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의 집 1~7 세트 - 전7권 - 개정증보판 장애공감 1318
야마모토 오사무 지음, 김은진 옮김 / 한울림스페셜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9.0






 장애를 불행이라 여기는 사람들에게 '장애는 개성이다'라고 말하는데 이 작품을 읽으니 그 말이 그렇게 경솔하게 들릴 수 없다. 글쎄, 하나의 장애가 있어도 다수의 비장애인들 틈에서 적응하며 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닌데, 장애가 두 개 이상이라면 삶 자체가 지옥이나 다름없게 된다. 하물며 작중 배경은 1960년대 일본이다. 지금 우리나라보다 보수적이며 극심한 경쟁 사회인 그 당시 일본에서 장애인은 말 그대로 불구자不具者 취급을 당했다. 사고로 장애를 얻든 선천적으로 장애인이든 당사자와 가족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건 사회의 냉대와 자기 혐오다. 오히려 장애의 성질이나 극복 여부도 부차적인 문제로 여겨질 만큼 장애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비관적이란 게 무엇보다도 절망적인 시대였다.

 이 작품에선 아이들의 장애를 단순히 동정의 대상이나 극복해야 할 장애물처럼 단순하게 접근하지 않는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고 또 작가가 많은 사람들과 만나 인터뷰를 해서 그런지 등장인물이 상당히 많았는데 - 여담이지만 작가가 인물들을 비슷비슷하게 그리는 면이 없잖아서 구분하기가 좀 어려웠다... - 각 인물들이 처한 상황이나 가정 형편, 사연들이 다양하면서도 기구해서 만화임에도 빠르게 읽어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작가가 밝히듯 만화의 소재로는 일반적이지 않았는데 장애에 대한 작가의 시선도 가감없어서 더욱 불편하게 읽혔다. 장애에 관한 일말의 환상까지 모조리 덜어냈기 때문인데 들리지 않는 건 기본이고 자폐증이 있거나 운신도 버거운 아이들이 용변 문제를 시작으로 살아감에 있어 수많은 문제에 직면한다는 걸 이 작가처럼 이렇게 적나라하게 그린 사람도 드물 것이다.


 새삼 부모도 부모지만 그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육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는 작품이었다. 부모는 사회적 시선 때문에 자기 자식을 장애인이란 이유로 버릴 수 없어 약간 반강제적으로 아이들을 보듬어야 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이들과 생판 남인 교육자들은 전혀 다른 처지지 않은가. 부모나 선생님이나 역할의 우열을 가릴 순 없겠지만 단순히 직업적 차원을 넘어 아이들에게 헌신을 다하는 모습에서 경외감을 느꼈다. 내가 '경외감'이라 표현한 이유는 과연 내가 당사자였어도 이들처럼 용변 문제부터 시작해 도토리의 집을 만들기 위해 운동까지 할 수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들의 선한 마음씨와 행동력이 자체가 두렵다기 보다 이런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는 점에서 왠지 모르게 두려웠던 것이다.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 중 한 명이 소원으로 자기 아들보다 딱 하루만 더 사는 것이란 대사는 개인적으로 정말 충격적이었다. 보통의 부모 입장에선 자식이 자기보다 먼저 죽는 모습을 꿈에서라도 보길 원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식이 아닌 이상 장애인 한 사람 한 사람을 보살필 리가 없는 사회에서 부모 없이 단 하루라도 살아갈 자식이 걱정스러워 저런 소원을 가진다는 건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부모로서 자식 사랑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게 아니냐고 생각할 사람이 많지만 아무리 부모 자식 관계가 피로 이어졌어도 결국엔 남이란 걸 생각한다면 저런 소원은 사랑을 넘어선 그 이상의 감정이라 봐야 마땅하다.


 그런 점에서 도토리의 집을 설립하게 된 계기나 끝내 성공한 것은 무척 소름 돋는 일이었다. 부모가 죽거나 선생님이 더는 곁을 봐줄 수 없을 때가 닥쳐도 장애인들끼리 연대해 서로름 보듬고 경제 활동도 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든 것은 단순히 장애인 교육 시스템 확립 그 이상의 성과로 여겨졌다. 혹자는 장애인이 장애인들끼리만 뭉치게 만들었다는 지적을 하던데 그런 사람들이 청각장애인이 수화도 익히지 못하게 했다는 걸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교육을 모두 수료했다고 무턱대고 비장애인들 사회에 장애인을 보내는 건 무책임한 처사일 수도 있음에 생각이 미쳤다면 장애인만의 시설이나 문화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이 작품의 사회적 영향력이나 짙은 주제의식도 물론이지만 에피소드마다 감정을 북받치게 만드는 서사도 주목해야 하는 부분이다. 장애를 가진 아이들의 티끌 없는 시선을 어른들이 깨닫는 과정에서 오는 감동이 실로 묵직했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영악하다는 이야길 많이 접해서 도리어 아이들의 순수성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신선하게 다가왔다. 인내심 있게 아이들을 이해해주고 기다려준 작중 어른들과 실제 사연의 주인공들이 없었으면 못 느꼈을 감동이었다. 그렇다고 내 안의 냉소적인 감정이 어디 간 건 아니지만 이 작품을 읽으니 반성을 좀 했다. 장애인을 비롯해 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이나 했을까?


 재앙이나 다름없을 상황에서 인간애를 믿은 주인공들, 그리고 작가 같은 사람 덕분에 오늘날 일본은 우리나라와 비교했을 때 확실히 장애와 관련한 복지 면에선 선진국이 된 것 같다. 과거엔 장애에 대한 인식이 막장이었지만 장애를 그리는 만화가 많이 나옴으로써 가능한 변화가 아니었을까. <나는 귀머거리다>에서 스쳐가던 식으로 묘사된 일본의 모습을 생각하면 근거없는 추측은 아닐 듯하다. 그런 점에서 만화의 역할은 역시 중요해 보인다. 이 작품의 경우엔 작풍이나 주제의식이 워낙 강해서 진입 장벽도 높은 편이었고 가끔씩 부담스러운 내용도 있었지만 그래도 만화가 가질 수 있는 갖은 순기능을 제법 잘 활용한 수작이라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도 경외감 넘치는 작품이었다.

약자를 배제해야만 성립하는 교육이라면 그건 참교육이 아닙니다. - 3권 3화 ‘노나카 선생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나 그 가족들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가족들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이 사회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존중받으며 서로 돕고 격려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그렇게 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 7권 10화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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