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얼굴은 먹기 힘들다
시라이 도모유키 지음, 구수영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1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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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내가 추리소설을 읽은 지 십 년이 넘어가니 어느샌가 추리소설이, 특히 일본 추리소설이 줄 수 있는 재미와 충격엔 한계가 있다고 알게 모르게 단정 지었던 것 같다. 최근 몇 년 동안 '충격의 데뷔작', '완전히 새로운 소설'이란 수식어가 붙은 소설을 읽어도 큰 감흥이 없었다. 어디선가 접한 클리셰고 다만 그 클리셰를 어떻게 창의적으로 재해석했느냐, 내가 추리소설에 기댈 수 있는 부분은 딱 거기까지라고 여겼다. 

 이 충격적인 제목의 소설도 마찬가지였다. 시놉시스를 읽을 때도 설마 이 정도로 모든 면에서 현혹시키는 작품이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정말 오랜만에 뒤를 궁금해 하며 페이지를 넘겼고 작가의 트릭에 보기 좋게 넘어갔으며 그렇기에 좌절감도 들었다. 이렇게 잘 써도 호불호가 갈리면 뜨기 힘들구나. 소재나 세계관을 비롯해 누명을 쓰는 게 쌤통이라 여겨질 정도로 비호감인 주인공, 그 주인공 못지않은 여러 골때리는 캐릭터들 때문에 이 소설은 다른 사람에게 덮어놓고 권할 만한 작품은 아니다. 무엇보다 직접적인 식인 장면은 없으나 그 장면을 연상케 하고 또 클론 인간을 철저히 가축, 식재료 취급하는 묘사 때문에라도 추천하기에 망설여진다. 단적으로 말해 매우 역겨웠으니까. 


 추리소설과 SF가 결합됐을 때 두 장르의 매력이 공존하는 수작은 생각보다 드문 편이다. SF 세계관의 법칙이나 주제의식에 집중하다 보면 자연스레 추리소설 트릭의 놀라움이나 공정함은 결여되는 것 같다. 특수 설정은 이야기에 개성을 부여할 순 있어도 공정한 게임을 진행하기엔 독이 되는 그야말로 양날의 칼 같은 요소다. 이 작품도 엄밀히 말해 '작가가 스스로 설정한 세계관에 취해 설명이 불충분한 무리수를 던지는' 경우가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런데 이 얘기를 하려면 아무래도 반전을 연출한 작가의 '큰 그림'에 대한 감상을 먼저 꺼내야 할 것 같다. 

 왜 하필 이 작품의 첫 시작이 바이러스 창궐이나 플라나리아 센터에서의 충격적인 출근 내용이 아닌 매춘부와의 만남이었던 걸까? 이 첫 장면에 우타노 쇼고의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 하네>와 흡사한 내용과 더불어 흡사한 역할도 있었음을 모른 채 나는 석연찮은 기분으로 책을 읽어나갔다. 이후엔 멘탈이 불안정한 주인공의 밥맛 떨어지는 모습들 - 어찌나 밥맛 떨어지는지 누명을 썼음에도 일말의 동정심도 일지 않았다. - 주인공의 누명을 둘러싼 속도감 있고 논리적으로 오가는 인물들의 추리에 몰입해가며 첫 장면과 더불어 사소한 의문이 들었던 모든 장면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게 됐다. 그 모든 것이 작가의 고도의 노림수라는 걸 모른 채로... 


 난 지금도 이 작품의 후반부의 반전이나 전개가 다소 설명적이고 주입식이라고 생각하지만 일단은 그 설명들이 무리수이되 말이 된다는 점과 그 반전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게끔 유도한 치밀하고도 교묘한 복선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히 그전까지는 밥맛 떨어지는 주인공이 SF 세계 속에서 겪는 밥맛 떨어지는 이야기로만 읽혔는데 반전을 기점으로 작품에 대한 인상이나 만족도가 완전히 달라진 것 역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간혹 소재의 독특함이나 주제의식의 깊이에 열중하다 보면 추리소설 특유의 장르적 재미가 떨어지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인간의 얼굴은 먹기 힘들다>는 장르적 재미마저 철저하게 디자인돼 그것만으로도 경탄스러웠던 작품이다. 


 <인간의 얼굴은 먹기 힘들다>는 어떻게 보면 인간의 육식 행위의 이중성을 잘 꼬집는 제목이라 할 수 있다. 바이러스로 대다수의 동물이 멸종됐음에도 배 터지게 육식을 하고 싶은 인간은 자신의 클론을 만들어 육식 욕구를 대신하는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얼굴은 먹고 싶지 않기에 자신의 클론 고기가 배달될 땐 얼굴은 잘려져서 배달된다. 이 작품의 경우 클론은 배달한 당사자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 테니 얼굴을 자르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는 소나 돼지고기를 먹을 때도 마찬가지로 얼굴은 먹지 않는다. 얼굴을 먹기 힘든 이유는 머리를 마주한 것만으로도 육식이 매우 잔인한 일임을 실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너무 잔인한 나머지 육식 행위 자체가 삽시간에 혐오스러워질 수도 있는데 이 작품에선 실수로 몸과 함께 배달된 얼굴이란 설정만으로 그 혐오스러움을 너무나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인간의 얼굴은 먹기 힘들다>는 육식에 대한 욕구보단 클론을 만들어서 먹어야 할 만큼 탐욕스러운 주제에 그 탐욕의 혐오스러움을 외면하려는 것에 대해 한껏 비웃음을 날리는 작품이었다. 


 자신의 클론을 만든 인간이 자기 입맛대로 착취한다는 설정을 듣고 마이클 베이의 영화 <아일랜드>가 떠올랐는데 이 소설은 그 영화의 설정보다 훨씬 적나라하고 구역질이 난다. <아일랜드>에선 적어도 클론들의 장기를 취하되 그전까지는 인간다운 삶을 살도록 나름대로 고도의 거짓말을 꾸며냈는데 이 작품의 인간들은 순수하게 클론 인간의 고기를 탐하는 만큼 성장 촉진제를 먹여 살을 뒤룩뒤룩 찌우고 가축처럼 우리에 가둬서 키운다. 언어도 지능도 없이 살만 찐 비만 인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어찌나 소름이 돋던지... 형언하기 힘들다. 게다가 고객에게 보낼 고기에 머리만 자르는 업무를 하는 주인공의 모습이나 일그러진 심리, 그리고 주인공이 갖고 있는 비밀의 내용도 엄청나게 충격적이라 대체 작가가 작품을 어떻게 끝낼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포일러를 최대한 배제하고 말하자면 난 이 작품의 엔딩이 해피엔딩과 배드엔딩에 동시에 속한다고 본다. 클론 인간을 배양한 장본인이나 클론 인간을 관리하고 배송하는 플라나리아 센터의 직원 모두 '천벌'을 받는다. 이 작품에서의 클론 인간의 대우나 클론 인간을 홀대한 인간들의 최후를 보면 이런 말이 떠오른다. 자업자득. 클론 인간을 배양할 수 있는 기술을 가졌으나 그 기술이 가져올 재앙을 지나치게 간과한 인간의 미래는 정말 암담하기 그지없다. 이 작품에 후속작이 나올는지 모르겠지만 결말이 인간에게 절망적이면서 클론에게 희망적이라 해피엔딩과 배드엔딩에 동시에 속한다고 생각됐다. 작중의 인간들이 클론한테 하는 짓을 보고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 생각에 해피엔딩이, 그래도 인간의 입장에 이입하면 배드엔딩이니까... 


 호불호도 많이 갈리고 무리수도 있었지만 탁월한 장르적 재미와 치밀한 설정 및 세계관, 또 그에 걸맞는 윤리적 주제의식까지. 아주 간만에 접한 모든 면에서 현혹되는 작품이었다. 그런데 이 작품이 요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 대상 최종 후보작에 그치다니... 아리스가와 아리스와 미치오 슈스케의 지지 덕분에 이 작품이 세상의 빛을 봤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정말 아까운 일이 벌어질 뻔했다. 한편으론 그만큼 소설로 뜨기가 힘들구나 싶어 소설가 지망생인 나는 여러모로 생각이 복잡해졌다. 정말... 여러모로 자극이 됐다. 

 만약에 이 작품이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의 작품이었다면 나는 낙담을 감추지 못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호불호가 갈리는 작품이라 이후에 작가의 다른 작품이 출간되리란 보장이 없기 때문인데 다행인 건 이미 작가의 <그리고 아무도 죽지 않았다>가 출간됐다기에 앞으로도 작가의 다른 작품도 출간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뚜껑을 열어봐야 알 테지만 이 정도 데뷔작을 쓸 수 있는 작가라면 다른 작품도 호불호는 갈릴지언정 그에 준하는 대단한 작품일 테니 그것 참 흥분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작가가 있었다니, 세상이 정말 넓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인간에게는 타인과 자신의 관계를 명백하게 정의하고 싶어 하는 본능 같은 게 있죠. 상대가 자신보다 열등한가 뛰어난가. 열등한 것처럼 보이면 상대가 자신보다 열등한가 뛰어난가. 열등한 것처럼 보이면 상대를 깔보고 공격하죠. 뛰어나다면 아양을 떨고요. 하지만 그런 마음의 작용을 멈추고 숨을 쉬는 인간을 물건으로 대하는 능력은 사회의 우중충한 부분에서 분명 필요하거든요. - 3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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