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체온증 에를렌뒤르 형사
아르드날뒤르 인드리다손 지음, 김이선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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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아이슬란드 추리소설가 아르드날뒤르 인드리다손의 작품을 읽어봤다. 작품 얘기를 하기에 앞서 한 가지 고백하자면 난 이 작품을 계기로 아이슬란드라는 나라의 존재를 알게 됐다. 처음 듣는 이름의 나라는 아니었지만 정확히 어디 있는 나라인지는 몰랐었다. 그런 외딴 곳에 그렇게 큰 섬이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여러모로 생경한 점으로 가득한 작품이었다. '밀레니엄' 시리즈나 요 네스뵈 등 북유럽 추리소설을 종종 접하긴 했으나 북유럽이란 무대는 여전히 낯선데 그 중에서도 변방이자 외진 바다 한 가운데에 있는 섬 나라의 소설은 내게 그렇게 다가왔다. 인명도 지명도 문화도 분위기도, 지금까지 읽은 그 어떤 소설보다도 신선한 느낌을 줬다.


 하지만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가 단지 아이슬란드 소설이기 때문은 아니다. 처음 접하는 작가였는데 제법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북유럽권 스릴러에서도 좀 알아주는 작가라고 한다. 업계 최고의 추리소설상인 유리열쇠상을 최초로 두 번 연속 수상했다나. 그 기록이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았다니 흠칫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살한 여자를 발견하면서 시작하는 소설은 주인공인 에를렌뒤르 형사에게 어딘가 석연치 않은 자살의 낌새를 전하며 전개에 박차를 더해간다. 지인들은 피해자가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우울해 했다지만 자살할 정도는 아니었다며 입을 모은다. 이윽고 생전에 피해자가 강령 의식을 치른 것을 알게 된 에를렌뒤르는 홀로 조사하기에 이른다. 모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살로 '마무리'된 이 사건을 진정으로 '해결'하기 위해.


 '에를렌뒤르 형사' 시리즈를 처음 읽어서 원래 이런 작풍인가 싶었는데, 일단 분위기가 여느 추리소설 - 비교적 같은 문화권인 북유럽 추리소설과 더불어 서구권이나 영미 추리소설까지 가리킨다. - 과 사뭇 달랐다. 내가 추리소설하면 느끼곤 했던 피비린내 나고 도덕적 해이가 의심되는 쾌락적인 묘사와는 정반대의 지점을 그린 작품이었던 것이다. 이런 양식은 일본의 사회파 추리소설 - 일본도 어둡고 피비린내나는 소설이라고 하면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잘 쓰긴 하지만 꼭 그렇지 않은 소설도 잘 쓴다는 이미지도 강하다. - 에 가까울 정도였다. 예를 들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가 형사' 시리즈에 가깝다고나 할까.

 자살은 범죄가 아닌 터라 추리소설 속에서 좀처럼 중심 사건으로 다뤄지지 않는다. 기껏 다뤄지면 자살 같은 타살이었다든가 아니면 어마어마한 사연이 있었다는 식인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자살은 역시 범죄가 아니라서 여타 요소를 넣어서 전개시킨다는 창작자들의 공통된 발상이다. 그렇다면 자살은 정말 범죄가 아닌 걸까?


 사전적인 의미에서 자살은 범죄가 아닌 것이 맞다. 종교적인 의미에서는 약간 다르지만 죄라고 부르기는 한다. 이 작품은 이 두 가지 의미로도 자살을 규정하지 않는다. 이는 작중 주인공인 에를렌뒤르의 지난 시절 겪은 일에서 기인한 듯하다. 그리고 나는 그가 겪었을 일들을, 한마디로 전작도 읽고 싶어졌다. 이번 작품에서처럼 정적이지만 상당히 의미 있는 여정을 전작들도 그리고 있다면 말이다.

 자살은 본인에게 있어서 마지막이지만 남겨진 사람들에겐 그렇지 않다. 그들에겐 후회와 허망함이 남는다. 그런 사람들을 두고 처벌할 대상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사건을 마무리 짓고 자살의 이유마저 파악하지 않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해결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가치 전도 현상을 에를렌뒤르는 범하지 않기 위해 자살의 진상에 다가서려고 한다.


 제목은 <저체온증>이고 배경도 아이슬란드고 인명과 지명도 낯설어 차가운 느낌을 가지기 쉽지만 실상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따뜻한 추리소설이었다. 어지간한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보다 더 확고하고 인간미 넘치는 주제의식으로 무장한 이 소설은 후반부가 다소 예상되는 면이 있음에도 남다른 기분으로 몰입할 수 있었다. 완전한 사건 해결을 위한 에를렌뒤르의 여정이 과연 끝나긴 할 것인지, 이 사건 아닌 사건이자 해결되지 않은 문제의 본질에 다가섰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비슷한 문화권의 추리소설들에 비하면 심심한 작품처럼 보일 것이다. 이 말은 맞는 말일 수도 있고 틀린 말일 수도 있다. 기존의 추리소설 작법과는 달리 자극적인 요소도 적고 제법 감정적이다. 하지만 한 사람의 죽음이 불러일으킨 파동에 대한 작가의 통찰은 정말 진지했고 자극만이 추리소설의 전부라는 생각이 아주 지엽적인 것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해준다. 익숙한 이야기 전개는 아니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의 일상과 가장 밀접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읽는 맛이 상당했다.


 찾아 보니 작가의 작품이 몇 개가 국내에 소개된 적이 있었다. 작가 이름이 좀 다르게 표기됐던데... 그보다 문제는 다 절판 도서라는 건데 열심히 찾아봐야겠다. 이 작품이 어떻게 잘 알려져서 작품 몇 개가 더 소개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고. 북유럽 추리소설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었던 만큼 다른 만남도 적잖이 기대된다.

자살 역시 실종 사건이야. - 239p




우연이란 비와 같아서, 바르게 사는 사람에게도 바르지 않게 사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내린다.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때로는 소위 운명이라는 것을 형성하기도 했다. 우연이란 난데없이 등장했다. 예상치 못하게, 기이하게, 설명할 수 없게. - 27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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