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6월
평점 :
절판


9.3







 박노자란 이름은 종종 들어봤지만 저서는 처음 접해본다. 노서아(러시아)의 사람(자)이란 의미로 지은 한국 이름 박노자. 한국인의 도움 없이 그의 자력으로 이 책을 썼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너무나 고급 어휘를 구사해 당연히 한국인이 썼거나 한국인의 도움을 받은 줄 알았다. <비정상회담>의 타일러보다 뛰어난, 오히려 그 이상의 한국어와 언변을 갖춘 사람이라 생각됐다.

 저자가 서두에서 밝히듯 이 책은 한국과 노르웨이를 비교해 무조건 그 나라를 배워야 한다고 찬양하는 책이 아니다. 노르웨이가 어떻게 부국이 됐고 천국과도 같은 복지 정책을 유지하고 그를 국민들이 누리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고 한국 사회와는 어떤 점에서 다르고 지금 두 나라의 처지가 다른 것은 어느 정도 타의적인 결과임을 강조한다. 한마디로 둘 다 똑같이 주변 국가로부터 침략을 당하고 식민지 생활을 겪었지만 비교적 유럽 선진국들 사이에서 대접받으며 간접적으로나마 식민주의의 덕도 볼 수 있던 노르웨이와 달리 한국 사회는 일제강점기는 물론이고 6.25와 독재자들의 등장 같은 악재를 연이어 겪어 애당초 단순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가 노르웨이나 여타 유럽 나라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는 있어도 그들 문화를 동경하다 못해 열등감을 느끼는 건 과하다고 저자는 계속 설파한다.


 다른 나라도 아닌 노르웨이라고 하니까 아무래도 꽤 관심 있게 읽혔다. 저자는 노르웨이에서 배울 점은 분명 많으나 - 시민들의 놀라울 정도로 능동적인 정치 의식, 사치를 죄악시하는 듯한 검소한 소비 습관, 그리고 체통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은 듯한 평등한 시민 의식 등 - 그 밝은 모습의 이면엔 분명 그늘이 존재하고 또 그만한 국가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벌인 노력 내지는 몇몇 부끄러운 행보를 언급하길 소홀히 하지 않는다. 결국 노르웨이도 백인 우월주의가 알게 모르게 있는 서방 국가라 무조건 찬양했다간 실망하기 십상이란 것이다. 애초에 시작점이 월등히 유리했기에 천국에 가까운 사회를 이룩하기가 비교적 용이했다고 이해하면 편하다.

 이 책이 집필된 건 지금으로부터 거의 20년 전인 2002년이다. 책에선 김대중 전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을 주로 언급하는데 - 나머지 노벨상과 달리 노벨 평화상은 노르웨이에서 수여한다. - 그 수상 소식에 우리나라 사람이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한 것을 두고 노르웨이인을 비롯한 유럽인들이 우리나라의 열등의식 표출로 본다는 건 좀 진지하게 생각해볼 일인 것 같다. 작년에 <기생충>도 그렇고 한강의 <채식주의자>도 그렇고 우리나라는 국위선양에 지나치게 기뻐하는 것 같다. 수상 소식이 자랑스럽긴 하지만 국제적으로 유명해졌다고 해서 그것이 곧 성공의 절대적인 지표는 아닐 텐데. <기생충>이나 <채식주의자>나 결국엔 이전보다 더 좋은 작품이 된 것이 아닌 그저 더 유명한 작품이 됐을 뿐이니까. 그런데 우린 너무나 기뻐한다. 말로는 우리 것이 최고라면서 외국, 정확히는 서구 문화에 대한 동경이나 편입에 대한 일종의 열망을 엿볼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의 지적은 꽤 뼈아프면서도 정확했다.


 한국을 너무나 좋아하고 또 이방인이기에 말할 수 있는 작가의 시선은 전반적으로 예리하고 유익했으며 우리나라 사람이 읽기에 퍽 애정 어린 구석이 있었다. 덕분에 그간 품어왔던 노르웨이에 대한 무조건적인 로망은 조금은 수그러들게 됐다. 생각해보면 이 책이 출간한지 9년 뒤에 노르웨이에선 엄청난 테러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 테러범 한 명으로 노르웨이를 나쁘게 봐선 안 될 일이지만, 분명 그 사건으로 하여금 우리는 노르웨이는 천국이 아니라 역시 사람 사는 곳이고 허점 역시 분명 존재하는 곳임을 알 수 있었다. 그 일에 대해 작가가 뭐라 생각했는지 궁금하네. 저자의 최근 저서에 그 일에 대해 언급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한 번 찾아봐야겠군.

 서두에서부터 마지막 파트까지 꽤 흥미롭게 읽어나가다가 막판에 글의 방향이 틀어져 좀 당혹스러웠다. 어딘지 자연스러웠지만 근본적으로 이 글의 끝을 진보, 좌익에 대한 설명, 그리고 군대에 대한 비판과 양심적 병영 거부자 오태양 씨와의 대화로 마무리한 건 너무 생뚱맞았다. 읽는 동안엔 나도 모르게 인류애가 끓어오르는 대목이 많았지만 뒤돌아 곰곰이 생각해보면 결국 대안 없는 비판인 것 같아 지금도 황당하기 그지없다. 찾아보니까 박노자 씨는 특유의 과한 폭력 반대 때문에 비판을 많이 받는 모양인데 나도 그 비판의 논지를 알 것 같다. 이렇게 폭력으로 물들어가는 사회 분위기를 비판하는 사람은 필요하지만 실질적인 대안 없이 공감과 윤리만 강조하니 좀 덧없게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나라 군대는 특히 몇 십 년, 혹은 백 년이 넘게 이어지는 상황이 낳은 시스템이기에 보다 치밀한 접근이 필요했는데...... 아니, 다 떠나서 이 글의 마무리로는 너무 느닷없는 주제라 초반에 느낀 좋은 인상이 많이 깨졌다.


 저자의 다른 책도 이런 내용이려나? 차라리 처음부터 이런 내용이라면 나도 준비하고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흘려들을 건 흘려들을 텐데 이렇게 요상하게 글을 마무리 짓는 건 좀 아니다 싶었다. 아무래도 박노자 씨의 다른 저서도 읽어봐야겠다.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필력의 소유자지만 그때는 좀 긴장이란 걸 하면서 읽어야겠다. 긴장의 끈을 놓으면 작가한테 완전히 홀릴 수도 있으니.

문제는 비서구 지역의 비민주성을 그토록 비웃는 서구 사람에게는 민주주의가 신념이기보다는 단지 사회의 관습일 뿐이라는 것이다. 안 지켜도 되고 또 안 지킬 수 있는 지역에서 그들은 민주주의와 도덕을 너무 쉽게 용도 폐기한다. - 104p




그리고 결코 말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많은 유럽인이 이번 수상을 둘러싼 한국의 ‘국가적 잔치 분위기‘를 유럽에 대한 한국인들의 열등의식 표출로 보고 있다. 오히려 이를 자제할 수 있어야만 남의 찬탄과 비방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자기 길로 나아가는 옛 선비의 정신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 12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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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킬 수 없는 약속
야쿠마루 가쿠 지음, 김성미 옮김 / 북플라자 / 201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8.9







 한때는 드문드문 출간되던 야쿠마루 가쿠의 작품이 어느 순간부터 줄줄이 출간되는 것 같다. 그 작가의 작품을 <천사의 나이프>부터 출간되던 족족 챙겨봤던 터라 지금과 같은 유명세가 놀랍기 그지없다. 한동안 작가의 작품을 안 찾아본 사이에 이렇게나 인기 작가가 됐다니... 이와 같은 인기를 누리게 된 계기가 바로 <돌이킬 수 없는 약속>이라던데, 서점에서 자주 눈에 띈 스테디 셀러라 책장을 펼치기 전부터 반신반의했다. 그놈의 청개구리 기질 때문에 그런 것도 있지만, 내가 알고 있는 야쿠마루 가쿠가 맞긴 한 건가 싶기 때문이었다. 왠지 몰라도 스테디 셀러와는 거리가 먼 작가라 생각했는데.

 아마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 입소문을 퍼뜨린 데에는 엄청난 가독성과 복잡하지 않은 이야기의 덕이 큰 것 같다. 이전작들의 주인공에 비해 이 작품의 주인공은 사회의 부조리함에 견디다 못해 청승을 떨지 않아 독자로서 몰입하기 용이한 캐릭터였다. 그렇다 보니 진지한 맛이 있던 작가의 특성은 상대적으로 얕게 느껴졌으나 대신 장르적인 재미, 박진감과 미스터리함은 상당히 상승했다. 주인공의 설정과 가해자에게 적절한 단죄를 내리지 못하는 문제 투성이 사회에 대한 묘사의 세세함이 떨어진 게 아쉽지만. 그래도 평화로운 일상이 아득히 멀어져가며 궁지에 몰리는 주인공의 추락과 그에 대한 심리 묘사가 꽤 볼만해서 나름 만족스럽게 읽혔다. 특히 이야기의 분위기를 전환하는 초자연적인 설정은 신선한 시도였는데, 끝까지 자기 컨셉에 충실한 범인의 말투도 묘하게 웃겨서 - 일본의 '존댓말 캐릭터'는 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 도대체 뭐하는 놈이기에 이렇게 주인공을 괴롭히느냐며 궁금한 마음에 멈추지 않고 읽었던 것 같다.


 어딘지 자기복제를 거듭하는 듯한 인상을 받아왔기에 이런 속도감 있는 추격물로 이미지 변신을 시도한 작가의 모습이 꽤 긍정적으로 비쳐졌다. 깊이와 재미의 균형이 약간 삐걱거리지만 다음엔 깊이와 재미 두 가지를 보다 순조롭게 조절하리란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확실히 주제의식이나 주인공의 모습이 비슷비슷했던 걸 생각하면 <돌이킬 수 없는 약속>의 주인공은 작가 입장에서 꽤나 신선하고 입체적인 캐릭터가 아니었나 싶다. 어떻게 보면 작가가 이전작들에서 다뤄온 주제와도 일맥상통하다고도 할 수 있겠는데, 어떻게든 죗값을 치루지 않았다 해도 나중엔 그보다 더한 대가를 치뤄야 한다는 작가의 인과응보식 철학이 반영된 캐릭터가 바로 이 작품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겠다.

 생각할수록 재밌는 캐릭터였다. 첫인상에 비해 상당히 거친 성정을 갖고 있었고 참작이 안 되는 과거 역시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다분히 인간적이라 동정하게 되고 살인을 망설이는 모습은 또 의외라 본성까지 글러먹진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범인의 정체, 작품의 후반부에서 몰아치는 반전과 더불어 주인공이 그렇게까지 선을 넘지 않았다는 설정은 약간 작위적이었다는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론 그 '선'이란 것이 어지간한 상황이 아닌 이상 정말 넘기 힘들기 때문에 '선'이라고 부르는 것인지 생각해봤다. 저렇게까지 궁지에 내몰렸음에도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 주인공의 모습이 약간 답답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상대가 동정할 가치도 없는 작자들이라 갈팡질팡하는 주인공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가령 내 처지라고 생각해보면 제아무리 판이 짜여졌다 해도 타인을 죽이기란 보통 각오로는 해낼 수 없다며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할 것 같다. 눈 딱 감고 무슨 짓을 못할까 싶다가도 고갤 절레절레 저으며 뒷걸음질 치는 게 인간으로서의 통상적인 모습이리라. 게다가 주인공은 과거나 현재나 자신이 나쁜 짓을 많이 저지르긴 했지만 살인은 저지르지 않음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선은 넘지 않았다는 마지막 자존심을 지켰을 테니 더욱 살인을 범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범인의 요구에 응하지 않은 것이 정답이었지만, 그런 결과론적인 얘길 떠나서 결국 멘탈이 흔들리지 않고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주인공의 모습은 미련하고 이기적이란 소릴 들을 수 있을지언정 결국 선을 넘지 않아 언젠가 가족으로부터 용서를 받을 수 있으리란 희망적인 전망을 가질 수 있었다. 작가는 그런 의도로 결말을 그렇게 모호하게 처리한 게 아니었을까.

 상술했듯 이 작품을 기점으로 작가의 작품이 꽤 많이 출간됐던데, 그렇다 보니 지뢰도 섞여있는지 조심은 해야겠지만 그래도 선택지가 많아서 뭘 먼저 읽어볼까 고민하는 것이 즐겁다. 아마 단편집 <형사의 눈빛>을 먼저 읽을 것 같다. 작가의 단편집이 궁금하기도 하고 유명 문학상 후보에 든 작품이 다수 수록된 것으로 알고 있어 꽤 괜찮아 보인다. 작가의 장편밖에 안 읽어봤는데, 단편은 과연 어떠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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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러시아
시베리카코 지음, 김진희 옮김 / 애니북스 / 201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8.5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렇지만 내가 5년 전에 블라디보스토크 여행할 때 가장 고생한 게 바로 음식이었다. 최근에야 블라디보스토크가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유럽'이라며 각광을 많이 받고 있지만 5년 전엔 미지의 여행지나 다름없어 도대체 그곳에서 뭘 먹어야 할는지 정보를 찾기가 힘들었다. 덕분에 버거킹만 두 번을 들러야 했는데;; 만약 그때 이 책을 접했더라면 최소한 이걸 먹어야지 저걸 먹어야지 하고 목표를 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이 책은 러시아 사람과 결혼한 작가가 실제로 1년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생활한 이야기를 그린 만화다. 대체로 맛있는 러시아 음식과 러시아 생활 중에 겪었던 러시아 문화의 흥미로운 점, 문화 차이에 놀랐던 점 등을 과하지 않으면서 공감할 수 있게끔 그려냈다.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러시아가 낯선 나라인 만큼 작중에서 작가가 놀라는 포인트가 한국 독자인 내가 놀라는 포인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러시아 음식에 들어가는 재료나 선호하는 식재료, 의외로 닮은 식성 등 눈길을 끄는 요소가 많았다. 간단한 레시피도 적혀 있던데 그림까지 그려져 이해하기 쉬웠고 - 과연 몇 명의 독자가 이 레시피를 보고 러시아 요리를 해먹을까 싶지만... - 작가의 맛 표현도 명확해 실제로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고 싶은 곳이 많아 언제 러시아에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나중에 러시아에 간다면 이 요리들을 기억하고 하나씩 도전해보려고 한다.


 전술했듯 러시아 여행 때 러시아 음식 때문에 고생을 좀 했다. 대체로 느끼하고 기름지고 달았던 기억이 나는데 내가 유난히 그 여행에서 이상한 것들만 골라 먹어서 그렇게 느낀 것인지, 아니면 나와 러시아 음식이 정녕 맞질 않은 건지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남들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먹어봤다는 킹크랩과 블린도 못 먹어서 이래서야 러시아 땅을 잠깐 밟았을 뿐 러시아 음식을 먹어봤다고 얘기할 순 없을 듯하다.

 작가는 러시아인 남편이 처음에 러시아에 가서 살아보자고 제안했을 때 러시아 특유의 춥고 무서운 이미지 때문에 거절했었지만 막상 러시아에 가니까 러시아의 맛있는 음식을 통해 그 나라 문화를 친숙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인다. 종국에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아쉬워하기까지 하는데, 새삼 음식을 통해 다른 나라의 문화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문화권에서건 추울 땐 따뜻한 음식을 먹고 더울 땐 시원한 음식을 먹길 원한다. 그리고 사람의 입맛은 생각보다 편차가 크질 않다. 맛있는 음식은 대체로 만인에게 맛있게 여겨진다. 그렇게 보면 음식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폭넓은 공감대를 제공해주는 것 같다.


 작품 말미에 '러시아가 어디 가는 것도 아닌데... 나중에 또 와야지' 하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말이 참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국경을 넘어 여행을 떠나는 게 무척이나 요원해보이는 요즘에 이런 작품 한 편 한 편이 소중하게 여겨지는 한편으로 작가가 참 부럽기 그지없었다. 마음 같아선 음식이 입맛에 하나도 안 맞아서 고생하더라도 러시아든 어디든 떠나고 싶다.

 실제로 말레이시아에서 배탈이 나 고생한 입장에서 이게 얼마나 경솔한 발언인지 안다. 작가가 책에서 그린 러시아에서의 일상이 너무 부러운 나머지 잠시 이성을 상실한 것 같다... 어쨌든 시국이 시국인 지라 참 흥미롭고 유익하면서 해외여행에 대한 갈증을 미약하나마 해소할 수 있던 책이었다.  그나저나 지금 이 작가는 일본에 있으려나, 러시아에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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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쿠 상어 - 사메지마 형사 시리즈 01 뫼비우스 서재
오사와 아리마사 지음, 김성기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8.2







 일본에서 범죄율이 가장 높다는 도쿄 신주쿠를 배경으로 한 하드보일드 경찰물. 주인공 사메지마의 별명 '신주쿠 상어'는 이름에 상어(사메)가 들어가서 붙여진 것이기도 하지만 상어처럼 범죄자를 상대할 때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다. 묘하게 유치하고 절묘한 이 별명의 주인공을 내세운 '사메지마 형사' 시리즈는 지금까지 10권이 넘게 나왔다는데 국내에는 아직 1권밖에 출간되지 않았다. 내가 10년 전에 읽었을 때도, 지금도 마찬가지다. 90년대에 출간된 구판으론 4권까지 출간됐던데 그 책들을 찾아 읽기엔 아무래도 번거롭고 번역도 옛스러워 손이 가지 않는다.

 작가의 출세작이자 많은 상을 받은 작품이지만 시리즈 자체가 좀 연식이 됐다 보니 우리나라 독자들이 구태여 주목하거나 관심을 가질 여력은 없어 보인다. 이 책 자체도 이미 절판됐기에 우연히 접할 사람도 요원해 사실상 이대로 후속작을 못 본다고 단념하는 게 나은 실정이다.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쉽다. 1권이 캐릭터 소개에 분량이 할애된 감이 있고 후속작에 대한 기대를 부풀려 놓았기에 역시 2권부터 순서대로 접할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사메지마와 범죄자들의 결투도 궁금하지만 쇼와의 연애 이야기도 궁금하다. 쇼는 대놓고 남성 독자들을 노리고 만든 캐릭터라 나도 어쩔 수 없이 그쪽에 더 마음이 가는 것 같다.


 지금 와서 보니까 이 작품이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신인상과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하고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best 1위에 선정됐다는 게 약간 과하다는 생각도 든다. 조직 생활의 규칙을 쿨하게 무시하고 타협 없이 범인을 쫓는 사메지마의 과거사와 여정은 박진감 넘치고 통쾌했으며 액션과 추리, 골때리는 캐릭터도 많이 등장해 전체적으로 풍성하게 읽혔다. 생각보다 사건이 싱겁게 해결되고 아직 간만 살짝 맛본 정도라 감질났던 점이 좀 걸리지만 말이다. 가볍게 읽을 작품으로 더할 나위 없지만 엄청난 깊이와 철학을 기대해선 곤란한 엔터테인먼트 작품이라는 것 정도가 <신주쿠 상어>에 어울리는 수식어일 듯하다. 수상한 상의 목록을 보고 접근하면 실망하기 십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상을 내세워 홍보하는 건 오히려 독일 수도 있다.

 신주쿠에는 딱 한 번 라멘을 먹으러 가봤는데 실제로 이렇게 분위기가 개판일까 싶어 약간 의아한 기분도 들었다. 3년 전에 신주쿠에 갔을 때 기억나는 건 신주쿠역의 규모가 정말 어마어마하다는 것이다. 출구도 너무 많아 비둘기들이 지하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광경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무튼 여행 중에 야쿠자를 볼 일이 없으니 작중에서 묘사되는 풍경이 정말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풍경으로 여겨졌다. 특히 총기 사고가 남발한다거나 90년대에 게이들이 이렇게 버젓이 돌아다닌다는 등의 묘사는 낯설기 그지없었다. 이런 묘사를 일본의 서브컬쳐에서 한두 번 접하는 건 아니지만 엄연히 실재하는 장소인 신주쿠를 배경으로 펼쳐지니 어디까지 허구고 진실일지 살짝 구분이 안 갔다. 이 작품이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는 건 어느 정도 고증이 잘 이뤄졌다고 받아들여야 하나? 살아생전 신주쿠는커녕 일본을 다시 밟을 일이 있을까 싶지만 만약 도쿄 여행 중에 신주쿠에 갈 일 있으면 이 작품의 내용을 잠시 떠올려봐야 할 듯하다. 무슨 일이 생길까 싶지만 혹시 또 모르니까.


 상술했듯 아마 이 시리즈의 후속작을 접할 일은 없을 것 같다. 후속작은 물론이고 나오키상을 받았다는 시리즈 4편도 궁금하지만 10년 동안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사메지마의 이야기는 국내하곤 인연이 없는 것으로 여겨야겠다. 그래도 작가가 제법 유명한 사람이니까 다른 작품은 좀 출간될 법한데... 무려 미야베 미유키와 교고쿠 나츠히코하고 같이 사무실을 열 수 있는 작가라면 적어도 윈 히트 원더는 아니란 뜻이겠지. 다른 작품에서 필력을 어떻게 발휘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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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님과 나
우타노 쇼고 지음, 양억관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8.8







 스포일러 : 많다. 읽은 사람은 알겠지만 스포일러 없이 감상을 풀어내는 게 무의미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국내에 출간된 우타노 쇼고의 작품 중 가장 호불호가 갈릴 작품일 것이다. 비호감의 극치를 넘어 아예 비호감의 화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주인공 카즈마의 골때리는 망상을 끝까지 읽으면 바닥이 보이지 않는 허무함과 막막함을 마주할 테니까. 정말 한숨이 다 나오는데, 이런 소재와 이야기를 과감히 쓴 작가가 정말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싶다. 서브컬쳐 전반에 조예가 깊기로는 타의 추종을 - 특정 분야에 관한 캐릭터들의 수다는 장관이 따로 없다. - 불허할 작가다. 히키코모리, 오타쿠, 로리콘은 차라리 귀엽게 보일 정도로 천인공노할 소재를 작가가 너무 능수능란하게 다뤄내 읽다가 눈을 질끔 감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선혈이 낭자하지 않지만 상상만으로도 불쾌하고 끔찍한 장면이 한둘이 아니라서 일일이 언급하려고 시도하는 것만으로 소름이 돋는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어느 정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일단 불쾌하긴 해도 소재의 특성을 100% 살려낸 것과 결말이 허무하긴 해도 망상 부분의 자체적인 완성도가 출중해 분명 몰입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두 번째 부분은 허무한 결말을 통해 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뭔지 느껴져 두 번째 읽은 지금에 와선 사뭇 통쾌하게 읽히기도 했다. 부모를 살해했다는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것까진 좋았는데 하필 너무나도 리얼하면서 답이 없는 내용의 망상으로 도망쳐 카즈마로선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그나마 소원 카드를 통해 상황을 반전시킬 여지가 있었으나 너무나 어이없는 타이밍에 카드를 써버려 - 일종의 죄책감이려나? 그래도 혐오스럽다는 건 달라지지 않는다. - 망상에서도 쫓겨난 카즈마의 모습은 이후에 또 망상으로 도망친다 하더라도 결국 그 망상조차도 지옥임을 암시하는 듯했다.


 작품을 읽는 내내 이 정도로 리얼하고 짜임새 있는 망상을 펼칠 줄 아는 카즈마라면 추리소설을 써봐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상은 여자아이를 유괴해서 죽이고 자기 부모도 홧김에 죽이고 인형을 여동생 삼아 대화하는 혐오스런 쓰레기지만 이런 재능을 잘만 살렸더라면 꽤나 건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그 능력은 잘못된 방향으로 발휘됐다. 카즈마가 언제까지고 망상에서도 안주하지 못하게 되리란 암시가 위안이 되면서도 착잡함을 더욱 배가시켰다. 작가가 어째서 이런 답도 없는 쓰레기가 만들어졌는지를 은근히 사회파 추리소설스럽게 접근한 탓에 카즈마가 경멸스러우면서도 동정의 시선을 거두기 힘든 캐릭터로 여겨졌다. 나만 그런지 모르겠는데 가상의 여동생을 걱정하는 마지막 장면은 어딘지 씁쓸하기까지 했다. 참 갱생의 여지가 없는 모습이면서도 망상 속에서는 부분부분 괜찮은 인간이고자 하는 욕망도 엿보였기에 그 욕망을 현실에서 구체화시키지 못한 카즈마가 못내 안타까웠다.

 늘 느끼지만 우타노 쇼고의 작품에는 개성적이지만 비호감인 캐릭터들이 정말 많이 등장한다. 카즈마의 망상 속에서 등장한 라이미와 그녀의 엄마는 반전 없는 암 유발자들이었고 탐정으로 등장한 미가사도 카즈마나 라이미 정도는 아니어도 골때리는 양반이었다. 특히 라이미는 망상에만 존재했으면 하고 바라게 될 정도로 카즈마와 우열을 가리기 힘든 쓰레기였는데, 바꿔서 얘기하면 카즈마 같은 쓰레기니까 이런 캐릭터를 망상 속에 등장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그의 상상력이 더욱 감탄스럽게 다가왔다. 이 정도면 추리소설가가 아니더라도 - 아무리 망상이라 하더라도 중간 부분과 끝마무리가 엉성했으니까. - 색깔 있는 소설가로 승승장구했을 것 같은데... 그래봤자 우타노 쇼고가 창작한 캐릭터긴 하지만 실제로 카즈마 같은 작자들이 적기는커녕 점점 늘어나는 추세라 난 이 작품에서의 카즈마의 모습이 도무지 소설 속 얘기로만 여겨지지 않았다. 카즈마나 라이미나 차라리 소설 속에서만 등장하면 다행이지, 안 찾아 읽으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디테일한 부분에서 다르더라도 카즈마나 라이미는 현실에서도 분명 존재한다. 오히려 더 심할 수도 있고. 현실은 언제나 소설을 능가하기 마련이니까... 다 떠나서 현실의 카즈마들은 자신의 재능을 올바르게 발휘하길 바랄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비호감 소재로 범벅된 금단의 엔터테인먼트 소설이었지만, 한편으론 착잡한 감상을 이끌어내는 사회파 추리소설이기도 해 이래저래 가볍게 읽히지 않는 작품이었다. 작가의 최고작 반열에 들 순 없지만 잊을 수 없는 작품 최상단을 거뜬히 차지할 수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 이런 소재로 이만한 두께의 소설을 써내려간 작가가 존경스러웠다. 정말 한계가 없는 작가인 것 같다.



 p.s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 마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 한강의 <채식주의자>, 산베 케이의 <나만이 없는 거리>, 그리고 이 작품 <여왕님과 나>까지 접하니 나 역시 돌아버릴 것만 같다. 정신병자와 쓰레기들을 너무 연달아 접한 탓에 이제 힐링물을 찾으려고 한다. 이런 이야기에 내성이 있는 편이지만 연달아 다섯 작품은 너무 강행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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