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 없는 세상 - 제6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9.4 






 중의적인 제목 그대로 주인공이 자기 여자친구와 한 번 하려다 퇴짜를 맞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유머러스하게 진행된다. 이 유머러스한 톤은 그대로 진행되고 이 어린 커플의 다툼도 진지하되 풋풋하게 그려진다. 지금이야 많이 개방된 편이지만 이 작품이 신인상을 수상한 즈음인 20년도 훨씬 전에 용케 이 유쾌한 작풍이 인정을 받았구나 싶을 정도로 <동정 없는 세상>은 세월감이 잘 느껴지지 않는 소설이다. 이상적인 어른과 짓궂어도 선은 넘지 않는 친구들, 속세에 속하지 않는 듯 대학 진학에 대한 욕구나 걱정이 전무한 4차원 주인공과 그 주인공이 유일하게 갖고 있는 목표인 '한 번 하고 싶은' 대상인 여자친구는 만만찮은 존재로 등장한다. 


 쉽게 말하자면 여러 우여곡절 끝에 여자친구와 실랑이를 벌이다 얼추 무드를 잘 잡아 거사를 치르는 뭐 그런 내용이다. 조금 어렵게 말하자면 정작 성관계보다 주인공이 인격적으로 어느 수준의 됨됨이를 갖춰 나가게 되는지가 더 눈길이 가던 성장 소설이었다. 내 개인적으로는 관계 뒤에 쪼그라든 주인공의 물건을 보고 여자친구가 귀엽다고 말하자 주인공이 영원히 쪼그라들어도 괜찮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아무튼 그 나이대 남성의 성욕을 유쾌하다 못해 시종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게 아닌가 싶다가도 작가의 성관념이 그릇됐다라고 여길 만한 부분이 느껴지지 않아 끝까지 기분 좋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현대 문학에서 성에 대한 묘사를 과시하듯 자극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트렌드를 넘어 일종의 소양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는데 이 소설은 그중에서 성이란 관념을 가장 모범적이고 바람직한 시선으로 묘사하지 않았나 싶다. 


 때문에 이 소설이 단편 드라마로 나왔다는 소식이 반갑기보다 불안하다. 보려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겠지만 원작의 풋풋함이나 적절한 수위가 드라마에서 제대로 구현됐으리란 기대가 잘 되지 않는다. 뚜껑은 열어봐야 아는 것이라지만 당장은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만약 본다 해도 그 전에 작가의 대표작 <아내가 결혼했다>를 다시 읽고 그 소설을 원작으로 둔 영화를 찾아볼 듯하다. 아, 물론 작가의 다른 책도 찾아 읽어볼 생각이다.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다는 것은 모든 것에 관심이 있다는 얘기하고 비슷해. - 142p



무엇을 하건 간에 어차피 어른이 되는 것이라면 근사한 어른이 되고 싶다.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근사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근사한 사람이 될 것이다. 어디까지나 근사하게 살아갈 것이다. - 181~182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무한발설 - 성매매 경험 당사자
성매매경험당사자네트워크 뭉치 지음 / 봄알람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8 





 20년 동안 성매매 여성이었던 저자가 자신의 경험을 풀어낸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에 이어서 이 책도 읽었다. 성매매 경험 당사자 네트워크 뭉치는 <성매매, 상식의 블랙홀>을 읽을 때부터 들어왔던 이름이라 그 단체에 소속된 여성들이 직접 풀어낸 책도 읽어보고 싶었다. '무한발설'이란 제목에 걸맞는 내용으로, 익명의 저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쏟아내는데 책의 디자인 덕분인지 지저분한 내용과 다르게 읽히기는 굉장히 감각적으로 읽혔다.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이 산문이면 이 책은 운문에 가까웠다. 어딘지 리듬감이 있었고 그렇기에 보다 성매매 경험 당사자들의 경험담이 매우 파괴력 있게 다가왔던 것 같다. 

 나는 성구매를 해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할 생각이 없었는데, 이 책에서 거론된 온갖 엽색 행각을 보노라면 앞의 내 생각에 '반드시' 라는 말을 붙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자 질에 뭘 넣고 행위를 한 다음에도 불만족스러웠다고 값을 치르려 하지 않는다거나 신고한다거나 진상질은 있는 대로 하고... 뭔가 많이 읽은 기억이 나는데 하도 충격적이라 일부러 잊은 것도 있다. 어떤 부분에선 성애 소설 <O 이야기>를 능가하기도 하니 진짜 말 다했다. 역시 픽션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현실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것 같다. 그런데 왜 이런 말은 나쁜 일에만 하게 되는 건지... 


 특히 섬에 데려가서 성매매를 시키는 건 기함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런 일을 겪고도 살아남은 분들이 존경스러웠고 그런 일이 꽤나 비일비재한 것과 성구매자나 포주 등 가해자들이 처벌받지 않았음이 자명한 것도 한탄스런 일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살려둔 게 이상할 정도로 정신이 이상한 작자가 한둘 언급되는 것이 아닌 터라 그자들의 악행이 법적으로 정녕 제지가 안 되는 것인지 읽는 내내 답답해서 체할 지경이었다. 당사자분들이 겪은 고통에 비할 바는 당연히 안 되겠지만 짧은 책임에도 후유증은 상당히 컸다. 

 성매매 시장이 망하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성매매 경험 당사자 네트워크가 외치는 것만으론 계란으로 바위 치기 격일 수 있다.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자는 말로도 역부족인 듯하다. <성매매, 상식의 블랙홀>엔 이런 말이 나온다. '남자는 짐승이고 성욕은 본능이니 성매매를 못 하게 하면 성범죄자가 된다는 말에 진정 분노하고 저항해야 하는 것은 누구인가.' 내가 봤을 때 이 말에 깊이 동의하는 남성들이 들고 일어나야 한다고 본다. '남자는 다 성구매자고 변태'라 싸잡는 일반화에 저항하는 사람도 동참해야 비로소 성매매 시장에 타격이 있을 듯하다. 당장 나부터 구체적인 실천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 누굴 계몽시키고자 설치는 것이 어불성설이니 일단 나부터 뭔가를 해야겠다. 그 뭔가가 무엇인지는 아직 갈피도 잡히지 않지만, 성매매 경험 여성들의 이야길 몇 주 동안 듣다 보니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남의 일이라 치부하고 무시하기엔 그들은 나와 똑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똑같이 아파하고 슬퍼할 줄 아는 사람들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 - 성매매라는 착취와 폭력에서 살아남은 한 여성의 용감한 기록
봄날 지음 / 반비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9 






 일전에 읽은 <성매매, 상식의 블랙홀>에서 언급된 책으로 '성매매 여성으로 20년을 살아온 여성의 경험담'이라 언급돼 바로 구매해 읽었다. 400페이지라는 적지 않은 분량의 책으로 300페이지에 달하는 1부는 저자가 성매매 여성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나머지 100페이지 가량의 2부는 탈성매매 이후 어떻게 사회에 적응했는지를 그리고 있다. 누군가는 이 책을 올해의 논픽션으로 꼽기도 하는데, 나 역시 동의하며 아마도 내가 올해 읽은 모든 논픽션 중 가장 으뜸이리라 감히 점쳐본다. 꼭 실화여서, 저자가 직접 경험했고 내가 애써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는 성매매 현장을 그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만한 고통을 겪고도 살아남은 저자의 생명력에 진심으로 존경스러워서다. 

 저자는 성매매 여성을 둘러싼 갖은 모욕과 멸시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성매매를 했다고 커밍아웃하게 되는 순간이 있는데, 그때마다 그 사실을 부끄러워 해야 할 것은 성매매를 한 자신이 아닌 자신의 성을 구매한 남성임을 저자는 책에서 분명히 하고 있다. 착한 성 구매자는 없었으며 저자 나름대로 순화했을 자신의 경험 속 온갖 수난들은 모두 남성이 주도한 결과란 것을 톡톡히 강조한다. 


 누군가는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몸을 판 것이 아니냐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성매매를 시작한 순간 서서히 노예로 전락하고 그 과정에서 노동이란 숭고한 단어는 입에 올리기 힘들 정도로 비루한 대우를 받았음을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보여준다. 몇 분만 지각해도 지각비 50만 원, 업소에서 일한 조건으로 선불금 몇 백에 아가씨를 업소에 소개해준 소개쟁이에게 줘야 할 돈, 홀에서 입을 옷, 다쳤을 때 필요한 치료비 등 모든 돈은 여성들의 돈, 즉 빚으로 달리게 되고 그 안에서 여성들은 도대체 끝이 없는 빚을 갚기 위해 몇 년을 꼼짝없이 갇히게 된다. 사회와 단절되고 돈을 지불했다는 이유로 남자들한테 학대를 당하고 술도 먹어야 하고... 그렇게 몇 년을 일해 돈을 벌어서 업소를 벗어났다고 해도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트라우마도 문제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간 사회와 격리된 탓에 세상 물정도 잘 모르고 할 줄 아는 일도 적으니 새로운 일을 배우는 것에 주눅들어 조금이라도 경제적으로 곤궁해지거나 심리적인 압박을 느끼면 업소로 돌아갈까 하는 충동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늪처럼 성매매의 경험은 해당 여성들에게 신체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매우 크고 지속적인 상흔을 남긴다. 이 책을 읽기 전엔 어쩌다 20년씩이나 성매매를 하게 됐느냐는 의문이 들었는데, 책을 읽는 내내 이토록 장기간 폭력에 노출되고 격리되면 그 이상의 시간도 순식간에 빼앗기리란 생각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수모를 겪고도 자기 파괴 충동이 일지 않고 끝내 업소에서 벗어나 사회에 적응 중인 저자가 진심으로 존경스러워졌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내내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는데, 이 책의 내용은 전부 실화이며 아직도 비일비재하고 저자처럼 벗어나지 못한 여성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여성의 몸을 착취하는 시스템은 더 교묘해졌고 음험해졌으며 기껏 성매매 현장에서 살아남아 자신의 이야길 외치는 이 책의 저자 같은 사람이 나와도 세상은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아니, 귀를 기울이지 않을 뿐이라면 차라리 다행인 것이, 이미 마음 속 기저에 뿌리 깊게 내려진 '몸 파는 여성에 대한 멸시'가 남아있어 아무리 고통을 호소해도 자업자득이라거나 머리에 똥만 들어서 남자한테 기생한다는 모멸적인 말까지 돌아오는 실정이다. 

 성 구매 경험이 있는 남성은 말할 것도 없을 테고, 나처럼 성 구매 경험이 없는 남성도 자신과 무관한 일이라며 사회에 만연한 성매매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앞으로도 성 구매할 생각은 없고 아마 어지간하면 반대의 입장이 될 일도 없을 것 같아 나와 상관 없는 일이라 선을 긋고 살아왔다. 타인의 문제를 내 일처럼 여기고 몰입하며 분개하기엔 내 앞가림도 버겁고 이런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야길 접하노라면 분노보다 절망이 앞설 뿐이다. 그렇게나 두텁게 체계화된 성매매 시스템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예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생각은 들었다. 어떤 기적이 벌어진 덕분이든 탈성매매 여성은 보다 자신감을 갖고 당당히 살아갔으면 했다. 그 긴 시간을 인내하고 살아남았고 눈치 싸움을 벌여왔고 심지어 비위도 좋은 당신들은 그 어떤 일이라도 잘할 수 있을 거라고, 꼭 술이나 몸을 파는 일이 아니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당신들은 견뎌냈고 살아남았을 뿐이라 생각할 수 있어도 내 눈엔 이미 살아남았다는 점에서 반 이상은 극복한 것으로 느껴졌으니까. 

 내가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이 대단히 주제 넘은 일일 수 있다. 하지만 그분들은 주제 넘든 아니든 누구에게나 위로와 격려의 말을 들을 자격이 있다는 생각도 든다. 꼭 그들이 어둡고 긴 터널을 통과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가족이나 친구에게도 외면당하거나,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조차 없는 일에 몸담은 적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모두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살아남길 원하고 절망스러우면 울고 과거를 후회하기도 하는 사람들... 그들이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치욕적인 경험을 했다 한들 나는 그분들이 나와 똑같은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사람 아래 사람 없고 사람 위에 사람 없다. 돈의 유무로 모든 것이 갈리는 자본주의 시장에서는 공허하게 들리는 말일 수 있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논리가 극한으로 적용된 성매매 업계는 필요악이니 뭐니 하는 말로 정당화될 수 없다. 업계라 불려서도 안 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여 매우 현장감 넘치는 이 책의 내용을 통해 나는 비로소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됐다. 성매매는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 아래 사람 없고 사람 위에 사람 없어야 하니까, 누군가 행복하면 누군가 고통 받는 것이 아무리 필연적인 일이라 하더라도 그 아이러니함은 점점 사라져야만 하니까 말이다. 

내 경험이 나를 갉아먹지 않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은 폭력을 폭력이라고 계속해서 말하는 것이다. - 403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3인칭
꼬마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9 







 <성매매, 상식의 블랙홀> 이후로 성매매 여성이 등장하는 작품을 골라 읽고 있다. <O 이야기>는 뒤로 갈수록 동정의 여지가 없는 능동적 성노예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에선 사창가를 전전하던 자신의 빚을 갚아준 정부에게 그 이상의 시련을 겪는 모습이 소년인 주인공의 시선에서 그려진다. 남성 독자로서 말하자면 이 작품들의 섹슈얼한 묘사는 구역질과 연민, 치욕스러움과 절망을 안겨주면서도 내가 남성이라 그런지 상상력이 자극돼, 성적으로 자극적으로 읽히기도 했다. 

 만화 <3인칭>은 일본 AV 배우를 사랑하게 된 한국 남자 노조기를 3인칭의 시선에서 바라보면서 전개되는 이야기다. 우연히 접한 몰카 설정의 AV를 본 노조기는 그전까지 한 번도 야동을 본 적도, 관심도 없었기에 그 영상을 진짜 몰카로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처음에 그 영상을 보고 화가 났으면서도 두 번째 세 번째 찾아보면서 그 여자를 만나야만 한다는 강렬한 생각에 사로잡혀 무작정 일본으로 가면서 시작된다. 


 이제 그는 일본에서 살고 있는 고등학생 동창 집을 거점으로 삼으면서 자신이 본 몰카 속 공간을 마치 사막에서 바늘 찾듯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일종의 광기에 사로잡혀 하염없이 매달린다. 동창인 종원은 친구의 모습이 여간 이상해 보여 자초지종을 물었는데, 고등학생 시절부터 성에 관해 유독 보수적이고 꽉 막힌 사고방식을 갖고 있던 노조기가 그토록 뒤틀린 '사랑'에 빠진 것이 웃기면서도 압도당해 그에게 진실을 알려준다. 영상 속 그 여자는 나도 알고 있는 여자다. 

 몰카 영상이 실은 컨셉이 있는 AV였고 그 여자가 AV 배우인 나카지마 후미히메임을 알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노조기의 너무나 꽉 막혀서 대화가 통하지 않는 그의 사고방식이 유일한 걸림돌인 상황이었다. 자신이 혼자 짝사랑한 여자가 실은 AV 배우였던 것도 그의 입장에서 충격적인데 AV 업계에 너무나 박식한 동창의 모습도 그로선 역겨운 나머지 일본에서 체류할 동안 집에서 재워준 동창에게 적반하장 따지기까지 한다. AV 보는 게 정상이냐고. 


 실상이 어떻든지 간에 자신이 몰카라고 생각한 영상 속 당사자를 사랑하고 직접 찾으러 나선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고, 정상이고 어떻고 떠나 성적으로 유난히 무균 상태인 듯한 인간은 솔직히 말해 무슨 말을 하건 공감이 되기는커녕 공허함만 주기 마련이라 노조기가 'AV 보는 게 정상이냐'고 따지는 것이 우습게만 들린다. 그 나름대로는 진지하게 사랑을 하는 것일 테지만, 그 사랑의 고충에서 오는 화를 남한테 풀거나 누군가에게 이해받으려는 듯한 모습은 어떻게 봐도 호감은 아니다. 설령 그의 사랑이 영상 속 배우와 결실을 맺어 짧게나마 진실된 관계를 맺었다 해도, 그가 나중에 동창이나 이 일과 관련된 몇몇 사람에게 달라진 모습을 보여줬다 해도 그가 비호감에서 호감으로 완전히 바뀐 것은 아니다. 적어도 내 안에선 노조기는 답답하기 그지없으나 그놈의 진실된 태도로 평생 그 누구도 경험하기 힘든 일을 경험한 행운아에 불과하다. 

 행운아? 일본인도 아닌 한국인이 일본 AV 배우와 동거를 하고 관계를 가진 것을 두고 나는 그를 행운아라 여긴 것일까? 오해할까봐 하는 말이지만 그건 아니다. 노조기가 후미히메를 AV 배우라 사랑한 것이 아닌 것처럼 그가 단지 사랑하는 누군가와 짧지만 진정성 있는 사랑을 나눈 것이 행운아라 여겨졌다. 비록 외국인이라 말이 100% 통하지 않지만, 본편에서 나오지 않은 그의 일기 속 내용을 보면 때론 언어만이 소통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리란 생각도 든다. 물론 노조기가 일본어를 배우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성립될 수 없는 관계였을 테지만, 언어보다 중요한 것은 후미히메의 영상을 본 것을 계기로 자신이 자신도 모르게 꽉 막힌 인간이었음을 자각한 것이 둘의 관계에 대해 얘기할 때 가장 핵심적인 부분일 것이다. 그렇기에 AV 배우와 뒤틀린 애정을 가진 남자의 사랑이 그리 자극적으로 읽히지 않았던 것이겠다. 


 그럼에도 자초지종을 모르는 종원은 후미히메와 헤어진 노조기에게 '태극기 꽂았다'고 말한다. 술김에 한 말이지만 오히려 술김이었기에 진심이었을 것이다. 결국 이 작품의 제목 '3인칭'은 1인칭도 2인칭도 아닌 3인칭의 시선에선 타인의 진심이나 사랑 같은 감정은 한낱 얘깃거리에 불과하고 자기 관점을 보태 이야기의 무게를 퇴색시키기 마련임을 강조하기 위한 제목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기에 타인의 이야길 듣고 전달하는 일을 조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노력하고 노력해도 결국 내 흥미를 잡아끄는 방향으로 이야길 각색하고 전달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라 할 수 있겠으나 그래도 의식적으로 조심하다 보면 미연에 큰 실례를 방지할 수 있으리라 본다... 그래서, 이건 여담이지만, 맨 처음에 언급한 <O 이야기>나 <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의 경우 내가 감상을 남기면서 필요 이상으로 성적인 요소를 부각하며 글을 쓰지 않았는지 생각해보게 됐다. <O 이야기>는 성적인 요소를 부각시킬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지만 <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는 어땠을는지... AV 배우를 등장시켰음에도 섹슈얼한 묘사는 극히 적었던 <3인칭>을 생각하며 나 역시 글을 더 조심히 써야겠다는 다짐이 들었다. 

정말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그 일방통행이란 말, 들어도 그 사람한테 듣고 싶어. - 9화 만남



누구나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사랑의 무게가 있는 것이 아닐까?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얼마나 진실하게, 사랑을 끝까지 감당해냈는가 하는 것이 아닐까? - 권혁주의 후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
이재웅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9.9 






 이 소설은 이복 누나를 제외한 모든 가족을 여읜 소년이 누나와 그녀의 정부가 사는 집에 얹혀 살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15살에 가출해 17살엔 룸살롱에서 인간 접시로, 19살엔 스트리퍼로, 23살엔 사창가를 전전하다가 그 다음해엔 자신의 빚을 갚아준 정부의 노예가 되어 아파트 단지에서 전문적인 매춘부로 지내고 있는 누나는 소년의 눈에 어떻게 비쳐졌을까? 소년은 처음 누나가 빚을 갚는 '용도불명'의 방에 있는 각종 도구를 바라보며 정확히는 몰라도 대강은 무슨 행위를 위한 방이고 누나가 무슨 일을 하는지 유추한다. 딱히 충격도 받지 않는다. 오히려 독자가 이러한 주인공의 담담한 시선에서 충격을 받는다. 소년은 자신을 늙은 소년이라 말하고 그 늙음의 기원이자 스승을 굳이 꼽자면 바로 '가난'이라 말한다.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아도 사실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누나를 바라보는 주인공의 시선은 복합적이다. 세상 사람들이 누나가 다리 벌려서 받은 돈으로 키운다고 욕하는 걸 주인공은 신경 쓰지 않는다. 다만 이미 폭력에 길들여졌고 하염없이 울고 동생의 정서를 걱정하며 정부인 곽호와 대립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소년은 혐오감과 안쓰러움을 느낄 뿐이다. 소년은 자신은 늙었다고 하지만 충격에 내성이 생겼을 뿐, 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없고 해결 방안이라고 제시하는 것도 현실적인 구석이 없으며 충동적이라 그가 겉늙었을 뿐 아직은 소년이긴 하다는 인상을 심어준다. 현재로서 모든 비극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곽호를 죽이면 다 해결될 일이지만, 그로 인해 감당해야 할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순수하게 느껴졌으니까. 


 눈물 없이 볼 수 없을 고통스러운 장면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던 소설이다. 주인공의 누나를 자신의 전용 매춘부로 두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기어코 '쪽바리들의 정액받이'로 넘겨버리겠다고 말한 곽호가 천벌을 받긴 할 것인지, 무력하지만 행동의 귀추 하나하나가 주목됐던 송봉권이나 작중 내내 끊임없이 수모를 겪던 소년의 누나와 소년이 어떤 결말을 맞이할 것인지 무척 궁금했기 때문이다. 중간중간 섹슈얼한 묘사가 있을수록 불쾌함과 비참함을 더하는 것은 직전에 읽은 <O 이야기>와 가장 다른 부분이었고 이 작품이 여성을 묘사하는 방식이 다소 전형적일지언정 하등 가볍거나 흥미 위주로 이뤄지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가난한 여성은 몸을 팔고 가난한 남성은 살인을 저지른다... 상투적인 설정과 전개지만 이 소설은 세상이 그 꼬라지로 돌아가는 원인과 가난한 당사자들이 세상을 증오할 수밖에 없는 이유와 소년이 희망을 품지 않는 이유 또한 개연성 있게 풀어낸다. 

 글쎄, 이 작품에서 주인공의 누나를 향한 여성 독자들의 감상은 과연 어떨는지 궁금하다. 그저 그런 섹슈얼한 캐릭터라기엔 동생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고 자애로워 나는 그녀에게 동정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타의와 더불어 자의로 인해 빚을 산더미처럼 불렸고 치명적인 오판으로 인해 매춘부의 신세를 면치 못하고 체념한 모습에 대해선 약간 이야기를 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두 번 다시 그쪽 일을 하지 않겠다 마음 먹어도 오래도록 몸에 익은 일과 어수룩한 경제 관념, 대인 관계 때문에 금방 빚에 허덕이는 모습, 심지어 주인공의 누나는 '사랑'에 너무 쉽게 빠져 풀릴 일도 그르쳐버린다는 단점 또한 갖고 있다. 물론 그 모든 걸 자업자득이라 말하기엔 수업료를 지나치게 잔인한 방식으로 지불하고 있지만...... 특유의 무력한 모습 때문에 동정 이외의 감정을 품기가 어렵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이 소설의 강점이자 단점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어떻게 보면 내가 이 소설에서 가장 주목한 캐릭터는 바로 곽호다. 그는 돈을 중요시하고 돈을 위해 자신이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세상이 다 그런 법'이라고 당당히 외치는 진정 쓰레기 같은 인물이다. 그 나름대로 세상을 거칠게 적응하며 살아왔을 테니 그런 극단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게 됐겠지만, 세상 핑계를 대면서 자신도 그런 세상을 만드는 이유 중 하나가 되어 주인공 남매를 괴롭히는 것은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다. 

 이 책을 둘러싼 사람들의 감상을 둘러보니 곽호도 은근히 동정하게 되는 캐릭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기껏 누나의 빚을 없앤 다음에 다시 지옥으로 떨어뜨리는 행보를 보인 쓰레기에게 도대체 어떻게 동정을 느끼는지 이해가 참 안 됐다. 자신의 사랑을 외면하고 돈을 들고 튄 누나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한다고 쳐도, 그럼에도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는 것은 어른으로서 보여야 할 태도가 아니었을까? 만약 그럼에도 누나가 곽호를 배신했다면 또 모를까, 자신이 갚아준 돈 그대로 자신에게 도로 갚으라고 태세를 전환하는 것은 악마도 고갤 저을 모습이라 생각됐다. 곽호가 빚을 갚아주자 그의 청혼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나 하고 있던 누나도 문제라면 문제지만, 결국 원흉은 곽호 혼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세상이 다 그런 법이라고 자신을 벌레 보듯 쳐다보는 소년의 시선에 응수하지만, 소년에게 죽임을 당할 빌미를 스스로 제공하고 그래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최악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본인은 알고 있을까? 아마 알고 있을 테지만, 다 떠나서 주인공의 누나를 향한 사랑이 배신당한 것을 배로 갚아주기 위해 그녀를 일본에 팔 계획까지 세운 것은 명백히 욕심 어린 행동으로 느껴졌다. 그야말로 소년으로선 이 세상은 증오하지 않고 싶어도 증오할 수밖에 없는 곳으로 인식하기에 충분한 계기였고, 소설의 결말은 어두워질 대로 어두워진 소년의 심상이 조만간 일을 내리란 암시를 준다. 스스로는 늙은 소년이라 칭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소년다웠던 주인공이 과도를 품고 곽호를 죽이려는 모습에선 그나마 남아있던 순수함이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야기의 고통스런 전개와 수위, 새삼스럽고 단선적인 주제의식은 여운보다 후유증을 크게 남긴다. 가난한 사람의 절망스러움이야 문학에서 한두 번 다뤄진 것도 아니고 도대체 답이 없는 이야기를 다 읽고서 세상을 전처럼 평안하게 바라보기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난 이 책을 첫 번째 읽었을 때 남긴 포스팅의 부제를 '몰라선 안 될 불쾌함'이라 적었지만 사실은 이런 이야기는 모르고 싶은 불쾌함에 해당한다고 본다. 


 그렇기에 이만큼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끈질기게 풀어내고 완결을 낸 저자가 존경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명확하게 해피엔딩을 그리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도 있지만, 작품 속의 등장인물들과 같은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직접 작품에 등장시키며 그걸 찾아 읽는 독자들의 존재가 이 세상을 조금은 더 괜찮게 바꾸지 않나 하는 막연한 생각도 든다. 곽호는 '세상이 다 그런 법'이라고 말하지만 그건 당신 생각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이 세상엔 많아져야 한다. 작품을 읽는 내내 나는 그런 어른이 되고 싶었고, 적어도 아이들에게 일부러 세상이 더럽다는 사실을 몸소 가르쳐주지 않는 어른이 돼야 한다고 단호하게 읊조리게 됐다. 

누구에게도 말은 안 했지만 난 이미 늙은 소년이었다. 나는 믿어야 할 말과 믿지 않아야 할 말을 구분할 줄 알았고, 항상 그러려고 노력했다. 누가 그것을 가르쳐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배웠다. 굳이 그 스승을 지명해야 한다면 ‘가난‘이었다. - 17p



난 한 번도 자유로운 적이 없었어.

그건 자유를 원하지 않을 만큼 충분히 자유롭기 때문이에요. 억지로 자유를 찾을 필요는 없어요. - 122p



맞아요. 사탄의 마음이에요. 나는 사탄이 좋아요. 사탄은 맨날 지고, 욕만 먹고, 쫓겨 다니기만 하잖아요. 선생님은 맨날 천사처럼 살아야 한다고 하지만 천사는 가난하지도 않고, 더러운 옷도 입지 않고, 저 하늘 위에서 웃을 일밖에 없는데 왜 제가 천사를 좋아해야 하죠? - 251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