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프 보이스 - 법정의 수화 통역사
마루야마 마사키 지음, 최은지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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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최근 잇달아 청각장애인이 등장하는 작품을 접하다보니 이 작품에도 자연스레 손이 갔다. 일본 추리소설엔 정말 다양한 소재의 작품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이 작품은 그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각장애인이 등장하는 추리소설, 그것도 시리즈물론 단연 독보적이다.

 놀라운 건 이 작품을 쓰기 전까지 작가는 특별히 청각장애인과 연관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일단 작가 본인이 청인이며 가족이나 친구 중에 청각장애인이 없으며 그전까지 청각장애인과 관련한 시설에서 일해본 적도 없다고 한다. 다만 아내가 청각장애인은 아니지만 경추 손상이라는 중증 장애인인 터라 장애에 관해 여러 사람들과 만났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장애인이 등장하는 소설은 없을까' 하면서 이 작품을 구상하게 됐다고 한다.


 비록 청각장애인도 아니고 주변에 청각장애인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탄탄한 사전조사와 관련 업계 사람들의 도움 덕분인지 <데프 보이스>는 고증에 있어선 빈틈이 없는 작품으로 자리매김했다. 우리나라에서 코다로 유명한 이길보라 감독이 추천해줄 정도면 그 수준이 짐작될 것이다. 코다는 Children Of Deaf Adult의 줄임말로 청각장애인 부모를 둔 들리는 아이를 가리키는 단어인데 <데프 보이스>에서 이 코다라는 키워드는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청각장애인의 문화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면서도 들린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쉽게 녹아들 수 없고, 그렇다고 반대로 청인들 사이라고 쉽게 녹아들 수 있는 것도 아닌 이 혼란스런 정체성은 주인공인 아라이의 성장담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청각장애인 커뮤니티와 '해마의 집'이라는 농아시설을 둘러싼 두 번의 사건을 통해 아라이가 내적 성장을 하게 된다는 게 작품의 주된 내용이다. 이 과정을 아라이와 비슷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을 이길보라 감독이 공감했다는 건 눈여겨볼 만한 점이다. 상술했듯 작가는 청각장애인도 코다도 아니기 때문에 장애인이든 장애인이 아니든 공감이 가고 몰입하게 되는 내용을 썼다는 건 작가로서 소재에 대단히 집중하고 노력했다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 작품을 칭찬할 때 소재만 언급하는 건 좀 아까운 일일 수 있다. 어쨌든 이 작품은 청각장애인이 등장하는 추리소설이며 작가는 추리소설이란 정체성 역시 소홀히 다루지 않으니까 말이다. 사건의 발단이며 전개, 해결에 이르기까지 제3자나 다름없어 보이는 주인공 아라이가 어떤 식으로 사건에 개입하는지, 전직 경찰이지만 현재는 수사권이 없는 일반인이 어떻게 사건을 추적하고 진상에 도달하는지, 사건의 마무리와 이후에 수습할 요소들을 아라이가 전문 수화 통역사로서 어떻게 마주할 것인지 기대하게 만들면서 작품은 임팩트있게 끝맺어진다.

 단순히 소재에 집중하기만 한 소설이 아닌 소설적인 완성도, 특히 추리소설적인 서사도 탄탄하기 그지없었다는 게 제일 마음에 들었다. 이 작품이 마쓰모토 세이초상 최종 후보에 그쳤다는데 그럼 당시에 이 작품을 제치고 수상을 거머쥔 작품은 또 어떨지 궁금해졌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 일이지만 당장 이 작품만 살펴보면 후보에 그쳤다는 게 납득이 안 간다. 이만큼 소재와 스토리가 균형을 이루며 수준급인 작품도 흔치 않으니까. 단순히 인권 감수성만 높을 뿐 아니라 추리소설로도 흡입력이 높다면 더할 나위 없지 않은가.


 혹자는 이 작품의 반전이 어느 정도 뻔한 구석이 있고 주인공의 위치가 사건을 주체적으로 해결하기에 한계가 있는 만큼 답답한 면도 없잖다고 하던데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처음 읽을 당시 '법정의 수화 통역사'라는 부제가 무색하게 정작 법정에서 통역하는 장면 대신 법정으로 나아가기까지 아라이가 갈팡질팡하는 내용만 나온 것에 대해 허무함을 느꼈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일단 이 작품에 <용의 귀를 너에게>라는 후속작이 있으며 그 작품에서 수화 통역 에피소드가 많이 나오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이번에 다시 읽었을 땐 작가가 아라이의 내적 갈등이나 정체성 혼란을 집중해서 다룬 게 적절하게 느껴져 지난 번과 달리 허무함을 느끼거나 하진 않았다.

 소재도 소재지만 추리소설적 완성도에 대해서 나의 극찬에 동의하지 못할 사람이 많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내가 워낙에 관심이 많은 소재다 보니 필요 이상으로 과대평가한 게 아닐까 하고 나 역시도 되짚어보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이 글만 읽고 너무 기대하지 말 것을 당부하겠다. 그러나 한편으로 내가 이것만은 강조하고 싶었음을 다시 강조하고자 한다. 어찌 됐든 추리소설로는 일반적이지 않은 소재로도 빼어나지 않을 순 있어도 부족함이라곤 없는 추리소설을 쓸 수 있다는 걸 이 작품의 저자 마루야마 마사키는 선보여줬다. 이는 청각장애인이나 코다도 아닌 작가가 청각장애인에 대해 얘기를 하는 것 이상으로 까다로운 작업이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편견을 깨부수는 것이 힘겹고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는 것은 역사에 남을 도전이라 한다면 과장 조금 보태서 이 작품 역시 그 반열에 올릴 만하다고 생각한다.


 일본에서 이 작품의 후속작이 나오기까지 7년이 걸렸다고 한다. 내가 알기론 세 번째 작품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내가 봤을 땐 시간이 필요할 뿐 능히 세 번째, 네 번째 작품도 나올 듯하다. 부디 그 작품들까지 국내에 출간되기를 바란다.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으니까 출간만 되기를...



 https://blog.naver.com/jimesking/221184468410

 이건 처음 읽었을 때 쓴 포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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