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위남
슈노 마사유키 지음, 정경진 옮김 / 스핑크스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9.8







 이 작품을 처음 읽을 당시 웃지 못할 해프닝이 있었다. 인터넷 서점에서 서평을 훑어보다가 얼떨결에 이 작품의 스포일러까지 읽고 말았던 것이다. 그냥 지나치고 읽기엔 너무 눈길을 끄는 내용이었던 만큼 이 작품의 첫 페이지를 넘길 즈음까지도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하지만 웃기게도 난 반전의 내용을 알면서도 속고 말았다. 작가가 워낙에 그럴싸하게 숨긴 나머지 내가 인터넷 서점에서 읽은 서평이 사실은 헛것이 아니었는지 의심해버렸다. 결과적으로 스포일러를 당한 게 무색하게 나는 이 작품을 즐기는데 아무런 지장도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참...

 처음 읽을 땐 반전의 놀라움에 감탄했다면 요번에 다시 읽을 때는 이런 반전을 구사한 작가의 주제의식에 눈길이 더 많이 갔다. 예전엔 놀라운 반전이라고만 여겼는데 최근에 작가의 다른 작품 <거울 속은 일요일>을 의식하며 읽으니 이 작가가 굉장히 노력하는 천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반전의 놀라움으로 승부하려는 작가가 아니라 그 반전을 통해 그 이상의 것을 말하고자 하는 작가라는 게 내가 <가위남>을 다시 읽으면서 받은 인상이다.


 동서고금의 추리소설가들은 제각각의 작품 세계를 갖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이런 뉘앙스의 말을 꼭 작품 속에 넣는 것 같다. '선입견 따위, 쓰레기통에나 던지라지.' 그 말 그대로다. 추리소설에선 가장 의외의 사람이 범인이고 가장 알리바이가 확실한 사람이 범인이다. 이런 경우는 오히려 클리셰라 봐도 무방할 정도로 선입견을 파고들거나 이용하는 건 추리소설에선 절대불변의 규칙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가위남>만큼 '선입견'이란 개념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파고드는 작품도 없는 것 같다.

 이 작품은 가급적 스포일러를 최소화하고 소개해보고 싶다. 어떤 종류의 반전을 구사하는지도 함구하겠다. 내 경우엔 반전의 핵심까지 알고도 속았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아예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읽었으면 좋겠다. 게다가 다른 이유도 있다. <가위남>은 선입견을 파고드는 아주 좋은 작품이긴 하나 그놈의 선입견 때문에 소개하는 입장에선 곤란한 작품이기도 하다. 가령 주인공이 연쇄살인범이고, 연쇄살인범이 세 번째 희생자를 물색하는 도입부나, 또 주인공이 연쇄살인범임에도 불구하고 누가 주인공 아니랄까봐 그 심상 세계가 묘하게 매력적인 것 등 이 작품의 기본 설정 자체를 좋게 표현했다간 속된 말로 미친 놈 소리 듣기 딱 좋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난 연쇄살인범이 등장하는 추리소설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물며 잔인한 작품이 취향도 아니며 그런 측면에서 이 작품은 여러모로 내가 인상 깊게 읽을 만한 작품은 아니었다. 주인공의 심상 세계가 매력적이지만 딱히 공감도 안 가고 경찰의 시점과 병행되는 전개도 생각보다 눈길을 끌지 못했다. 작가가 캐릭터 만드는 솜씨가 형편없었으면 이 작품은 답이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작중에서 그럴 듯하게 설명되지만, 사건 전개에 있어 우연이 너무 남발되는 것도 호불호가 갈릴 것이다. 개중엔 너무 허술한 부분도 있어 역시 데뷔작은 어쩔 수 없구나 싶었다. 후반 100페이지를 읽기 전까지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결국엔 반전이 전부인 소설이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그 반전이 없었으면 지지부진하기만 했던 앞의 서사들은 통째로 되살아날 일 없이 그대로 지지부진한 채로 묻혔을 테니까. 다시 읽으니 그 점이 더욱 극명하게 느껴졌다. 이 작품은 반전을 빼면 시체라고. 하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반전 없이는 애초에 구상되지도 않았을 작품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쓰던 도중에 급하게 떠올린 반전일 가능성은 절대 없다. 단순히 복선과 치밀한 구성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잊을 만하면 강조된 선입견의 위험성은 모두 반전의 놀라움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장치였다.


 <가위남>은 선입견 따위, 쓰레기통에나 던지라고 온몸으로 주장하는 작품이다. 선입견이 무가치할 뿐더러 위험할 수 있다는 걸 작중 내내 강조하는데, 선입견을 가져선 안 된다는 걸 누군들 모를까 싶겠지만 정작 왜 그래야 하는지 설명하려는 사람은 적다는 걸 우리는 생각해봐야 한다. 선입견이 생긴 것엔 어느 정도 근거도 있고 필요하단 의견도 있지만 솔직히 말해 대다수의 사람은 뭐가 선입견인지 일일이 따지며 살지도 않는다. 누군가 나서서 언급하지 않는 이상 선입견은 선입견으로 인식되지도 않는다.

 이 작품을 쓴 슈노 마사유키는 그 '누군가'에 해당할 사람이다. 자신이 떠올린 반전을 위해, 그에 걸맞은 설득력을 갖추기 위해, 충격을 배가시키기 위해 다각도로 공부한 슈노 마사유키는 이 작품으로 하여금 성공적으로 데뷔했고 독자들 사이에서 반전하면 생각나는 작품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에도 성공했다. 지금 읽어도 혁신적인 작품이고, 중요한 건 이 작가가 원 히트 원더에 속하는 작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거울 속은 일요일>을 읽었을 땐 <가위남>으로만 평가하기엔 아까운 작가라고 여겨졌다. 그가 지금은 고인이고 그의 다른 작품이 좀처럼 국내에 소개되지 않는 게 아까울 따름이다. 천재가 이렇게 잊혀져선 안 되는데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가위남>이 영화로도 나왔다는 것인데, 이 작품을 읽은 사람은 알겠지만 영화의 완성도가 심히 의심스러울 것이다. 영화로 구현되면 어떤 부분 때문에 작품의 묘미가 확 떨어질 텐데, 아니나 다를까 캐스팅 목록을 보니 아예 그 묘미를 포기한 것 같다. 영화는 영화대로 재밌을 것 같지만, 만약 둘 다 본다면 무조건 소설 먼저 봐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실히 들었다. 난 이미 소설부터 읽었으니 다행이라 할 수 있겠다. 만약 반대로 접했다면... 상상도 하기 싫다.

왜, 산에서 곰을 만나면 죽은 척하라는 이야기가 있잖아. 옛날부터 그렇게 전해 내려왔고, 실제로 그렇게 해서 살아남은 사람도 많다고 말이지. 그건 당연한 거야. 죽은 척했다가 실패하면 곰한테 잡아먹히는 거잖아? 나는 곰 앞에서 죽은 척했습니다만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하고 증언하는 사람은 없어. 당연히 성공 사례밖에 보고되지 않아. 자살도 마찬가지야. 자살에 성공한 인간은 나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하고 말하지 못해. 이미 죽은 몸이니까. - 56p




그리고 오히려 나와 경사 나리와 마쓰모토 형사님의 직감이 일치했을 때가 위험한 거야. 모두가 이 사람이 범인이라고 믿어버리면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르게 될 수 있어. 누명은 그렇게 해서 씌워지는 거야.

네가 해야 할 건 이런 직감을 몸에 익히는 게 아니야. 너 자신의 견해를 관철하는 거야. - 19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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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녀와 통곡의 순례자 - Extreme Novel
노무라 미즈키 지음, 최고은 옮김, 타케오카 미호 그림 / 학산문화사(라이트노벨) / 2009년 1월
평점 :
품절


8.3







 이번 에피소드에선 코노하의 트라우마라 할 수 있을 미우가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회상에서만 단편적으로 등장해서 늘 궁금증을 유발했던 미우가 대관절 코노하에게 어떤 존재인지 살펴볼 수 있었는데 예상대로 그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어느 정도 멘탈을 다잡은 듯한 코노하였지만 미우가 자기의 평소 생활 반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만으로 바로 멘붕에 빠져버린다. 하긴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이번엔 코노하가 멘붕한 모습이 그리 못나게 보이진 않았다. 기껏 가까워진 여자친구 고토부키와 삽시간에 소원해진다거나 아쿠타가와나 다케다처럼 새로 사귄 친구들과 단숨에 거리가 생기는 건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토오코 선배만큼은 코노하에게 있어 구원이었던 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이미 이 시리즈의 결말까지 다 아는 입장에서 더 선명하게 느껴진 건데, 역시 코노하에겐 토오코 선배만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토오코의 에피소드는 이 책을 기준으로 두 권은 더 지나야 본격적으로 다뤄질 테니 그 얘기는 그때 가서 하도록 하고, 이번 권의 주역인 미우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그래도 예전에 비해 코노하의 멘탈이 강해지긴 한 건지 생각보다 우여곡절이 뒤따르진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이야길 좀 질질 끄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사건의 발단이나 발생 원인 파악, 해결 등이 비교적 쉬운 편이었으며 분량에 비해 복잡하지도 않았다.


 물론 미우가 일그러진 심성의 소유자긴 하지만 지난 에피소드에서 나온 인물들에 비하면 차라리 양호한 편이라 느껴졌다. 애초에 그렇게 난리를 칠 만한 일일까도 싶었지만 사람의 자괴감이나 배신감, 질투심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당사자를 엇나가게 만드는 만큼 이전보다 훨씬 납득할 수 있는 사연이었다. 이 책 직전에 <종이의 집>을 봤더니 미우는 양반으로 느껴진 건지 모르겠다;; 어쨌든 동상이몽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듯 항상 가까이 지냈고 서로 친한 사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고 해도 의외로 한 쪽에서 상대방을 증오할 수도 있단 걸 미우의 사례에서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코노하에게 무슨 죄가 있겠냐만, 때론 상대방의 맹목적인 동경은 나 자신을 옥죄는 감옥이 될 수 있음을 작가는 너무나 잘 표현했다.

 최근에 읽은 슈노 마사유키의 <거울 속은 일요일>에서 비슷한 주제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는데 이 작품에선 이 주제가 훨씬 광기 넘치게 묘사됐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광기야말로 작가의 주특기라 할 수 있겠는데 차이가 있다면 그전까진 그 광기를 독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유명 고전문학의 사례를 적극 인용한 반면 이번 에피소드에선 인용하는 고전문학의 존재감이 옅었다는 것이다. 특정 작품보단 미야자와 겐지의 작품 세계를 소재로 다룬 느낌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순수하게 본편 자체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이전 에피소드에서 너무 모티브로 잡은 고전문학과 너무 밀접하단 느낌을 받은 것에 비하면 차라리 시리즈의 개성은 옅어졌어도 독립된 이야기를 강조한 요번 구성이 훨씬 효과적이었다고 본다. 작가한텐 미안한 얘기일 수 있지만 이번 작품에 한해선 본편 자체가 강렬해서 미야자와 겐지의 작품들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인용했는가는 독자 입장에서 아무래도 상관없는 부분이었다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또 한 번의 거대한 산을 넘은 느낌이 들던 찰나에 막판에 초대형 떡밥을 던지며 에피소드가 마무리됐다. 떡밥을 던지지 않은 적이 없었던 것 같지만 이번 떡밥은 꽤 심상치 않았다. 무려 두 권으로 분권된 기념비적인 마지막 에피소드는 상당히 묵직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전에 잠시 쉬어가기로 만날 예정인 외전도 예상보다 훨씬 괜찮았던 기억이 나 벌써부터 완결까지 남은 세 권 모두 기대가 된다.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얼마 안 남았으니 빠르면 올해 안에 다 읽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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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프 보이스 - 법정의 수화 통역사
마루야마 마사키 지음, 최은지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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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최근 잇달아 청각장애인이 등장하는 작품을 접하다보니 이 작품에도 자연스레 손이 갔다. 일본 추리소설엔 정말 다양한 소재의 작품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이 작품은 그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각장애인이 등장하는 추리소설, 그것도 시리즈물론 단연 독보적이다.

 놀라운 건 이 작품을 쓰기 전까지 작가는 특별히 청각장애인과 연관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일단 작가 본인이 청인이며 가족이나 친구 중에 청각장애인이 없으며 그전까지 청각장애인과 관련한 시설에서 일해본 적도 없다고 한다. 다만 아내가 청각장애인은 아니지만 경추 손상이라는 중증 장애인인 터라 장애에 관해 여러 사람들과 만났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장애인이 등장하는 소설은 없을까' 하면서 이 작품을 구상하게 됐다고 한다.


 비록 청각장애인도 아니고 주변에 청각장애인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탄탄한 사전조사와 관련 업계 사람들의 도움 덕분인지 <데프 보이스>는 고증에 있어선 빈틈이 없는 작품으로 자리매김했다. 우리나라에서 코다로 유명한 이길보라 감독이 추천해줄 정도면 그 수준이 짐작될 것이다. 코다는 Children Of Deaf Adult의 줄임말로 청각장애인 부모를 둔 들리는 아이를 가리키는 단어인데 <데프 보이스>에서 이 코다라는 키워드는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청각장애인의 문화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면서도 들린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쉽게 녹아들 수 없고, 그렇다고 반대로 청인들 사이라고 쉽게 녹아들 수 있는 것도 아닌 이 혼란스런 정체성은 주인공인 아라이의 성장담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청각장애인 커뮤니티와 '해마의 집'이라는 농아시설을 둘러싼 두 번의 사건을 통해 아라이가 내적 성장을 하게 된다는 게 작품의 주된 내용이다. 이 과정을 아라이와 비슷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을 이길보라 감독이 공감했다는 건 눈여겨볼 만한 점이다. 상술했듯 작가는 청각장애인도 코다도 아니기 때문에 장애인이든 장애인이 아니든 공감이 가고 몰입하게 되는 내용을 썼다는 건 작가로서 소재에 대단히 집중하고 노력했다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 작품을 칭찬할 때 소재만 언급하는 건 좀 아까운 일일 수 있다. 어쨌든 이 작품은 청각장애인이 등장하는 추리소설이며 작가는 추리소설이란 정체성 역시 소홀히 다루지 않으니까 말이다. 사건의 발단이며 전개, 해결에 이르기까지 제3자나 다름없어 보이는 주인공 아라이가 어떤 식으로 사건에 개입하는지, 전직 경찰이지만 현재는 수사권이 없는 일반인이 어떻게 사건을 추적하고 진상에 도달하는지, 사건의 마무리와 이후에 수습할 요소들을 아라이가 전문 수화 통역사로서 어떻게 마주할 것인지 기대하게 만들면서 작품은 임팩트있게 끝맺어진다.

 단순히 소재에 집중하기만 한 소설이 아닌 소설적인 완성도, 특히 추리소설적인 서사도 탄탄하기 그지없었다는 게 제일 마음에 들었다. 이 작품이 마쓰모토 세이초상 최종 후보에 그쳤다는데 그럼 당시에 이 작품을 제치고 수상을 거머쥔 작품은 또 어떨지 궁금해졌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 일이지만 당장 이 작품만 살펴보면 후보에 그쳤다는 게 납득이 안 간다. 이만큼 소재와 스토리가 균형을 이루며 수준급인 작품도 흔치 않으니까. 단순히 인권 감수성만 높을 뿐 아니라 추리소설로도 흡입력이 높다면 더할 나위 없지 않은가.


 혹자는 이 작품의 반전이 어느 정도 뻔한 구석이 있고 주인공의 위치가 사건을 주체적으로 해결하기에 한계가 있는 만큼 답답한 면도 없잖다고 하던데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처음 읽을 당시 '법정의 수화 통역사'라는 부제가 무색하게 정작 법정에서 통역하는 장면 대신 법정으로 나아가기까지 아라이가 갈팡질팡하는 내용만 나온 것에 대해 허무함을 느꼈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일단 이 작품에 <용의 귀를 너에게>라는 후속작이 있으며 그 작품에서 수화 통역 에피소드가 많이 나오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이번에 다시 읽었을 땐 작가가 아라이의 내적 갈등이나 정체성 혼란을 집중해서 다룬 게 적절하게 느껴져 지난 번과 달리 허무함을 느끼거나 하진 않았다.

 소재도 소재지만 추리소설적 완성도에 대해서 나의 극찬에 동의하지 못할 사람이 많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내가 워낙에 관심이 많은 소재다 보니 필요 이상으로 과대평가한 게 아닐까 하고 나 역시도 되짚어보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이 글만 읽고 너무 기대하지 말 것을 당부하겠다. 그러나 한편으로 내가 이것만은 강조하고 싶었음을 다시 강조하고자 한다. 어찌 됐든 추리소설로는 일반적이지 않은 소재로도 빼어나지 않을 순 있어도 부족함이라곤 없는 추리소설을 쓸 수 있다는 걸 이 작품의 저자 마루야마 마사키는 선보여줬다. 이는 청각장애인이나 코다도 아닌 작가가 청각장애인에 대해 얘기를 하는 것 이상으로 까다로운 작업이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편견을 깨부수는 것이 힘겹고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는 것은 역사에 남을 도전이라 한다면 과장 조금 보태서 이 작품 역시 그 반열에 올릴 만하다고 생각한다.


 일본에서 이 작품의 후속작이 나오기까지 7년이 걸렸다고 한다. 내가 알기론 세 번째 작품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내가 봤을 땐 시간이 필요할 뿐 능히 세 번째, 네 번째 작품도 나올 듯하다. 부디 그 작품들까지 국내에 출간되기를 바란다.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으니까 출간만 되기를...



 https://blog.naver.com/jimesking/221184468410

 이건 처음 읽었을 때 쓴 포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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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의 집 1~7 세트 - 전7권 - 개정증보판 장애공감 1318
야마모토 오사무 지음, 김은진 옮김 / 한울림스페셜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9.0






 장애를 불행이라 여기는 사람들에게 '장애는 개성이다'라고 말하는데 이 작품을 읽으니 그 말이 그렇게 경솔하게 들릴 수 없다. 글쎄, 하나의 장애가 있어도 다수의 비장애인들 틈에서 적응하며 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닌데, 장애가 두 개 이상이라면 삶 자체가 지옥이나 다름없게 된다. 하물며 작중 배경은 1960년대 일본이다. 지금 우리나라보다 보수적이며 극심한 경쟁 사회인 그 당시 일본에서 장애인은 말 그대로 불구자不具者 취급을 당했다. 사고로 장애를 얻든 선천적으로 장애인이든 당사자와 가족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건 사회의 냉대와 자기 혐오다. 오히려 장애의 성질이나 극복 여부도 부차적인 문제로 여겨질 만큼 장애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비관적이란 게 무엇보다도 절망적인 시대였다.

 이 작품에선 아이들의 장애를 단순히 동정의 대상이나 극복해야 할 장애물처럼 단순하게 접근하지 않는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고 또 작가가 많은 사람들과 만나 인터뷰를 해서 그런지 등장인물이 상당히 많았는데 - 여담이지만 작가가 인물들을 비슷비슷하게 그리는 면이 없잖아서 구분하기가 좀 어려웠다... - 각 인물들이 처한 상황이나 가정 형편, 사연들이 다양하면서도 기구해서 만화임에도 빠르게 읽어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작가가 밝히듯 만화의 소재로는 일반적이지 않았는데 장애에 대한 작가의 시선도 가감없어서 더욱 불편하게 읽혔다. 장애에 관한 일말의 환상까지 모조리 덜어냈기 때문인데 들리지 않는 건 기본이고 자폐증이 있거나 운신도 버거운 아이들이 용변 문제를 시작으로 살아감에 있어 수많은 문제에 직면한다는 걸 이 작가처럼 이렇게 적나라하게 그린 사람도 드물 것이다.


 새삼 부모도 부모지만 그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육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는 작품이었다. 부모는 사회적 시선 때문에 자기 자식을 장애인이란 이유로 버릴 수 없어 약간 반강제적으로 아이들을 보듬어야 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이들과 생판 남인 교육자들은 전혀 다른 처지지 않은가. 부모나 선생님이나 역할의 우열을 가릴 순 없겠지만 단순히 직업적 차원을 넘어 아이들에게 헌신을 다하는 모습에서 경외감을 느꼈다. 내가 '경외감'이라 표현한 이유는 과연 내가 당사자였어도 이들처럼 용변 문제부터 시작해 도토리의 집을 만들기 위해 운동까지 할 수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들의 선한 마음씨와 행동력이 자체가 두렵다기 보다 이런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는 점에서 왠지 모르게 두려웠던 것이다.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 중 한 명이 소원으로 자기 아들보다 딱 하루만 더 사는 것이란 대사는 개인적으로 정말 충격적이었다. 보통의 부모 입장에선 자식이 자기보다 먼저 죽는 모습을 꿈에서라도 보길 원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식이 아닌 이상 장애인 한 사람 한 사람을 보살필 리가 없는 사회에서 부모 없이 단 하루라도 살아갈 자식이 걱정스러워 저런 소원을 가진다는 건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부모로서 자식 사랑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게 아니냐고 생각할 사람이 많지만 아무리 부모 자식 관계가 피로 이어졌어도 결국엔 남이란 걸 생각한다면 저런 소원은 사랑을 넘어선 그 이상의 감정이라 봐야 마땅하다.


 그런 점에서 도토리의 집을 설립하게 된 계기나 끝내 성공한 것은 무척 소름 돋는 일이었다. 부모가 죽거나 선생님이 더는 곁을 봐줄 수 없을 때가 닥쳐도 장애인들끼리 연대해 서로름 보듬고 경제 활동도 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든 것은 단순히 장애인 교육 시스템 확립 그 이상의 성과로 여겨졌다. 혹자는 장애인이 장애인들끼리만 뭉치게 만들었다는 지적을 하던데 그런 사람들이 청각장애인이 수화도 익히지 못하게 했다는 걸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교육을 모두 수료했다고 무턱대고 비장애인들 사회에 장애인을 보내는 건 무책임한 처사일 수도 있음에 생각이 미쳤다면 장애인만의 시설이나 문화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이 작품의 사회적 영향력이나 짙은 주제의식도 물론이지만 에피소드마다 감정을 북받치게 만드는 서사도 주목해야 하는 부분이다. 장애를 가진 아이들의 티끌 없는 시선을 어른들이 깨닫는 과정에서 오는 감동이 실로 묵직했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영악하다는 이야길 많이 접해서 도리어 아이들의 순수성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신선하게 다가왔다. 인내심 있게 아이들을 이해해주고 기다려준 작중 어른들과 실제 사연의 주인공들이 없었으면 못 느꼈을 감동이었다. 그렇다고 내 안의 냉소적인 감정이 어디 간 건 아니지만 이 작품을 읽으니 반성을 좀 했다. 장애인을 비롯해 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이나 했을까?


 재앙이나 다름없을 상황에서 인간애를 믿은 주인공들, 그리고 작가 같은 사람 덕분에 오늘날 일본은 우리나라와 비교했을 때 확실히 장애와 관련한 복지 면에선 선진국이 된 것 같다. 과거엔 장애에 대한 인식이 막장이었지만 장애를 그리는 만화가 많이 나옴으로써 가능한 변화가 아니었을까. <나는 귀머거리다>에서 스쳐가던 식으로 묘사된 일본의 모습을 생각하면 근거없는 추측은 아닐 듯하다. 그런 점에서 만화의 역할은 역시 중요해 보인다. 이 작품의 경우엔 작풍이나 주제의식이 워낙 강해서 진입 장벽도 높은 편이었고 가끔씩 부담스러운 내용도 있었지만 그래도 만화가 가질 수 있는 갖은 순기능을 제법 잘 활용한 수작이라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도 경외감 넘치는 작품이었다.

약자를 배제해야만 성립하는 교육이라면 그건 참교육이 아닙니다. - 3권 3화 ‘노나카 선생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나 그 가족들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가족들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이 사회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존중받으며 서로 돕고 격려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그렇게 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 7권 10화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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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합격, 계급 - 장강명 르포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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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한 사람의 소설가 지망생으로서 이 책은 위안이 되는 한편으로 각오를 다지게 만들었다. 소설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 꿈이나 다름없는 등단이란 시스템의 본질에 대해 질문하는 이 책은 기자 출신 소설가인 장강명 씨의 적절한 필치로 생각보다 객관적이고 다채로운 내용들로 구성됐다. 등단 시스템과 문학상의 존재 이유, 맹점, 관련 업계 종사자들의 평가와 대안 등을 꼼꼼한 조사와 작가 자신만의 철학으로 잘 분석했다. 책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국에만 있는 이 시스템은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있다고.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지만 작가는 논리적으로 풀어낸다.

 개인적으로 작가가 신인 장편문학상 심사위원이 되면서 겪었던 일이 꽤 인상적이었다. 자신의 개인적 취향 때문에 역사에 남을 작품이 빛을 보지 못할 수 있다는 걱정에 책임감을 갖고 임했다는 묘사와 어떤 작품은 걸렀고 어떤 작품을 꼽았는지, 자신이 봤을 때 대상감이라 여긴 작품을 위해 다른 심사위원들과 설전을 벌였다는 에피소드는 눈여겨볼 만했다. 내가 나중에 심사위원이 됐을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 그도 그럴 게 아직 등단도 못한 소설가 지망생이 그런 상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헛웃음 나올 일이잖은가. - 나로서는 추측의 영역에 불과했던 심사위원들의 고충이라든가 작품을 출품할 때 실질적으로 대비해야 할 요소들을 짐작케 해준다는 점에서 허투루 읽을 수 없었다.


 책을 읽기 전에는 등단과 신인상 제도는 독서 시장이 열악한 우리나라에서 출판사에는 합리적이고 소설가 지망생에겐 매력적인 제도라 생각했다. 당장 이런 제도 없이 출판사에 원고를 들고 편집자를 찾거나 아무런 타이틀 없이 출판되는 것은 솔직히 불안하기 짝이 없는 일이니까. 구관이 명관이라고 출판사 입장에선 기성 작가에게 투자를 하는 게 낫지 모든 불특정 다수의 신인에게 신경쓸 겨를이 없겠고 독자 입장에서도 특별한 계기가 없는 이상 신인의 작품까지 관심을 기울일 필요성을 느끼지 힘들 것이다. 어지간한 애독자라면 모를까, 모든 독자가 내가 쓴 책에 약속이라도 했듯 관심을 보이길 바랐다간 꿈도 야무지다는 말이나 들을 것이다.

 작가도 비슷한 이유로 이 제도를 옹호하지만 그렇게 무비판적으로 제도를 맹신해선 안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조선 시대의 과거 제도부터 시작해 대기업 공채 시험까지 우리나라에서의 모든 시험은 비슷한 맥락과 동일한 맹점이 있다며 책의 서두를 장식한 작가는 질문의 화살을 신인 장편문학상들에 돌린다. 처음엔 소설가 지망생에게 기회를 주고자 했지만 시간이 흘러 등단자와 비등단자로 이분하는 권력과 계급의 상징이 된 이 신인 장편문학상 제도에 대한 작가의 분석은 날카로웠다. 상을 받았느냐, 등단을 어디서 했느냐로 파벌과 차별이 생긴다거나, 혹은 기발하고 역동적이지만 기존 문단이나 심사위원의 문학관과는 위배돼 빛을 보지 못한 작가와 작품들을 두고 작가는 이 제도가 우리가 처한 상황에 적합한 듯하나 완벽하지 못하단 걸 책에서 내내 강조하고 있다.


 장강명 작가를 작가로서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꽤 믿을 만한 작가라고 생각했다. 가령 자기가 심사위원일 때의 일화를 언급하면서 심사위원들도 각자 취향에 눈이 가려져 간과하는 대작도 있음을 암시하며 작가 스스로도 그 점을 가장 우려했다는 게 특히 신뢰가 갔다. 서두에서도 그 어떤 작가보다 신인상의 특혜를 받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인 본인이 등단 제도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지 고민하는 부분이 나온다. 자기 고민과 생각을 독자와 함께 공유하는 작가는 신뢰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바로 직전에 이사카 코타로의 작품을 접해서 그런지 이런 의심하고 또 의심하는 작가의 태도가 더 긍정적으로 다가왔다.

 르포의 특성상 뭔가 했던 말 반복하는 느낌이 없잖았고 작가 스스로도 공인했듯 어딘지 따로 놀면서 불필요해 보이는 부분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론 그 모든 요소들이 모여 글을 신뢰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만들어지지 않았나 싶다. 소설가 지망생으로선 등단이라는 좁지만 영광스런 구멍을 무시할 수 없고 등단한 작가끼리 연대하거나 더욱 본인들이 통과한 제도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모습에 대해서도 작가는 동정의 시선을 아끼지 않는다. 다만 작가는 소설가 지망생들의 절박한 마음을 당연하다는 듯 이용해 기존 제도에 대안 같은 건 필요없다는 의견이나 권위주의에 젖어 비판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분위기에 대해선 의문을 감추지 않는다.


 결국 이 책의 내용도 으레 그렇듯 대안 없는 비판에 불과할 수 있다. 작가도 제도의 장점을 언급하며 지망생들에게 도전을 멈추지 말 것을 당부해 그렇게 느낄 독자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가장 특혜를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기성 작가가 이만큼 기존 제도에 의문을 제기한 책은 결코 흔치 않다고 생각한다. 이런 책의 존재야말로, 의문을 제기한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사회에선 충분히 가치가 있지 않을까. 그것밖에 못했느냐고 할 게 아니라 이거라도 정말 대단하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문학상 수상이 간절한 소설가 지망생이다. 문학상이란 타이틀이 주는 화려함과 안전함은 무시할 수 없다. 당연히 수상할 때까지 도전할 생각인데, 이 책을 읽으니 설령 시간이 더디 걸려도, 혹은 다른 길로 우회해도 꼭 내가 재능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고 약속을 받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나 자신한테 떳떳하려면 그만큼 거짓없이 열심히 써야 할 테니 그만큼 책임이 동반되는 약속이겠다. 참으로 듣기 좋은 동시에 잔인한 내용의 책이 아닐 수 없었다.

모험을 망설이는 사람에게 지도를 그려 제공하자는 게 나의 제안이다. 지금 한국 독서 생태계나 노동시장은 너무 깜깜하다. ‘무슨 무슨 시험에 합격했다‘는 간판들만 빛나는 어두운 거리 같다. - 42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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