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의 날개 재인 가가 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7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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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워낙 다작 작가인지라 이제 히가시노 게이고란 이름만 보고 작품을 읽을 수 없게 됐다. 처음 접했을 땐 대표작들만 읽어서 최고의 작가라 생각했지만 몇몇 범작을 접하니 차츰 무턱대고 골라선 안 된다는 경각심이 생기게 됐다. 그래도 히가시노 게이고는 아무리 못 써도 범작 정도니... 라고 생각했으나 최근 들어서는 그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렇지만 '가가 형사' 시리즈라면 얘기가 다르다. 데뷔한 지 30년이 넘었지만 가가 형사가 등장하는 작품은 10작품 정도라는 것에서 작가가 이 시리즈를 얼마나 공들여 쓰는가 짐작할 수 있다. 그 짐작은 틀린 적 없이 매 작품마다 안정적인 완성도를 자랑했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였다.


 도시 한복판에서 칼에 찔려 살해된 피해자, 그 죽음에 얽힌 진상을 파헤치려는 형사 가가의 얘기다. 사건의 양상은 무척 단순하고 유력한 용의자도 잡혀 사건은 금방 해결될 것 같았다. 비록 용의자는 의식 불명인 상황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피해자가 죽기 전의 행적이 조금씩 밝혀지자 수사 방향은 예상치 못한 곳으로 흐르게 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사회파 추리소설은 오랜만에 읽었다. 나는 이 작가 덕분에 사회파 추리소설을 처음 접했는데 그 당시에 느끼곤 했던 전율이 다시금 떠올라 읽으면서 참 반가웠다. 이제는 전형적인 느낌도 들고 또 심리 묘사가 너무 단순한 게 아니냐며 심드렁해 할 법도 한데 쉽사리 빈정대지 못하겠다. 아무래도 살인 사건과 마주한 가가 형사의 진정성 있는 태도에 감화됐기 때문인 것 같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말이 있는데 이 작품에 너무나 잘 맞는 말인 것 같다. 표면상으로 유력 용의자가 검거돼 논리적으로 동기를 추론해서 해결했다고 서류 작업을 해봤자 실상 끝나는 건 아무것도 없다. 기껏해야 형사들의 업무가 끝났을 뿐, 사건의 당사자들에게는 그 무엇도 끝나지 않은 것이다.

 추리소설이란 모름지기 범인을 잡으면 끝나는 소설이라고 인식했었던 나에게 위와 같은 가가 형사의 신념은 꽤 충격적이었다. 직업으로서의 형사와 인간으로서의 형사가 추구하는 가치가 완전히 다르고 후자의 형사야말로 사건을 진정으로 해결한다는 게 어린 나에게 꽤 남기는 바가 컸다.


 사실 이 작품은 이미 영화로 접했다. 도이 노부히로 연출에 아베 히로시 주연의 영화로 당시 드라마로 흥행에 성공한 '가가 형사' 시리즈를 완전히 대중에게 각인시킨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무튼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그 특유의 드라마를 워낙 잘 살린 덕에 원작마저 바래 보이게 만드는 느낌을 받곤 했다. 드라마 <유성의 인연>과 <신참자>, 그리고 이 작품 <기린의 날개>가 그랬다. 어디 가서 가독성 좋다는 얘긴 빠지지 않고 듣는 작가지만 그와 동시에 가독성밖에 없는 문장이라는 얘기도 심심치 않게 들리는 게 떠올랐다.

 확실히 히가시노 게이고는 문장력이 뛰어난 작가는 아니다. 이번에 그걸 제대로 느꼈다. 표현도 어딘가 상투적이고 심리 묘사도 겉만 핥는 식으로 싱겁다. 하필 영화를 먼저 봐서 - 이게 다 소설이 늦게 번역 출간됐기 때문이다... - 여러모로 비교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러한 작가의 단점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작가의 장기인 스토리 텔링, 설정, 주제의식의 진가를 깎을 정도는 아니지만 전에 없이 눈에 밟혀 괜히 안타까웠다.


 유달리 단점을 인식하긴 했어도 작가의 장점 또한 역할을 다했다. 살인 사건을 둘러싼 인간미 있는 접근은 역시 사회파 추리소설의 귀감이 될 만했다. 혹자는 미스터리와 반전이 약하다고 하던데 나는 분량 분배가 미흡한 것을 제외하면 추리소설로도 충분히 만족하며 읽을 수 있었다. 띠지에서처럼 '가가 형사' 시리즈 최고의 걸작이라고는 못하겠지만 사건을 진정으로 해결하려는 가가 형사의 노력 덕분에 작품은 예측불가하게 전개됐다. 얼핏 보면 단순하게만 보이는 사건에 저렇게 복잡한 이면이 숨겨졌다는 것과 그를 밝히는 과정이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는 사회파 추리소설이란 형식과 연동된 재미라서, 한마디로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은 몰입도를 선사해서 읽는 내내 흥미진진했다.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감동이 녹아든 반전과 결말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아주 좋았다. 누구는 신파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정도면 그렇게 심하지 않다. 무미건조한 편에 속하는 작가의 문장 덕분인진 모르겠는데 모르긴 몰라도 눈물을 짜내기 위해 애쓰는 기색은 읽어낼 수 없었다. 부성애와 후회, 소통 없이 단절된 가족 관계가 긴밀하게 연결됐고 아이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심지 못하는 모든 어른을 겨냥한 일침은 특히 기억에 남았다.


 물론 이런 요소가 작가의 다른 작품들 어딘가에서 한 번쯤 본 것 같아 좀 식상한 감이 없지않아 있긴 했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 그렇게 심드렁하진 않다. 어쨌든 작가의 장기가 빈틈없이 녹아들었고 게다가 주인공이 있는 시리즈물다운 주인공의 개인사도 적잖이 개입시키는 등 전체적으로 볼거리가 풍성해 즐기기에 부족함이랄 게 없었다.

 '가가 형사' 시리즈의 9번째 작품까지 읽어봤다. 일본에는 10번째 작품까지 나온 걸로 알고 있는데... 언제 나오든 기다리고 있겠다. 반드시 읽을 용의가 있으니.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 243p




살인 사건이란 게 암세포와 같아서 일단 생겼다 하면 그 고통이 주위로 번진단 말이지. 범인이 잡히든 수사가 종결되든, 그 고통에 의한 침식을 막기가 어려워. - 249p




가가 씨가 본 것은 시체지 살아 있는 사람의 죽음이 아니에요. 저는 죽어 가는 사람들을 수없이 봐왔어요.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 사람은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죠. 자존심이나 의지 같은 것을 다 버리고 자신의 마지막 소원과 마주하게 돼요. 그런 그들의 마지막 메시지를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의무예요. - 313p




공식을 기억하면 여러 가지 문제를 풀 수 있죠. 그런데 처음에 잘못 기억하면 똑같은 실수를 계속 반복하게 됩니다. - 36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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