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
이재웅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9.9 






 이 소설은 이복 누나를 제외한 모든 가족을 여읜 소년이 누나와 그녀의 정부가 사는 집에 얹혀 살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15살에 가출해 17살엔 룸살롱에서 인간 접시로, 19살엔 스트리퍼로, 23살엔 사창가를 전전하다가 그 다음해엔 자신의 빚을 갚아준 정부의 노예가 되어 아파트 단지에서 전문적인 매춘부로 지내고 있는 누나는 소년의 눈에 어떻게 비쳐졌을까? 소년은 처음 누나가 빚을 갚는 '용도불명'의 방에 있는 각종 도구를 바라보며 정확히는 몰라도 대강은 무슨 행위를 위한 방이고 누나가 무슨 일을 하는지 유추한다. 딱히 충격도 받지 않는다. 오히려 독자가 이러한 주인공의 담담한 시선에서 충격을 받는다. 소년은 자신을 늙은 소년이라 말하고 그 늙음의 기원이자 스승을 굳이 꼽자면 바로 '가난'이라 말한다.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아도 사실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누나를 바라보는 주인공의 시선은 복합적이다. 세상 사람들이 누나가 다리 벌려서 받은 돈으로 키운다고 욕하는 걸 주인공은 신경 쓰지 않는다. 다만 이미 폭력에 길들여졌고 하염없이 울고 동생의 정서를 걱정하며 정부인 곽호와 대립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소년은 혐오감과 안쓰러움을 느낄 뿐이다. 소년은 자신은 늙었다고 하지만 충격에 내성이 생겼을 뿐, 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없고 해결 방안이라고 제시하는 것도 현실적인 구석이 없으며 충동적이라 그가 겉늙었을 뿐 아직은 소년이긴 하다는 인상을 심어준다. 현재로서 모든 비극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곽호를 죽이면 다 해결될 일이지만, 그로 인해 감당해야 할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순수하게 느껴졌으니까. 


 눈물 없이 볼 수 없을 고통스러운 장면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던 소설이다. 주인공의 누나를 자신의 전용 매춘부로 두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기어코 '쪽바리들의 정액받이'로 넘겨버리겠다고 말한 곽호가 천벌을 받긴 할 것인지, 무력하지만 행동의 귀추 하나하나가 주목됐던 송봉권이나 작중 내내 끊임없이 수모를 겪던 소년의 누나와 소년이 어떤 결말을 맞이할 것인지 무척 궁금했기 때문이다. 중간중간 섹슈얼한 묘사가 있을수록 불쾌함과 비참함을 더하는 것은 직전에 읽은 <O 이야기>와 가장 다른 부분이었고 이 작품이 여성을 묘사하는 방식이 다소 전형적일지언정 하등 가볍거나 흥미 위주로 이뤄지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가난한 여성은 몸을 팔고 가난한 남성은 살인을 저지른다... 상투적인 설정과 전개지만 이 소설은 세상이 그 꼬라지로 돌아가는 원인과 가난한 당사자들이 세상을 증오할 수밖에 없는 이유와 소년이 희망을 품지 않는 이유 또한 개연성 있게 풀어낸다. 

 글쎄, 이 작품에서 주인공의 누나를 향한 여성 독자들의 감상은 과연 어떨는지 궁금하다. 그저 그런 섹슈얼한 캐릭터라기엔 동생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고 자애로워 나는 그녀에게 동정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타의와 더불어 자의로 인해 빚을 산더미처럼 불렸고 치명적인 오판으로 인해 매춘부의 신세를 면치 못하고 체념한 모습에 대해선 약간 이야기를 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두 번 다시 그쪽 일을 하지 않겠다 마음 먹어도 오래도록 몸에 익은 일과 어수룩한 경제 관념, 대인 관계 때문에 금방 빚에 허덕이는 모습, 심지어 주인공의 누나는 '사랑'에 너무 쉽게 빠져 풀릴 일도 그르쳐버린다는 단점 또한 갖고 있다. 물론 그 모든 걸 자업자득이라 말하기엔 수업료를 지나치게 잔인한 방식으로 지불하고 있지만...... 특유의 무력한 모습 때문에 동정 이외의 감정을 품기가 어렵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이 소설의 강점이자 단점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어떻게 보면 내가 이 소설에서 가장 주목한 캐릭터는 바로 곽호다. 그는 돈을 중요시하고 돈을 위해 자신이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세상이 다 그런 법'이라고 당당히 외치는 진정 쓰레기 같은 인물이다. 그 나름대로 세상을 거칠게 적응하며 살아왔을 테니 그런 극단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게 됐겠지만, 세상 핑계를 대면서 자신도 그런 세상을 만드는 이유 중 하나가 되어 주인공 남매를 괴롭히는 것은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다. 

 이 책을 둘러싼 사람들의 감상을 둘러보니 곽호도 은근히 동정하게 되는 캐릭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기껏 누나의 빚을 없앤 다음에 다시 지옥으로 떨어뜨리는 행보를 보인 쓰레기에게 도대체 어떻게 동정을 느끼는지 이해가 참 안 됐다. 자신의 사랑을 외면하고 돈을 들고 튄 누나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한다고 쳐도, 그럼에도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는 것은 어른으로서 보여야 할 태도가 아니었을까? 만약 그럼에도 누나가 곽호를 배신했다면 또 모를까, 자신이 갚아준 돈 그대로 자신에게 도로 갚으라고 태세를 전환하는 것은 악마도 고갤 저을 모습이라 생각됐다. 곽호가 빚을 갚아주자 그의 청혼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나 하고 있던 누나도 문제라면 문제지만, 결국 원흉은 곽호 혼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세상이 다 그런 법이라고 자신을 벌레 보듯 쳐다보는 소년의 시선에 응수하지만, 소년에게 죽임을 당할 빌미를 스스로 제공하고 그래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최악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본인은 알고 있을까? 아마 알고 있을 테지만, 다 떠나서 주인공의 누나를 향한 사랑이 배신당한 것을 배로 갚아주기 위해 그녀를 일본에 팔 계획까지 세운 것은 명백히 욕심 어린 행동으로 느껴졌다. 그야말로 소년으로선 이 세상은 증오하지 않고 싶어도 증오할 수밖에 없는 곳으로 인식하기에 충분한 계기였고, 소설의 결말은 어두워질 대로 어두워진 소년의 심상이 조만간 일을 내리란 암시를 준다. 스스로는 늙은 소년이라 칭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소년다웠던 주인공이 과도를 품고 곽호를 죽이려는 모습에선 그나마 남아있던 순수함이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야기의 고통스런 전개와 수위, 새삼스럽고 단선적인 주제의식은 여운보다 후유증을 크게 남긴다. 가난한 사람의 절망스러움이야 문학에서 한두 번 다뤄진 것도 아니고 도대체 답이 없는 이야기를 다 읽고서 세상을 전처럼 평안하게 바라보기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난 이 책을 첫 번째 읽었을 때 남긴 포스팅의 부제를 '몰라선 안 될 불쾌함'이라 적었지만 사실은 이런 이야기는 모르고 싶은 불쾌함에 해당한다고 본다. 


 그렇기에 이만큼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끈질기게 풀어내고 완결을 낸 저자가 존경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명확하게 해피엔딩을 그리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도 있지만, 작품 속의 등장인물들과 같은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직접 작품에 등장시키며 그걸 찾아 읽는 독자들의 존재가 이 세상을 조금은 더 괜찮게 바꾸지 않나 하는 막연한 생각도 든다. 곽호는 '세상이 다 그런 법'이라고 말하지만 그건 당신 생각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이 세상엔 많아져야 한다. 작품을 읽는 내내 나는 그런 어른이 되고 싶었고, 적어도 아이들에게 일부러 세상이 더럽다는 사실을 몸소 가르쳐주지 않는 어른이 돼야 한다고 단호하게 읊조리게 됐다. 

누구에게도 말은 안 했지만 난 이미 늙은 소년이었다. 나는 믿어야 할 말과 믿지 않아야 할 말을 구분할 줄 알았고, 항상 그러려고 노력했다. 누가 그것을 가르쳐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배웠다. 굳이 그 스승을 지명해야 한다면 ‘가난‘이었다. - 17p



난 한 번도 자유로운 적이 없었어.

그건 자유를 원하지 않을 만큼 충분히 자유롭기 때문이에요. 억지로 자유를 찾을 필요는 없어요. - 122p



맞아요. 사탄의 마음이에요. 나는 사탄이 좋아요. 사탄은 맨날 지고, 욕만 먹고, 쫓겨 다니기만 하잖아요. 선생님은 맨날 천사처럼 살아야 한다고 하지만 천사는 가난하지도 않고, 더러운 옷도 입지 않고, 저 하늘 위에서 웃을 일밖에 없는데 왜 제가 천사를 좋아해야 하죠? - 25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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