 허락하지 못하는 듯하다. 실제로 그런 사람을 많이 봐왔고 나도 그랬기에 작중에서 로드리고가 배교를 미루는 모습이 특별히 독하게 여겨지지 않았고 오히려 지극히 정상적인데 싶어 그가 전에 없이 인간적으로 다가왔다. 


 스승이 극동의 땅 일본에서 배교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또 선교라는 찬란한 목표를 위해 로드리고는 일본으로 출항했다. 그는 일본에 도착한 직후까지도 자신에게 순교가 아닌 오직 스승처럼 배교하는 미래만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일본 막부는 기독교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박해할 수 있는지 노하우가 쌓인 터라 신부를 죽이는 것이 아닌 배교하는 전략을 취했는데 그러한 전략은 로드리고를 내부에서부터 뒤흔든다. 그리고 별다른 반전 없이 막부는 로드리고를 그의 스승과 마찬가지로 배교의 길을 걷게 만드는 데 성공한다. 

 로드리고는 이미 일본에 온 직후부터 자신이 믿는 기독교와 일본인들의 기독교가 다르다는 것, 어쩌면 신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차가운 현실을 외면해왔다. 지금 자신이 순교를 고집하는 것은 똥고집에 불과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음에도 로드리고는 버티고 버티고 또 버틴다. 자신이 배교하게 되면 정말로 자신의 노력과 신도들의 희생이 개죽음으로 전락해버리니까. 하지만, 자신이 배교하지 않으면 이미 배교를 한 일본인들마저 죽이겠다는 막부의 엄포와 스승 페레이라의 회유에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이미 그 전에 일본인들로부터 '너 같은 놈은 신부로 불릴 자격이 없다'는 말을 들었던 터라 로드리고는 자포자기했던 것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일본인을 상대로 신부란 직함은 완전히 무의미하다는 걸 뼛속 깊이 깨달은 것인지도 모른다. 


 위의 감상은 단순히 로드리고를 변호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만큼 당시 일본의 종교 박해가 너무나 가증스러운 탓에 나온 감상이다. 온갖 상식을 벗어난 방식으로 기독교 신자들을 박해하고 신부에겐 배교 혹은 신자들의 죽음이라는 양자택일의 시련을 - 말이 시련이지 살아있는 지옥 - 선사하고 있으면서 자신들이 원치 않는 선택을 하는 신부에게 신부로 불릴 자격이 없다고 욕한다는 건 그야말로 어불성설이지 않은가? 그러는 본인들은 인간으로 불릴 자격이 없다는 건 자각해본 적은 있는지? 이교도를 박해하는 것이 상식인 야만적인 시대니까 그러려니 하는 거지, 지금처럼 여러 종교가 혼재해도 특별히 문제다운 문제가 생기지 않는 걸 아는 현대의 사람으로서 기독교 박해에 이렇게 열심인 일본의 모습은 적어도 배교에 망설이는 로드리고보다 이해 불가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 딴에는 신부의 배교라는 최소한의 희생으로 기독교 박해라는 임무를 달성하려는 것인데 로드리고가 당최 비협조적이니 그들로선 그게 그렇게 못마땅했나 보다. 

 물론 신부에게 배교를 강요할 때 동원한 논리가 마냥 터무니없진 않았다. 결국 이런 극동의 땅에 선교를 하려는 것은 기독교도의 욕심에 불과한데 한낱 욕심에 눈이 멀어 죄없는 일본의 신자들에게 순교를 강요하느냐고 아픈 지점을 찌른다. 로드리고의 양심과 함께 오늘날에도 비판 받는 기독교의 약점을 거론한 것인데, 미지의 땅에서까지 선교를 하려는 것이나 순교야말로 사랑이며 목숨이 위협을 당하는 상황에서의 배교도 배교라고 일축하는 기독교의 논리엔 고압적인 구석이 있어 내심 이들의 비판이 통쾌했다. 나는 종교가 없음에도 종교를 자기 수양의 일환으로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 천국에 가기 위해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갈 만큼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믿는 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 선교나 순교나 배교에 대한 기독교의 개념은 너무 권위주의와 선민사상에 찌든 감이 있다고 보는 터라 퍽 공감이 갔다. 그런데 이는 정말로 종교인이 아니니까 할 수 있는 망측한 발언에 불과한 것일까? 


 <침묵>이 종교소설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열광한 이유는 기독교의 약점이나 모순을 작가가 종교인의 입장에서 열거한다는 것에 있다. 신자들의 개죽음을 순교로 미화시키는 것, 신의 가르침을 퍼뜨리기 위해 다른 나라 땅을 헤집는다는 것, 어떤 순간에도 배교는 배교일 뿐이라며 종교라는 절대적 권위의 실추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관점만 바꾸면 쉽게 인식할 수 있는 모순일 터다. 이런 모순을 엔도 슈사쿠는 종교인으로서 외면하지 않고 정말 이대로 둬도 될 만큼 아무 문제도 없는 것인가 질문하는 게 종교인이 아닌 독자의 눈에도 경이롭게 비쳐졌다. 여러 면에서 대단한 소설이지만 독자들에게 질문과 대화를 이끌어낸다는 점만으로 걸작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라 생각됐다. 

 결말에서 로드리고가 배교를 했음에도, 새로운 사랑 운운하며 일본인들이 정신 승리하지 말라고 비웃는 장면이 절망적이기 이를 데 없으나 비참하게 읽히지 않았다. 기존의 딱딱한 기독교의 교리만으론 이 세상의 복잡한 이치를 다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음을 너무나 잘 풀어낸 작품의 내용의 덕이 크다고 본다. 한마디로 기독교가 얼마나 믿음직한 종교고 반대로 기독교의 교리가 얼마나 모순됐는가 유무와는 가장 무관한 결말인 것 같다는 게 지금의 나로서 내릴 수 있는 제일 진심 어린 감상이다. 아니, 다른 걸 떠나서 종교인이 아님에도 계속 이 소설을 찾아 읽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이 소설이 진정 걸작이란 증거는 아닌지... 요번에 책을 읽는 내내 한 생각이다. 

하지만 당신이라면 이렇게 말하겠지요. 그들의 죽음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고. 그들의 죽음은 결국 교회의 기초가 되는 돌이 된 거라고. 그리고 주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그런 시련은 결코 주시지 않는다고.

(중략) 저도 물론 그런 것은 백 번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데도 왜 이런 비애의 감정이 가슴 밑바닥에 남는 것일까요? 어째서 기둥에 묶인 모키치가 숨이 끊어질 듯이 불렀다는 노래가 이렇게 고통스러움으로 머리에 되살아오는 것일까요? - 94p



가령 아내에게 배신당한 남편을 상상하면 알 수 있지. 그는 아직 아내를 계속 사랑하고 있어. 그러나 아내가 자신을 배반한 것 자체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야. 아내를 사랑하면서도 그 배신행위에 혐오를 느끼는 남편의 기분, 그것이 그리스도가 유다에게 가진 마음이었을 거야. - 118p



죄란, 인간이 또 한 인간의 인생을 통과하면서 자신이 거기에 남긴 흔적을 망각하는 데 있었다. - 136p



그렇지만 제게도 할 말이 있어요. 성화를 밟은 자에게도 밟은 자로서의 할 말이 있어요. 성화를 제가 즐거워서 밟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밟은 이 발은 아픕니다, 아파요. 나를 약한 자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이 강한 자 흉내를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건 무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건 억지이고말고요. - 177p



인간들을 위해 유익하게 소용된다는 것은 성직자들의 단 한 가지 염원이며 꿈이다. 신부들의 고독이란 자신이 타인을 위해 무익할 때다. - 224p



강한 자도 약한 자도 없는 거요. 강한 자보다 약한 자가 고통스럽지 않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소. - 29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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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수저 Silver Spoon 15 - 완결
아라카와 히로무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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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제목에 '은'이 들어가서 작가의 데뷔작인 <강철의 연금술사>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 여긴 사람이라면, 이 작품이 농업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성장물이란 것에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데뷔작에서 보인 아라카와 히로무의 스토리텔링과 또 그 작가가 농고를 졸업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면 이 작품 역시 <강철~> 못지않은 역작이리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배틀물이 인기를 끄는 국내 만화 독자들의 성향상, 또 '그래봤자 전문고'란 인식이 강한 우리나라의 통념 때문인지 대단히 인기를 끌지 못했지만, 나는 <은수저>가 호불호는 갈릴지언정 <강철의 연금술사>와 함께 아라카와 히로무의 대표작이라 꼽을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후반부의 연재가 급격히 느려진 탓에 관심이 시들해져 이 작품이 완결이 났는지도 모른 채 지냈었다. 작가가 태만했기 때문이 아니라 가족들이 병을 심각하게 앓아서 도저히 연재에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는데, 전작 때는 출산을 하고서도 연재를 했을 정도의 프로 의식을 가진 작가이니 가족들의 병세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다행히 가족분들의 병세가 호전됐다고 하고 작품도 다소 급작스러긴 해도 괜찮게 매듭이 지어져 긴 시간, 거의 10년 가까이 읽은 보람과 감동을 만끽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 작품은 크게 농고에서 농업의 즐거움과 현실적인 어려움을 알아가는 평범한 중학생 하치켄의 컬쳐 쇼크와 입시에 좌절해 자존감을 잃은 하치켄이 농고에서의 경험을 통해 성장하는 이야기, 이렇게 두 갈래로 나눠서 볼 수 있다. 전자에선 어딘지 하찮은 일로도 인식되는 농업의 숭고함과 농업 종사자들에 대한 경외감, 아울러 '경제동물'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인간에게 철저히 착취당하는 가축들에 대한 겸허함을 배울 수 있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육식 욕구를 해결할 수 있는 것엔 모두 농업 종사자분들의 노고 덕분임을 나는 은연중에 간과하며 살아온 것 같다. 이건 정말이지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근 <인간의 얼굴은 먹기 힘들다>라는 소설을 통해 육식이 매우 잔인한 행위임을 실감할 수 있었는데 <은수저>에선 인간의 육식 욕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잔인한 '시스템'을 갖추게 만들었으며 그 시스템은 단순히 '동물들이 불쌍해서 채식주의자가 되겠다'는 마음가짐으로는 타파할 수 없음을 진지하게 살펴본다. 육식을 향한 인간의 욕구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서 가축을 마구잡이로 착취해도 문제가 없는지, 과연 가축들이나 파는 사람이나 먹는 사람 모두에게 괜찮은 대안이 있긴 한 것인지... 그 답을 이 작품이라고 시원하게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인상적인 점이 있다면, 어차피 가축을 잡아먹을 거면서 감정 이입하고 의미 부여하는 것은 무의미할 수 있음을 전제로 깔되 끈질기게 고민을 멈추지 않는 주인공 하치켄의 모습이었다. 학교에서 유일하게 비농가 출신인 하치켄이기에 자신이 기른 가축을 잡아먹는 비정한 시스템에 이토록 진지하게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일 터다. 


 하치켄은 지나치게 엄격한 가정의 분위기 속에서 -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하치켄의 아버지가 후반부부터 알게 모르게 미화된 것 같아 읽으면서 기분이 언짢았다. 좋은 어른이란 건 부정하지 않겠다만 결코 좋은 부모는 아니니까. 하치켄이 더 유약했으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 자존감을 상실할 대로 상실한 채 농고에 입학했다. 자신은 입시에 실패해 도망쳤다며 자포자기한 하치켄은 그 이질적인 출신 때문에 농고의 분위기, 농가 자녀들과 전혀 다른 가치관을 선보인다. 그 가치관은 농고에 낯선 일반 독자들의 입장을 대변해주는데, 겨우 고등학생 주제에 인생 끝났다는 듯 무기력한 하치켄은 처음엔 농고에서 적응하지 못했지만 차츰 그간의 일상에서 겪지 못한 자극 덕분에 생각 이상으로 본래의 성격, 자신감 등을 되찾는다. 누군가 하치켄에게 한 말처럼 하치켄은 '가축과 달리 살기 위한 도망을 친' 보람을 얻은 것이었다. 

 하치켄의 농고 입학이 그의 인생에 아주 긍정적인 전환점이 됐음을 강조하는 그 말은 비록 가축에겐 큰 실례일 순 있으나 그 말 그대로 가축과 함께 하는 고등학교 생활을 보내고 있는 하치켄에게 있어서는 최고로 실감할 수 있는 격려였을 것이다. 우리들 인간에게 도망이란 무조건 나쁜 것이라 여기지만 결코 그렇지 않거니와 오히려 도망을 쳤기에 배울 수 있는 것도 있다. 단적으로 말해 하치켄이 농고에 입학하지 않았다면 그의 인생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테니까. 필요로 해서 대학을 가는 것이 아닌 그냥 가야 하니까 기계처럼 공부했을 테고 그랬으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멘탈 붕괴에 직면하게 됐겠지. 


 농업 이야기나 하치켄의 성장담 말고도 개성적인 친구들과의 케미, 지속적이고도 군침 나는 먹방, 승마부 에피소드에서 펼쳐지는 학원 스포츠물의 쾌감, 홋카이도라는 매력적인 배경, 그리고 미카게와의 연애 이야기가 가슴 설레게 읽혔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제목인 '은수저'의 의미를 중점적으로 얘기하고 싶다. 은수저의 의미는 간단히 말해 자기 자식을 굶기지 않게 하기 위한 마음에서 주는 부모의 선물이라는데, 그걸 선물하기 위한 부모의 마음이나 그 부모의 마음을 받드는 은장인의 솜씨가 결실을 맺은 결과물이라는 은수저엔 단순한 장식물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을 터다. 과거에서부터 나를 위해 이어져 온 마음을 소중히 여기며 써나가는 이미지가 은수저라는 물건에 녹아들었는데, 성장물이 자칫 주제의식이 추상적이거나 식상하게 강조된다는 걸 생각하면 이 작품은 상대적으로 이야기의 내용이 구체적이면서 여운 있게 다가와서 마음에 들었다. 

 <강철~> 때도 느꼈지만 아라카와 히로무는 정말 만화를 그릴 줄 아는 작가다. 완벽한 동선과 완급을 자랑하는 전개나 개성 만점 캐릭터들, 농업 학교라는 전문성을 제대로 살린 - 농업의 음과 양을 함께 조명한 것은 특히 좋았다. - 것이나 요번에 새로 도전했을 스포츠물, 러브 코미디도 능숙하게 소화해 감격하고 또 감격하며 읽었다. 전작과의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 악인이 없다는 것인데, 유일하게 비판할 여지가 있다고 할 수 있을 하치켄의 아버지도 그 나름대로 본받을 만한 부성애가 있음이 비쳐져서 - 그놈의 엄격함만 내려놓았더라면 참 좋았겠지만. - 전반적으로 현실적이되 따뜻함이 넘쳐났다. 여러모로 힐링물의 성격을 띄는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힐링물의 약점인 감정 과잉 같은 무리수가 없어서 그야말로 완벽한 작품이 아닐 수 없었다. 세상에, 얘기하면 얘기할수록 이 작가를 계속 찬양하게 되는 것 같다. 

어떤 일이든, 그걸 이루든 못 이루든... 꿈을 갖는다는 건 동시에 현실과 싸울 것을 각오하는 거라고 생각한단다. - 1권 6화 봄 이야기 6



도망칠 곳이 없는 경제동물들과 자네들은 다르니까, 살기 위한 도망은 있을 수 있지. - 4권 34화 가을 이야기 3



꿈이 있는 사람에게나 없는 사람에게나 평등하게. 은수저의 마음은 여러분을 위해 있습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그것을 마음껏 사용하세요. 다만, 은은 닦지 않으면 금세 변색한답니다! - 11권 96화 겨울 이야기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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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우니까 괜찮아 ㅣ 이타카
김이환 지음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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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서울에서 귀여운 걸 다섯 가지를 찾아오라고 천사에게 명령하는 조물주, 만약 다섯 가지가 없으면 어떡하느냐는 천사의 질문에 조물주는 그럼 서울은 가치가 없는 곳이라고 딱 잘라 말한다. 설마 서울도 없애버리는 걸까 반신반의하는 천사는 어찌 됐든 간에 명령을 수행하러 떠난다. 때는 2010년대의 서울로 귀여움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던 서울이었다. 물론 지금 서울이라고 그때보다 귀여운 것이 많다는 건 아니지만... 

 어딘지 나사 빠진 제목과 설정을 내세운 것과 달리 그 당시 정권에 대한 비판의식이 그득한 작품임에도 여러모로 판타지한 색채 덕에 무겁게 읽히지 않는다. 대놓고 작위적이면서 일도 수월하게 풀리는 작가와 만화가 콤비라든가 코미디 전문 방송국이라든가 조류가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을 꿈꾸는 비둘기라든가 슈퍼맨 활동을 비밀리에 하고 있는 슈퍼맨 협회라든가 엄연히 무생물임에도 의지를 갖고 지구 절반 가까이를 헤엄쳤던 오리 인형 등 환상적이고 귀여운 존재들이 끊임없이 등장해 일단 지루하지 않았다. 썰렁한 개그나 언뜻 의미가 와 닿지 않는 난잡한 전개나 은유가 발목을 붙잡았지만 전반적으로 가독성과 결말이 좋은 작품이었다. 가독성은 워낙에 장면 전환을 많이 해서 무난하게 확보했고 결말의 경우엔 뻔하지만 연출이 좋아 마음이 갔다. 


 이 작품을 다시 읽으니 오리 인형 에피소드가 특히 마음에 들었는데, 마치 동화처럼 몇 년 간 바다를 떠돌아다닌 오리 인형의 여정이 실로 파란만장해 작품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대관절 이 오리 인형의 에피소드가 이야기 속에서 무슨 역할을 하는지도 모르겠으나 홍콩으로 가던 배가 침몰해 다 같이 바다를 조류하게 된 오리 인형들이 바다가 이끄는 대로 흘러가다 다시 영국에 도착했더라는 얘기는 신비롭고 감동적이고 귀여웠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오리 인형 이야기는 실화라던데, 정확히 무슨 연유인지 드러나지 않지만 작가는 이 오리 인형에게 서울이 조물주로부터 목숨을 부지하게 되는 결정적 역할을 부여했다. 

 작가의 의도를 미뤄 짐작해봤을 때 한낱 귀여운 오리 인형에도 불구하고 바다에 가라앉지 않고 고향(?)을 찾아간 불굴의 의지와 놀라운 운명이 신을 감탄케 했다는 맥락에서 그러한 결말을 택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난 오리 인형을 귀여워 하는 작가의 시선이야말로 귀엽게 느껴졌는데, 어쩌면 조물주도 서울에 다시 기회를 준 이유가 이와 비슷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까놓고 말해 오리 인형이 무슨 일을 겪었든 그건 그냥 오리 인형이 파란만장하게 바다를 떠돈 일에 불과한데, 그 일화에 의미를 부여하고 상상을 불어넣는 인간의 모습은 모든 것을 알고 세상을 관장하는 조물주의 입장에서 퍽 귀여워 보였을 것도 같다. 


 최근에 읽은 <사신 치바>라는 소설에서 사신인 치바는 인간은 모든 일에 자기 인생을 대입하며 저 혼자 깨달음을 얻고 침울해 한다는 식의 문장이 나왔었는데, 객관적으로 자신과 무관한 일이더라도 그 안에 의미를 찾아보려 하고 이야기하려 한다는 건 인간 외의 존재가 봤을 때 정말 이상하고 독특한 인간만의 특성인 듯했다. 물론 그렇게 부여하거나 발견해낸 의미, 깨달음은 즉흥적이었던 만큼 금방 잊혀지지만 우리가 그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조금씩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마음을 되새긴다는 게 한편으론 몹시 바람직한 일이지 않은가 싶었다. 

 그런 인간의 특성은 조물주로 하여금 그래도 기특하고 발전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는지 기회를 준 것인지 모른다. 설마 작가가 이런 마인드로 결말을 짜진 않았겠으나, '귀여운 것이 세상을 구한다!'는 책의 소개 문구를 직역해보면 세상만사에 의미를 발견해내는 인간의 모습이 세상을 구할 수 있지 않은가 싶어 자꾸만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된다. 그나저나, 작가 입장에선 자신이 쓴 글에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독자가 귀여워 보이려나? 마치 조물주가 인간을 바라볼 때처럼? 

모두가 놀리고 싶어하는 사람을 놀리는 건 코미디가 아니야. 그건 풍자가 아니라 아첨이라고 나는 생각하네. 그런 코미디에는 고통이 있을 뿐이지. - 19p



나라를 망치는 건 사람들이죠. 나라는 사람들이 모인 것이지 예언이 모인 것이 아니니까요. - 147p



사람은 조물주와 달라서 모든 일을 다 알진 못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알지 못할 일이 일어나더라도 기뻐하고 행복해할 줄은 알았다. - 29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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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톡 어때? ㅣ 무화과 여행 만화 1
무화과 지음 / 일구구일(1991)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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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제목에 있는 블라디보스톡과 더불어 우수리스크, 하바롭스크까지 섭렵한 여행 만화. 하지만 여행 만화라고 해서 정보가 아주 꼼꼼하거나 체계적인 것은 아니다. 출판사에서 분량에 제약을 걸었던 것일까? 여행 일정이 무려 13일에 달하는 것치곤 실제로 화폭에 옮긴 내용은 극히 일부고 그마저도 소소한 감상 위주라 실질적으로 여행에 대비하기 위한 책으로는 미흡한 것 같다. 물론 그럼에도 유용한 정보가 전무했던 것은 아니다. 

 참고로 나는 5년 전에 블라디보스톡을 가봤는데, 당시엔 이런 만화가 출간되리라 생각도 못할 정도로 매우 미지의 여행지였기에 여행을 다녀온 지 시간이 지났음에도 이런 책이 퍽 반가웠다. 언제가 될는지 몰라도 블라디보스톡을 다시 가긴 갈 텐데 이 책에 소개된 여행지나 동선을, 그리고 어떤 기념품을 사면 좋은지 적잖이 참고해볼 생각이다. 이 작가처럼 시베리아 횡단 열차도 타보고 카페도 가보고... 지난 번에 못한 걸 유감 없이 해봐야지. 


 당장 여행 내용보다도 오히려 난 한국으로 돌아갈 때 작가가 느낀 심정이 더욱 인상적으로 읽혔다. 반쯤 충동적으로 퇴사하고 친구랑 간 블라디보스톡 여행, 2주 간의 여정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은 참으로 무겁기 그지없을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며 앞으로 이처럼 긴 여행을 떠날 날이 올 것인지에 대한 우울함을 나 역시 적잖이 겪었다. 이 만화의 좋은 점은 이러한 감정을 너무 청승맞게 그리는 게 아니라 적절한 횟수에 적절한 깊이로 들여다보며 여운 있게 여행기를 마무리한다는 점이었다. 여행의 순간 순간에 지나친 의미 부여를 시도 않는 것도 좋았고 정말 여행기처럼 특별한 경험에 일희일비하는 모습을 담백하게 그려내 자연스레 몰입됐다. 이와 같은 호들갑 떨지 않는 여행관이 내 평소 여행관과 닮은 데가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여행이 끝날 무렵이면 무릇 감상에 젖어 인생에 관해 대단한 결심을 하기 마련인데 실제로 지난 날을 돌이켜 보니 그 결심이 온전히 지켜진 적이 없는 것 같다. 지켜져도 작심삼일에 그쳤거나. 그럴 때마다 난 다음 여행을 계획하고 떠날 자격이 있는 것인가 자책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꼬박꼬박 잘 다녀온다. 한때는 이조차도 자괴감이 들 때도 있었는데...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만큼 여행을 다녀오지 않았으면 일상의 스트레스나 복잡한 마음을 어떻게 정리했을까 싶어 역시 될 수 있는 한 다녀왔던 게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특히 지금 같은 시국엔 더더욱. 


 국내 여행마저 눈치가 보이는 지금 시국에 이런 여행 만화나 과거의 여행 기억은 우리에게 예상치 못한 힐링과 더불어 현재에 대한 착잡함을 배가시킨다. 굳이 시국 때문이 아니더라도 여행의 기억이란 건 다녀온 지 시간이 지날수록, 또 현실이 팍팍할수록 오히려 독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여행을 괜히 갔다는 생각은 어지간해선 들지 않는 것 같다. 정말 어지간해선 여행은 충동적이건 뭐건 내가 좋아서 가는 것이니까. 때문에 여행을 다녀온 것으로 인생이 대단히 변하지 않고 그 여행이 딱히 인생의 전환점이 되지 못하더라도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까지 든다. 그래, 애당초 여행으로 하여금 뭔가 대단한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지나치게 부담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내용이 적어서 그렇지 화풍이나 이야길 전달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던 책이다. 작가의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은데 아직 많이 출간된 책이 많이 없더라. 작가가 어찌나 고군분투하고 있는 중일지 상상이 가 나 역시 고군분투하며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을 다잡게 됐다. 암, 마음을 다잡아야지. 

우리에겐 낯설고 신기한 여행지이지만, 이곳의 사람들에겐 익숙한 일상의 공간.

낯선 언어, 낯선 음식, 낯선 풍경, 그리고 낯선 사람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 풍경 속에서 가장 낯선 것이 우리이겠지. - Day 9



하고 싶은 일을 해도, 하기 싫은 일을 해도 인생이 이어진다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고 싶다.

행복하게 인생을 사는 법을. - Day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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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얼굴은 먹기 힘들다
시라이 도모유키 지음, 구수영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1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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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내가 추리소설을 읽은 지 십 년이 넘어가니 어느샌가 추리소설이, 특히 일본 추리소설이 줄 수 있는 재미와 충격엔 한계가 있다고 알게 모르게 단정 지었던 것 같다. 최근 몇 년 동안 '충격의 데뷔작', '완전히 새로운 소설'이란 수식어가 붙은 소설을 읽어도 큰 감흥이 없었다. 어디선가 접한 클리셰고 다만 그 클리셰를 어떻게 창의적으로 재해석했느냐, 내가 추리소설에 기댈 수 있는 부분은 딱 거기까지라고 여겼다. 

 이 충격적인 제목의 소설도 마찬가지였다. 시놉시스를 읽을 때도 설마 이 정도로 모든 면에서 현혹시키는 작품이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정말 오랜만에 뒤를 궁금해 하며 페이지를 넘겼고 작가의 트릭에 보기 좋게 넘어갔으며 그렇기에 좌절감도 들었다. 이렇게 잘 써도 호불호가 갈리면 뜨기 힘들구나. 소재나 세계관을 비롯해 누명을 쓰는 게 쌤통이라 여겨질 정도로 비호감인 주인공, 그 주인공 못지않은 여러 골때리는 캐릭터들 때문에 이 소설은 다른 사람에게 덮어놓고 권할 만한 작품은 아니다. 무엇보다 직접적인 식인 장면은 없으나 그 장면을 연상케 하고 또 클론 인간을 철저히 가축, 식재료 취급하는 묘사 때문에라도 추천하기에 망설여진다. 단적으로 말해 매우 역겨웠으니까. 


 추리소설과 SF가 결합됐을 때 두 장르의 매력이 공존하는 수작은 생각보다 드문 편이다. SF 세계관의 법칙이나 주제의식에 집중하다 보면 자연스레 추리소설 트릭의 놀라움이나 공정함은 결여되는 것 같다. 특수 설정은 이야기에 개성을 부여할 순 있어도 공정한 게임을 진행하기엔 독이 되는 그야말로 양날의 칼 같은 요소다. 이 작품도 엄밀히 말해 '작가가 스스로 설정한 세계관에 취해 설명이 불충분한 무리수를 던지는' 경우가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런데 이 얘기를 하려면 아무래도 반전을 연출한 작가의 '큰 그림'에 대한 감상을 먼저 꺼내야 할 것 같다. 

 왜 하필 이 작품의 첫 시작이 바이러스 창궐이나 플라나리아 센터에서의 충격적인 출근 내용이 아닌 매춘부와의 만남이었던 걸까? 이 첫 장면에 우타노 쇼고의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 하네>와 흡사한 내용과 더불어 흡사한 역할도 있었음을 모른 채 나는 석연찮은 기분으로 책을 읽어나갔다. 이후엔 멘탈이 불안정한 주인공의 밥맛 떨어지는 모습들 - 어찌나 밥맛 떨어지는지 누명을 썼음에도 일말의 동정심도 일지 않았다. - 주인공의 누명을 둘러싼 속도감 있고 논리적으로 오가는 인물들의 추리에 몰입해가며 첫 장면과 더불어 사소한 의문이 들었던 모든 장면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게 됐다. 그 모든 것이 작가의 고도의 노림수라는 걸 모른 채로... 


 난 지금도 이 작품의 후반부의 반전이나 전개가 다소 설명적이고 주입식이라고 생각하지만 일단은 그 설명들이 무리수이되 말이 된다는 점과 그 반전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게끔 유도한 치밀하고도 교묘한 복선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히 그전까지는 밥맛 떨어지는 주인공이 SF 세계 속에서 겪는 밥맛 떨어지는 이야기로만 읽혔는데 반전을 기점으로 작품에 대한 인상이나 만족도가 완전히 달라진 것 역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간혹 소재의 독특함이나 주제의식의 깊이에 열중하다 보면 추리소설 특유의 장르적 재미가 떨어지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인간의 얼굴은 먹기 힘들다>는 장르적 재미마저 철저하게 디자인돼 그것만으로도 경탄스러웠던 작품이다. 


 <인간의 얼굴은 먹기 힘들다>는 어떻게 보면 인간의 육식 행위의 이중성을 잘 꼬집는 제목이라 할 수 있다. 바이러스로 대다수의 동물이 멸종됐음에도 배 터지게 육식을 하고 싶은 인간은 자신의 클론을 만들어 육식 욕구를 대신하는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얼굴은 먹고 싶지 않기에 자신의 클론 고기가 배달될 땐 얼굴은 잘려져서 배달된다. 이 작품의 경우 클론은 배달한 당사자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 테니 얼굴을 자르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는 소나 돼지고기를 먹을 때도 마찬가지로 얼굴은 먹지 않는다. 얼굴을 먹기 힘든 이유는 머리를 마주한 것만으로도 육식이 매우 잔인한 일임을 실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너무 잔인한 나머지 육식 행위 자체가 삽시간에 혐오스러워질 수도 있는데 이 작품에선 실수로 몸과 함께 배달된 얼굴이란 설정만으로 그 혐오스러움을 너무나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인간의 얼굴은 먹기 힘들다>는 육식에 대한 욕구보단 클론을 만들어서 먹어야 할 만큼 탐욕스러운 주제에 그 탐욕의 혐오스러움을 외면하려는 것에 대해 한껏 비웃음을 날리는 작품이었다. 


 자신의 클론을 만든 인간이 자기 입맛대로 착취한다는 설정을 듣고 마이클 베이의 영화 <아일랜드>가 떠올랐는데 이 소설은 그 영화의 설정보다 훨씬 적나라하고 구역질이 난다. <아일랜드>에선 적어도 클론들의 장기를 취하되 그전까지는 인간다운 삶을 살도록 나름대로 고도의 거짓말을 꾸며냈는데 이 작품의 인간들은 순수하게 클론 인간의 고기를 탐하는 만큼 성장 촉진제를 먹여 살을 뒤룩뒤룩 찌우고 가축처럼 우리에 가둬서 키운다. 언어도 지능도 없이 살만 찐 비만 인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어찌나 소름이 돋던지... 형언하기 힘들다. 게다가 고객에게 보낼 고기에 머리만 자르는 업무를 하는 주인공의 모습이나 일그러진 심리, 그리고 주인공이 갖고 있는 비밀의 내용도 엄청나게 충격적이라 대체 작가가 작품을 어떻게 끝낼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포일러를 최대한 배제하고 말하자면 난 이 작품의 엔딩이 해피엔딩과 배드엔딩에 동시에 속한다고 본다. 클론 인간을 배양한 장본인이나 클론 인간을 관리하고 배송하는 플라나리아 센터의 직원 모두 '천벌'을 받는다. 이 작품에서의 클론 인간의 대우나 클론 인간을 홀대한 인간들의 최후를 보면 이런 말이 떠오른다. 자업자득. 클론 인간을 배양할 수 있는 기술을 가졌으나 그 기술이 가져올 재앙을 지나치게 간과한 인간의 미래는 정말 암담하기 그지없다. 이 작품에 후속작이 나올는지 모르겠지만 결말이 인간에게 절망적이면서 클론에게 희망적이라 해피엔딩과 배드엔딩에 동시에 속한다고 생각됐다. 작중의 인간들이 클론한테 하는 짓을 보고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 생각에 해피엔딩이, 그래도 인간의 입장에 이입하면 배드엔딩이니까... 


 호불호도 많이 갈리고 무리수도 있었지만 탁월한 장르적 재미와 치밀한 설정 및 세계관, 또 그에 걸맞는 윤리적 주제의식까지. 아주 간만에 접한 모든 면에서 현혹되는 작품이었다. 그런데 이 작품이 요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 대상 최종 후보작에 그치다니... 아리스가와 아리스와 미치오 슈스케의 지지 덕분에 이 작품이 세상의 빛을 봤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정말 아까운 일이 벌어질 뻔했다. 한편으론 그만큼 소설로 뜨기가 힘들구나 싶어 소설가 지망생인 나는 여러모로 생각이 복잡해졌다. 정말... 여러모로 자극이 됐다. 

 만약에 이 작품이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의 작품이었다면 나는 낙담을 감추지 못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호불호가 갈리는 작품이라 이후에 작가의 다른 작품이 출간되리란 보장이 없기 때문인데 다행인 건 이미 작가의 <그리고 아무도 죽지 않았다>가 출간됐다기에 앞으로도 작가의 다른 작품도 출간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뚜껑을 열어봐야 알 테지만 이 정도 데뷔작을 쓸 수 있는 작가라면 다른 작품도 호불호는 갈릴지언정 그에 준하는 대단한 작품일 테니 그것 참 흥분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작가가 있었다니, 세상이 정말 넓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인간에게는 타인과 자신의 관계를 명백하게 정의하고 싶어 하는 본능 같은 게 있죠. 상대가 자신보다 열등한가 뛰어난가. 열등한 것처럼 보이면 상대가 자신보다 열등한가 뛰어난가. 열등한 것처럼 보이면 상대를 깔보고 공격하죠. 뛰어나다면 아양을 떨고요. 하지만 그런 마음의 작용을 멈추고 숨을 쉬는 인간을 물건으로 대하는 능력은 사회의 우중충한 부분에서 분명 필요하거든요. - 3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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