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산장 살인사건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7.8







 지금이야 아주 잘 나가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사실 우여곡절이 많은 작가였다. 데뷔한 지 30년이 넘고 펴낸 작품이 거의 100권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엄청난 다작 작가가 아닐 수 없는데 그렇다 보니 책을 고르는 입장에선 신중을 기해야만 한다. <명탐정의 규칙> 이전의 초기작, '갈릴레오' 시리즈로 위시되는 과학적 추리소설과 현재의 드라마틱한 사회파 추리소설로 삼분할 수 있을 듯하다. 여기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바로 작가의 초기작들이다. 작가의 방황이 10년에 걸쳐 녹아든 시기인 만큼 작가 이름만 믿고 접근했다간 실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 <백마산장 살인사건>은 굉장히 초기에 나온 작품이다. 몰랐는데 이 작가가 세 번째로 펴낸 작품이더라. 확실히 젋었을 적, 패기 넘치는 시절에 쓴 게 역력한 작품이긴 했다. 작가의 대표작인 <용의자 X의 헌신>, <백야행>,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등을 읽은 독자라면 이 작품의 양식이 낯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본격 추리소설이라니. 영락없는 코난, 김전일 같은 추리소설인데 작가의 다른 소설에 비하면 시시한 편에 속하지만 그래도 범작 이상은 한다. 평범해서 문제지.


 초기의 히가시노 게이고는 밀실이나 알리바이, 저택 같은 고전적인 소재의 추리소설로 성공하려는 야망이 있었다고 한다. 이 작품만 봐도 그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건 아주 전형적인 추리소설이다. 지금의 히가시노 게이고도 전형적이라는 얘기를 듣지만 여기서 말하는 전형성이란 작가 스스로가 만든 스타일 자체를 일컫는다. <백마산장 살인사건>이 전형적인 추리소설이라는 건, 이전에도 숱하게 읽었던 추리소설과 다를 바 없다는 얘기다. 한마디로 작가의 개성이 아직 발현되기 전의 작품이란 것이다.

 그래도 히가시노 게이고란 이름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그런대로 괜찮은 작품이다. 어쨌든 저택을 무대로 한 고전적인 추리소설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매력적이고 시리즈가 아닌 단독 작품임에도 캐릭터들이 나름 생동감이 있고 또 매력적이라서 그들의 여정을 쫓아가기에 모자람은 없었다.


 1년 전, 생전의 오빠가 죽은 장소인 산장을 찾은 나오코와 그녀의 친구 마코토. 밀실의 방 안에서 죽은 오빠는 살인이 아닌 자살로 처리됐는데 동생인 나오코 입장에서 아무래도 받아들일 수 없는 얘기다. 정확히 1년 뒤, 오빠가 죽기 전에 남긴 편지를 근거로 백마산장에 숨겨진 무언가를 찾으러 떠난 나오코는 그곳에서 연쇄 살인사건에 휘말린다.

 아까부터 전형적이라는 얘기를 질리도록 했는데 작품 자체의 독창성만 봤을 때는 제법 흥미를 돋우는 요소가 많다. 몇 년에 걸친 연쇄 살인사건의 내막이 일단 독자들로 하여금 궁금증이 일게 하고 범인의 정체와 동기, 그리고 무엇보다 백마산장 자체의 개성에도 눈길이 간다. 한 영국인이 지었다는 백마산장에는 방마다 영국의 전래 동요인 머더구스가 한 편씩 남겨져 있는데 이는 백마산장에 오는 손님들에게 수수께끼로써 다가온다.


 밀실 살인사건, 연쇄 살인, 암호. 이 작품을 요약하면 이렇다. 암호와 관련된 머더구스의 가사의 내용은 한국인인 나로서는 생소하기 그지없어 솔직히 시큰둥했다. 결국 주인공들과 함께 추리에 동참하기 보단 맹목적으로 따라가게 된 건 아쉬웠다. 수동적인 독서는 아쉬움을 남겼지만 그래도 후반부에서 밝혀지는 사건의 진상은 인상적이었다. 더불어 에필로그는 신의 한 수였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욕심은 참 덧없다니까.

 이렇게 보면 히가시노 게이고도 고전적인 추리소설을 나쁘지 않게 쓰긴 하는데 당시엔 작가로서 돈벌이도 안 되고 무엇보다 더 뛰어난 작가 - 노리즈키 린타로, 아리스가와 아리스... - 에 비하면 어딘가 어설프니 결국 회의감이 들었나 보다. 이후 작가는 <명탐정의 규칙> 이후로 전혀 다른 양식의, 혁신적인 추리소설을 잇달아 발표하는데 초기의 그의 작풍과 비교하면 정말 판이하다.


 히가시노 게이고를 처음 접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대표작부터 읽을 테니 이와 같은 초기작은 상대적으로 어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팬이라면, 히가시노 게이고에 지대한 관심이 생겼다면 초기작의 작품도 나쁘지 않게 읽힐 것이다. 좀 실망스러울 순 있어도 그 나름의 매력 또한 분명 갖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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