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킬 수 없는 약속
야쿠마루 가쿠 지음, 김성미 옮김 / 북플라자 / 201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8.9







 한때는 드문드문 출간되던 야쿠마루 가쿠의 작품이 어느 순간부터 줄줄이 출간되는 것 같다. 그 작가의 작품을 <천사의 나이프>부터 출간되던 족족 챙겨봤던 터라 지금과 같은 유명세가 놀랍기 그지없다. 한동안 작가의 작품을 안 찾아본 사이에 이렇게나 인기 작가가 됐다니... 이와 같은 인기를 누리게 된 계기가 바로 <돌이킬 수 없는 약속>이라던데, 서점에서 자주 눈에 띈 스테디 셀러라 책장을 펼치기 전부터 반신반의했다. 그놈의 청개구리 기질 때문에 그런 것도 있지만, 내가 알고 있는 야쿠마루 가쿠가 맞긴 한 건가 싶기 때문이었다. 왠지 몰라도 스테디 셀러와는 거리가 먼 작가라 생각했는데.

 아마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 입소문을 퍼뜨린 데에는 엄청난 가독성과 복잡하지 않은 이야기의 덕이 큰 것 같다. 이전작들의 주인공에 비해 이 작품의 주인공은 사회의 부조리함에 견디다 못해 청승을 떨지 않아 독자로서 몰입하기 용이한 캐릭터였다. 그렇다 보니 진지한 맛이 있던 작가의 특성은 상대적으로 얕게 느껴졌으나 대신 장르적인 재미, 박진감과 미스터리함은 상당히 상승했다. 주인공의 설정과 가해자에게 적절한 단죄를 내리지 못하는 문제 투성이 사회에 대한 묘사의 세세함이 떨어진 게 아쉽지만. 그래도 평화로운 일상이 아득히 멀어져가며 궁지에 몰리는 주인공의 추락과 그에 대한 심리 묘사가 꽤 볼만해서 나름 만족스럽게 읽혔다. 특히 이야기의 분위기를 전환하는 초자연적인 설정은 신선한 시도였는데, 끝까지 자기 컨셉에 충실한 범인의 말투도 묘하게 웃겨서 - 일본의 '존댓말 캐릭터'는 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 도대체 뭐하는 놈이기에 이렇게 주인공을 괴롭히느냐며 궁금한 마음에 멈추지 않고 읽었던 것 같다.


 어딘지 자기복제를 거듭하는 듯한 인상을 받아왔기에 이런 속도감 있는 추격물로 이미지 변신을 시도한 작가의 모습이 꽤 긍정적으로 비쳐졌다. 깊이와 재미의 균형이 약간 삐걱거리지만 다음엔 깊이와 재미 두 가지를 보다 순조롭게 조절하리란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확실히 주제의식이나 주인공의 모습이 비슷비슷했던 걸 생각하면 <돌이킬 수 없는 약속>의 주인공은 작가 입장에서 꽤나 신선하고 입체적인 캐릭터가 아니었나 싶다. 어떻게 보면 작가가 이전작들에서 다뤄온 주제와도 일맥상통하다고도 할 수 있겠는데, 어떻게든 죗값을 치루지 않았다 해도 나중엔 그보다 더한 대가를 치뤄야 한다는 작가의 인과응보식 철학이 반영된 캐릭터가 바로 이 작품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겠다.

 생각할수록 재밌는 캐릭터였다. 첫인상에 비해 상당히 거친 성정을 갖고 있었고 참작이 안 되는 과거 역시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다분히 인간적이라 동정하게 되고 살인을 망설이는 모습은 또 의외라 본성까지 글러먹진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범인의 정체, 작품의 후반부에서 몰아치는 반전과 더불어 주인공이 그렇게까지 선을 넘지 않았다는 설정은 약간 작위적이었다는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론 그 '선'이란 것이 어지간한 상황이 아닌 이상 정말 넘기 힘들기 때문에 '선'이라고 부르는 것인지 생각해봤다. 저렇게까지 궁지에 내몰렸음에도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 주인공의 모습이 약간 답답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상대가 동정할 가치도 없는 작자들이라 갈팡질팡하는 주인공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가령 내 처지라고 생각해보면 제아무리 판이 짜여졌다 해도 타인을 죽이기란 보통 각오로는 해낼 수 없다며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할 것 같다. 눈 딱 감고 무슨 짓을 못할까 싶다가도 고갤 절레절레 저으며 뒷걸음질 치는 게 인간으로서의 통상적인 모습이리라. 게다가 주인공은 과거나 현재나 자신이 나쁜 짓을 많이 저지르긴 했지만 살인은 저지르지 않음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선은 넘지 않았다는 마지막 자존심을 지켰을 테니 더욱 살인을 범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범인의 요구에 응하지 않은 것이 정답이었지만, 그런 결과론적인 얘길 떠나서 결국 멘탈이 흔들리지 않고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주인공의 모습은 미련하고 이기적이란 소릴 들을 수 있을지언정 결국 선을 넘지 않아 언젠가 가족으로부터 용서를 받을 수 있으리란 희망적인 전망을 가질 수 있었다. 작가는 그런 의도로 결말을 그렇게 모호하게 처리한 게 아니었을까.

 상술했듯 이 작품을 기점으로 작가의 작품이 꽤 많이 출간됐던데, 그렇다 보니 지뢰도 섞여있는지 조심은 해야겠지만 그래도 선택지가 많아서 뭘 먼저 읽어볼까 고민하는 것이 즐겁다. 아마 단편집 <형사의 눈빛>을 먼저 읽을 것 같다. 작가의 단편집이 궁금하기도 하고 유명 문학상 후보에 든 작품이 다수 수록된 것으로 알고 있어 꽤 괜찮아 보인다. 작가의 장편밖에 안 읽어봤는데, 단편은 과연 어떠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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