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와 향신료 14 - Extreme Novel
하세쿠라 이스나 지음, 박소영 옮김, 아야쿠라 쥬우 그림 / 학산문화사(라이트노벨)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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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5.8






 클라이막스를 목전에 두고서 정말로 마지막으로 쉬었다 가는 에피소드. 서로의 마음을 알고도 남는데 혹시 몰라 전전긍긍하는 전개가 답답하기 짝이 없었지만 어쨌든 나름의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호로의 고향인 요이츠로 간다고 한다. 참 오래도 걸렸다. 라이트 노벨의 단점 중 하나가 바로 짧고 강렬하게 끝낼 수 있는 이야길 캐릭터의 매력에 취해 지지부진하게 늘려나간다는 것이라는데 이 작품이 딱 그렇다. 이젠 거의 애정이 아닌 의리로 읽어나가는 실정이라 당연하게도 거의 남는 게 없는 독서였다. 내가 제일 지양하는 독서긴 하나 지난 시절 끝을 보지 못한 이 '늑대와 향신료' 시리즈를 이번에 제대로 끝맺고자 꾸역꾸역 읽고 있다는 게 기가 막힐 따름이다. 작가도 마찬가지다. 이걸 또 이렇게 이어가는 게 대단할 지경이다. 개인적으로 인상 깊게 읽었던 4권의 등장인물 엘사의 재등장은 반가웠지만 그래봤자 지지부진하게 읽힌다는 점엔 변함이 없었다.

 이제는 이름밖에 남지 않는 황량한 곳이라도 어쨌든 호로와 로렌스가 요이츠에 가고자 하는 마음가짐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되짚는 게 이번 에피소드의 포인트다. 이걸 굳이 장편으로 썼어야 했나 싶지만 그래도 특유의 심리 묘사나 호로와 로랜스의 애틋한 관계, 그리고 이 관계의 발전까지 그려져 소소한 재미는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이번 14권을 쓴 진짜 포인트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네.

제 자신의 강인함이 있은 위에 길동무의 힘을 빌리는 것뿐입니다. 작은 그릇에 큰 물건을 담으려 하지 마라. 상인의 철칙입니다. - 99~10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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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 추방된 영혼의 기록
이리스 뮐러 베스테르만 지음, 홍주연 옮김 / 예경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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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뭉크가 그린 그림 중 뭉크 자신을 등장시키거나 뭉크의 심적 상황이 제대로 드러난 그림을 중점적으로 다룬 책이다. 한마디로 자화상을 중심으로 뭉크의 일생을 들여본다는 얘긴데, 내가 올해 안에 뭉크 관련 서적만 세 번째 접하는 지라 솔직히 크게 인상적인 책은 아니었다. 일단 자화상을 중심으로 다룬다니까 꼭 뭉크의 덜 알려진 작품들을 다룬다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 어느 정도는 생소한 작품들도 다루고 있긴 했다. <환상>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 사실 뭉크의 대다수의 대표작 중 그의 자화상이 꽤 많아 책의 그림들이 대부분 낯익었다. 이 책이 꼭 자화상만 다루는 건 아니고 뭉크의 당시 정서가 강하게 표현된 작품도 다루지만 그런 작품이야말로 뭉크의 대표작이들이기에 역시 낯익은 작품이 많았다. 뭉크만큼 자신의 삶을 그림 속에 적극적으로 투영한 화가도 없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다. 글쎄,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이름이 알려진 화가 중 과연 그렇지 않은 화가가 몇이나 될까 싶다만. 뭉크에 대한 팬심을 떠나서 하는 말이다.

 뭉크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전에 읽었던 책에서 이미 접했던 내용이고 또 그 책들의 포스팅에서도 써본 내용이기에 특별히 더 덧붙이거나 하진 않겠다. 다만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를, 무려 3만원이 넘는 이 책을 봐야 할 이유로 나는 상당히 거대하고 양질의 판본으로 뭉크의 그림을 감상하는 것에 있다고 감히 단언해보겠다. 책을 사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도 없는 나지만 이렇게 고가의 미술책은 처음이었기에 아무래도 구입하기가 망설여졌지만 큰맘 먹고 사서 읽은 보람이 있었다. 뭉크에 대한 팬심이 없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오히려 이 책을 읽고 뭉크의 팬이 됐을 테니까 애당초 가정 자체가 무의미하려나. 아무튼, 우리가 미술관에 가는 이유가 그림을 크게 보기 위해서듯 미술책을 보는 이유도 그와 비슷하단 걸 이 책을 읽고 알게 됐다. 그림은 역시 크게 봐야 돼.


 가격 때문에 이 책으로 뭉크에 입문하라고는 못하겠지만 그게 제약이 되지 않는다면 추천해본다. 단기간에 뭉크 책을 많이 읽어 내 개인적으로 식상했다 뿐이지, 다루는 내용도 풍성하고 무엇보다 주석이 탄탄하다. 주석이 미주註 형식이라 페이지를 왔다 갔다 하는 게 좀 귀찮았고 또 그 양이 양인 지라 더욱 귀찮았지만 그만큼 내용이 알찼다. 단순히 내용의 출처만 밝히고 마는 게 아니라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다뤄 주석이라면 으레 이래야 한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https://blog.naver.com/jimesking/221554790642

 이건 유성혜 씨의 <뭉크> 포스팅.



https://blog.naver.com/jimesking/221601395453

 이건 뭉크가 쓴 글들을 모아놓은 <뭉크 뭉크> 포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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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사회 - 타인의 공간에서 통제되는 행동과 언어들
김민섭 지음 / 와이즈베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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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일전에 '309동 1201호'라는 필명의 저자가 쓴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미리 말하는데 그 책의 내용은 저자의 필명 만큼이나 강렬한 듯 무색무취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 모든 내용이 경험을 바탕으로 한 엄연한 실화이며 저자가 고발하는 사회의 부조리가 날카로웠던 부분도 있었기에 단순히 저자로서가 아닌 한 개인으로서의 미래를 담담히 응원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저자가 필명을 벗고, 동시에 지방대 시간강사 자리도 박차고 나와 본명으로 글을 쓰며 책도 여러 권 냈다는 소식이 적잖이 반가웠다. 학교에서의 10년보다 거리에서의 1년이 자신에게 더 가치있었다고 역설하는 김민섭 작가의 패기는 제법 이 사회에 파동을 불러일으키는 듯했다.

 이번 에세이도 전체적인 인상은 저번에 읽은 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와 에세이가 잘 안 맞는다는 걸 감안해야겠지만, 그럼에도 저자가 동어를 반복한 탓인지 흡입력이 떨어졌다는 걸 강조하고 싶다. 대리 기사로 일하면서 얻었던 통찰을 글에 온전히 녹여내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타인의 공간이니 주체니 비슷한 단어를 남발하는 게 어느 순간부턴 조금 지겨워졌다. 저자의 글이 내게 크게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탓일까? 생각해보면 택시는 타봤지 대리는 한 번도 이용해본 적이 없기에 실질적인 체험에서 오는 공감이 부재했던 건 부정할 수 없다.


 글쎄, 어쩌면 저러한 감상은 순전히 나의 질투에서 기인한 것인지 모른다. 어쨌든 저자는 열심히 일하면서 글도 썼고 어떻게든 가족을 부양하고 있으며 아내와도 힘겨운 삶 속에서도 서로 의지하며 조금씩 이렇게 활자로나마 이 사회에 자신의 족적을 남기고 있으니까. 그렇기에 앞에서 쓴 지겹다느니 흡입력이 어떻다느니 하는 말은 트집이 아니었냐고 따져도 할 말은 없다.

 실질적으로 공감하기엔 좀 버거웠지만 단순히 대리 기사라는 특수한 직업 세계를 간접 체험한 것 자체는 흥미로웠다. 아주 극적이진 않았지만 아무튼 대리 기사로서 고객의 차 안에서 한없이 을이 되는 서러움과 긴장감 등은 넘치도록 잘 묘사했다고 할 수 있다. 아무래도 직업의 특성상 진상 손님 에피소드가 나오지 않을까 했는데 오히려 그렇지 않은 손님, 품격이 있던 손님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꽤 인상에 남았다. 그러고 보면 세상은 긍정적인 힘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그냥 있는 말이 아닌가 보다. 간단히 말해 대리 기사를 아랫사람, 자기는 윗사람으로 선을 긋지 않는 데서 품격이 만들어지고 그렇지 않은 사람일수록 자신이 그은 선에서의 아랫사람에 속하게 된다는 말은 꽤나 정곡을 찌르는 표현이었다. 나도 서비스업에 종사를 하기 때문인지 특히 공감이 갔다.


 저자가 글 속에 자기 인생 이야기를 많이 넣다 보니 글을 다 읽고나서 저자의 앞날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이 출간된 게 16년이고 지금 저자 이름을 검색하니 3권 이상의 책이 더 출간됐다. 그 모든 책이 분명 전업 작가로서 낸 것은 아닐 터다. 앞에서도 얘기를 했지만 단순히 글의 결과물을 떠나서 사람으로서 존경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자신의 인생 경험을 글로 풀어내는 것도 쉽지 않고 그 글로나마 가족과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가는 게 절대 녹록지 않을 텐데 말이다... 정말이지 동정표가 아니라 순수하게 사람으로서 응원하게 되는 작가다.



https://blog.naver.com/jimesking/220719755141

 이건 저자의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포스팅.

인상 깊은 구절




"차가 많이 낡았죠" 하고 웃던 그는, 차의 ‘가격‘과는 별개로 내가 만난 가장 ‘품격‘ 있는 손님이었다. 대리기사와 자신을 함께 주체로 만들었다. 그러한 힘은 상대방의 처지에서 공감하고 또한 경청하는 데서 나온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대리기사와 자신을 함께 대리로 격하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안흔 선을 긋고 하대하지만 결국 자신도 그 밑에 존재함을 알지 못한다. - 88~8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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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논쟁! 철학 배틀
하타케야마 소우 지음, 이와모토 다쓰로 그림, 김경원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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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대학에 진학하면 철학을 전공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도덕과 윤리 시간을 좋아했고 점수도 곧잘 받았다. 물론 좋아한다고 해봤자 입시를 위한 공부라 수박 겉핥기에 불과했을 터다. 참된 이해를 동반하지 않은 채 수많은 철학가의 이름과 주장을 단지 암기하기만 했던 건 아닐까 싶다. 그래도 이 책은 과거에 내가 좋아했다고 믿은 도덕, 윤리, 그리고 철학의 재미를 다시금 떠올리게 해 반갑기 그지없었다. 소크라테스를 시작으로 순자와 노자, 벤담, 루소, 칸트, 흄, 밀, 애덤 스미스, 마르크스, 존 롤스, 헤겔, 키르케고르, 니체, 사르트르나 카뮈나 모리 오가이 같은 소설가, 심지어 간디와 부처까지 아우르는 구성은 몇 번을 생각해도 참 대담한 시도가 아닐 수 없다.

 우스겟소리지만 <대논쟁! 철학 배틀>이란 제목을 <대환장! 철학 배틀>로도 바꿔볼 수 있겠다. 상당히 교육적인 목적을 염두에 두고 집필된 책일 텐데 여러 철학가가 가상의 토론을 벌인다는 컨셉이 어떻게 보면 유치하다 느낄 수 있겠다. 냉정하게 말하면 지금 윤리를 공부하는 학생들을 해당 과목에 관심을 기울이게 만드는 데 최적인 책일 듯하고 반대로 철학을 정말 진지하게 공부하려는 독자들한텐 살짝 맛만 보여주고 토론을 마무리하는 걸 못내 아쉬워할 듯하다. 다루는 인물, 논리가 하도 많다보니 이 정도면 분량 배분을 상당히 잘했다고는 생각하지만 누군가의 말마따나 '철학자들이 서로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다가 끝나는' 식이라... 토론이란 게 반드시 결론을 내리기 위해 하는 것은 아니므로 - 여담이지만 철학은 저서보단 대화를 통해 후세에 전달된 경우가 많았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철학은 곧 대화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 중도를 지향한 저자에겐 박수를 쳐주고 싶지만 이런 부분이 불만인 독자도 분명 있을 것만 같다.


 이 책이 갖는 최대의 순기능은 몇몇 철학자들에 관심을 가지게 해준다는 점일 것이다. 내가 철학에 관심이 많다곤 했지만 실제로 철학서까지 읽어본 적은 없는데 이 책을 읽으니 키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이나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같은 책들에 관심이 가게 됐다. 저자가 철학자들의 핵심을 잘 정리한 덕분이다. 공감해줄지 모르겠는데 일본인은 뭔갈 쉽게 설명하는 것에 이골이 난 것 같다. 뭐, 아무리 이골이 났어도 철학은 쉽지 않은지 후반부에 다다랐을 땐 읽는 나도 그렇고 쓰는 저자도 텐션이 떨어지는 감이 있었지만 이 정도면 만족스럽다.

 처음엔 '살인이나 전쟁은 절대악인가?'하는 질문부터 소년 범죄나 글로벌리즘을 다루는 등 제법 피부에 와 닿는 논제가 제시됐는데 후엔 '성선설 VS 성악설'처럼 케케묵고 교과서적인 논쟁을 비롯해 자유나 진리, 별세계, 경험과 이성 등 아무래도 좋을 것 같은 형이상학적 얘기들을 다루고 있어 역시 철학은 철학이라는 감상이 나왔다. 소크라테스가 강조하듯 이런 음미하는 사고 자체는 좋은데 다소 선문답 같은 느낌이 들었던 건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선문답의 가치를 부정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기왕 처음에 피부에 와 닿는 논제로 시작했으니 그 컨셉을 그대로 유지했더라면 어땠을까 싶었다. 그래도 조금은 가볍게 가더라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 대담한 시도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책인 만큼 더 아쉽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p.s 각 철학가의 일러스트를 담당한 이와모토 다쓰로 씨의 솜씨가 제법이었다. 인물의 특징이 아주 잘 살아서 누가 새로 등장할 때마다 감탄한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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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자서전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이지수 옮김 / 바다출판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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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고레에다 히로카즈 본인이 직접 데뷔작부터 <태풍이 지나가고>를 찍기까지의 시간과, 그 사이에 작업한 단편 TV 프로그램이나 드라마 등에 대해 쓴 글을 모아놓은 책이다. 감독의 팬을 자처하는 나였지만 그런 것치곤 막상 읽으면서 감독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며 민망함이 끊이질 않았다. 그와 동시에 감독의 생각을 접하고 있음에 신기한 기분도 들었는데 이는 특히 내가 감명 깊게 봤던 영화들에 관한 글에서 심하게 들곤 했다. 내심 처음에 다큐멘터리에 대해서 얘기가 이어질 땐 지루함을 감추지 못했던 터라 다행인 일이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감독은 수많은 감독과 프로그램을 언급하지만 다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생각보다 일본 영화며 방송이 바로 옆나라인 우리나라에 그렇게 알려진 게 없구나 싶었다. 그만큼 일본이 폐쇄적인 건지 아니면 우리나라가 의도적으로 일제를 기피하는 건지... 요즘은 후자에 훨씬 가까운 것 같다.

 감독의 모든 작품을 보진 못했다. 다큐멘터리는 한 편도 못 봤고 - 볼 수 있다면 보고 싶다. - 영화도 못 본 작품이 몇 있다. 그래서 책의 글들의 만족도가 들쑥날쑥이냐고 묻는다면 꼭 그렇지 않았다. 영화에 한해서 말해보자면, 감독의 작품 중 어떤 작품이 흥행과 무관하게 평단의 호응을 얻었고 외면을 받았는지 대강이라도 알고는 있었는데 그렇게 평가가 갈린 이유를 감독이 쓴 글을 읽으면서 대강 파악이 된다는 게 참 재밌었다. 감독도 인정했듯, 작품을 만들면서 생각이 너무 지나치면 안 됐던 것이다. 생각이 많이 개입되면 관객이 쫓아가질 못해 오히려 감독만의 작품이 될 공산이 크다. 영화 한 편을 만들면서 많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건 그것대로 대단한 일이긴 하지만 이렇게 자서전의 형식으로 접하는 나조차도 장황하다 못해 과하게 느껴지는데 실제로 영화로 풀어내려면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하니 역시 뭐든지 과한 건 경계하고 볼 일이구나 싶었다.


 감독은 유럽의 영화 감독들에 비해 일본의 감독은 영화를 찍는 것 외엔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고 했지만, 백 번 양보해서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얘기지 책을 읽는 내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생각의 깊이에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 '아는 게 없다'는 감독 본인의 말엔 크게 동의하기가 힘들었다. 물론 아는 것의 개념이나 기준은 사람마다 제각각이라 어떤 사람은 또 다르게 느낄지 모르겠지만...

 가령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에 대해 '전쟁의 비참함을 전달하는 시설로는 그다지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는 말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다시 보게 만들었다. 참 솔직하고 신랄한 말이 아닐 수 없는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비하면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면이 부족하단 지적은 일견 알쏭달쏭하게 들려 반감을 표시할 독자들이 꽤 있지 않을까 싶었다. 더군다나 이 감독이 일본인이란 사실이 더욱 그러한 반감을 부추길 듯한데...


 감독 본인이 바로 예시를 들었던 자국의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폭 추모 공원이나 기념관에도 해당되는 터라 감독의 말에 제법 공감이 됐다. 실제로 두 곳을 방문했던 나로선, 자신들이 피해를 당했다는 것에 있어서 아낌없이 전시한다는 느낌까지 받았던 나로선 특히나. 이러한 편향된 전시 경향이 꼭 우리나라라고 덜하리란 법은 없을 텐데 가까운 곳에 있는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을 고레에다 감독이 외국인의 시선에서 바라보고서 한 말이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워 내 마음 속을 훅 파고들었다.

 내가 어떤 사람을 판단할 때 인격 못지않게 그 사람의 솔직함과 날카로움도 보곤 하는데 그 사람이 창작자라고 한다면 후자의 경우를 더 중시할 때도 있다. 솔직하면서 날카로운 감각을 가진 사람의 창작물이야말로 완성도를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가족 영화를 주로 발표하면서 조금 간과당하는 감이 있는 것 같은데, 어떤 작품이건 서늘한 감각만은 유지하는 감독답게 이번 자서전도 생각의 깊이만큼이나 날카로운 발상이 영화 못지않게 인상적이었다. 감독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무슨 말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인간미를 내세운 따뜻한 작풍 속에서도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날카로운 시선이 있을 수 있음을 말이다.


 자서전까지 읽으니 아직 못 본 감독의 작품은 물론이고 이미 봤던 작품들도 다시 보고 싶어졌는데, 아무래도 영화를 한 편 볼 때마다 이 책을 집어들어 그에 해당하는 글을 다시 찾아 읽게 될 것 같다. 그런 목적으로 펼쳐들 때 더욱 의미있는 책이 되지 않을까 싶다. 여담이지만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본 최근 영화 <세 번째 살인>과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어느 가족>은 책의 출간 시기 이후에 발표된 작품이라 본서에선 언급되지 않았는데, 나중에 그 작품들에 관한 글들도 읽어본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게 언제가 될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말은 주제넘게 들릴 수 있지만, 타인인 저에게 정기적으로 남편 이야기를 하는 것은 도모코 씨에게 슬픔을 치유하는 과정이 된 측면도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환상의 빛> 주인공처럼 가슴속 슬픔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다는 점이 인간의 씩씩함이나 아름다움 아닐까요. 그 슬픔을 받아 주는 쪽이 될 수 있었던 귀중한 체험은 제게도 매우 의미 있었습니다. - 78p




물론 피해의 극심함을 호소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걸로 문제없을지도 모르지만, 전쟁을 어떤 식으로 다음 세대에거 설명할지를 결정할 때 피해자 쪽으로 기울어진 이야기가 큰 비중을 차지하면 거기서 사고가 멈추어 일종의 배타주의와 적대주의만 부추기게 되지 않을까요. - 151p




"의미 있는 죽음보다 의미 없는 풍성한 삶을 발견한다."

영화가 그런 주장을 소리 높여 하는 게 아니라 영화 그 자체가 풍성한 삶의 실감으로서 존재할 수 있을 것. 지금의 제가 지향하는 바입니다. - 17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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