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작된 시간
사쿠 다쓰키 지음, 이수미 옮김 / 몽실북스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9.3







 경찰을 비롯한 국가 기관의 실태를 고발하는 작품이라고 하면 난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 다음으로는 톰 롭 스미스의 <차일드44>가 떠오르는데 이런 작품의 특성상 국가의 명령이란 이름 아래 일반 시민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는 장면이 꼭 나온다. 고문은 말할 것도 없고, 거기서 그치면 차라리 다행이련만 피해자가 어처구니 없이 인생이 망가지거나 최악엔 죽는 경우까지 다뤄지니 이래저래 뒷맛이 찝찝하다.

 사쿠 다쓰키의 <조작된 시간>은 일전에 <사망 추정시각>이란 제목으로 출간된 작품이다. 처음 출간될 때의 원제도 그렇고 요번에 바뀐 제목도 그렇고 사실 그닥 흥미를 돋우는 제목이 아니라서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다. 현직 볍조계 종사자가 썼다는 작품의 진가를 미처 몰라본 것이다. 이건 제목의 문제라기보단 전적으로 내 어리석음 탓이다. 사람마다 가치관은 다르겠지만, 어쨌든 제목이 작품의 전부가 될 수는 없거늘.


 이 작품은 원죄冤罪가 어떻게 탄생하는가를 그린 점에서 아주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적어도 오리하라 이치의 <원죄자>보단 인상적이었다. 원죄란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를 일컫는데 보통 작품 속에서 누간의 지독히 악의적인 목적에서 탄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선 원죄란 여러 입장에 처한 사람들이 각자의 정의를 관철하느라 빚어진 해프닝으로 묘사한다. 실로 소름 끼치는 일이고 심지어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는 경과가 무척 세세하게 적혀 여러모로 충격적이었다.

 한 소녀가 유괴당해 결국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피해자의 소지품에 남은 지문을 검색한 결과 전과 기록이 있는 한 청년이 경찰의 눈에 띈다. 당장 청년을 체포한 청년은 취조 끝에 자백을 받아내고 결국 청년은 사형을 선고받는다. 그리고 1년의 시간이 흐른 뒤, 우연히 사건 기록을 접한 한 변호사가 청년을 찾아간다.


 청년이 자백을 했다는 점에서 이미 끝난 사건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 처음부터 청년을 범인이라 단정한 경찰이 청년을 밀실의 취조실에서 어떤 식으로 코너에 몰고 끝내 자백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이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산에서 우연히 소녀의 시체를 발견했다가 덜컥 겁이 난 청년이 신고도 않고 지갑의 돈만 훔치고 자리를 모면한 어리석음의 대가치곤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닌가. <살인의 추억>에서 연신 '향숙이'를 입에 담는 남자가 중요한 목격자임에도 정신 지체자라서 불리하게도 경찰들에게 끝까지 시달린 것과 같다. <조작의 시간> 속 청년이 비록 덜떨어진 인물이긴 해도 그렇기 때문에 경찰의 정의감에 희생당해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할 순 없잖은가.

 경찰의 말마따나 범인을 잡기 위해 범인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가 피해자가 죽은 초반의 비극적 설정 역시 청년의 원죄와 그 성격이 다르지 않다. 둘 다 사리분별도 배제한 어줍짢은 정의감에 휘말린 케이스란 점에서 말이다. 피해자의 경우엔 그 유족에게 사망 추정시각을 조작함으로써 자신들의 과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찰 조직의 부도덕함이 엿보이고 사형이 선고된 청년의 경우는 결정적 증거도 없는데 '이 녀석이 범인이 확실하다'는 감에 의존해 위법을 가하면서까지 범인으로 몰아간 막장스러움을 연출한다.


 그 이후엔 사법부의 병폐와 맞물려 청년의 무죄가 쉽사리 인정받지 못하는 난관을 그려낸다. 그런데 중요한 건 청년이 무죄라는 건 오로지 독자인 우리만 안다는 것이다. 다름이 아니라 작가가 알려줬으니까. 이렇게 전지적 시점이 없다면 청년이 무죄라는 것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자백을 한 범인이 - 왜 바보같이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자백을 했나 싶겠지만 거짓으로라도 자백을 할 수밖에 없는 취조 방식이 가해지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이다... - 느닷없이 몇몇 증거가 나왔다고 무죄라고 생각하기는 확실히 무리한 일이긴 하다.

 이 세상에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한 대가를 치루는 것만큼 억울한 일도 없다. 그건 누구도 원치 않는 일이다. 하지만 거대한 물결에 휩싸여 모두가 나 하나에게 누명을 씌우려고 하거나 아니면 내가 한 일이라 단정짓고 있다면 그것만큼 고독한 일도 없을 것이다. 사건의 일면만 보고 속단하면 억울한 피해자가 생기는 건 자명한 일이다. 때문에 우리는 보다 신중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작중에서 사건이 종결되고 시간이 제법 흘러버린 터라 진짜 정의는 좌절될 수밖에 없냐며 침울해지는 순간이 온다. 과오를 바로잡기에 늦은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지 모른다. 실제로 종결된 사건은 대개 그렇게 취급된다. 개중에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원죄도 있음에도 말이다. 원죄란, 누가 뭐라 해도 비극이다. 원죄가 방치되는 것은 진범을 못 잡는 것만큼이나 - 갑자기 영화 <7번 방의 선물>이 떠오르는구만. - 있어선 안 될 일이다.

 원죄가 어떤 식으로 탄생하고 공고히 굳혀지는가를 살펴볼 수 있게 한 이 작품을 읽은 것은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었다. 덮어놓고 의심하는 것도 안 될 일이지만 무조건 맹신하는 것은 위험하기 그지없다. 실로 간과하기 쉬운 위험함과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아무리 경계해도 모자람이 없는 것에 대해 얘기한 이 작품이 불편해도 읽어야 할 이유가 되기도 할 것이다.

스토리가 사실과 다르게 무고한 피의자를 범인으로 몰고 가는 것이 특히 ‘일본형 원죄冤罪‘의 특징이다. - 204p




인생은 화와 복, 즉 재앙도 행복도 서로 뒤섞여 꼬인 새끼줄 같다는 의미인데, 내가 원죄사건을 만날 때마다 이 말을 떠올리는 이유는 원죄라는 건 결코 한두 사람의 악인이 품은 악의나 누군가 한 사람의 실수만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지. 수십 가닥의 짚이 꼬여서 굵은 밧줄이 되는 것처럼, 수십 명의 인간이 한 일, 즉 악의뿐만이 아니라 일종의 선의, 배신이나 과실에다 일종의 의무에 충실한 행동이나 모범적인 행위도 모두 함께 꼬이고, 다양한 인간 활동이 섞이고 얽히고 설켜, 그것이 어떨 땐 원죄가 되기도 한다는 말일세. - 469p




하지만 자칫 범인으로 보일 수도 있는 피의자를 범인으로 몰지 않기 위해서는 조직의 흐름에 항거하여 진실을 추구할 수 있는 한 단계 더 높은 정의감이 있어야 한다. - 47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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