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자서전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이지수 옮김 / 바다출판사 / 2017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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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고레에다 히로카즈 본인이 직접 데뷔작부터 <태풍이 지나가고>를 찍기까지의 시간과, 그 사이에 작업한 단편 TV 프로그램이나 드라마 등에 대해 쓴 글을 모아놓은 책이다. 감독의 팬을 자처하는 나였지만 그런 것치곤 막상 읽으면서 감독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며 민망함이 끊이질 않았다. 그와 동시에 감독의 생각을 접하고 있음에 신기한 기분도 들었는데 이는 특히 내가 감명 깊게 봤던 영화들에 관한 글에서 심하게 들곤 했다. 내심 처음에 다큐멘터리에 대해서 얘기가 이어질 땐 지루함을 감추지 못했던 터라 다행인 일이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감독은 수많은 감독과 프로그램을 언급하지만 다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생각보다 일본 영화며 방송이 바로 옆나라인 우리나라에 그렇게 알려진 게 없구나 싶었다. 그만큼 일본이 폐쇄적인 건지 아니면 우리나라가 의도적으로 일제를 기피하는 건지... 요즘은 후자에 훨씬 가까운 것 같다.

 감독의 모든 작품을 보진 못했다. 다큐멘터리는 한 편도 못 봤고 - 볼 수 있다면 보고 싶다. - 영화도 못 본 작품이 몇 있다. 그래서 책의 글들의 만족도가 들쑥날쑥이냐고 묻는다면 꼭 그렇지 않았다. 영화에 한해서 말해보자면, 감독의 작품 중 어떤 작품이 흥행과 무관하게 평단의 호응을 얻었고 외면을 받았는지 대강이라도 알고는 있었는데 그렇게 평가가 갈린 이유를 감독이 쓴 글을 읽으면서 대강 파악이 된다는 게 참 재밌었다. 감독도 인정했듯, 작품을 만들면서 생각이 너무 지나치면 안 됐던 것이다. 생각이 많이 개입되면 관객이 쫓아가질 못해 오히려 감독만의 작품이 될 공산이 크다. 영화 한 편을 만들면서 많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건 그것대로 대단한 일이긴 하지만 이렇게 자서전의 형식으로 접하는 나조차도 장황하다 못해 과하게 느껴지는데 실제로 영화로 풀어내려면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하니 역시 뭐든지 과한 건 경계하고 볼 일이구나 싶었다.


 감독은 유럽의 영화 감독들에 비해 일본의 감독은 영화를 찍는 것 외엔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고 했지만, 백 번 양보해서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얘기지 책을 읽는 내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생각의 깊이에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 '아는 게 없다'는 감독 본인의 말엔 크게 동의하기가 힘들었다. 물론 아는 것의 개념이나 기준은 사람마다 제각각이라 어떤 사람은 또 다르게 느낄지 모르겠지만...

 가령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에 대해 '전쟁의 비참함을 전달하는 시설로는 그다지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는 말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다시 보게 만들었다. 참 솔직하고 신랄한 말이 아닐 수 없는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비하면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면이 부족하단 지적은 일견 알쏭달쏭하게 들려 반감을 표시할 독자들이 꽤 있지 않을까 싶었다. 더군다나 이 감독이 일본인이란 사실이 더욱 그러한 반감을 부추길 듯한데...


 감독 본인이 바로 예시를 들었던 자국의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폭 추모 공원이나 기념관에도 해당되는 터라 감독의 말에 제법 공감이 됐다. 실제로 두 곳을 방문했던 나로선, 자신들이 피해를 당했다는 것에 있어서 아낌없이 전시한다는 느낌까지 받았던 나로선 특히나. 이러한 편향된 전시 경향이 꼭 우리나라라고 덜하리란 법은 없을 텐데 가까운 곳에 있는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을 고레에다 감독이 외국인의 시선에서 바라보고서 한 말이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워 내 마음 속을 훅 파고들었다.

 내가 어떤 사람을 판단할 때 인격 못지않게 그 사람의 솔직함과 날카로움도 보곤 하는데 그 사람이 창작자라고 한다면 후자의 경우를 더 중시할 때도 있다. 솔직하면서 날카로운 감각을 가진 사람의 창작물이야말로 완성도를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가족 영화를 주로 발표하면서 조금 간과당하는 감이 있는 것 같은데, 어떤 작품이건 서늘한 감각만은 유지하는 감독답게 이번 자서전도 생각의 깊이만큼이나 날카로운 발상이 영화 못지않게 인상적이었다. 감독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무슨 말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인간미를 내세운 따뜻한 작풍 속에서도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날카로운 시선이 있을 수 있음을 말이다.


 자서전까지 읽으니 아직 못 본 감독의 작품은 물론이고 이미 봤던 작품들도 다시 보고 싶어졌는데, 아무래도 영화를 한 편 볼 때마다 이 책을 집어들어 그에 해당하는 글을 다시 찾아 읽게 될 것 같다. 그런 목적으로 펼쳐들 때 더욱 의미있는 책이 되지 않을까 싶다. 여담이지만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본 최근 영화 <세 번째 살인>과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어느 가족>은 책의 출간 시기 이후에 발표된 작품이라 본서에선 언급되지 않았는데, 나중에 그 작품들에 관한 글들도 읽어본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게 언제가 될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말은 주제넘게 들릴 수 있지만, 타인인 저에게 정기적으로 남편 이야기를 하는 것은 도모코 씨에게 슬픔을 치유하는 과정이 된 측면도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환상의 빛> 주인공처럼 가슴속 슬픔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다는 점이 인간의 씩씩함이나 아름다움 아닐까요. 그 슬픔을 받아 주는 쪽이 될 수 있었던 귀중한 체험은 제게도 매우 의미 있었습니다. - 78p




물론 피해의 극심함을 호소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걸로 문제없을지도 모르지만, 전쟁을 어떤 식으로 다음 세대에거 설명할지를 결정할 때 피해자 쪽으로 기울어진 이야기가 큰 비중을 차지하면 거기서 사고가 멈추어 일종의 배타주의와 적대주의만 부추기게 되지 않을까요. - 151p




"의미 있는 죽음보다 의미 없는 풍성한 삶을 발견한다."

영화가 그런 주장을 소리 높여 하는 게 아니라 영화 그 자체가 풍성한 삶의 실감으로서 존재할 수 있을 것. 지금의 제가 지향하는 바입니다. - 17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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