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산장 살인사건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7.8







 지금이야 아주 잘 나가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사실 우여곡절이 많은 작가였다. 데뷔한 지 30년이 넘고 펴낸 작품이 거의 100권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엄청난 다작 작가가 아닐 수 없는데 그렇다 보니 책을 고르는 입장에선 신중을 기해야만 한다. <명탐정의 규칙> 이전의 초기작, '갈릴레오' 시리즈로 위시되는 과학적 추리소설과 현재의 드라마틱한 사회파 추리소설로 삼분할 수 있을 듯하다. 여기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바로 작가의 초기작들이다. 작가의 방황이 10년에 걸쳐 녹아든 시기인 만큼 작가 이름만 믿고 접근했다간 실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 <백마산장 살인사건>은 굉장히 초기에 나온 작품이다. 몰랐는데 이 작가가 세 번째로 펴낸 작품이더라. 확실히 젋었을 적, 패기 넘치는 시절에 쓴 게 역력한 작품이긴 했다. 작가의 대표작인 <용의자 X의 헌신>, <백야행>,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등을 읽은 독자라면 이 작품의 양식이 낯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본격 추리소설이라니. 영락없는 코난, 김전일 같은 추리소설인데 작가의 다른 소설에 비하면 시시한 편에 속하지만 그래도 범작 이상은 한다. 평범해서 문제지.


 초기의 히가시노 게이고는 밀실이나 알리바이, 저택 같은 고전적인 소재의 추리소설로 성공하려는 야망이 있었다고 한다. 이 작품만 봐도 그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건 아주 전형적인 추리소설이다. 지금의 히가시노 게이고도 전형적이라는 얘기를 듣지만 여기서 말하는 전형성이란 작가 스스로가 만든 스타일 자체를 일컫는다. <백마산장 살인사건>이 전형적인 추리소설이라는 건, 이전에도 숱하게 읽었던 추리소설과 다를 바 없다는 얘기다. 한마디로 작가의 개성이 아직 발현되기 전의 작품이란 것이다.

 그래도 히가시노 게이고란 이름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그런대로 괜찮은 작품이다. 어쨌든 저택을 무대로 한 고전적인 추리소설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매력적이고 시리즈가 아닌 단독 작품임에도 캐릭터들이 나름 생동감이 있고 또 매력적이라서 그들의 여정을 쫓아가기에 모자람은 없었다.


 1년 전, 생전의 오빠가 죽은 장소인 산장을 찾은 나오코와 그녀의 친구 마코토. 밀실의 방 안에서 죽은 오빠는 살인이 아닌 자살로 처리됐는데 동생인 나오코 입장에서 아무래도 받아들일 수 없는 얘기다. 정확히 1년 뒤, 오빠가 죽기 전에 남긴 편지를 근거로 백마산장에 숨겨진 무언가를 찾으러 떠난 나오코는 그곳에서 연쇄 살인사건에 휘말린다.

 아까부터 전형적이라는 얘기를 질리도록 했는데 작품 자체의 독창성만 봤을 때는 제법 흥미를 돋우는 요소가 많다. 몇 년에 걸친 연쇄 살인사건의 내막이 일단 독자들로 하여금 궁금증이 일게 하고 범인의 정체와 동기, 그리고 무엇보다 백마산장 자체의 개성에도 눈길이 간다. 한 영국인이 지었다는 백마산장에는 방마다 영국의 전래 동요인 머더구스가 한 편씩 남겨져 있는데 이는 백마산장에 오는 손님들에게 수수께끼로써 다가온다.


 밀실 살인사건, 연쇄 살인, 암호. 이 작품을 요약하면 이렇다. 암호와 관련된 머더구스의 가사의 내용은 한국인인 나로서는 생소하기 그지없어 솔직히 시큰둥했다. 결국 주인공들과 함께 추리에 동참하기 보단 맹목적으로 따라가게 된 건 아쉬웠다. 수동적인 독서는 아쉬움을 남겼지만 그래도 후반부에서 밝혀지는 사건의 진상은 인상적이었다. 더불어 에필로그는 신의 한 수였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욕심은 참 덧없다니까.

 이렇게 보면 히가시노 게이고도 고전적인 추리소설을 나쁘지 않게 쓰긴 하는데 당시엔 작가로서 돈벌이도 안 되고 무엇보다 더 뛰어난 작가 - 노리즈키 린타로, 아리스가와 아리스... - 에 비하면 어딘가 어설프니 결국 회의감이 들었나 보다. 이후 작가는 <명탐정의 규칙> 이후로 전혀 다른 양식의, 혁신적인 추리소설을 잇달아 발표하는데 초기의 그의 작풍과 비교하면 정말 판이하다.


 히가시노 게이고를 처음 접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대표작부터 읽을 테니 이와 같은 초기작은 상대적으로 어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팬이라면, 히가시노 게이고에 지대한 관심이 생겼다면 초기작의 작품도 나쁘지 않게 읽힐 것이다. 좀 실망스러울 순 있어도 그 나름의 매력 또한 분명 갖고 있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기린의 날개 ㅣ 재인 가가 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0







 워낙 다작 작가인지라 이제 히가시노 게이고란 이름만 보고 작품을 읽을 수 없게 됐다. 처음 접했을 땐 대표작들만 읽어서 최고의 작가라 생각했지만 몇몇 범작을 접하니 차츰 무턱대고 골라선 안 된다는 경각심이 생기게 됐다. 그래도 히가시노 게이고는 아무리 못 써도 범작 정도니... 라고 생각했으나 최근 들어서는 그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렇지만 '가가 형사' 시리즈라면 얘기가 다르다. 데뷔한 지 30년이 넘었지만 가가 형사가 등장하는 작품은 10작품 정도라는 것에서 작가가 이 시리즈를 얼마나 공들여 쓰는가 짐작할 수 있다. 그 짐작은 틀린 적 없이 매 작품마다 안정적인 완성도를 자랑했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였다.


 도시 한복판에서 칼에 찔려 살해된 피해자, 그 죽음에 얽힌 진상을 파헤치려는 형사 가가의 얘기다. 사건의 양상은 무척 단순하고 유력한 용의자도 잡혀 사건은 금방 해결될 것 같았다. 비록 용의자는 의식 불명인 상황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피해자가 죽기 전의 행적이 조금씩 밝혀지자 수사 방향은 예상치 못한 곳으로 흐르게 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사회파 추리소설은 오랜만에 읽었다. 나는 이 작가 덕분에 사회파 추리소설을 처음 접했는데 그 당시에 느끼곤 했던 전율이 다시금 떠올라 읽으면서 참 반가웠다. 이제는 전형적인 느낌도 들고 또 심리 묘사가 너무 단순한 게 아니냐며 심드렁해 할 법도 한데 쉽사리 빈정대지 못하겠다. 아무래도 살인 사건과 마주한 가가 형사의 진정성 있는 태도에 감화됐기 때문인 것 같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말이 있는데 이 작품에 너무나 잘 맞는 말인 것 같다. 표면상으로 유력 용의자가 검거돼 논리적으로 동기를 추론해서 해결했다고 서류 작업을 해봤자 실상 끝나는 건 아무것도 없다. 기껏해야 형사들의 업무가 끝났을 뿐, 사건의 당사자들에게는 그 무엇도 끝나지 않은 것이다.

 추리소설이란 모름지기 범인을 잡으면 끝나는 소설이라고 인식했었던 나에게 위와 같은 가가 형사의 신념은 꽤 충격적이었다. 직업으로서의 형사와 인간으로서의 형사가 추구하는 가치가 완전히 다르고 후자의 형사야말로 사건을 진정으로 해결한다는 게 어린 나에게 꽤 남기는 바가 컸다.


 사실 이 작품은 이미 영화로 접했다. 도이 노부히로 연출에 아베 히로시 주연의 영화로 당시 드라마로 흥행에 성공한 '가가 형사' 시리즈를 완전히 대중에게 각인시킨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무튼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그 특유의 드라마를 워낙 잘 살린 덕에 원작마저 바래 보이게 만드는 느낌을 받곤 했다. 드라마 <유성의 인연>과 <신참자>, 그리고 이 작품 <기린의 날개>가 그랬다. 어디 가서 가독성 좋다는 얘긴 빠지지 않고 듣는 작가지만 그와 동시에 가독성밖에 없는 문장이라는 얘기도 심심치 않게 들리는 게 떠올랐다.

 확실히 히가시노 게이고는 문장력이 뛰어난 작가는 아니다. 이번에 그걸 제대로 느꼈다. 표현도 어딘가 상투적이고 심리 묘사도 겉만 핥는 식으로 싱겁다. 하필 영화를 먼저 봐서 - 이게 다 소설이 늦게 번역 출간됐기 때문이다... - 여러모로 비교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러한 작가의 단점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작가의 장기인 스토리 텔링, 설정, 주제의식의 진가를 깎을 정도는 아니지만 전에 없이 눈에 밟혀 괜히 안타까웠다.


 유달리 단점을 인식하긴 했어도 작가의 장점 또한 역할을 다했다. 살인 사건을 둘러싼 인간미 있는 접근은 역시 사회파 추리소설의 귀감이 될 만했다. 혹자는 미스터리와 반전이 약하다고 하던데 나는 분량 분배가 미흡한 것을 제외하면 추리소설로도 충분히 만족하며 읽을 수 있었다. 띠지에서처럼 '가가 형사' 시리즈 최고의 걸작이라고는 못하겠지만 사건을 진정으로 해결하려는 가가 형사의 노력 덕분에 작품은 예측불가하게 전개됐다. 얼핏 보면 단순하게만 보이는 사건에 저렇게 복잡한 이면이 숨겨졌다는 것과 그를 밝히는 과정이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는 사회파 추리소설이란 형식과 연동된 재미라서, 한마디로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은 몰입도를 선사해서 읽는 내내 흥미진진했다.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감동이 녹아든 반전과 결말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아주 좋았다. 누구는 신파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정도면 그렇게 심하지 않다. 무미건조한 편에 속하는 작가의 문장 덕분인진 모르겠는데 모르긴 몰라도 눈물을 짜내기 위해 애쓰는 기색은 읽어낼 수 없었다. 부성애와 후회, 소통 없이 단절된 가족 관계가 긴밀하게 연결됐고 아이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심지 못하는 모든 어른을 겨냥한 일침은 특히 기억에 남았다.


 물론 이런 요소가 작가의 다른 작품들 어딘가에서 한 번쯤 본 것 같아 좀 식상한 감이 없지않아 있긴 했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 그렇게 심드렁하진 않다. 어쨌든 작가의 장기가 빈틈없이 녹아들었고 게다가 주인공이 있는 시리즈물다운 주인공의 개인사도 적잖이 개입시키는 등 전체적으로 볼거리가 풍성해 즐기기에 부족함이랄 게 없었다.

 '가가 형사' 시리즈의 9번째 작품까지 읽어봤다. 일본에는 10번째 작품까지 나온 걸로 알고 있는데... 언제 나오든 기다리고 있겠다. 반드시 읽을 용의가 있으니.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 243p




살인 사건이란 게 암세포와 같아서 일단 생겼다 하면 그 고통이 주위로 번진단 말이지. 범인이 잡히든 수사가 종결되든, 그 고통에 의한 침식을 막기가 어려워. - 249p




가가 씨가 본 것은 시체지 살아 있는 사람의 죽음이 아니에요. 저는 죽어 가는 사람들을 수없이 봐왔어요.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 사람은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죠. 자존심이나 의지 같은 것을 다 버리고 자신의 마지막 소원과 마주하게 돼요. 그런 그들의 마지막 메시지를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의무예요. - 313p




공식을 기억하면 여러 가지 문제를 풀 수 있죠. 그런데 처음에 잘못 기억하면 똑같은 실수를 계속 반복하게 됩니다. - 363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속초에서의 겨울
엘리자 수아 뒤사팽 지음, 이상해 옮김 / 북레시피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7.3







 한국인 어머니와 프랑스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작가 엘리자 수아 뒤사팽이 자전적인 이야기를 풀어낸 소설이다. 혼혈로서 겪어야 했던 필연적인 정체성 혼란을 속초에서의 기묘한 사랑 이야기로 발현해냈다. 쉽게 설명하면 이런 내용인데... 대부분의 프랑스 소설이 그렇듯 이 작품도 난해한 구석이 적잖았다. 그리고 그 이전에 한국인으로서 느낄 수밖에 없는 어색함도 있어 조금 아쉬웠다.

 실제 저자는 프랑스에서 살았지만 작품 속 주인공은 속초에서 사는 것으로 변경했다. 이런 설정은 나름 인상적이긴 한데 정서적으로 와 닿거나 혹은 실질적으로 전달된 바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건 그냥 혼혈인 주인공이 얀 케랑이라는 만화가와 교감을 나누는 이야기다. 부분적으로는 혼혈만이 가질 수 있는 시각이 드러나 흥미롭긴 했지만 그게 작품 속에서 겉도는 느낌이 있었다. 사랑 이야기 자체도 지지부진한 편에 속하는데 괜히 애매하게 정체성 이야기와 결부시키다 보니 이도 저도 아니게 된 것 같다.


 글쎄, 작가가 작품 속에 자전적인 요소를 얼마든지 넣어도 상관 없다고 본다. 중요한 건 작품에 결정적으로 필요한 요소였는가의 여부인 것 같다. 냉정하게 말하면 작가의 사정 같은 건 독자 입장에선 아무래도 좋은 것이고 요는 작품의 완성도와 설득력이다. 작중의 한국에 관한 묘사가 한국적이지 않고 다분히 외국인의 시선인 것만 같았던 건 기분 탓이라 치부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야기의 무대가 꼭 한국이어야 할 당위성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럼 한국이면 안 될 당위성이 있냐고 묻는다면 나는 작가에게 익숙한 요소일수록 작품이 자연스러워진다고 대답하겠다. 작가조차도 낯설어 하는 무대를 얘기해봐야 어설프게 보일 뿐이다. 이 작품에 국한된 얘기는 아닌데 아무튼 시도에 비해 성과는 미미해 읽는 내내 어딘가 답답했다.

 속초는 최근에 여행을 간 적이 있어 - 하필 그때 여행 시기가 겨울이었다. - 제목에 눈에 띈 책이었다. 무슨 얘기일까 싶어 읽었는데 예상 외의 정경이 펼쳐져 의외였다. 확실히 겨울의 속초는 황량한 데가 있었다. 나쁘지 않은 장소 선정인데 작중에서의 묘사는 크게 두드러지지 못했다. 프랑스의 노르망디와 동일선상에 놓고 뭔가 의미를 찾아내긴 했는데 이거야말로 지극히 외국인스러워서 거리감이 있었다. 번역의 문젠가? 어째 하나같이 시큰둥하기 그지없었다.


 친구 중에 속초가 고향인 녀석이 있는데 괜히 또 들러보고 - 겨울에 간 것도 친구 때문이었다. - 싶었다. 여름은 또 어떤 풍경일지. 뜬금 없지만... 이런 말이 아니고서야 이 할 말 없는 책에 대한 감상을 끝맺을 방법이 없는 것 같다. 어떤 식으로라도 추천하기 애매한 작품은 곤혹스럽다.

결국, 글쓰기는 내가 현실에서 찾아내지 못한 거처를 창조해내는 방법이었던 것 같다. 모든 경계 너머에서 모든 공간이 동일할 수 있고 모든 상상이 가능한 그런 거처 말이다. - 6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밤의 매미 ㅣ 엔시 씨와 나 시리즈 2
기타무라 가오루 지음, 정경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7년 6월
평점 :
품절


7.6








 아주 반갑게도 <하늘을 나는 말>의 후속편이 금방 출간됐다. 유명세에 비해 출간 소식이 없어 늘 궁금증을 자아냈던 시리즈의 1, 2편이 연이어 출간되니 기쁘기 그지없다. 아무래도 일본 전통 예능인 라쿠고가 작품 속에 상당 부분 인용돼 내용 이해에 애로사항이 없지않아 있지만 감성적 문체와 뜻밖의 미스터리가 있어 읽는 맛이 있었는데 이렇게 금방 후속작을 만나니 반가웠다.

 기타무라 가오루의 '엔시 씨와 나' 시리즈는 일본 추리소설계에서 상징하는 바가 크다. 살인사건이 등장하지 않고도 추리소설이 추리소설로서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은 100년 전부터 증명됐지만 여전히 사람들에게 추리소설은 곧 살인사건이 등장하는 소설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도 그렇고 '셜록 홈즈' 시리즈에도 살인사건이 등장하지 않는 작품이 있는데 말이다.


 그런 와중에 기타무라 가오루의 '밤의 매미'가 일본추리작가협회상(단편)을 수상한 건 그야말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살인사건이 없는 추리소설이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 의미가 남다르다.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이 상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수상작들이 추리소설답지 않은 게 좀 걸리긴 했지만 어쨌든 이름 있는 상을 탔다니 기대를 안 할 수가 없었다.

 이 책에는 표제작이자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인 '밤의 매미'를 비롯해 2편의 일상 미스터리 작품이 수록됐다. 전편 못지않은 유려한 문체로 진행되는 작품들이었다. 추리소설이라고 인식을 않고 읽었더라면 영락없는 성장 소설로 읽었을지도 모르겠다. 방금 위에서 말했지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답게 전형적인 추리소설과는 판이한 작풍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 전에 작가가 남자라는 얘길 안 들었다면 반드시 여성 작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작가가 끝까지 복면 작가로 활동했다면 지금까지도 여성 작가로 오해를 받지 않았을까 싶다.


 정확히 어떤 부분 때문이라고 짚을 순 없는데 개인적으로 전편인 <하늘을 나는 말>이 더 재밌었다. 역자 후기나 다른 사람 평에선 전편보다 진일보했다고 하는데 나는 자기 복제 수준이 아닌가 싶을 만큼 비슷하게 읽혔다. 오히려 감성과 주인공인 '나'의 성장에 초점을 두느라 미스터리가 옅어진 것 같아 아쉽기까지 했다. 어쩌면 최근 들어 일상이 급변해 감성을 즐길 여력이 없는 내 개인적 상황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전편보다 몰입은 잘 이뤄지지 않았다.

 다만, 이런 성격의 작품은 대게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르게 읽힐 것 같은 느낌'을 주곤 하는데 이 작품도 마찬가지였다. 포장하고자 하는 말은 아닌데, 여타 추리소설이 '재독할 여지를 주지 못한다'는 통념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에 비하면 이 작품 <밤의 매미>의 인상은 가볍게 넘길 만한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읽은 기타무라 가오루의 소설은 <달의 사막을 사박사박>, '시간과 사람' 3부작의 <스킵>, 그리고 이 작품의 전작 <하늘을 달리는 말>이 전부다. 그리 많이 읽진 않았지만 읽을 때마다 예외 없이 이 작가가 추리소설가치곤 유달리 감성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추리소설, 특히 이 작품과 같은 일상 미스터리 작품도 수위가 세고 냉소적인 작풍이 많은 것을 보면 분명 이질적인 요소긴 하다.

 30년 전에 출간됐을 당시엔 어마어마한 족적을 남긴 시리즈지만 현재의 독자에게 큰 인상을 남기기엔 애매한 부분 또한 있다. 보다 혁신적이고 현대의 감성에 맞는 작품과 동렬에 놓으면 과연 두드러지는 인상을 남길 수 있을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일반적인 추리소설과는 전혀 다른 맥락의 정경을 갖춘 점, 그리고 허투루 쓴 추리소설이 아니라는 점에서 접근할 가치는 충분하다고 못을 박고 싶다. 너무 의의를 따지는 게 아닌가 싶지만, 일반적인 추리소설의 통념을 따르지 않기에 한 사람의 추리소설 애독자로서 도무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후속작은 어떨까? 좀 더 강렬한 사건이 등장한다는 얘길 들었는데 지금까지 보인 작풍으로 어떻게 묘사할 것인지 궁금하긴 하다. 더불어 지금까지 접한 작가의 작품에서도 그렇게 자극적인 요소가 등장하지 않았기에 새로운 시도가 걱정되기도 한다. 과연 어떨지...



 p.s 히가시노 게이고의 <비밀>, 이사카 코타로의 <사신 치바>, 사쿠라바 가즈키의 <아카쿠치바 전설>, 호시 신이치의 <망상은행>, 고마츠 사쿄의 <일본침몰>, 가노 도모코의 <유리기린>, 나카지마 라모의 <가다라의 돼지>, 다카노 가즈아키의 <제노사이드>, 야마다 무네키의 <백년법>... 이 작품들의 공통점은 다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이라는 것이다. 한 작품이라도 읽어 본 사람들은 상당히 의아할 것이다. 이런 수상작을 읽으면 한 번이라도 추리소설을 쓴 적 있는 작가의 작품이거나, 혹은 미스터리가 어떤 식으로든 포함되면 상을 주는 건가 싶다. 모든 수상작이 다 그렇진 않지만 종종 그런 의문이 드는 작품이 있다. 중요한 건 추리소설이건 뭐건 재밌게 읽힌다는 것이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현청접대과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2
아리카와 히로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9.1






 


 일본은 '현'이라는 지역 단위로 이뤄진 나라다. 현은 우리나라의 중앙 집권형 발전과 달리 일본 특유의 지방 분권형 발전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뭔가 말을 어렵게 하고 있는데, 한마디로 각각의 고장이 개성적이라는 것이다. 현끼리 개성을 내세우며 발전하는 게 일본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렇다 보니 일본은 '현민주의'를 가진, 이른바 애향심이 강한 사람이 많다고 한다. 서울로 상경하는 사람이 많듯 일본도 사람들이 도쿄로 상경하는 추세가 있긴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고 자란 고향에 대한 애정도 상당한 것은 일본 소설에서 자주 묘사된다. 우리나라 수도권의 지나친 인구 집중을 다룬 기사를 떠올리면 이런 일본의 모습은 그저 신기할 뿐이다.

 작품은 고치 현청에서 새로 발족한 접대과가 관광 사업에 팔을 걷어붙이며 시작된다. 고치가 어디냐면, 일본의 주요 섬 4개 중 가장 작은 시코쿠 섬에서 남쪽에 위치한 변방의 현이다. 그 유명한 사카모토 료마와 '호빵맨'의 저자인 야나세 다카시의 고향이라지만 실상은 낙후된 현으로 특히 관광 분야에서 처참한 성과를 거듭했다고 한다. 관광객을 손님처럼 접대한다는 의미에서 지은 이름의 접대과는 고치 현청에서 호기롭게 신설됐지만 그래봤자 공무원인 과원들은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속된 말로 '뻘짓'을 일삼는다.


 고치 현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접대과를 무대로 한 이 작품은 고치 출신의 저자 아리카와 히로가 고향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만든 소설이다. 관광객 유치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공무원들의 이야기가 과연 재밌을까 싶지만 <도서관 전쟁>으로 유명세를 떨쳤던 작가의 전적이 무색하지 않게 꽤 흥미진진하게 읽혔다.

 일본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은 듯 초반부에서 공무원들이 보인 모습은 그리 낯설지 않았다. 현실 감각이 결여된 채 오로지 예산과 윗사람의 눈치를 보다 본말이 전도되는 상황을 보노라니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새어 나왔다.

 그러니까 공무원이란...

 안정된 직장의 공무원들을 둘러싼 비아냥이 이렇게 와 닿기도 힘들 것이다. 아무튼 이 답도 없는 접대과가 과연 외화 벌이에 성공할 수 있을까? 주인공 가케미즈를 비롯한 공무원들 행태를 보면 불가능하게 보이지만 몇몇 조력자의 등장으로 일은 점차 희망적으로 흘러간다.


 문장이나 심리 묘사는 어딘지 유치한 구석이 있지만 관광 사업에 대한 고찰만큼은 정말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뼈아플 만큼 지적되는 공무원들의 실태는 현실에만 안주하며 제 밥그릇만 챙기다 일을 그르치는 바람직하지 못한 세태를 꼬집기에 이른다. 하물며 관광객 유치는 진정 관광객을 위하지 않고서는 성립할 수 없다. 절대 탁상공론만으로 이뤄질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다 읽으니 이야기의 무대인 고치에 여행 가고 싶어졌다. 작가의 고향 사랑이 잘 반영된 덕분이리라. 산지가 많아 개발을 못해 '자연밖에 없다'는 평을 듣는 고치가 그 '자연밖에 없다'는 점을 내세워 관광객 유치의 발판으로 삼는다는 등 고치라서 펼칠 수 있는 시도들이 재미있었다. 비록 성사하지 못했지만 과거 서일본 최초로 동물원에 판다를 들이자는 입안부터 작중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기발했다.


 나는 서울이 고향인 서울 촌놈으로 서울을 벗어나 산 적이 없기 때문에 작품 속 내용을 온전히 공감할 수는 없었다. 그중 애향심은 내게 가장 동떨어진 감정 중 하나다. 이건 서울 사람이라면 대부분 그렇지 않을까? 모르긴 몰라도 상경한다는 개념이 아예 없다시피 한 서울 출신의 사람들에게 고향에 대한 특별한 애착은 어지간히 갖기 힘든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작중 등장인물의 목적의식을 오로지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측면에서 쉽게 몰입할 수 있었던 건 참 놀라운 일이다.

 일본을 여행하면 대도시보다 오히려 변방의, 나아가서 시골을 돌아다닐 때 더 재밌는 경우가 많다. 그건 내가 외국인이라서 그런 것일  수 있겠지만 나는 해당 지방의 사람들이 정성껏 가꾼 도시의 모습이 유독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라고 항변하고 싶다. 결국 똑같이 관광객을 위한 일이지만 관광객으로서 그 고장의 매력을 극대화하는 전략에 더 눈길이 가는 것이다.


 읽으면서 우리나라의 관광 사업의 현황이 궁금했다. 내가 한국인이라 그런지 몰라도 경제 부흥에 따른 번화가와 쇼핑을 제외하면 우리나라의 매력을 잘 어필하지 못하는 것 같다. JTBC 방송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서 장위안이 '서울 말고 한국의 시골은 외국인으로서 여행하기 두렵다'고 한 게 기억난다. 나도 우리나라를 그렇게 많이 돌아다니지 않았지만 - 기껏해야 부산이나 전주 정도? 군산이랑 속초, 울산도 기억난다. - 갈 때마다 솔직한 심정으로 외국 여행을 할 때처럼 흥미가 일진 않았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국내여행과 해외여행의 차이일 수 있으나 그를 감안하더라도 어딘지 획일화돤 모습을 느끼곤 했다...

 세계적인 관광 대국으로 명성이 자자한 일본을 무조건 찬양하자는 건 아니지만, 작품 속 낙후 도시에서 태동하는 관광 사업의 모습은 어떻게든 본받을 만했다. 당장 책으로 읽어도 고치에 가보고 싶어진 것만 봐도 그렇다. 이는 내가 좀처럼 갖지 못할 작가의 애향심에 끌린 결과일 텐데 그러고 보면 그 애향심이란 게 정말 대단하구나 싶었다. 그런 소중하고도 바람직한 마음이 모여 이룩해낸 작중의 관광 사업의 모양새는 읽는 내가 다 흐뭇했다. 약간 이상한 투정일 수도 있는데 잠시나마 내가 대도시 출신인 게 재미없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리카와 히로의 작품은 <백수 알바 내 집 장만기> 이후로 두 번째로 접했다. 그 유명한 <도서관 전쟁>은 영화로 접했는데 작풍이 내가 읽은 작가의 책들과는 전혀 달랐다. 사쿠라바 가즈키처럼 여러 작풍을 소화하는 것 같은데 작가의 다른 작품은 또 어떤지... 기대가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