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믿음의 글들 9
엔도 슈사쿠 지음, 공문혜 옮김 / 홍성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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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영화로 한 번, 책으로만 두 번째 접하는 <침묵>이 이제 지겨울 법도 하지만, 워낙에 단순하면서도 울림이 큰 내용인 터라 쉽게 질리지 않는 것 같다. 여전히 주인공의 번민과 후반부에서의 마음가짐은 완전히 와 닿지 않지만... 아니 어쩌면 와 닿지 않기에 반복적으로 읽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배교를 했음에도 자신은 아직 진정으로 신을 배신하지 않았으며 자신만의 사랑을 실천한다는 결론은 속된 말로 '정신 승리'로 보일 수도 있으나, 절망에서 시작해 더 절망으로 끝나는 이 이야기를 끝없는 패배의 서사로 기억되지 않게끔 작가가 노력을 한 것 같아서... 내가 종교인이 아니라서 그런지 이런 작가의 모습이 참 끈질기구나 싶다가도 존경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종교인이기에 쓸 수 있는 한편으로 종교인이기에 쓰기 힘들었을 이 소설이 사람들에게 걸작으로 불리는 데엔 바로 이와 같은 논란의 결말 덕분이지 않을까 싶다.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전과 인상이 달라진 부분이 크게 두 가지 있었는데, 로드리고에게 전에 없이 인간적으로 느껴진 것과 그에게 배교를 이끌어내기 위해 갖은 수를 쓰는 일본인들이 유난히 가증스러웠던 것이다. 전에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지금도 여전히 종교인이 아니고 앞으로도 될 예정이 없기에 배교하는 심정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추측하지 모르겠지만, 종교를 말 그대로 종교가 아닌 단순히 '믿음'이라는 단어에 주목하니까 비로소 그 절망감이 얼마나 깊은지 한결 수월하게 이해됐다. 간단히 말해 나의 가치관을 부정하지 않으면 어마어마한 불이익을 안겨주겠다 으름장을 놓는 외부의 압박이 가해졌을 때 나라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겉으로 수긍한 척하겠는가 아니면 끝까지 버티겠는가. 전자의 자세야말로 현명할 테지만 사람은 비겁한 존재인 동시에 반발심 역시 지대한 터라 후자의 미련한 방식을 고집하기 마련이다. 설령 자신의 가치관이 객관적으로도 잘못됐다는 걸 스스로 인식하고 난 다음에도 그놈의 반발심 때문에 자기 입으로 '잘못했다'는 말을 내뱉는 걸 스스로 허락하지 못하는 듯하다. 실제로 그런 사람을 많이 봐왔고 나도 그랬기에 작중에서 로드리고가 배교를 미루는 모습이 특별히 독하게 여겨지지 않았고 오히려 지극히 정상적인데 싶어 그가 전에 없이 인간적으로 다가왔다. 


 스승이 극동의 땅 일본에서 배교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또 선교라는 찬란한 목표를 위해 로드리고는 일본으로 출항했다. 그는 일본에 도착한 직후까지도 자신에게 순교가 아닌 오직 스승처럼 배교하는 미래만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일본 막부는 기독교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박해할 수 있는지 노하우가 쌓인 터라 신부를 죽이는 것이 아닌 배교하는 전략을 취했는데 그러한 전략은 로드리고를 내부에서부터 뒤흔든다. 그리고 별다른 반전 없이 막부는 로드리고를 그의 스승과 마찬가지로 배교의 길을 걷게 만드는 데 성공한다. 

 로드리고는 이미 일본에 온 직후부터 자신이 믿는 기독교와 일본인들의 기독교가 다르다는 것, 어쩌면 신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차가운 현실을 외면해왔다. 지금 자신이 순교를 고집하는 것은 똥고집에 불과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음에도 로드리고는 버티고 버티고 또 버틴다. 자신이 배교하게 되면 정말로 자신의 노력과 신도들의 희생이 개죽음으로 전락해버리니까. 하지만, 자신이 배교하지 않으면 이미 배교를 한 일본인들마저 죽이겠다는 막부의 엄포와 스승 페레이라의 회유에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이미 그 전에 일본인들로부터 '너 같은 놈은 신부로 불릴 자격이 없다'는 말을 들었던 터라 로드리고는 자포자기했던 것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일본인을 상대로 신부란 직함은 완전히 무의미하다는 걸 뼛속 깊이 깨달은 것인지도 모른다. 


 위의 감상은 단순히 로드리고를 변호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만큼 당시 일본의 종교 박해가 너무나 가증스러운 탓에 나온 감상이다. 온갖 상식을 벗어난 방식으로 기독교 신자들을 박해하고 신부에겐 배교 혹은 신자들의 죽음이라는 양자택일의 시련을 - 말이 시련이지 살아있는 지옥 - 선사하고 있으면서 자신들이 원치 않는 선택을 하는 신부에게 신부로 불릴 자격이 없다고 욕한다는 건 그야말로 어불성설이지 않은가? 그러는 본인들은 인간으로 불릴 자격이 없다는 건 자각해본 적은 있는지? 이교도를 박해하는 것이 상식인 야만적인 시대니까 그러려니 하는 거지, 지금처럼 여러 종교가 혼재해도 특별히 문제다운 문제가 생기지 않는 걸 아는 현대의 사람으로서 기독교 박해에 이렇게 열심인 일본의 모습은 적어도 배교에 망설이는 로드리고보다 이해 불가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 딴에는 신부의 배교라는 최소한의 희생으로 기독교 박해라는 임무를 달성하려는 것인데 로드리고가 당최 비협조적이니 그들로선 그게 그렇게 못마땅했나 보다. 

 물론 신부에게 배교를 강요할 때 동원한 논리가 마냥 터무니없진 않았다. 결국 이런 극동의 땅에 선교를 하려는 것은 기독교도의 욕심에 불과한데 한낱 욕심에 눈이 멀어 죄없는 일본의 신자들에게 순교를 강요하느냐고 아픈 지점을 찌른다. 로드리고의 양심과 함께 오늘날에도 비판 받는 기독교의 약점을 거론한 것인데, 미지의 땅에서까지 선교를 하려는 것이나 순교야말로 사랑이며 목숨이 위협을 당하는 상황에서의 배교도 배교라고 일축하는 기독교의 논리엔 고압적인 구석이 있어 내심 이들의 비판이 통쾌했다. 나는 종교가 없음에도 종교를 자기 수양의 일환으로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 천국에 가기 위해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갈 만큼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믿는 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 선교나 순교나 배교에 대한 기독교의 개념은 너무 권위주의와 선민사상에 찌든 감이 있다고 보는 터라 퍽 공감이 갔다. 그런데 이는 정말로 종교인이 아니니까 할 수 있는 망측한 발언에 불과한 것일까? 


 <침묵>이 종교소설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열광한 이유는 기독교의 약점이나 모순을 작가가 종교인의 입장에서 열거한다는 것에 있다. 신자들의 개죽음을 순교로 미화시키는 것, 신의 가르침을 퍼뜨리기 위해 다른 나라 땅을 헤집는다는 것, 어떤 순간에도 배교는 배교일 뿐이라며 종교라는 절대적 권위의 실추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관점만 바꾸면 쉽게 인식할 수 있는 모순일 터다. 이런 모순을 엔도 슈사쿠는 종교인으로서 외면하지 않고 정말 이대로 둬도 될 만큼 아무 문제도 없는 것인가 질문하는 게 종교인이 아닌 독자의 눈에도 경이롭게 비쳐졌다. 여러 면에서 대단한 소설이지만 독자들에게 질문과 대화를 이끌어낸다는 점만으로 걸작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라 생각됐다. 

 결말에서 로드리고가 배교를 했음에도, 새로운 사랑 운운하며 일본인들이 정신 승리하지 말라고 비웃는 장면이 절망적이기 이를 데 없으나 비참하게 읽히지 않았다. 기존의 딱딱한 기독교의 교리만으론 이 세상의 복잡한 이치를 다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음을 너무나 잘 풀어낸 작품의 내용의 덕이 크다고 본다. 한마디로 기독교가 얼마나 믿음직한 종교고 반대로 기독교의 교리가 얼마나 모순됐는가 유무와는 가장 무관한 결말인 것 같다는 게 지금의 나로서 내릴 수 있는 제일 진심 어린 감상이다. 아니, 다른 걸 떠나서 종교인이 아님에도 계속 이 소설을 찾아 읽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이 소설이 진정 걸작이란 증거는 아닌지... 요번에 책을 읽는 내내 한 생각이다. 

하지만 당신이라면 이렇게 말하겠지요. 그들의 죽음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고. 그들의 죽음은 결국 교회의 기초가 되는 돌이 된 거라고. 그리고 주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그런 시련은 결코 주시지 않는다고.

(중략) 저도 물론 그런 것은 백 번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데도 왜 이런 비애의 감정이 가슴 밑바닥에 남는 것일까요? 어째서 기둥에 묶인 모키치가 숨이 끊어질 듯이 불렀다는 노래가 이렇게 고통스러움으로 머리에 되살아오는 것일까요? - 94p



가령 아내에게 배신당한 남편을 상상하면 알 수 있지. 그는 아직 아내를 계속 사랑하고 있어. 그러나 아내가 자신을 배반한 것 자체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야. 아내를 사랑하면서도 그 배신행위에 혐오를 느끼는 남편의 기분, 그것이 그리스도가 유다에게 가진 마음이었을 거야. - 118p



죄란, 인간이 또 한 인간의 인생을 통과하면서 자신이 거기에 남긴 흔적을 망각하는 데 있었다. - 136p



그렇지만 제게도 할 말이 있어요. 성화를 밟은 자에게도 밟은 자로서의 할 말이 있어요. 성화를 제가 즐거워서 밟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밟은 이 발은 아픕니다, 아파요. 나를 약한 자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이 강한 자 흉내를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건 무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건 억지이고말고요. - 177p



인간들을 위해 유익하게 소용된다는 것은 성직자들의 단 한 가지 염원이며 꿈이다. 신부들의 고독이란 자신이 타인을 위해 무익할 때다. - 224p



강한 자도 약한 자도 없는 거요. 강한 자보다 약한 자가 고통스럽지 않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소. - 29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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