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야
잽 테르 하르 지음, 이미옥 옮김, 최수연 그림 / 궁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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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선천적인 시각장애인이 아닌 불의의 사고로 후천적으로 시각을 잃은 사람에게 '괜찮아,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야' 라고 말을 하면 어떻게 생각할까? 너무 상투적으로 들리는 나머지 기만이라 느끼거나 공허함을 느낄까? 시각은 가장 강렬한 감각이자 인간이 가장 의존하는 감각이기에 시각이 부재하는 삶은 꿈에서라도 상상하기 쉽지 않다. 세상 모든 장애가 마찬가지지만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처한 상황이 유독 공포스럽게 다가왔다. 읽고 쓰는 것처럼 보는 것과 직결되는 일이 아니더라도 걷거나 먹는 것처럼 일상적인 일에도 시각이 필요하다. 아주 기본적인 일조차 타인의 도움 없인 온전히 해내기 불가능한 상황이란 얘긴데, 어쩌면 장애가 무서운 이유는 장애 그 자체보다도 그런 무기력함과 절망스러움에 기인한 것이리란 생각이 든다. 

 이 작품에선 '보다' 라는 동사를 단순한 의미로만 쓰지 않는다. 외국에도 일반적으로 쓰는 표현인가 싶었는데 '눈멀다'는 말에 있는 관용적인 의미, '어떤 일에 마음을 빼앗겨 이성을 잃다'는 의미가 이 작품에선 자주 사용된다. 시각을 잃은 주인공은 청각을 비롯해 여러 감각으로 사고 전엔 느끼지 못했을 것들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렇다 보니 특히 다른 사람을 평가함에 있어 비장애인들과 다른 인상을 받곤 하는데, 이를테면 수려한 외모건 얼굴에 흉한 상처가 있건 그게 아니더라도 외모를 깔끔하게 다듬지 않건 주인공에게 그닥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 같은 비장애인들은 시각이 주는 정보에 무의식적으로 얽매인다. 자리에 맞지 않게 깔끔한 차림이 아니면 개념이 없다고 여기고 뭘 하든 실수투성이거나 사람이 경거망동해도 외모가 괜찮으면 크게 문제삼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주인공에게 타인의 외모란 무의미하다. 시각장애의 장점이라고 말하긴 좀 그렇지만, 적어도 시각 정보의 제약 없이 사람을 있는 그대로 판단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지게 된 것은 어찌 보면 참 역설적인 일처럼 느껴졌다. 눈먼 사람이 오히려 눈멀지 않게 된 것이다. 작품에선 마치 서술트릭이 작렬하는 추리소설처럼 주인공이 호감을 가진 사람들이 타인에게 외모 때문에 그리 호감을 얻지 못하고 반대로 특유의 경박함 때문에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외모만으로 후한 평가를 받는다는 식의 묘사가 자주 나온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시각장애인이 주인공인 소설은 필연적으로 추리소설을 읽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구나 싶었다. 시각 정보 없이 문장만으로 이야길 전달하다보니 간혹 '보이지 않는' 이야기의 맹점을 찌르곤 하는 추리소설처럼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아도 살아가게 되는 주인공도 자신의 단편적인 인식의 사각을 찌르는 현실과 시시각각 마주한다. 물론 단편적이라는 말도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을 가리켜서 한 말이지, 눈이 보이지 않는 대신 청각을 비롯해 온갖 감각을 총동원하는 주인공을 보노라면 다소 까다롭긴 해도 정말로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야' 라고 말하는 제목이 그럴싸하게 들린다. 


 앞으로 시각장애인으로 살아가면서 뒤따를 현실적인 어려움, 장애인 학교를 향한 세간의 편견 사이에서 주인공네 가족은 고민이 이만저만 아니지만 결말에 이르러서 편견과 무지를 극복하고 주인공은 시각장애인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된다.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려 할 때 끝나는 느낌이라 아쉬웠지만 여러 사건과 존재감 넘치는 몇몇 인물의 격려로 인해 삶을 사랑할 준비가 된 주인공이 장애인 학교에서건 앞으로 어느 환경에선 무사히 잘 살아가리란 희망 또한 느껴져 책을 기분 좋게 덮을 수 있었다. 선천적인 시각장애인이었음에도 점자를 개발한 루이 브라유처럼 주인공도 자신의 장애를 극복할 수 있으리란 희망 말이다. 

 슬프고 끔찍하지만 누군가에게 분명히 일어날지 모를 주인공의 시각장애 적응기와 절망 어린 마음을 추스르는 과정은 제법 의미 있게 읽혔다. 소재를 떠나 이야기의 몰입력이 상당했는데, 단순히 시각장애에만 국한하지 않고 여타 장애나 정신적인 장애물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가슴 따뜻한 시선이 있어 이래저래 감동적으로 읽혔다. 작품의 내용이 꼭 내게 일어날 지도 모를 일이라 가정하지 않고 읽어도 작품 전체에 녹아든 삶을 향한 긍정적인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다 읽은 뒤엔 장애인이냐 비장애인이냐 여부를 떠나 우리 모두에게 희망을 느끼며 살아갈 가치가 있지 않은가 하고 상투적이지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됐다. 


 역겨운 불행 포르노가 아닌 장애인 창작물은 늘 더할 나위 없는 여운을 안겨준다. 이사카 코타로의 <서브머린>과 마블 드라마 <데어데블>에서 시각장애인 캐릭터를 연달아 접해서 이 소설도 떠올라 다시 읽게 됐는데, 전에 읽었을 때보다 더 감동적으로 읽혀 왠지 모르게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아마 이 작품은 두고 두고 읽게 될 것 같다. 나 같은 성인 독자도 그렇지만 특히 어린 독자들도 꼭 읽었으면 하는 작품이다. 전에 쓴 후기에도 비슷한 말을 했는데, 우린 어렸을 때 이런 좋은 이야길 많이 접해야 한다. 

앞으로 죽을 때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의지하면서 살아야겠지요. 이런 생각이 들자 베어는 화가 치밀어 올라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다른 생각도 떠올랐습니다. 사실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면서 사는 게 아닐까? - 1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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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머린
이사카 고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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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7.9 





 무려 <칠드런> 이후 12년 만에 나온 후속작으로 나도 대강 전편을 읽은 지 10년이 지나고 읽은 것 같다. 골때리면서 매력적인 4차원 캐릭터와 인상적인 시각장애인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을 제외하곤 전편의 내용이 가물가물한 나머지 '굳이 후속편이 나올 만한 이야기였나' 하는 의문도 들었다. 물론 골때리면서 매력적인 4차원 캐릭터 진나이의 직업의 특성상 후속작이 나와도 그리 이상하지 않지만, 이번 작품은 <칠드런>과 다르게 분위기가 사뭇 진지해 어딘지 경건한 마음으로 읽어나갔다. 십 몇 년 사이에 작가에게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칠드런>을 재기발랄함을 생각하고 <서브머린>을 펼치면 실망할 가능성이 크다. 

 나도 내용은 가물가물하지만 전편이 기발하고 유쾌했던 것은 기억에 남아있어 후속작의 달라진 분위기와 노선이 꽤 의외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실망했는데, 사건의 윤곽이 처음부터 잘 잡히지 않는 건 그렇다 쳐도 이야기가 느슨하게 전개되는 감이 있어 장편임에도 몰입이 잘 되지 않았다. 마치 단편집을 읽듯 띄엄띄엄 읽어도 큰 지장이 없을 만큼 느슨하고 어딘지 즉흥적으로 전개되는 것도 같아 여러모로 긴장감 없이 읽혔다. 


 이 작품은 추리소설이 아니다. <칠드런>도 그리 정석적인 추리소설은 아니었지만 그냥 지나치기 힘든 미스터리한 현상과 주변 인물들의 추리, 그리고 반전이 있어 확실한 흡입력과 완결성이 있던 반면 이 작품은 미스터리함도 부족하고 추리라고 부를 만한 행위를 독자들에게 유발하기엔 그 여지가 적은 편이며 딱히 반전도 없이 주제의식으로 승부를 보는 돌직구 같은 작품이었다. 

 범죄를 일으킨 소년은 소년법이라는 별도의 법을 적용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솜방망이 처벌, 어린 것이 면죄부냐고 부조리함을 외치는 가운데 가정법원 조사원인 진나이와 무토가 고민하며 자신들이 담당하고 있는 소년들이 사건을 일으킨 경위를 조사해나간다. 작중 등장하는 소년은 총 두 명으로 한 명은 협박범 오야마다 슌과 다른 한 명은 이야기의 매인 캐릭터인 다나오카 유마인데 두 소년 다 순수한 악의에서 비롯된 행위가 아니라 일종의 공명심과 저 나름대로의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반항심에서 비롯된 행위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인터넷에서 수시로 협박장을 유포하거나 실제로 행위로 연결하는 사람들을 해킹해 그들에게 대신 협박 편지를 보낸 오야마다, 자신의 친구를 뺑소니로 잃은 다나오카가 나중에 무면허 운전으로 사람을 치어 죽인 이유는 어른들도 딱 잘라서 100% 잘못됐다고 말하기엔 어느 정도의 타당성이 있어 이들을 곁에서 지켜보는 가정법원 조사원 진나이와 무토는 씁쓸함을 느낀다. 


 일단 가장 큰 불만은 이 작품이 가해자 소년의 시선을 살피느라 정말 억울하게 피해를 당한 사람에겐 다소 사려 깊지 못한 시선으로 전개됐다는 것이다. 소년법과 가정법원 조사원의 존재 의의는 잘 알겠고 내 개인적으로도 우리 세상이 완벽하지 못해서 반드시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하지만, 이런 식의 얘기는 피해자 입장에선 기만에 불과할 수 있으며 그저 배부른 소리하고 있다는 자각을 이 소설에서 무토의 시선으로 하여금 충분히 다뤄지지 않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4차원을 넘어 독선적인 츤데레인 진나이의 시선에서 진행된 이야기라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상식인인 무토의 시선임에도 딱 가정법원 조사원이 할 법한 편향된 주장을 할애 받은 지면에 다 풀어야겠다는 듯이 이야기하고 있어 오히려 역효과를 낳았다. 

 이 소설이 비록 작가의 전매특허인 촘촘한 구성력의 추리소설이 아니었더라도 새롭거나 진지한 주제의식을 펼쳤으면 불만이 적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년 범죄의 심각함과 씁쓸함 내지는 자꾸 사람들을 회의적으로 만드는 맹점에 대해서 그다지 새롭게 얘기하지도 않고, 진지하게 얘기하지만 아주 특기할 만한 수준은 또 아니라 어디서 봤던 얘기를 또 봤던 느낌이 났다. 진나이나 나가세, 개성적인 소년들은 이야기를 개성적이고 생동감 넘치게 풀어내지만 그걸론 역부족이었다. 


 소년들은 미성숙하고 옳고 그름을 제대로 판단할 가치관이 다 생성되지 않아 소년법이라는 별도의 법이 적용된다, 라는 주장이 더는 납득하기 어려워지는 세상이 돼버렸다. 그런 세상이기에 반대로 '과연 그럴까' 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서브머린> 같은 작품에 분명 의의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사실상 아주 양심적인 캐릭터인 와카바야시의 등장을 제외하면 이런 평가마저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스포일러 때문에 긴 말은 못하겠지만 이 인물이 보여준 죄책감은 참 바람직하면서 현실적이기도 해 많은 생각이 들게 했다. 이 인물이 중반부가 아니라 거의 초반부터 더 비중 있게 등장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럼 이 작품은 몰입도나 주제의식이 더 강화되지 않았을까 싶다. 소수의 극악무도한 소년 범죄자를 짓밟기 위해 소년법의 가치를 부정할 것인지, 대다수의 미성숙하고 어른들도 감당하기 힘든 죄책감의 무게에 시달릴 그들을 위해 한 번의 기회를 줄 것인지... 후자의 관점에서 진행되는 작품인 만큼 '죄책감'이란 키워드를 더 부각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칠드런>의 내용이 가물가물해도 작품 이해에 큰 지장은 없었지만, 작가가 넣었을 잔재미들을 캐치하지 못해 아쉬웠다. 역시 전편을 먼저 읽은 다음에 이 작품을 이어서 읽을 걸 그랬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지. 늦지 않게 <칠드런>을 다시 읽을 생각이다. 오히려 감회가 더 새로울 수도 있겠다. 과연 10년이 지난 다음에 읽으면 어떤 기분이려나? 

자포자기해서 이런 사건을 일으키는 녀석들은 왜 하나같이 어린아이나 약자들만 노리는 거지? 어차피 인생 마감할 작정이면 더 강하고 나쁜 놈들과 붙어 보고 싶지 않나? 비아냥거리는 게 아니라 정말 궁금해서 그래. 딱히 정의의 용사가 되라는 건 아닌데, 어차피 일을 칠 거면 악당 퇴치에 힘을 쏟는 게 여러모로 역전할 수 있지 않겠어? - 14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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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 -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이야기, 제22회 양성평등미디어상 우수상 수상작
이유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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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은 명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여성 차별의 흔적과 세간에 덜 알려진 여성 화가,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명 화가들의 일종의 '시대적 한계'라고 볼 수 있을 여성을 향한 차별 행위를 집대성한 책이다. 강렬한 제목과 표지도 인상적이고 내용도 다양하면서 유명한 얘기들만 다루고 있지 않아서 상당히 유익하게 읽혔다. 여성 화가라고 하면 꼭 언급되는 젠틸레스키 말고도 여러 굵직한 화가들을 소개한 것, 특히 표지의 그림을 그린 중국 화가 판위량을 알게 된 게 좋았다. 페미니즘에 관심이 없거나 약간 거부감이 있더라도 미술에 관심이 있고 새로운 화가를 소개받는 것을 반기는 사람이라면 펼쳐보기 좋은 책일 것이다. 

 책에 소개된 여성 화가들이 대부분 모르는 화가였는데 젠틸레스키도 여러 미술책을 읽으며 많이 접해봤기에 아는 것이지 그조차 없었다면 책에 언급된 여성 화가 전부를 처음 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소개된 화가들의 그림을 보니 당대 남성 화가들과 비교해도 딱히 부족할 것도 없고 오히려 여성에 대한 교육이 열악함을 넘어 전무하다시피 했던 시절에 그 정도 수준의 그림을 그려냈으니 더 화제가 됐거나 사람들이 우러러봤을 법하지 않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오히려 평단이건 대중이건 할 것 없이 재능을 시기하거나 외모로 특정 고위층 남성에게 예쁨을 받아서라거나, 그렇지 않으면 못생겼다면서 그림과 무관한 이야기를 동원해서라도 어떻게든 깎아내리는 등 고단한 대우에 대해 작가는 일목요연하게 열거하고 비판한다. 


 뿐만 아니라 유명 남성 화가들이 저지른 만행도 적잖이 비판했는데, 그 분야의 대표 주자라고 해도 좋을 피카소나 고갱은 물론이거니와 자코메티와 오노레 도미에 등 재능과 동시에 작품의 주제의식에서 엿볼 수 있던 인성과 무관하게 여성에 대해서만큼은 지금 기준으로 후진적이고 아쉬운 일면을 조명시켜준 것도 뜻깊었다. 개중에는 화가 개인에게 실망하게 되는 경우도 많아 마치 연예인의 사생활을 알면 알수록 TV를 못 보게 된다는 말처럼 내가 좋아했던 화가들의 그림이 달리 보이게 돼 참 기분이 씁쓸했다. 

 마녀사냥을 비롯해 여성을 저잣거리에서 팔거나 잔소리가 심한 아내한테 모욕적인 가면을 씌워 조리돌림을 하는 등의 기록이 담긴 그림들을 유명 화가나 작자 미상 관계 없이 소개한 것도 씁쓸하긴 매한가지였다. 그 그림의 내용보다도 오히려 당시 그런 그림이 그려지고도 문제시되기는커녕 어떤 의미에서 칭찬을 받는 것 같은 기이함에 더 혀를 차기도 했다. 내가 요새 페미니즘에 회의적이게 됐어도 진짜 원시나 다름없던 과거의 여성 차별 사례를 접하다보면 작금의 페미니즘에 깃든 공격성이나 극단성에 일말의 긍정을 하게 된다. 그렇다고 그 모든 억지를 다 받아주자는 얘긴 아니지만, 만약 페미니즘이 괴물이라면 그 괴물은 혼자 갑자기 튀어나온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물든 것인지는 한 번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역사를 들여다보면 늘 그런 생각이 든다. 어떤 현상이든 밑도 끝도 없이 발생한 것은 없다고. 


 그밖에도 조지아 오키프처럼 여성이란 굴레에 얽매이지 않고 그냥 자기자신으로서 평가받길 원했던 화가들도 소개했는데 이 대목에서 SF 소설가 옥타비아 버틀러 자신이 흑인이란 이유로 자기가 쓰는 작품을 흑인이 쓴 작품이란 굴레에 넣지 말라고 한 말이 떠올랐다. 지금 시대는 작가의 성별 같은 건 중요하지 않은 시대일까? 국적이나 인종이면 몰라도 예술가의 성별에 잣대를 들이대는 경우는 내가 알기론 거의 없는 것 같다. 성별의 차이에 따라 작품의 성향이 다를 수 있다고 하지만 예외의 경우를 많이 봐서 성별의 구분 같은 것이 뭐가 중요한가 싶다. 

 그리고 이 말은 이제 예술가만이 아닌 다른 직업군에도 해당돼야 한다는 게 바로 이 책을 쓴 저자가 말하고 싶던 바라고 본다. 일차적으로 여성 미술에 대해 얘기했지만, 지금 우리 시선에서 봤을 때 여성 화가라는 이유로 차별을 당한 사례에 부조리함을 느끼는 것처럼 지금도 비슷한 일이 여기저기서 비일비재하게 발생하고 있을 것이라 얘기하면서 주제의식을 자연스럽게 확장하고 있다. 미술과 역사에 대한 풍부한 지식 못지않게 필력도 감탄스러워서 작가의 다른 책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이 책을 집필할 때 참고한 책들도 읽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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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 - 양장본
마크 해던 지음, 유은영 옮김 / 문학수첩 리틀북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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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9.3 





 우영우를 보다가 바로 연상된 <한밤 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은 내가 읽은 몇 안 되는 자폐 스팩트럼 주인공이 등장하는 작품이다. 제목 그대로 한밤 중에 죽은 이웃집 개를 누가 죽였는가 파헤치는 주인공의 1인칭 시점의 소설이며 실제로 작중에서도 주인공이 '수사'를 진행하는 틈틈이 지도 교사의 도움을 받아 이 소설을 쓰는 내용으로 전개된다. 중간에 수사가 중단되기도 하고 이 소설을 압수되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사건의 진상은 알게 됐고 소설도 완성했는데, 당초 주인공이 예상한 것과 전혀 다른 결말이 나와 읽다가 어안이 벙벙했다. 

 이 소설은 주인공이 사건을 수사하면서 자기 한계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훌륭한 성장소설이자 예상치 못한 사건의 진상을 논리성이 극도로 발달한 자폐 스팩트럼 주인공이 논리적으로 접근한다는 점에서 추리소설의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추리소설의 성격이 강할 뿐 대놓고 추리소설이라 부르기 주저되는 이유는 범인의 정체가 너무 뻔하고 사건의 진상에 다가가는 것이 논리적이긴 하나 이와 같은 긴장감은 모두 주인공이 자폐 스팩트럼 때문에 생각과 행동 반경이 좁은 탓에 비장애인에게 너무나 쉬운 일도 극히 까다롭게 처리하는 기질에서 비롯된다 볼 수 있다. 한마디로 특수 설정이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변칙적인 추리소설이라 보는 것이 적합하기에 아무런 수식어 없이 추리소설이라고만 부르는 것은 조금 망설여진다. 정작 주인공은 자신이 겪은 일련의 사건을 다룬 소설을 추리소설로 부르긴 하지만 말이다. 


 전에 읽은 지 10년 가까이 지나고 다시 읽으니 새롭게 다가오는 지점이 있었다. 10년 사이에 장애인들과 같이 일을 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이 강해지는 경험을 한 탓에, 우영우를 볼 때도 그랬지만 장애에 대한 무비판적인 긍정이 그리 달갑지 않게 읽혔다. 1인칭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스스로의 논리적 재능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데 그 재능은 분명 그가 자폐인이란 이유로 부정당해선 안 될 만큼 뛰어난 재능이다. 허나 자신의 재능에 초점을 두거나 자신의 관심사를 나열하는 것에 비해 정작 가족을 비롯한 주변인에 대한 묘사는 자폐인답게 사무적으로 이뤄지는데, 이처럼 이기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 장애의 특성은 제3자의 시선에도 곱게 보이지 않았다. 당장 동행하는 사람이 없으면 기차 하나 탑승하기 힘들어하고 온갖 자신만의 규칙에 갇혀 쉬운 길을 멀리 돌아가거나 자신의 요구를 위해 떼쓰는 모습을 보노라면 미안한 얘기지만 장애인이고 어린아이고 어쩌고 논하기 전에 그의 재능이 과연 주변 사람들이 인정하고 헌신할 정도인가 하는 반감마저 들었다. 

 반면 주인공이 자신의 세계에 빠져 수학과 과학에 관한 자신만의 '알쓸신잡'을 펼치는 구간은 흥미로운 내용들로 가득했다. 주인공 스스로 말했듯 은유엔 젬병이라 정작 이 

'알쓸신잡'이 소설 본편과 무슨 상관인지 한 번에 와 닿지 않는다는 것과 그래서 가독성을 떨어뜨린다는 점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읽는 맛 자체는 상당했다. 수학, 과학 도서를 자주 읽지 않아서 더 흥미로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과연 그 내용들을 얼마나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인공을 비롯해 여러 등장인물들, 주로 주인공의 가족들은 어찌 보면 주인공의 왜곡된 시선으로 인해 그들의 행동이 알다가도 모르게 비쳐졌는데, 특히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주인공의 덤덤한 반응 탓에 꽤 막장스런 인물들의 행보도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가 하는 아리송한 의문을 낳게 해 다 읽은 지금에 와선 참 신기한 기분도 든다. 작은 사건으로 시작해 예상치 못한 진실과 마주하고 세상의 부조리함을 깨닫고 돌파해나간다는 전형적인 성장소설의 구조 자체는 참 인상적이었는데 은근히 편파적인 주인공의 문장과 객관성을 파악하기 힘든 상황 묘사 때문에 다 읽고 나서 굉장히 오묘한 기분이 든 기억도 난다. 

 상당히 좋은 기억을 갖고 있던 작품이었는데 다시 읽으니 기대와는 다른 감상이 남아서 인상적인 시간이었다. 이 소설을 바탕으로 한 연극을 볼 때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연극은 자폐인 주인공의 내면 세계를 무대에 효과적이고 감각적으로 재현해 보는 맛이 있었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의 문체는 그때 그 감탄스런 연출에 미치지 못해 상대적으로 심심하고 답답하게 다가온 것 같다. 요새 가장 핫한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흥행 요인으로 박은빈 배우의 매력적인 연기를 결코 빼놓을 수 없음을 생각해보면, 참 씁쓸한 얘기지만 장애인이 등장하는 창작물은 비장애인에게 어필될 만큼 매력적인 장애인이 등장하지 않는 한 외면당하거나 흥미가 떨어지기 십상이란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이런 깨달음을 확인해볼 요량으로 이 작품을 다시 읽은 것은 아니었는데... 10년 전에 못 느낀 감상을 적다 보니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어떤 의미에서건 나도 참 많이 변했구나 싶다.  

소수는 모든 규칙들을 지우고 났을 때 남는 수다. 나는 소수가 인생과 같다고 생각한다. 소수들은 매우 논리적이지만, 당신이 한평생 생각하더라도 소수가 만들어지는 규칙은 결코 알아낼 수 없다. - 28~29p



색에 대한 편견은 어리석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인생에 있어서 사람들은 많은 결정들을 하게 되고, 만약 어떤 것도 결정을 하지 못하게 된다면 여러 일들 중에서 이것을 할까 저것을 할까 택하느라 시간을 소모하게 된다. 그래서 어떤 것을 왜 싫어하고, 또 어떤 것을 왜 좋아하는지 이유가 있는 것이 좋다. - 155p



그리고 나는 책까지 썼다. 그 말은 내가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뜻이다. - 37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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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함께 : 저승편 3
주호민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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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문득 다시 읽고 싶어져서 <신화 함께: 저승편>을 다시 읽어봤다. 왜 다시 읽고 싶어졌을까 책장을 펼치는 와중에도 알지 못했는데, 이 작품이 꽤 그럴싸한 형식의 법정물임을 알게 되고서 단번에 이해됐다. 최근에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덕분에 그동안 추천받았거나 이전에 접했던 장애인 창작물, 법정물을 찾아 읽고 있는데 <신과 함께: 저승편>도 일종의 법정물로 내 머릿속에 아른거렸던 것 같다. 

 죽은 사람이 49일 동안 한국 신화 속 저승관을 바탕으로 생전에 지은 죄를 재판을 받는다는 획기적인 설정의 이 작품의 제목을 못 들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동명의 영화 때문에라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 참고로 나는 그 영화가 너무나 신파적이란 얘길 듣고 보지 않았다. 무엇보다 원작에서 제일 중요한 진기한 변호사가 나오지 않는다고 하니 볼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 변호사는 어찌 보면 부조리로 가득한 저승의 법정에서 의뢰인한테 신이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은 활약을 펼치니까 말이다. 


 이번에 다시 읽으니 본작의 저승에서 벌어지는 일곱 번의 재판이 참 부조리하단 생각이 들었다. 죽은 것도 서러운데 갑자기 피고인으로 부르질 않나, 악덕 회사 때문에 술병에 걸려 죽은 사람 보고 부모보다 먼저 죽었으니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고 하질 않나, 지갑을 주워 돈만 챙기고 파출소에 맡긴 걸 지적하며 똥통에 튀겨야 하는 자로 판결을 내리려고 하질 않나, 어째 재판이 뒤로 갈수록 연좌제처럼 죄인 여부를 가르는 기준이 느슨해지거나 이상해지는 등 의구심이 남는 설정이 많았다. 당장엔 재판을 받는다는 방식이 참신하고 이승에서 소심하고 착한 사람이 보상을 받는 일종의 권선징악적 전개가 마음에 들어 의식하지 못했지만, 이 쓸데없이 엄하고 전근대적인 가치관을 가진 재판부가 저승에 온 사람을 재판하니 억울하게 영원한 고통을 받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겠다는 걱정이 들었다. 

 반면 억울하게 죽어 원귀가 된 유성연과 그를 잡으러 동분서주하는 저승차사의 이야기는 갈수록 흥미로웠다. 이 세계관의 방식대로 유성연을 죽인 악인을 처벌한 것도 나름대로 통쾌했고, 누가 <짬>의 작가 아니랄까봐 군대 이야기를 적절하게 잘 녹여낸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아마 예상하기로 영화화가 이뤄지면서 유성연의 서사에 적잖이 신파를 더했을 듯한데, 사연이 사연인 만큼 각색하는 입장에서 더 신파으로 만들자고 마음 먹어도 이상하지 않은 비극이란 생각이 들었다. 


 김자홍과 그의 변호인 진기한 변호사의 저승 재판, 원귀 유성연과 그를 쫓는 저승 차사의 이야기가 병렬되며 전개되는 이 작품은 전자의 파트는 뒤로 갈수록 느슨하고 후자의 파트는 극적으로 치닫는다. 재밌는 건 어느 정도 코믹하게 묘사된 저승은 세계관이 판타지적인 탓인지 현실적으로 어설프고 부조리하게 다가왔고 후자는 현세를 배경으로 했기에 마찬가지로 부조리하게 묘사됨에도 무게감 있게 읽혔다. 현세가 저승 파트의 문제를 보완하는 것 같은 이 모양새는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현세에서 어떤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고민해보게끔 해 제법 의미심장한 연출이지 않은가 싶었다. 저승 간 다음에 착하게 살 걸 하고 후회해도 늦다, 진정 착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만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세계관 설정의 미묘한 구멍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좋은 작품으로 독자들에게 각인된 비결이 아니었을까. 

 이번에 읽으면서 인상 깊게 읽은 구절을 소개하며 후기를 마치도록 하겠다. 내 기준에선 참 이상한 기준의 재판이었지만, 아무튼 연좌제를 바탕으로 생전에 좋은 사람과 가까이 했는지 살펴보는 재판에서 피고 김자홍은 나쁜 친구를 사귀기는커녕 오히려 그 성정 덕분에 남들에게 김자홍 본인이 '좋은 친구'로 기억에 남을 것이란 극찬을 듣는다. 세상은 혼자 사는 곳이 아님을 날마다 느끼는 내게 있어 참 가슴을 울리는 장면과 대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내 스스로에게 같은 질문을 해봤다. 난 남들에게 '좋은 친구'로 기억될 만한 사람인가? 이 말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다고 대답하긴 참 쉽지 않을 것 같다. 비록 연좌제로 가중 처벌을 하려는 본작의 저승 재판의 논리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이 장면은 정말 묵직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듯하다. 

네 가족과 친구들이 죽어서 여기까지 오게 되는 날에는 그들 너로 인해 많은 가산점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먼저 간 네 생각을 하겠지.

착하게 살아줘서 고맙다고... - 3권 3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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