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가능성은 이미 떠올렸다
이노우에 마기 지음, 이연승 옮김 / 스핑크스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8.1







 추리소설이란 게 아무리 날고 기어도 주인공인 탐정 캐릭터는 사실 거기서 거기란 생각을 늘 했는데 일단 그 생각부터 흔들며 시작하는 게 무척 신기한 작품이었다. 기적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기적을 믿는 탐정이라니. 추리소설 속 탐정들은 기적을 부정하기에 불가사의한 사건에 도전을 하기 마련인데 이 작품의 탐정 우에오로는 모든 가능성을 검토해봤더니 기적 외엔 설명이 되지 않는다고 초장부터 호언한다. 모든 가능성이라고? 생각만 해도 아득하고 심연의 너머에 있는 무한의 가능성을 전부 다 검토했단 말인가? 사실 이쯤 되면 특이한 걸 넘어 무리수가 아니냐며 작가가 걱정될 정도였다. 감당할 수 있을까...?

 호불호가 갈리는 부분은 이제부터 시작인데, 탐정 우에오로는 1장이 끝나기 전에 조사에 착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건의 진상은 기적'이라 결론짓는다. 그때 그런 탐정의 존재, 사상부터 인정할 수 없다는 캐릭터가 우르르 나와 저마다 이 사건이 기적이 아니라는 가능성을 제기하는데 여기서 탐정은 도전자가 아니라 도전을 받아들이는 자로서 추리쇼에 임한다. 통상적인 추리소설과 비교하면 완전히 주객이 전도된 셈인데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컨셉이나 배틀 형식으로 진행되는 전개는 영락없이 만화나 촌극에 비견될 정도로 특색 있어 이래저래 특이하기 짝이 없다. 이렇게 일본 특유의 유치하고 겉멋든 설정에 조금이라도 내성이 없는 사람들은 몸 어딘가에 두드러기가 나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이 됐다. 다른 걸 떠나서 화자가 중국인이라지만 그놈의 중국어는 왜 그렇게 자주 나오는지... 이건 말 그대로 취향의 영역이지만 가독성을 헤칠 요소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마찬가지로 주의할 필요는 있을 듯하다.


 개인적으로 사건 자체는 그다지 흥미를 끌지 못했고 사건의 개요를 설명하는 것도 지루해 작품의 하이라이트인 논리 싸움은 내게 있어 그렇게 인상적이진 못했다. 미안한 말이지만 기대보다 사건의 스케일이 작았다고 느껴져 기적이니 무한의 가능성이니 하면서 뻥튀기하는 거 아니냐고 반문이 들기도 했다. 캐릭터들도 추리 이전에 말들이 너무 많아 답답하기 그지없었는데... 추리 대결이 반복돼 익숙해진 덕분인지 나중엔 작가가 고민을 한 전개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탐정 혼자서 이것 저것 추리하면서 가능성을 지우는 것보다 다른 도전자가 탐정 앞을 가로막아 대결 형식으로 추리를 펼치고 부정하는 게 훨씬 흥미진진하니까 말이다. 작풍은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적어도 그 정도 모험도 없었더라면 내 경우엔 아예 끝까지 안 읽었을 가능성이 컸다.

 설정도 설정이지만 기적에 대한 엄청나게 진지한 자세도 인상적이었다. 처음엔 탐정이 좀 특이하구나 싶었지만 자존심을 넘어 목숨도 걸 수 있을 만한 기적을 믿는다는 게 느껴지자 자세를 고치지 않을 수 없었다. 각 인물들의 말솜씨는 현란함이나 깊이 면에서 시마다 소지와 교고쿠 나츠히코를 연상시켰는데 겉멋이 들긴 했지만 전문용어, 사어, 문어가 총동원되는 말들이 흡입력은 떨어지지만 작가의 집요함이 느껴져 믿음이 가기도 했다. 별로 상관 없는 얘길 수 있지만 작품의 예상치 못한 깊이는 저자가 도쿄대를 졸업했다는 약력을 보고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정말 별로 상관 없는 얘길 수 있지만.


 진지한 자세, 깊이, 현란함, 설정... 작품엔 여러 개성과 장점이 있지만, 뭐니뭐니 해도 가장 좋았던 건 결말이다. 정말 이대로 기적은 기적인 채 탐정은 인정을 받는가, 하는 질문에 가장 납득할 수 있고 멋있는 형태의 대답이 나오고 무엇보다 크기를 떠난 기적의 위대함을 엿볼 수 있는 지점도 있어서 예상치 않게 여운도 짙었다. 이건 정말 뜻밖이었는데...... 호불호를 떠나, 또 취향을 벗어나 정말 좋은 결말이었다는 생각밖엔 안 든다. 이건 뭐 후속작을 기대하지 않는 게 불가능할 정도니 원. 어떻게 이 작품이 상을 하나도 못 받았지? 작년에 읽은 기대작 <시인장의 살인>보다 괜찮았는데. 적어도 설정을 감당하는 능력은 몇 수 위다.

오히려 분노를 느낀다면 신의 변덕스러운 은총 쪽에 분노해야 하지 않을까. 푸린은 어차피 버릴 거라면 평등하게 버려달라고 생각했다. 경계선의 오른쪽에는 행복한 가족의 단란한 모습이 비치고, 왼쪽에는 불행과 고통, 통곡이 오가는 세상의 모습은 그야말로 뒤틀려 있고 해학적이다. 아름답고 조화로운 대자연을 창조한 조물주가 왜 인간 사회의 부조화는 모르는 척 방지하고 있는 걸까. 마치 개발 계획이 좌절된 고층 빌딩의 잔해를 보는 듯한 심정이다.

아니면 이것이야말로 신이 인간에게 보내는 최상급의 조롱인 걸까. - 37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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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마가도키 동물원 5 - 완결
호리코시 코헤이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3년 4월
평점 :
절판


8.0







 이 작품이 그 유명한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를 그린 작가의 데뷔작인 줄은 몰랐다. 추천을 많이 받은 작품인데 뜻하지 않게 작가의 데뷔작을 먼저 읽게 됐다. 읽고 나니 그 작품의 인기와 데뷔작의 미약한 결말이 쉽게 연결되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작가가 정말 장족의 발전을 이뤘나 보다. 오죽 인기가 없었으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타이밍에 연재가 중단돼서 급결말이 났겠는가. 결말이 이른 감이 있어 아쉽긴 했지만 연재 중단 자체는 작품 퀄리티를 생각하면 당연한 수순일 수밖에 없었다.

 일단 제목이 눈에 띄는 맛이 없어 독자를 끌어모으기에 역부족이고 이야기 도입은 너무 산만해 초반에 독자층을 굳히는 데 실패한 것이라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간다. 그림체가 여타 일본 만화의 그림체와 다른 건 신선했지만 모르긴 몰라도 컷 분할 같은 시각적 연출이 산만해서 가뜩이나 역동적인 장면이 많은 게 오히려 부작용을 낳지 않았나 싶다. 게다가 이야기의 화자인 아오이 하나도 덜렁거리지만 동물을 좋아한다는, 딱 이 정도의 매력밖에 없어 작중에서 겉돌거나 잊혀지는 수준의 존재감을 자랑한다. 여러모로 의욕에 비해 기본이 부실했던 작품이 아닐 수 없었다.


 반면에 소재는 꽤 좋았다. 동물을 괴롭힌 사람이 저주를 받아 동물의 모습으로 변해버리는 대신 동물을 말 그대로 의인화시키는 능력을 얻는다. 그 능력으로 말미암아 세계 최고의 동물원을 만들면 저주가 풀려 다시 인간으로 돌아온다는 내용인데 문제는 주인공인 오우마가도키 동물원 원장 시이나가 계획성이 조금도 없어서 저주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무 어렸을 때 저주에 걸려버려서 노는 것과 재밌는 것만 찾는 가히 정신 연령은 유아 수준에 멈추고 말았다. 그래도 동물을 의인화시키는 능력 덕에 동물가 친구가 될 수 있어 외롭진 않았단 건 가슴 찡했고 후반부에 드러난 의인화 능력의 비밀에선 눈물이 다 나오는 요소가 있는 등 상당한 수준까지 발전을 이뤘다. 하지만 급결말 때문에 설정 자체가 완전히 떡밥만 남겨버려서...

 은근히 심오한 설정이지만 정작 작품은 점프의 연재작답게 소년 독자를 겨냥한 배틀 만화다. 저주에 걸린 동물 인간이나 그 인간들이 의인화시킨 동물들의 배틀은 초월적인 물리 법칙과 현실에서의 동물의 특징이 교묘히 섞여져 사뭇 특이한 긴장감과 재미를 연출한다. 덕분에 처음엔 산만했지만 수족관 에피소드로 돌입하고 나선 흡입력이 대폭 상승했는데 동물 의인화가 흔한 듯해도 활용 방안이 다양한 만큼 작가가 잘 연구해서 작품에 녹여낸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사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하는 게 수족관 에피소드는 확실히 재밌었다. 양 진영의 가치관이 아주 상극이라 대립의 양상을 알기 쉬워 주제의식을 강조하기가 용이했고 사려 깊은 마무리는 정말 훌륭했다. 개인적으로 동물원이나 수족관이 동물을 가두고 야성을 마모시킨다고 생각해 굉장히 싫어했지만 비록 가상이긴 해도 인간과 동물끼리 서로를 위하고 아끼는 동물원이 정말로 있다면 그것 참 괜찮지 아니한가 싶었다. 무엇보다 동물을 인간 형태로 변신시키는 능력이라니... 동물과 대화할 수 있는 점 하나는 부럽고 꿈과 같은 일이기 그지없잖은가. 동물을 좋아한 나머지 반려동물과 인연을 맺은 사람이라면 이 말에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시이나는 저주에 아랑곳 않고 동물들이랑 노는 것에만 관심 있어서 최고의 동물원을 만드는 것은 요원해 보여도 오히려 저주가 의도한 바를 가장 잘 실천 중이진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좋은 점들이 꽤 있었지만 그림 연출이 산만하고 내용은 배틀 일색에 소년 독자층을 겨냥한 유치한 작풍에 의해 설정의 심오한 매력이 덜 드러났다고 본다. 그렇게 앙케이트 인기 조사에서 내내 하위권을 기록하다 조기 연재 중단에 이르게 된 것일 텐데... 이 명백한 실패가 후에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같은 점프의 간판 작품을 그리는 발판이 됐겠으나 이 작품 자체는 너무 묻힌 감이 있어 차라리 연령층을 높여 다른 잡지에서 블랙 유머의 성격을 더해 여러 연령대의 독자를 아우를 수 있는 작풍을 구사했더라면 적어도 이렇게까지 급결말이 나진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참 아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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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모래시계 - Novel Engine POP
도리카이 히우 지음, 정대식 옮김 / 데이즈엔터(주) / 2018년 7월
평점 :
품절


8.7







 작중에 등장하는 가상 국가 제리미스탄은 '종말 감옥'이란 특이한 정책을 내건다. 전세계적으로 인권의 바람이 불어 대부분의 나라가 사형수를 사형시키지 못할 때 제리미스탄은 종말 감옥을 만들어 전세계 사형수를 받아서 대신 사형시키겠다고 앞장선 것이다. 당연히 인권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겐 논란이 됐지만 이 정책은 당장 여러 나라에게 큰 환영을 받는다. 사형수들을 사형시키지 않고 감옥에 가둬두느라 세금이 허비되는 게 탐탁치 않았던 각국 정부는 사례금을 주고서 제리미스탄에 사형수를 양도하고 제리미스탄은 그렇게 얻은 사례금으로 국력을 키운다. 그렇게 윈윈 전략 아래서 탄생한 제리미스탄의 종말 감옥에는 각국의 사형수들이 모이는데...

 참 특이한 설정의 연작 추리소설이었는데 감옥을 배경으로 해서 추리에 제약이 발생한다는 상황도 흥미로웠고 전세계 사람들이 모여 각자 출신지에 따른 가치관의 차이에서 - 참고로 수감자는 의사소통을 위해 필수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제리미스탄어 수업을 듣는다. - 수수께끼와 갈등, 살인이 비롯된다는 건 개인적으로 취향에 맞아 좋았다. 무엇보다 감옥을 배경으로 한 창작물이 흔히 보이는 '범죄자에게도 정이 있다'는 듯한 분위기가 별로 없던 게 좋았고 사형 제도 자체에도 크게 주제의식을 드러내지 않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간혹 특정 나라의 가치관에 반했을 뿐이지 객관적으로 보면 사형수 판결이 과한 인물도 있고 개중엔 아예 무고한 사람도 있지만 그걸 빌미로 사형 제도의 모순을 비판하기 보단 본격 추리소설의 소재와 설정으로 이용한다는 느낌을 받아 오히려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한마디로 오락을 강조한 추리소설이란 컨셉에 충실했다는 것이다.



 '마왕 샤보 돌마얀의 밀실'


 초장부터 전세계 사람들이 수감된 종말 감옥이란 설정과 매력을 각인시키기에 제격이었던 에피소드. 총 6편의 수록작 중에서도 가장 임팩트가 컸다. 사건의 동기는 그리 어렵지 않게 유추가 됐지만 방법에 대한 해답은 꽤 재밌었다. 복선도 충분했고 캐릭터들도 다 개성이 있어 이래저래 이상적인 출발이 아니었나 싶었다. 

 그나저나 작중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이 전부 특이한데 우리나라 번역판이니까 그나마 괜찮았지 일본 원서로 읽으면 가타카나가 범벅이라 눈이 다 어지러웠을 것 같다.



 '영웅 첸 웨이츠의 실종'


 유일하게 제리미스탄 종말 감옥에서 탈출한 첸 웨이츠의 비범함은 놀라웠지만 이후에 보인 다소 썰렁한 행보가 뜻밖이었던 작품. 반전 자체는 그렇게 의외도 아니었고 오히려 첸 웨이츠란 인물에게 실망하게 됐지만 탈출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계획성과 추진력은 혀를 내두를 만했다. 그렇기에 그의 행보가 더욱 실망스러웠던 거겠지.



 '감찰관 제마이야 칼리드의 도회'


 어떻게 보면 사형 제도를 전면으로 수행하는 종말 감옥이란 공간에서 사형 제도에 대해 그나마 사유다운 사유를 했던 에피소드. 간수들은 사형수들이 사형되기 전에 그들의 인권을 어느 선까지 존중할 것인가. 꽤 생각해봄직한 질문이었는데 너무 편파된 답을 유도하는 듯한 막장스런 인격의 간수가 나왔던 건 내심 아쉬웠다. 그래서 사건의 내막에 공감이 크게 집중이 안 갔던 것 같다. 하필 사건의 내막이 너무 작위적이고 초월적이기까지 해서 작중에 드러난 사유의 역할이 중요했는데 너무 반전에만 급급한 듯한 내막이라 도리어 크게 인상에 남지 않았다.



 '묘지기 라쿠파 걀포의 긍지'


 서로 다른 출신지의 수감자들이 모이는 종말 감옥의 특수성에 가장 어울리는 반전이 돋보인 에피소드였다. 솔직히 말해 다룬 소재가 보통 특수한 게 아니다 보니 복선이 부족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데 작품의 설정에는 대단히 어울리는 사건이고 반전이 아닐 수 없어 치사한 감은 있어도 납득하게 되는 결말이었다. 여러 나라의 문화에 관심이 있다면 흥미롭기 이를 데 없는 에피소드일 것이다.



 '여죄수 마리아 스코필드의 잉태'


 남자 수감자와 여자 수감자가 철저히 분리되는 제리미스탄 감옥에서 한 여자 죄수가 임신했다는 보고가 들어온다. 이 책의 수록작 중에서 가장 궁금한 도입부였는데 결말은 기괴하기 짝이 없어서 뒷맛이 상당히 안 좋았다. <죽음과 모래시계>의 수록작 6편 중 3편은 종말 감옥이란 배경을 잘 활용했고 나머지 3편은 배경의 한계를 드러낸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그 3편 중 '여죄수 마리아 스코필드의 잉태'가 가장 심했다. 논리적으로 말은 되고 의외성도 있었지만 계획 실행에 있어 일부 우연에 기댄 부분도 있었기에 추리소설로써도 완성도는 그닥이었던 에피소드였다.



 '확정수 앨런 이시다의 진실' - 스포일러 有


 예상과 달리 마지막치고 클리셰 투성이라 놀랐던 에피소드. 용두사미까진 아니지만 확실히 기대에 못 미치긴 했다. '알고 보니 무고했다'는 앨런의 과거도 그렇지만 그의 아버지의 정체나 다소 격정적이었던 후반부의 전개도 전부 클리셰가 아닌가. 막판에 앨런의 아버지가 숨을 거두면서 읆조린 말에서 소름이 돋긴 했지만 그것만으론 이 상투적인 마지막 에피소드의 아쉬움을 달래기엔 역부족이었다. 해피엔딩이 아니란 건 마음에 들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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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 비행
가노 도모코 지음, 박정임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7.3







 바로 직전에 <작가 형사 부스지마>를 읽어서 그런가... 작풍을 비롯해 모든 것이 상반된 작품을 이렇게 연속으로 읽는 건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기껏 감성적인 일상 미스터리를 읽으면 뭐하는가, 직전에 읽은 작품과의 온도 차에 적응이 되지 않아 미진한 반응만 일고 마는 것을.

 ...이렇게 생각하고 싶지만 이 작가에 대한 기대가 커서 상대적으로 실망했던 게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가노 도모코의 작품은 <유리기린>이나 <손 안의 작은 새>는 꽤 재밌게 읽었는데 정작 작가의 데뷔작이나 그 작품의 후속작인 이 작품 <마법 비행>은 별로였다. 꽤 재밌게 읽었던 두 작품은 내가 10대 후반, 20대 초반에 읽었고 별로였던 작품은 최근에 읽었는데 이 시간 동안 내가 많이 바뀐 것일까? 그건 재밌게 읽은 두 작품을 재독하면 판명될 일일 것이다.


 작가의 데뷔작 <일곱 번째 이야기>와 이번 <마법 비행>은 여대생 고마코가 주인공인 연작 일상 추리소설로 어딘가 자전적인 요소가 느껴지는 아기자기한 작품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두 소설을 추리소설로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엄연히 수수께끼가 등장하고 그 수수께끼를 논리적으로 푸는 과정이 후반부에 배치돼서 실상 굉장히 정석적인 추리소설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여타 추리소설과 차이가 있다면 주인공인 고마코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묘사가 따뜻한 것이 - 아주 따뜻함 일색인 건 아니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분명 따뜻하기 이를 데 없다. - 영락없도록 추리소설적 분위기,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범죄의 기운이 물씬 나는 분위기완 상반됐다는 것일 터다.

 일상 추리소설을 좀 찾아 읽는 사람이라면 이런 작풍은 그리 낯설지 않겠지만 특유의 자전적 요소와 고마코가 겪는 일상의 사건과 그걸 소설화시키는 고마코의 서술 사이의 관계라는 부분이 있어 조금은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이 매력이다. 와카타케 나나미의 작품보단 따뜻하고 기타무라 가오루의 '엔시 씨와 나' 시리즈하고는 이 자전적 요소에서 미묘하게 차이가 있어 나름의 개성이 있기도 하다. 이런 부분이 매우 비관적이고, 특히 소설에 대한 환상을 모조리 조롱한 <작가 형사 부스지마>와 상극이라 그 작품을 읽은 직후에 <마법 비행>을 읽는다는 것은 남들에게 말도 못할 당혹스러운 경험이었는데 그런 부분을 감안하더라도 이 연작 추리소설은 왠지 이목을 끄는 맛이 부족했다.


 표제작인 '마법 비행'이 그나마 재밌었고 나머지 세 작품은 인상이 흐릿했다. 일상 추리소설답게 무척 사기적인 수준의 추리가 나오는데 고마코의 소설과 세오 씨의 해설이 너무 역할이 딱딱 나뉜 경향이 있어 무의식적으로 고마코의 소설 부분의 몰입도가 약해지지 않았나 싶다. 고마코의 소설 부분이 추리소설적 구성을 지녀 그런대로 흥미롭지만 사건의 임팩트 자체는 미미한 수준이기에 정작 해설에 이르는 과정보다 해설 자체만 기다리게 되지 않았나 싶다. 나도 결국엔 똑같은 소설가 지망생이라 훈수 두기엔 처지가 좀 그렇긴 하나 단적으로 말해 소설을 읽거나 쓰는 것엔 취향이란 별개의 영역도 분명 있는 법이니 선뜻 작가의 감성과 스토리 텔링이 퍽 와 닿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내가 무척 불성실한 독자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이 작품 몇 년 뒤에 쓴 작가의 작품 <유리기린>, <손 안의 작은 새>가 재밌던 걸 떠올리면 나는 작가가 아직 이 작품을 쓸 때까지는 미숙했던 거라 단정하고 싶다. 일상 추리소설에서 작가가 구현한 감성에 몰입할 수 있느냐는 것은 꽤 중요한 지점이므로 다시 말하지만 상술한 두 작품을 재독해야 판명될 일임에도 지금 당장으로서는 솔직히 말해 이 시절까지는 작가가 미숙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거, 진짜 말이 나온 김에 <유리기린>부터 좀 다시 읽든가 해야겠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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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형사 부스지마 스토리콜렉터 64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김윤수 옮김 / 북로드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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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우리나라 독자 한정으로 참 재밌는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원래는 독설가인 주인공의 성격에 맞게 이름에 '독'이 들어갔을 뿐인데 뜻밖이면서도 아이러니하게 우리나라에선 다른 의미의 이름이 되고 말았다. 실제로 부스지마는 작중에서 용의자나 업계 등 자기 앞의 대상을 그야말로 철저하게 부수는데...

 직언하지 않는 게 국민성이라 할 일본이다 보니 오히려 그에 대한 갈증으로 인해 사이다 발언을 하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작품을 잘 만드는 것도 같다. 비슷한 플롯과 캐릭터를 다룬 작품으로 오쿠다 히데오의 '이라부' 시리즈와 교고쿠 나츠히코의 <죽지그래>, 그리고 사카이 마사토가 출연한 드라마 <리갈 하이>가 떠오르는데 모두 가식 없이 내면을 후벼파는 내용이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작가 형사 부스지마>는 주인공의 캐릭터성만 보면 위의 작품들에 비해 좀 약한 편이지만 대신 컨셉이 특이해 재미와 통쾌함이 위의 작품들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이 책은 작가 지망생은 결코 읽으면 안 되는 책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작가 지망생인 내 입장에서 불편하지만 읽어야만 하는 내용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오로지 출판업계만을 상대로 비판을 일삼는 작품은 처음인데 추리소설적인 사건과 반전, 결말은 부수적인 요소로 느껴질 만큼 업계의 실상을 낱낱이 까발리는 게 주된 목적인 작품이라 생각하게 만드는 요소가 참 많았다.

 공모전 1차에 낙선되는 실력 미달 작가 지망생, 편집자에 의존하는 신출내기 작가들과 그런 작가들의 등골마저 빼먹는 악덕 편집자, 어떻게 신인상을 받으면서 데뷔는 했지만 실적을 못 내고 있는 작가들과 그들에게 꼰대짓을 하는 문단의 거장 등 에피소드가 거듭될수록 조롱하는 대상이 진화하는데... 어떨 때는 '이게 현실일 리 없다'며 부정하고 싶은 발언도 나오고 언제는 '남들이 날 이렇게 보고 있진 않을까' 라며 찔리는 장면도 나와 여러모로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워너비의 심리 테스트'


 공모전 1차에서 떨어지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는 작가 지망생들의 추한 모습을 다룬 첫 번째 에피소드. 그들과 완전히 같은 처지라 할 수 있기에 남 얘기처럼 읽히지 않았다. 나 역시 작년에 낙선하고 최종 심사에도 못 들어서 크게 낙심하던 차였는데, 작중 인물들만큼은 아니더라도 내심 불만스러웠던 터라 오히려 읽고 반성하게 되는 에피소드였다. 타인의 객관적이고 냉정한 개입 없이 자기 세계에 갇히는 게 얼마나 위험하고 추한 것인지 작가 형사 부스지마가 제대로 비웃는데 나도 그 대상이 되지 않게끔 열심히 써야겠단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편집자는 편집자'


 이 에피소드는 무능한 작가인 용의자들과 너무 이해타산적이라 유능한 편집자라 평가받았던 피해자를 동시에 꼬집는다. 데뷔를 했어도 첫 번재 에피소드의 용의자들과 다를 게 없는 인물들이 또 나오는데 이런 병적인 면모는 어떻게 보면 작가를 지향하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모습이겠단 생각에 크게 웃을 수만은 없었다. 따라서 사건의 전말은 씁쓸하기 짝이 없었는데, 출판업계엔 걸출한 재능의 소유자가 너무 극소수라 비즈니스적 요인을 무시하고 이상적으로 꾸려나가기엔 힘들다는 의견에 새삼 동의하게 됐다.



 '상을 받긴 했지만'


 화려하게 데뷔는 했지만 성과를 내지 못해 도태되기 일보직전인 용의자들이 나오는 에피소드다. 첫 번째, 두 번째 에피소드와 플롯이 비슷하긴 한데 개인적으로 피해자가 출판업계에서나 거장 소리 들을 만한 위인이었다는 것이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두 번째 에피소드의 피해자도 주변에서 유능하지만 인격엔 문제가 있는 것으로 평가를 받았는데 이번엔 인격적인 부분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주변의 평가가 조금 의아했기 때문이다. 물론 피해자가 괜찮은 작가고 양반인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신인들한테 설교를 한다는, 꼰대라 불려도 할 말이 없는 행동에 대해선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 물론 부스지마의 방식이라고 찬성할 순 없지만... 때론 도태되는 것을 자청하는 인물을 구제하려는 게 말짱 헛짓인 경우나 상대도 있구나 싶어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특히 이익을 추구해야 하는 출판사의 입장을 떠올리면 더더욱.


 

 '애독자'


 이야기 자체는 그리 흥미롭진 않았는데 용의자 중 한 명이 꽤나 인상에 남았다. 책을 사지도 않고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 주제에 인터넷으로 악평을 남기고 책을 사서 보는 건 낭비고 바보 같은 짓이라 주장하는 그 인물의 논리가 반은 동의하고 반은 반대하기 때문이다. 나 같은 경우엔 신뢰하는 작가의 작품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의 책을 빌려 읽기로 결심한 독자인데 빌려 읽었는가, 돈을 내고 읽었는가에 따라 감상에 차이가 있으며 대체로 후자가 더 정성이 들어가기 마련인 걸 경험했기에 이 인물에 대한 비판에 대해 대체로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하지만 작가로서 출판업계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자아와는 무관하게 나는 소비자로서의 선택의 자유를 옹호하는 편이므로 결국 중요한 건, 이 작품집의 진정한 주제일지 모를 '작가는 재능이건 뭐건 작품을 성실히 잘 쓰는 게 답이다'란 결론이 아닌가 싶었다. 해당 에피소드와는 그리 관련이 없는 말이긴 하나, 실력도 없는데 이상을 추구하거나 건방을 떠는 건 추하기만 할 뿐이니까.


 

 '원작과 드라마 사이에는 깊고 어두운 강이 있다'


 소설이 원작인 일본 드라마를 자주 보는 나로서 정말이지 공감하지 않기가 힘들었던 이야기. 가장 궁금하면서도 가장 골 때리는 부분에 대해 얘기하는데, 순전히 작품 외적이면서 하찮기 이를 데 없는 요인으로 원작을 훼손하는 드라마 프로듀서가 정말이지 언제나 좋은 작품을 접하길 바라는 한 사람으로서 살해당해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란 생각을 나도 모르게 품었던 것 같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부스지마가 용의 선상에 오르는 상황도 재밌었고 작가이자 '형사 기능지도원'으로 재취업된 형사이기도 한 부스지마의 정체성이 강조된 의외의 결말, 그리고 첫 번째 에피소드 때부터 활용된 함정 수사 형식이 돋보인 것도 모두 인상적이었다.


 

 부스지마처럼 못된 말을 하는 캐릭터로 <리갈 하이>에서 사카이 마사토가 열연한 코미카도가 떠오른다. 그 캐릭터는 세상이 요지경이라 위악자로 사는 게 아닌가 하는 묘사가 있었는데 부스지마는 그런 면모까지 그려지지 않아 약간 아쉬웠다. 심지어 딱히 위악자는 아닌 것 같은데 억지로 못된 말만 하는 것 같은 다소 어정쩡한 모습을 보여 어딘가 어정쩡하다는 느낌도 받았지만 대신 하는 말 대부분이, 작가를 대변하는 그의 말은 의미가 있어 한동안 잊지 못할 캐릭터임엔 분명하다.

 또 부스지마한테 그렇게 철저히 당하고도 '그래도 자긴 열심히 쓸 거다'고 하는 하는 몇몇 인물들도 마찬가지로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들은 통찰력이 뛰어나기로 정평이 난 부스지마의 예상을 벗어난 인물이자 우리가 본받아야 할 유형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이 되고자 하는 역사에 남을 위대한 작가는 그런 식으로 탄생하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 작품에서 묘사된 출판 업계처럼 - 아마 현실과 거의 비슷할 - 독설이 절실한 막장의 세계에선 말이다.


 작가의 데뷔작을 읽었을 땐 이 정도 인상까진 못 받았는데 이 작품을 읽으니 이 작가의 책이 왜 그토록 많이 출간되는지 알게 됐다. 작가의 또 다른 데뷔작인 <안녕, 드뷔시>부터 차근차근 읽어야겠다.

야심이 원한으로 변질되는 건 이 바닥에 때때로 일어나는 일이죠. - 31p




작가의 재능이라는 게 워낙에 실체가 의심스럽잖아. 자각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꼭 이익으로 직결된다고 볼 수도 없고, 잠재력이 어느 정도인도 짐작할 수 없고. 하지만 그게 없으면 얘기가 안 돼. 의심스러운 걸 다루기 때문에 모조리 비즈니스처럼 처리할 수도 없고, 스스로 착각하는 인간들도 나오게 마련이지. - 103p




정말이지 당신들 하는 짓하고는. 드라마에서는 여기저기 온갖 배려하며 예의 차린 것만 만들면서, 보도만 된다 하면 한없이 천해진다니까. - 30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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