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행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정태원 옮김 / 태동출판사 / 200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10








어떤 책을 두 번씩이나 읽는다는 것은, 그 두 번 읽기까지의 시간 동안 스스로 얼마나 변했는가를 확인하는 일일 터다. 책은 항상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그러니 똑같은 책이 다르게 읽혔다면 그건 내가 변했다는 뜻이겠지.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은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읽은 책이다. 당시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에 아주 빠져 살았을 때였는데 유일하게 이 책은 그저 그랬다. 료지와 유키호를 관찰하는 듯한 시선이 기존의 시원시원한 작가의 작법과 이질적이서 그랬는지, 예상과 달리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진행되지 않고 인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여러 사건을 다뤘기 때문인지, 아니면 작품의 마무리가 비교적 느닷없는 탓이었는지 다 읽고서 당혹스럽기만 했다. 작가의 최고 작품이라는 세간의 평가에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시 이 작품을 완독한 지금에 이르러서야 나는 작가의 최고작이라는 얘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아는 만큼 또 다른 재미가 있었던 것일까? 이번 재독은 흥미진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료지와 유키호의 연결고리, 그 둘에 휘말려 인생이 변화하는 - 대체로 망가지는 - 사람들, 흑과 백의 선명한 대조를 통한 작풍의 완급 조절, 당시 일본의 시대상을 자연스럽게 녹인 잔재미,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일생을 살펴보는 대서사시... 이제 와 말하지만 확실히 히가시노 게이고의 역작이자 단연 문학적인 작품이었다.

 문학적이라는 단어만큼 히가시노 게이고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도 없으리라. 그는 타고난 이야기꾼이긴 하나 빠르고 분명하게 읽히는 문장과 남다른 주제의식으로 승부를 보는 대중 소설가일 뿐, 문학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가와는 분명 거리가 있었다. 이는 다른 장르의 소설가도 아닌 같은 일본 추리소설가의 작품을 조금만 접해도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최근 출판사들이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름만 믿고 신작을 무작정 비싸게 파는 무리수를 보이고 있는데 - 그만큼 작가의 몸값이 어마어마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 문제는 작가의 작품이 항상 재밌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출판사는 물론이고 괜히 다작을 하는 작가한테까지 반감이 들곤 했다. 그런 즈음에 읽은 <백야행>은 작가에게 품던 애먼 불만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 있는 작품이었다. 그래도, 누가 이 작품을 두고 몇 년에 한 번씩이라도 좋으니 이 작품 같은 퀄리티를 유지해달라고 하던데 나 역시 동의한다. 꾸준히 많이 쓰는 것도 좋지만 이런 길고도 좋은 작품을 쓰는 게 훨씬 좋은 일이지 않은가.

 한 여자를 위해 그림자에서 헌신하는 남자와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여자. 처음엔 이 둘의 행보를 지켜보기가 썩 달갑지 않았는데 작가가 긴 시간을 공들인, 이른바 범죄자의 탄생이자 나아가서는 일그러진 심리의 기원에 대한 기술은 정말 눈을 뗄 수 없는 몰입도를 자랑했다. 유키호의 인생을 설계하기 위해서 실로 이해타산적으로 벌어진 연쇄 범죄의 속내에는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보통의 추리소설이라면 이 범죄의 연쇄를 파헤쳐 인과를 분명히 해 정의를 실현하는 것에 초점을 두지만 이 작품은 모든 것을 불분명하게 냅두면서도 범죄의 연쇄와 두 주인공에 대한 연민에 빠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범죄를 미화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 누군가란 과거에 이 책을 처음 읽었던 나다. 사실 그 심정엔 변화가 없다. 하지만 한편으론 보다 불쌍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또한 사실이다. 어쩌면 일본 소설 특유의 감성일 수 있는데 이런 요소 때문에 이 작품을 문학적이라고 느끼는 게 아니었을까. 일본에서 드라마화와 영화화, 우리나라에서 손예진과 한석규 주연의 영화화까지 이뤄진 <백야행>이 이토록 많이 영상화된 이유는 작품 특유의 드라마와 이미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흑과 백이 정확히 맞닿은 백야 속에서 선악을 함부로 규정짓기 어려운 행동거지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니까. 이러한 역설 속에서 문학이라는 이름의 정체불명임에도 인지되는 경지가 탄생한다고 보는데 그런 의미에서 상당히 인상적이기 그지없는 작품이었다.

 히가시노 게이고와 그의 모든 작품에 대한 인상이 확실히 바뀌는 작품이었다. 지금까지 두 번 읽은 모든 책 중에서 가장 반전의 감상을 남긴 작품이기도 하다. 읽느라 2주 이상이 걸렸지만 여러모로 정말 의미있는 독서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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