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 - 성매매라는 착취와 폭력에서 살아남은 한 여성의 용감한 기록
봄날 지음 / 반비 / 2019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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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일전에 읽은 <성매매, 상식의 블랙홀>에서 언급된 책으로 '성매매 여성으로 20년을 살아온 여성의 경험담'이라 언급돼 바로 구매해 읽었다. 400페이지라는 적지 않은 분량의 책으로 300페이지에 달하는 1부는 저자가 성매매 여성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나머지 100페이지 가량의 2부는 탈성매매 이후 어떻게 사회에 적응했는지를 그리고 있다. 누군가는 이 책을 올해의 논픽션으로 꼽기도 하는데, 나 역시 동의하며 아마도 내가 올해 읽은 모든 논픽션 중 가장 으뜸이리라 감히 점쳐본다. 꼭 실화여서, 저자가 직접 경험했고 내가 애써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는 성매매 현장을 그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만한 고통을 겪고도 살아남은 저자의 생명력에 진심으로 존경스러워서다. 

 저자는 성매매 여성을 둘러싼 갖은 모욕과 멸시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성매매를 했다고 커밍아웃하게 되는 순간이 있는데, 그때마다 그 사실을 부끄러워 해야 할 것은 성매매를 한 자신이 아닌 자신의 성을 구매한 남성임을 저자는 책에서 분명히 하고 있다. 착한 성 구매자는 없었으며 저자 나름대로 순화했을 자신의 경험 속 온갖 수난들은 모두 남성이 주도한 결과란 것을 톡톡히 강조한다. 


 누군가는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몸을 판 것이 아니냐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성매매를 시작한 순간 서서히 노예로 전락하고 그 과정에서 노동이란 숭고한 단어는 입에 올리기 힘들 정도로 비루한 대우를 받았음을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보여준다. 몇 분만 지각해도 지각비 50만 원, 업소에서 일한 조건으로 선불금 몇 백에 아가씨를 업소에 소개해준 소개쟁이에게 줘야 할 돈, 홀에서 입을 옷, 다쳤을 때 필요한 치료비 등 모든 돈은 여성들의 돈, 즉 빚으로 달리게 되고 그 안에서 여성들은 도대체 끝이 없는 빚을 갚기 위해 몇 년을 꼼짝없이 갇히게 된다. 사회와 단절되고 돈을 지불했다는 이유로 남자들한테 학대를 당하고 술도 먹어야 하고... 그렇게 몇 년을 일해 돈을 벌어서 업소를 벗어났다고 해도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트라우마도 문제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간 사회와 격리된 탓에 세상 물정도 잘 모르고 할 줄 아는 일도 적으니 새로운 일을 배우는 것에 주눅들어 조금이라도 경제적으로 곤궁해지거나 심리적인 압박을 느끼면 업소로 돌아갈까 하는 충동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늪처럼 성매매의 경험은 해당 여성들에게 신체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매우 크고 지속적인 상흔을 남긴다. 이 책을 읽기 전엔 어쩌다 20년씩이나 성매매를 하게 됐느냐는 의문이 들었는데, 책을 읽는 내내 이토록 장기간 폭력에 노출되고 격리되면 그 이상의 시간도 순식간에 빼앗기리란 생각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수모를 겪고도 자기 파괴 충동이 일지 않고 끝내 업소에서 벗어나 사회에 적응 중인 저자가 진심으로 존경스러워졌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내내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는데, 이 책의 내용은 전부 실화이며 아직도 비일비재하고 저자처럼 벗어나지 못한 여성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여성의 몸을 착취하는 시스템은 더 교묘해졌고 음험해졌으며 기껏 성매매 현장에서 살아남아 자신의 이야길 외치는 이 책의 저자 같은 사람이 나와도 세상은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아니, 귀를 기울이지 않을 뿐이라면 차라리 다행인 것이, 이미 마음 속 기저에 뿌리 깊게 내려진 '몸 파는 여성에 대한 멸시'가 남아있어 아무리 고통을 호소해도 자업자득이라거나 머리에 똥만 들어서 남자한테 기생한다는 모멸적인 말까지 돌아오는 실정이다. 

 성 구매 경험이 있는 남성은 말할 것도 없을 테고, 나처럼 성 구매 경험이 없는 남성도 자신과 무관한 일이라며 사회에 만연한 성매매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앞으로도 성 구매할 생각은 없고 아마 어지간하면 반대의 입장이 될 일도 없을 것 같아 나와 상관 없는 일이라 선을 긋고 살아왔다. 타인의 문제를 내 일처럼 여기고 몰입하며 분개하기엔 내 앞가림도 버겁고 이런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야길 접하노라면 분노보다 절망이 앞설 뿐이다. 그렇게나 두텁게 체계화된 성매매 시스템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예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생각은 들었다. 어떤 기적이 벌어진 덕분이든 탈성매매 여성은 보다 자신감을 갖고 당당히 살아갔으면 했다. 그 긴 시간을 인내하고 살아남았고 눈치 싸움을 벌여왔고 심지어 비위도 좋은 당신들은 그 어떤 일이라도 잘할 수 있을 거라고, 꼭 술이나 몸을 파는 일이 아니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당신들은 견뎌냈고 살아남았을 뿐이라 생각할 수 있어도 내 눈엔 이미 살아남았다는 점에서 반 이상은 극복한 것으로 느껴졌으니까. 

 내가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이 대단히 주제 넘은 일일 수 있다. 하지만 그분들은 주제 넘든 아니든 누구에게나 위로와 격려의 말을 들을 자격이 있다는 생각도 든다. 꼭 그들이 어둡고 긴 터널을 통과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가족이나 친구에게도 외면당하거나,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조차 없는 일에 몸담은 적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모두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살아남길 원하고 절망스러우면 울고 과거를 후회하기도 하는 사람들... 그들이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치욕적인 경험을 했다 한들 나는 그분들이 나와 똑같은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사람 아래 사람 없고 사람 위에 사람 없다. 돈의 유무로 모든 것이 갈리는 자본주의 시장에서는 공허하게 들리는 말일 수 있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논리가 극한으로 적용된 성매매 업계는 필요악이니 뭐니 하는 말로 정당화될 수 없다. 업계라 불려서도 안 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여 매우 현장감 넘치는 이 책의 내용을 통해 나는 비로소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됐다. 성매매는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 아래 사람 없고 사람 위에 사람 없어야 하니까, 누군가 행복하면 누군가 고통 받는 것이 아무리 필연적인 일이라 하더라도 그 아이러니함은 점점 사라져야만 하니까 말이다. 

내 경험이 나를 갉아먹지 않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은 폭력을 폭력이라고 계속해서 말하는 것이다. - 40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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