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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수저 Silver Spoon 15 - 완결
아라카와 히로무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20년 9월
평점 :
품절
9.9
제목에 '은'이 들어가서 작가의 데뷔작인 <강철의 연금술사>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 여긴 사람이라면, 이 작품이 농업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성장물이란 것에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데뷔작에서 보인 아라카와 히로무의 스토리텔링과 또 그 작가가 농고를 졸업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면 이 작품 역시 <강철~> 못지않은 역작이리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배틀물이 인기를 끄는 국내 만화 독자들의 성향상, 또 '그래봤자 전문고'란 인식이 강한 우리나라의 통념 때문인지 대단히 인기를 끌지 못했지만, 나는 <은수저>가 호불호는 갈릴지언정 <강철의 연금술사>와 함께 아라카와 히로무의 대표작이라 꼽을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후반부의 연재가 급격히 느려진 탓에 관심이 시들해져 이 작품이 완결이 났는지도 모른 채 지냈었다. 작가가 태만했기 때문이 아니라 가족들이 병을 심각하게 앓아서 도저히 연재에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는데, 전작 때는 출산을 하고서도 연재를 했을 정도의 프로 의식을 가진 작가이니 가족들의 병세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다행히 가족분들의 병세가 호전됐다고 하고 작품도 다소 급작스러긴 해도 괜찮게 매듭이 지어져 긴 시간, 거의 10년 가까이 읽은 보람과 감동을 만끽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 작품은 크게 농고에서 농업의 즐거움과 현실적인 어려움을 알아가는 평범한 중학생 하치켄의 컬쳐 쇼크와 입시에 좌절해 자존감을 잃은 하치켄이 농고에서의 경험을 통해 성장하는 이야기, 이렇게 두 갈래로 나눠서 볼 수 있다. 전자에선 어딘지 하찮은 일로도 인식되는 농업의 숭고함과 농업 종사자들에 대한 경외감, 아울러 '경제동물'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인간에게 철저히 착취당하는 가축들에 대한 겸허함을 배울 수 있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육식 욕구를 해결할 수 있는 것엔 모두 농업 종사자분들의 노고 덕분임을 나는 은연중에 간과하며 살아온 것 같다. 이건 정말이지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근 <인간의 얼굴은 먹기 힘들다>라는 소설을 통해 육식이 매우 잔인한 행위임을 실감할 수 있었는데 <은수저>에선 인간의 육식 욕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잔인한 '시스템'을 갖추게 만들었으며 그 시스템은 단순히 '동물들이 불쌍해서 채식주의자가 되겠다'는 마음가짐으로는 타파할 수 없음을 진지하게 살펴본다. 육식을 향한 인간의 욕구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서 가축을 마구잡이로 착취해도 문제가 없는지, 과연 가축들이나 파는 사람이나 먹는 사람 모두에게 괜찮은 대안이 있긴 한 것인지... 그 답을 이 작품이라고 시원하게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인상적인 점이 있다면, 어차피 가축을 잡아먹을 거면서 감정 이입하고 의미 부여하는 것은 무의미할 수 있음을 전제로 깔되 끈질기게 고민을 멈추지 않는 주인공 하치켄의 모습이었다. 학교에서 유일하게 비농가 출신인 하치켄이기에 자신이 기른 가축을 잡아먹는 비정한 시스템에 이토록 진지하게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일 터다.
하치켄은 지나치게 엄격한 가정의 분위기 속에서 -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하치켄의 아버지가 후반부부터 알게 모르게 미화된 것 같아 읽으면서 기분이 언짢았다. 좋은 어른이란 건 부정하지 않겠다만 결코 좋은 부모는 아니니까. 하치켄이 더 유약했으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 자존감을 상실할 대로 상실한 채 농고에 입학했다. 자신은 입시에 실패해 도망쳤다며 자포자기한 하치켄은 그 이질적인 출신 때문에 농고의 분위기, 농가 자녀들과 전혀 다른 가치관을 선보인다. 그 가치관은 농고에 낯선 일반 독자들의 입장을 대변해주는데, 겨우 고등학생 주제에 인생 끝났다는 듯 무기력한 하치켄은 처음엔 농고에서 적응하지 못했지만 차츰 그간의 일상에서 겪지 못한 자극 덕분에 생각 이상으로 본래의 성격, 자신감 등을 되찾는다. 누군가 하치켄에게 한 말처럼 하치켄은 '가축과 달리 살기 위한 도망을 친' 보람을 얻은 것이었다.
하치켄의 농고 입학이 그의 인생에 아주 긍정적인 전환점이 됐음을 강조하는 그 말은 비록 가축에겐 큰 실례일 순 있으나 그 말 그대로 가축과 함께 하는 고등학교 생활을 보내고 있는 하치켄에게 있어서는 최고로 실감할 수 있는 격려였을 것이다. 우리들 인간에게 도망이란 무조건 나쁜 것이라 여기지만 결코 그렇지 않거니와 오히려 도망을 쳤기에 배울 수 있는 것도 있다. 단적으로 말해 하치켄이 농고에 입학하지 않았다면 그의 인생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테니까. 필요로 해서 대학을 가는 것이 아닌 그냥 가야 하니까 기계처럼 공부했을 테고 그랬으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멘탈 붕괴에 직면하게 됐겠지.
농업 이야기나 하치켄의 성장담 말고도 개성적인 친구들과의 케미, 지속적이고도 군침 나는 먹방, 승마부 에피소드에서 펼쳐지는 학원 스포츠물의 쾌감, 홋카이도라는 매력적인 배경, 그리고 미카게와의 연애 이야기가 가슴 설레게 읽혔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제목인 '은수저'의 의미를 중점적으로 얘기하고 싶다. 은수저의 의미는 간단히 말해 자기 자식을 굶기지 않게 하기 위한 마음에서 주는 부모의 선물이라는데, 그걸 선물하기 위한 부모의 마음이나 그 부모의 마음을 받드는 은장인의 솜씨가 결실을 맺은 결과물이라는 은수저엔 단순한 장식물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을 터다. 과거에서부터 나를 위해 이어져 온 마음을 소중히 여기며 써나가는 이미지가 은수저라는 물건에 녹아들었는데, 성장물이 자칫 주제의식이 추상적이거나 식상하게 강조된다는 걸 생각하면 이 작품은 상대적으로 이야기의 내용이 구체적이면서 여운 있게 다가와서 마음에 들었다.
<강철~> 때도 느꼈지만 아라카와 히로무는 정말 만화를 그릴 줄 아는 작가다. 완벽한 동선과 완급을 자랑하는 전개나 개성 만점 캐릭터들, 농업 학교라는 전문성을 제대로 살린 - 농업의 음과 양을 함께 조명한 것은 특히 좋았다. - 것이나 요번에 새로 도전했을 스포츠물, 러브 코미디도 능숙하게 소화해 감격하고 또 감격하며 읽었다. 전작과의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 악인이 없다는 것인데, 유일하게 비판할 여지가 있다고 할 수 있을 하치켄의 아버지도 그 나름대로 본받을 만한 부성애가 있음이 비쳐져서 - 그놈의 엄격함만 내려놓았더라면 참 좋았겠지만. - 전반적으로 현실적이되 따뜻함이 넘쳐났다. 여러모로 힐링물의 성격을 띄는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힐링물의 약점인 감정 과잉 같은 무리수가 없어서 그야말로 완벽한 작품이 아닐 수 없었다. 세상에, 얘기하면 얘기할수록 이 작가를 계속 찬양하게 되는 것 같다.
어떤 일이든, 그걸 이루든 못 이루든... 꿈을 갖는다는 건 동시에 현실과 싸울 것을 각오하는 거라고 생각한단다. - 1권 6화 봄 이야기 6
도망칠 곳이 없는 경제동물들과 자네들은 다르니까, 살기 위한 도망은 있을 수 있지. - 4권 34화 가을 이야기 3
꿈이 있는 사람에게나 없는 사람에게나 평등하게. 은수저의 마음은 여러분을 위해 있습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그것을 마음껏 사용하세요. 다만, 은은 닦지 않으면 금세 변색한답니다! - 11권 96화 겨울 이야기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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