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ㅣ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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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난 '맘충'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냥 막연하게 '마마보이'보다 상위 버전의 욕일 거라고 짐작했다. 굳이 풀이하자면 엄마 찾는 벌레정도려나 싶었다. 설마 벌레라고 가리키는 대상이 엄마일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실제로 저자가 지나가는 남자한테서 맘충이란 욕을 들었을 때 구상이 시작됐다는 이 소설은 지극히 여성의 시각에 입각한 소설이다. 이런 부분은 남성 독자인 입장에서 아주 낯선 것이었다. 불편함 이전에 낯섦이 더 컸다. 특히 급식을 먹을 때 출석 번호가 뒷자리인 여학생이 불이익을 받는 것이나 사호한 호의에 착각해서 덤벼드는 남자에 대한 무서움 등은 이 작품을 읽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체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책은 특성상 대부분의 여성의 공감을 샀지만 어떤 남성들에겐 공분을 사고 있다고 한다. 주인공 김지영의 일생을 엿보노라면 그야말로 우리나라에서 여성이 어떤 식으로 차별받고 사는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그리고 어떤 남자 독자는 바로 이 부분에 동의를 하지 않는 모양이다. 여성으로서의 삶에서 각종 안 좋은 면만 긁어모아 특정 성별에 대한 적개심이나 동정심을 조장한다고 난리를 치던 글을 읽었는데 나 역시 같은 남자이거늘 크게 공감할 수 없는 말이다.

 이 소설이 제법 직설적이고 작정하고 만들어진 페미니즘 작품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대개 이런 경우엔 일말의 불편함을 남기기 마련이다. 더구나 이 작품에서 간간이 고갤 드는 통계 수치나 의도가 명확한 전개는  실험적이거나 뻔해서 도리어 반감이 들 법도 했다. 이런 형식적인 요소들을 문제 삼는다면 이래저래 불편한 소설이긴 했다.


 작품 뒤에 실린 해설에선 평범함을 추구하여 독창성을 가진다며 이 소설을 일컫는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건 정말이지 여성이라서 쓸 수 있는 가장 평범하지만 가장 얘기되지 않았던 일상적인 이야기를 그리고 있었다. 이건 내가 경험한 적 없는 일상이다. 그리고 분명한 건 절대 공격적이지 않았다. 작중에서 김지영을 좌절케 하는 주체적 대상들은 전부 남성이지만 그게 곧 남성에 대한 적대심으로 해석되지 않은 것이다. 그럼 왜 전부 남성인가? 왜 남성만 김지영을 괴롭게 하는 역할인가? 이렇게 묻는 사람은 정말 몰라서 묻는 걸까?

 당사자라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이란 게 있다. 난 <82년생 김지영>이 과장됐다고 하는 이야기가 정말 이해가 안 된다. 차라리 이 소설이 중립적이지 않다는 말은 이해할 수 있다. 결혼과 출산의 과정에서 김지영에게 의지가 되고자 한 남편이 김지영에게 면박을 당하고 김지영의 불평등한 기분을 더욱 돋우는 존재로 그려진 부분이 다소 이성적이지 못했던 것은 살짝 마음에 걸렸으니까.


 최근 혐오라는 개념이 인지되면서 이상하게 더욱 격화되는 것 같다. 특히 한쪽 성이 다른 성을 혐오하는 모양새는 예전보다 더욱 극렬하다. 난 이런 혐오의 근원에는 타자에 대한 무심함과 무지함이 자리하고 있다고 보는데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면서 이 무심함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가를 새삼 깨달았다. 여성으로 태어나서 처하게 된 상황, 처하게 될 상황에 집중하고 풀어낸 소설이 그간 페미니스트라 자칭했던 나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들었다. 남자와 여자는 다르지 않기에 남자가 여자를 안다고 말한다는 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얘기였는지... 정말이지 무심함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아주 술술 읽히고, 여성의 현황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었고, 심지어 간만에 울컥하게 만든 소설이었다. 여성 차별이란 키워드에 집중하니 소설 전개 방식이 토막난 경향이 있지만 그 일관된 주제의식이 또 집중을 높여줬다. 한마디로 집약적이었다고나 할까. 이 소설은 여성의 처지가 현재진행형임을 아주 잘 시사하며 그 어떤 페미니스트 서적보다 흡입력이 강했다.


 여성 차별 문제가 단시간에 결과가 나타날 만큼 어제 오늘 일이 아닌 터라 앞으로 이 책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질 것 같다. 연대에도 용기가 필요한 법이니까. 현재 이 소설을 둘러싸 던져대는 막말 - 소설의 완성도 이전에 리얼리티를 문제 삼는... - 속에 담긴 그들의 무심함에 결코 굴해선 안 된다. 진실한 통찰과 비판도 없이 자신이 알지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아서 범하는 적대심이 언제까지고 활개쳐선 안 될 일이다. '여성은 세계에서 유일하고도 광대한 남은 식민지'라는 말마따나 그간 되풀이된 정세에 이젠 불만을 표하고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해야만 한다. 안 그랬다간 계속 되풀이될 게 뻔하니까. 내겐 이 암담하고도 끝내 무기력했던 소설이 그렇게 다가왔다.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 안의 소소한 규칙이나 약속이나 습관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 132p




김지영 씨가 능력이 없거나 성실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그렇게 되었다. 아이를 남의 손에 맡기고 일하는 게 아이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듯, 일을 그만두고 아이를 키우는 것도 일에 열정이 없어서가 아니다. - 145p




가해자들이 작은 것 하나라도 잃을까 전전긍긍하는 동안 피해자들은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해야 했다. - 156p




내가 오빠 돈을 훔친 것도 아니잖아. 죽을 만큼 아프면서 아이를 낳았고, 내 생활도, 일도, 꿈도, 내 인생, 나 자신을 전부 포기하고 아이를 키웠어. 그랬더니 벌레가 됐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돼? - 165p




여기까지가 내가 읽은 <82년생 김지영>이 던지는 질문이다. 그리고 그 해결책을 82년생 김지영 혼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함께 고민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김지영이기 때문이다. - 19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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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온도 - 착한 스프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하명희 지음 / 북로드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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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4.5







 내가 마지막으로 본 우리나라 드라마는 김명민 주연의 <베토벤 바이러스>다. 그 이후로 드라마 자체를 보질 않는데 이유는 별것 아니다. 그 얘기가 그 얘기 같아서. 이 말을 납득하지 못할 사람이 있을 것 같아 얘기를 좀 더 풀자면, 스릴러건 음악물이건 사채업자 이야기건 뭐건 로맨스와 키스신이 필수적으로 들어간다는 공식이 싫증난다는 얘기다. 로맨스니 뭐니 하는 것들이 결코 나쁘단 얘기는 아니지만 뭘 틀어도 로맨스라다면 그건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러브 라인이 흥행을 위한 공식이라 할지라도. 아니, 흥행의 공식이기 때문에 다뤄지는 것이라면 더더욱 문제다.

 일본 드라마나 미국, 영국의 드라마도 흥행을 위한 일종의 정형화된 틀을 갖고 있지만 시장의 크기와 다양성 면에서 비교가 불허하다. 우리나라도 요즘 케이블 드라마가 각광받으면서 제법 다양한 컨텐츠를 다루나 본데 원체 불신이 깊은 나는 그마저도 미심쩍으니... 당장 일본에서 미스터리 장르를 표방하는 드라마라고 하면 정말 로맨스 없이 - 러브 라인이 있다 해도 썸만 타다 끝나는 경우가 대다수다. - 장르 자체에 집중하는 것을 그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솔직히 드라마를 안 본 지 너무 오래 돼서 내가 드라마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일 수 있다. 그래도 간혹 드라마의 원작 소설이나 혹은 드라마 작가가 쓴 소설을 접하는 경우가 있어 아주 할 말이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순전히 나의 선입견일 수 있는데 드라마 작가가 쓴 소설은 정말이지... 소설의 맛 자체는 그닥 훌륭하지 않다는 걸 읽을 때마다 느낀다.

 아까도 말했듯 드라마를 원체 보질 않는 탓에 하명희라는 드라마 작가는 완전 처음 접하는 이름이었다. 작가의 대표작도 마찬가지. 내가 이 작가에 대해 아는 것은 <착한 스프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라고 과거에 쓴 소설이 요번에 <사랑의 온도>라는 제목으로 드라마화함과 동시에 원작 소설도 제목이 바뀌면서 재출간됐다는 것밖에 없다. 그리고 이 사실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건 소설을 먼저 쓰긴 했지만 결국 드라마화를 염두에 둔 소설이라는 것이다.


 읽는 내내 차라리 드라마로 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나한테 문제가 있는 것인지 시종 소설의 작법 자체가 아예 눈에 들어오질 않더라. 드라마화를 결심하기에 너무나 적절한 텍스트이며 적당한 소설화를 거쳤지만 그게 다다. 나 한 사람의 이상한 장애라고 치부해도 상관은 없는데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다. 서두에서 작가는 사랑의 피상성과 관계의 어긋남에 대해 쓰고자 했고 제법 근사하게 이야길 풀어냈지만 결국 익히 알고도 남는 얘기에 지나지 않았다.

 독서는 누가 뭐라 해도 굉장히 능동적인 행위다. TV를 틀어놓고 보는 것과 책장을 펼쳐 읽는 행위는 눈으로 행한다는 공통점은 있지만 절대 같지 않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읽은 내용을 머릿속에 상상으로 풀어내고 다음 내용을 찾아가는, 제법 품이 많이 드는 행위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를 하고자 할 때 평범한 이야기를 들이댄다면 살짝 허탈한 기분이 들지 않을까.


 사랑은 아주 오래 전부터 보편적으로 자리잡은 소재고 누구나 천착해는 주제다. 그렇기에 어지간해선 기억에 남는 창작물이 나오기도 힘들고 그걸 접하기는 더더욱 힘들다. 물론 이 소설엔 해당되지 않는 얘기다. 아까도 말했지만 드라마로는 상관 없을 그럭저럭인 수준의 작품이다. 무슨 X폼을 잡겠다고 이리 삐딱하게 구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딱히 감흥은 일지 않았던, 그야말로 읽었는지 말았는지도 기억이 애매한 작품에 불과했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내게서 '사랑'에 대한 잡설을 이끌어내지 못한 걸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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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작된 시간
사쿠 다쓰키 지음, 이수미 옮김 / 몽실북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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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9.3







 경찰을 비롯한 국가 기관의 실태를 고발하는 작품이라고 하면 난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 다음으로는 톰 롭 스미스의 <차일드44>가 떠오르는데 이런 작품의 특성상 국가의 명령이란 이름 아래 일반 시민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는 장면이 꼭 나온다. 고문은 말할 것도 없고, 거기서 그치면 차라리 다행이련만 피해자가 어처구니 없이 인생이 망가지거나 최악엔 죽는 경우까지 다뤄지니 이래저래 뒷맛이 찝찝하다.

 사쿠 다쓰키의 <조작된 시간>은 일전에 <사망 추정시각>이란 제목으로 출간된 작품이다. 처음 출간될 때의 원제도 그렇고 요번에 바뀐 제목도 그렇고 사실 그닥 흥미를 돋우는 제목이 아니라서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다. 현직 볍조계 종사자가 썼다는 작품의 진가를 미처 몰라본 것이다. 이건 제목의 문제라기보단 전적으로 내 어리석음 탓이다. 사람마다 가치관은 다르겠지만, 어쨌든 제목이 작품의 전부가 될 수는 없거늘.


 이 작품은 원죄冤罪가 어떻게 탄생하는가를 그린 점에서 아주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적어도 오리하라 이치의 <원죄자>보단 인상적이었다. 원죄란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를 일컫는데 보통 작품 속에서 누간의 지독히 악의적인 목적에서 탄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선 원죄란 여러 입장에 처한 사람들이 각자의 정의를 관철하느라 빚어진 해프닝으로 묘사한다. 실로 소름 끼치는 일이고 심지어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는 경과가 무척 세세하게 적혀 여러모로 충격적이었다.

 한 소녀가 유괴당해 결국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피해자의 소지품에 남은 지문을 검색한 결과 전과 기록이 있는 한 청년이 경찰의 눈에 띈다. 당장 청년을 체포한 청년은 취조 끝에 자백을 받아내고 결국 청년은 사형을 선고받는다. 그리고 1년의 시간이 흐른 뒤, 우연히 사건 기록을 접한 한 변호사가 청년을 찾아간다.


 청년이 자백을 했다는 점에서 이미 끝난 사건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 처음부터 청년을 범인이라 단정한 경찰이 청년을 밀실의 취조실에서 어떤 식으로 코너에 몰고 끝내 자백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이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산에서 우연히 소녀의 시체를 발견했다가 덜컥 겁이 난 청년이 신고도 않고 지갑의 돈만 훔치고 자리를 모면한 어리석음의 대가치곤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닌가. <살인의 추억>에서 연신 '향숙이'를 입에 담는 남자가 중요한 목격자임에도 정신 지체자라서 불리하게도 경찰들에게 끝까지 시달린 것과 같다. <조작의 시간> 속 청년이 비록 덜떨어진 인물이긴 해도 그렇기 때문에 경찰의 정의감에 희생당해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할 순 없잖은가.

 경찰의 말마따나 범인을 잡기 위해 범인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가 피해자가 죽은 초반의 비극적 설정 역시 청년의 원죄와 그 성격이 다르지 않다. 둘 다 사리분별도 배제한 어줍짢은 정의감에 휘말린 케이스란 점에서 말이다. 피해자의 경우엔 그 유족에게 사망 추정시각을 조작함으로써 자신들의 과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찰 조직의 부도덕함이 엿보이고 사형이 선고된 청년의 경우는 결정적 증거도 없는데 '이 녀석이 범인이 확실하다'는 감에 의존해 위법을 가하면서까지 범인으로 몰아간 막장스러움을 연출한다.


 그 이후엔 사법부의 병폐와 맞물려 청년의 무죄가 쉽사리 인정받지 못하는 난관을 그려낸다. 그런데 중요한 건 청년이 무죄라는 건 오로지 독자인 우리만 안다는 것이다. 다름이 아니라 작가가 알려줬으니까. 이렇게 전지적 시점이 없다면 청년이 무죄라는 것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자백을 한 범인이 - 왜 바보같이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자백을 했나 싶겠지만 거짓으로라도 자백을 할 수밖에 없는 취조 방식이 가해지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이다... - 느닷없이 몇몇 증거가 나왔다고 무죄라고 생각하기는 확실히 무리한 일이긴 하다.

 이 세상에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한 대가를 치루는 것만큼 억울한 일도 없다. 그건 누구도 원치 않는 일이다. 하지만 거대한 물결에 휩싸여 모두가 나 하나에게 누명을 씌우려고 하거나 아니면 내가 한 일이라 단정짓고 있다면 그것만큼 고독한 일도 없을 것이다. 사건의 일면만 보고 속단하면 억울한 피해자가 생기는 건 자명한 일이다. 때문에 우리는 보다 신중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작중에서 사건이 종결되고 시간이 제법 흘러버린 터라 진짜 정의는 좌절될 수밖에 없냐며 침울해지는 순간이 온다. 과오를 바로잡기에 늦은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지 모른다. 실제로 종결된 사건은 대개 그렇게 취급된다. 개중에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원죄도 있음에도 말이다. 원죄란, 누가 뭐라 해도 비극이다. 원죄가 방치되는 것은 진범을 못 잡는 것만큼이나 - 갑자기 영화 <7번 방의 선물>이 떠오르는구만. - 있어선 안 될 일이다.

 원죄가 어떤 식으로 탄생하고 공고히 굳혀지는가를 살펴볼 수 있게 한 이 작품을 읽은 것은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었다. 덮어놓고 의심하는 것도 안 될 일이지만 무조건 맹신하는 것은 위험하기 그지없다. 실로 간과하기 쉬운 위험함과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아무리 경계해도 모자람이 없는 것에 대해 얘기한 이 작품이 불편해도 읽어야 할 이유가 되기도 할 것이다.

스토리가 사실과 다르게 무고한 피의자를 범인으로 몰고 가는 것이 특히 ‘일본형 원죄冤罪‘의 특징이다. - 204p




인생은 화와 복, 즉 재앙도 행복도 서로 뒤섞여 꼬인 새끼줄 같다는 의미인데, 내가 원죄사건을 만날 때마다 이 말을 떠올리는 이유는 원죄라는 건 결코 한두 사람의 악인이 품은 악의나 누군가 한 사람의 실수만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지. 수십 가닥의 짚이 꼬여서 굵은 밧줄이 되는 것처럼, 수십 명의 인간이 한 일, 즉 악의뿐만이 아니라 일종의 선의, 배신이나 과실에다 일종의 의무에 충실한 행동이나 모범적인 행위도 모두 함께 꼬이고, 다양한 인간 활동이 섞이고 얽히고 설켜, 그것이 어떨 땐 원죄가 되기도 한다는 말일세. - 469p




하지만 자칫 범인으로 보일 수도 있는 피의자를 범인으로 몰지 않기 위해서는 조직의 흐름에 항거하여 진실을 추구할 수 있는 한 단계 더 높은 정의감이 있어야 한다. - 47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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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체온증 ㅣ 에를렌뒤르 형사
아르드날뒤르 인드리다손 지음, 김이선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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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아이슬란드 추리소설가 아르드날뒤르 인드리다손의 작품을 읽어봤다. 작품 얘기를 하기에 앞서 한 가지 고백하자면 난 이 작품을 계기로 아이슬란드라는 나라의 존재를 알게 됐다. 처음 듣는 이름의 나라는 아니었지만 정확히 어디 있는 나라인지는 몰랐었다. 그런 외딴 곳에 그렇게 큰 섬이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여러모로 생경한 점으로 가득한 작품이었다. '밀레니엄' 시리즈나 요 네스뵈 등 북유럽 추리소설을 종종 접하긴 했으나 북유럽이란 무대는 여전히 낯선데 그 중에서도 변방이자 외진 바다 한 가운데에 있는 섬 나라의 소설은 내게 그렇게 다가왔다. 인명도 지명도 문화도 분위기도, 지금까지 읽은 그 어떤 소설보다도 신선한 느낌을 줬다.


 하지만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가 단지 아이슬란드 소설이기 때문은 아니다. 처음 접하는 작가였는데 제법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북유럽권 스릴러에서도 좀 알아주는 작가라고 한다. 업계 최고의 추리소설상인 유리열쇠상을 최초로 두 번 연속 수상했다나. 그 기록이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았다니 흠칫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살한 여자를 발견하면서 시작하는 소설은 주인공인 에를렌뒤르 형사에게 어딘가 석연치 않은 자살의 낌새를 전하며 전개에 박차를 더해간다. 지인들은 피해자가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우울해 했다지만 자살할 정도는 아니었다며 입을 모은다. 이윽고 생전에 피해자가 강령 의식을 치른 것을 알게 된 에를렌뒤르는 홀로 조사하기에 이른다. 모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살로 '마무리'된 이 사건을 진정으로 '해결'하기 위해.


 '에를렌뒤르 형사' 시리즈를 처음 읽어서 원래 이런 작풍인가 싶었는데, 일단 분위기가 여느 추리소설 - 비교적 같은 문화권인 북유럽 추리소설과 더불어 서구권이나 영미 추리소설까지 가리킨다. - 과 사뭇 달랐다. 내가 추리소설하면 느끼곤 했던 피비린내 나고 도덕적 해이가 의심되는 쾌락적인 묘사와는 정반대의 지점을 그린 작품이었던 것이다. 이런 양식은 일본의 사회파 추리소설 - 일본도 어둡고 피비린내나는 소설이라고 하면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잘 쓰긴 하지만 꼭 그렇지 않은 소설도 잘 쓴다는 이미지도 강하다. - 에 가까울 정도였다. 예를 들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가 형사' 시리즈에 가깝다고나 할까.

 자살은 범죄가 아닌 터라 추리소설 속에서 좀처럼 중심 사건으로 다뤄지지 않는다. 기껏 다뤄지면 자살 같은 타살이었다든가 아니면 어마어마한 사연이 있었다는 식인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자살은 역시 범죄가 아니라서 여타 요소를 넣어서 전개시킨다는 창작자들의 공통된 발상이다. 그렇다면 자살은 정말 범죄가 아닌 걸까?


 사전적인 의미에서 자살은 범죄가 아닌 것이 맞다. 종교적인 의미에서는 약간 다르지만 죄라고 부르기는 한다. 이 작품은 이 두 가지 의미로도 자살을 규정하지 않는다. 이는 작중 주인공인 에를렌뒤르의 지난 시절 겪은 일에서 기인한 듯하다. 그리고 나는 그가 겪었을 일들을, 한마디로 전작도 읽고 싶어졌다. 이번 작품에서처럼 정적이지만 상당히 의미 있는 여정을 전작들도 그리고 있다면 말이다.

 자살은 본인에게 있어서 마지막이지만 남겨진 사람들에겐 그렇지 않다. 그들에겐 후회와 허망함이 남는다. 그런 사람들을 두고 처벌할 대상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사건을 마무리 짓고 자살의 이유마저 파악하지 않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해결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가치 전도 현상을 에를렌뒤르는 범하지 않기 위해 자살의 진상에 다가서려고 한다.


 제목은 <저체온증>이고 배경도 아이슬란드고 인명과 지명도 낯설어 차가운 느낌을 가지기 쉽지만 실상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따뜻한 추리소설이었다. 어지간한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보다 더 확고하고 인간미 넘치는 주제의식으로 무장한 이 소설은 후반부가 다소 예상되는 면이 있음에도 남다른 기분으로 몰입할 수 있었다. 완전한 사건 해결을 위한 에를렌뒤르의 여정이 과연 끝나긴 할 것인지, 이 사건 아닌 사건이자 해결되지 않은 문제의 본질에 다가섰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비슷한 문화권의 추리소설들에 비하면 심심한 작품처럼 보일 것이다. 이 말은 맞는 말일 수도 있고 틀린 말일 수도 있다. 기존의 추리소설 작법과는 달리 자극적인 요소도 적고 제법 감정적이다. 하지만 한 사람의 죽음이 불러일으킨 파동에 대한 작가의 통찰은 정말 진지했고 자극만이 추리소설의 전부라는 생각이 아주 지엽적인 것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해준다. 익숙한 이야기 전개는 아니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의 일상과 가장 밀접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읽는 맛이 상당했다.


 찾아 보니 작가의 작품이 몇 개가 국내에 소개된 적이 있었다. 작가 이름이 좀 다르게 표기됐던데... 그보다 문제는 다 절판 도서라는 건데 열심히 찾아봐야겠다. 이 작품이 어떻게 잘 알려져서 작품 몇 개가 더 소개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고. 북유럽 추리소설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었던 만큼 다른 만남도 적잖이 기대된다.

자살 역시 실종 사건이야. - 239p




우연이란 비와 같아서, 바르게 사는 사람에게도 바르지 않게 사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내린다.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때로는 소위 운명이라는 것을 형성하기도 했다. 우연이란 난데없이 등장했다. 예상치 못하게, 기이하게, 설명할 수 없게. - 27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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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행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정태원 옮김 / 태동출판사 / 200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10








어떤 책을 두 번씩이나 읽는다는 것은, 그 두 번 읽기까지의 시간 동안 스스로 얼마나 변했는가를 확인하는 일일 터다. 책은 항상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그러니 똑같은 책이 다르게 읽혔다면 그건 내가 변했다는 뜻이겠지.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은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읽은 책이다. 당시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에 아주 빠져 살았을 때였는데 유일하게 이 책은 그저 그랬다. 료지와 유키호를 관찰하는 듯한 시선이 기존의 시원시원한 작가의 작법과 이질적이서 그랬는지, 예상과 달리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진행되지 않고 인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여러 사건을 다뤘기 때문인지, 아니면 작품의 마무리가 비교적 느닷없는 탓이었는지 다 읽고서 당혹스럽기만 했다. 작가의 최고 작품이라는 세간의 평가에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시 이 작품을 완독한 지금에 이르러서야 나는 작가의 최고작이라는 얘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아는 만큼 또 다른 재미가 있었던 것일까? 이번 재독은 흥미진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료지와 유키호의 연결고리, 그 둘에 휘말려 인생이 변화하는 - 대체로 망가지는 - 사람들, 흑과 백의 선명한 대조를 통한 작풍의 완급 조절, 당시 일본의 시대상을 자연스럽게 녹인 잔재미,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일생을 살펴보는 대서사시... 이제 와 말하지만 확실히 히가시노 게이고의 역작이자 단연 문학적인 작품이었다.

 문학적이라는 단어만큼 히가시노 게이고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도 없으리라. 그는 타고난 이야기꾼이긴 하나 빠르고 분명하게 읽히는 문장과 남다른 주제의식으로 승부를 보는 대중 소설가일 뿐, 문학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가와는 분명 거리가 있었다. 이는 다른 장르의 소설가도 아닌 같은 일본 추리소설가의 작품을 조금만 접해도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최근 출판사들이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름만 믿고 신작을 무작정 비싸게 파는 무리수를 보이고 있는데 - 그만큼 작가의 몸값이 어마어마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 문제는 작가의 작품이 항상 재밌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출판사는 물론이고 괜히 다작을 하는 작가한테까지 반감이 들곤 했다. 그런 즈음에 읽은 <백야행>은 작가에게 품던 애먼 불만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 있는 작품이었다. 그래도, 누가 이 작품을 두고 몇 년에 한 번씩이라도 좋으니 이 작품 같은 퀄리티를 유지해달라고 하던데 나 역시 동의한다. 꾸준히 많이 쓰는 것도 좋지만 이런 길고도 좋은 작품을 쓰는 게 훨씬 좋은 일이지 않은가.

 한 여자를 위해 그림자에서 헌신하는 남자와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여자. 처음엔 이 둘의 행보를 지켜보기가 썩 달갑지 않았는데 작가가 긴 시간을 공들인, 이른바 범죄자의 탄생이자 나아가서는 일그러진 심리의 기원에 대한 기술은 정말 눈을 뗄 수 없는 몰입도를 자랑했다. 유키호의 인생을 설계하기 위해서 실로 이해타산적으로 벌어진 연쇄 범죄의 속내에는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보통의 추리소설이라면 이 범죄의 연쇄를 파헤쳐 인과를 분명히 해 정의를 실현하는 것에 초점을 두지만 이 작품은 모든 것을 불분명하게 냅두면서도 범죄의 연쇄와 두 주인공에 대한 연민에 빠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범죄를 미화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 누군가란 과거에 이 책을 처음 읽었던 나다. 사실 그 심정엔 변화가 없다. 하지만 한편으론 보다 불쌍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또한 사실이다. 어쩌면 일본 소설 특유의 감성일 수 있는데 이런 요소 때문에 이 작품을 문학적이라고 느끼는 게 아니었을까. 일본에서 드라마화와 영화화, 우리나라에서 손예진과 한석규 주연의 영화화까지 이뤄진 <백야행>이 이토록 많이 영상화된 이유는 작품 특유의 드라마와 이미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흑과 백이 정확히 맞닿은 백야 속에서 선악을 함부로 규정짓기 어려운 행동거지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니까. 이러한 역설 속에서 문학이라는 이름의 정체불명임에도 인지되는 경지가 탄생한다고 보는데 그런 의미에서 상당히 인상적이기 그지없는 작품이었다.

 히가시노 게이고와 그의 모든 작품에 대한 인상이 확실히 바뀌는 작품이었다. 지금까지 두 번 읽은 모든 책 중에서 가장 반전의 감상을 남긴 작품이기도 하다. 읽느라 2주 이상이 걸렸지만 여러모로 정말 의미있는 독서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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