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가능성은 이미 떠올렸다
이노우에 마기 지음, 이연승 옮김 / 스핑크스 / 2018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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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추리소설이란 게 아무리 날고 기어도 주인공인 탐정 캐릭터는 사실 거기서 거기란 생각을 늘 했는데 일단 그 생각부터 흔들며 시작하는 게 무척 신기한 작품이었다. 기적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기적을 믿는 탐정이라니. 추리소설 속 탐정들은 기적을 부정하기에 불가사의한 사건에 도전을 하기 마련인데 이 작품의 탐정 우에오로는 모든 가능성을 검토해봤더니 기적 외엔 설명이 되지 않는다고 초장부터 호언한다. 모든 가능성이라고? 생각만 해도 아득하고 심연의 너머에 있는 무한의 가능성을 전부 다 검토했단 말인가? 사실 이쯤 되면 특이한 걸 넘어 무리수가 아니냐며 작가가 걱정될 정도였다. 감당할 수 있을까...?

 호불호가 갈리는 부분은 이제부터 시작인데, 탐정 우에오로는 1장이 끝나기 전에 조사에 착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건의 진상은 기적'이라 결론짓는다. 그때 그런 탐정의 존재, 사상부터 인정할 수 없다는 캐릭터가 우르르 나와 저마다 이 사건이 기적이 아니라는 가능성을 제기하는데 여기서 탐정은 도전자가 아니라 도전을 받아들이는 자로서 추리쇼에 임한다. 통상적인 추리소설과 비교하면 완전히 주객이 전도된 셈인데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컨셉이나 배틀 형식으로 진행되는 전개는 영락없이 만화나 촌극에 비견될 정도로 특색 있어 이래저래 특이하기 짝이 없다. 이렇게 일본 특유의 유치하고 겉멋든 설정에 조금이라도 내성이 없는 사람들은 몸 어딘가에 두드러기가 나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이 됐다. 다른 걸 떠나서 화자가 중국인이라지만 그놈의 중국어는 왜 그렇게 자주 나오는지... 이건 말 그대로 취향의 영역이지만 가독성을 헤칠 요소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마찬가지로 주의할 필요는 있을 듯하다.


 개인적으로 사건 자체는 그다지 흥미를 끌지 못했고 사건의 개요를 설명하는 것도 지루해 작품의 하이라이트인 논리 싸움은 내게 있어 그렇게 인상적이진 못했다. 미안한 말이지만 기대보다 사건의 스케일이 작았다고 느껴져 기적이니 무한의 가능성이니 하면서 뻥튀기하는 거 아니냐고 반문이 들기도 했다. 캐릭터들도 추리 이전에 말들이 너무 많아 답답하기 그지없었는데... 추리 대결이 반복돼 익숙해진 덕분인지 나중엔 작가가 고민을 한 전개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탐정 혼자서 이것 저것 추리하면서 가능성을 지우는 것보다 다른 도전자가 탐정 앞을 가로막아 대결 형식으로 추리를 펼치고 부정하는 게 훨씬 흥미진진하니까 말이다. 작풍은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적어도 그 정도 모험도 없었더라면 내 경우엔 아예 끝까지 안 읽었을 가능성이 컸다.

 설정도 설정이지만 기적에 대한 엄청나게 진지한 자세도 인상적이었다. 처음엔 탐정이 좀 특이하구나 싶었지만 자존심을 넘어 목숨도 걸 수 있을 만한 기적을 믿는다는 게 느껴지자 자세를 고치지 않을 수 없었다. 각 인물들의 말솜씨는 현란함이나 깊이 면에서 시마다 소지와 교고쿠 나츠히코를 연상시켰는데 겉멋이 들긴 했지만 전문용어, 사어, 문어가 총동원되는 말들이 흡입력은 떨어지지만 작가의 집요함이 느껴져 믿음이 가기도 했다. 별로 상관 없는 얘길 수 있지만 작품의 예상치 못한 깊이는 저자가 도쿄대를 졸업했다는 약력을 보고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정말 별로 상관 없는 얘길 수 있지만.


 진지한 자세, 깊이, 현란함, 설정... 작품엔 여러 개성과 장점이 있지만, 뭐니뭐니 해도 가장 좋았던 건 결말이다. 정말 이대로 기적은 기적인 채 탐정은 인정을 받는가, 하는 질문에 가장 납득할 수 있고 멋있는 형태의 대답이 나오고 무엇보다 크기를 떠난 기적의 위대함을 엿볼 수 있는 지점도 있어서 예상치 않게 여운도 짙었다. 이건 정말 뜻밖이었는데...... 호불호를 떠나, 또 취향을 벗어나 정말 좋은 결말이었다는 생각밖엔 안 든다. 이건 뭐 후속작을 기대하지 않는 게 불가능할 정도니 원. 어떻게 이 작품이 상을 하나도 못 받았지? 작년에 읽은 기대작 <시인장의 살인>보다 괜찮았는데. 적어도 설정을 감당하는 능력은 몇 수 위다.

오히려 분노를 느낀다면 신의 변덕스러운 은총 쪽에 분노해야 하지 않을까. 푸린은 어차피 버릴 거라면 평등하게 버려달라고 생각했다. 경계선의 오른쪽에는 행복한 가족의 단란한 모습이 비치고, 왼쪽에는 불행과 고통, 통곡이 오가는 세상의 모습은 그야말로 뒤틀려 있고 해학적이다. 아름답고 조화로운 대자연을 창조한 조물주가 왜 인간 사회의 부조화는 모르는 척 방지하고 있는 걸까. 마치 개발 계획이 좌절된 고층 빌딩의 잔해를 보는 듯한 심정이다.

아니면 이것이야말로 신이 인간에게 보내는 최상급의 조롱인 걸까. - 37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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