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시게마츠 기요시 지음, 이선희 옮김 / 예담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9.0







 이지메, 학교 폭력에 천착하기로는 일가견이 있는 작가 시게마츠 기요시는 한때 내가 가장 신뢰하던 작가 중 한 명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작품마다 하는 얘기가 은근히 비슷하다고 느끼면서 신작을 잘 안 찾아보게 됐는데, 그래도 이 책의 '고단샤 100주년 기념 걸작'이자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은 예사롭지 않아 집어들게 됐다. 다 읽고 나서 이 작가가 풀어내는 이야기가 은근히 비슷하다고 느꼈던 나 자신에 대해 반성을 하게 됐다. 같은 이야기라 하더라도 깊이가 이렇게 다르다는 것에 감탄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평생에 걸쳐 진지하게 자신이 천착한 바를 풀어내는 작가도 없어서 감히 비교를 불허할 정도였다.

 학교에서 벌어지는 문제는 어제오늘 사이에 불거진 일이 아니다. 안타깝지만 왕따 피해자가 자살하는 일도 작금의 세계에선 대수로운 일이라고 볼 수 없다. 아마 우리는 이런 사건사고에 대해 무뎌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을 것이다. 가령, 유서가 어지간히 충격적이지 않은 이상 쉽게 이슈화되기 쉽지 않은 세상이라 봐도 무방하겠다. 만약 이 작품에서 후지슌이 유서로 자신을 괴롭힌 동급생 두 명만이 아니라 생전에 좋아했던 여학생, 그리고 자신의 절친이 되어주어서 고맙다고 주인공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죽음이 그토록 이슈화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유가족은 언제까지고 그 슬픔과 충격에서 헤어나올 수 없겠지만 후지슌과 무관하거나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방관했던 학생들은 그 죽음의 무게를 실감할 수 없었을 테고, 이는 주인공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절친이라고 부를 정도로 친한 사이도 아니었던 사람이 유서에다 자기 이름을 적었다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십자가>는 주인공 사나다 유가 동급생 후지슌의 죽음 이후로 20년간 느껴왔던 심상을 적어낸 작품이다. 주인공은 다소 억울하긴 하지만 세상의 시선, 특히 후지슌 유가족의 시선과 마음을 배반할 생각을 못하고 얼떨결에 후지슌의 절친으로서 살아가게 된다. 후지슌의 장례식, 1주기, 가족 모임에도 주인공은 불편한 상황임에도 꼬박꼬박 유가족을 찾아간다. '절친이 자살을 할 때까지 넌 뭘 했는가?' 라며 후지슌 사건을 담당하는 경찰, 기차에게 불합리하다 싶은 취급을 받지만 주인공은 얼떨떨한 채로 감내하려고 한다. 처음엔 캐릭터 설정이 작위적인 게 아닌가 싶었지만 소설에선 '나이프의 말과 십자의 말의 차이'를 언급하며 속죄의 무거움과 개연성을 부여한다.

 비난의 말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나이프의 말은 순간적으론 아프지만 상처가 없어지면 사라진다. 그러나 십자가의 말은 평생 등에 지고 가야 한다. 내가 만약 평소에 친하지도 않다고 생각한 애가 유서에 내 이름을 적었다는 이유로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는 처지가 됐다면, 난 무척 불합리하다고 버티지 못했을 것 같다. 실제로 주인공도 결국엔 참다 못해 감정이 폭발했듯 십자가를 평생 짊어지길 강요하기엔 아무래도 잔인한 구석이 있다. 누군들 자신과 무관하다고 여긴 타인의 삶에 계속 책임감을 갖긴 쉽지 않으니까 말이다.


 주인공 선정이 참 절묘한 작품이었다. 작가는 실제로 자살로 자기보다 먼저 떠난 아들을 둔 어느 아버지의 인터뷰를 접하고서 이 소설을 집필했다고 한다. 그런데 작가는 실질적으론 사건의 제3자에 해당할 동급생 한 명을 주인공으로 설정했다. 피해자 본인이 아닌, 유가족인 아버지가 아닌, 가해자도 아닌 작가 본인과 마찬가지인 제3자를. 사나다는 후지슌과 동급생일 뿐 윤리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느냐 여부는 작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인물일지 모른다. 작중 사건을 취재하는 기자 - 약간 기레기 기질도 없잖았던... - 는 나름 사명감을 갖고 주인공을 비롯한 방관한 동급생들을 매도하지만, 결국 동급생들이 방관해서 후지슌이 자살했다는 얘긴 결과론적인 얘기에 지나지 않는다. 후지슌에게도 삶을 이어나갈 기회는 있었고 결국 자살을 최종적으로 실행에 옮긴 건 자살한 당사자니까. 어쩌면 후지슌을 도우려고 한 사람이 많았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렇다. 그렇게 생각하며 책임감에서 자유로워지긴 너무나 쉽다. 사나다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정확히는 시게마츠 기요시는 그런 식으로 글을 쓰지 않았다. 작가는 꽤 진지하게 글을 이어나갔다. 얼마든지 동급생 자살로부터 눈을 돌릴 수 있음에도 절대 그를 용납하지 않는다. 주인공에게 십자가를 지우려는 후지슌의 아버지와 기자를 더욱 부추긴다. 물론 작가는 이 두 인물에게도 어느 정도 스스로의 모습을 자각할 수 있게끔 여지를 남기긴 했다. 기자의 언론 플레이며 아버지의 냉담한 태도는 감정적인 걸 넘어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그렇지 않기가 어렵단 건 인정하나 느닷없이 절친이 된 주인공의 심정을 헤아린다면 그를 향한 어른들의 취급은 너무 가혹했다.


 나 역시 제3자에 불과하기에 주인공의 감정에 몰입할 수밖에 없던 걸까? 20년에 걸쳐, 고향을 떠나서도 떳떳함이라곤 없이 사는 주인공의 일대기가 불편하게 읽혔다면 너무 본질을 놓치는 걸까? 제아무리 주인공이 곤혹스럽더라도 삶에 비관해 자살한 후지슌에 비한다면 배부른 상황이니 언제나 그 책임에서 자유로워지면 안 되는 걸까? 소설은 답이 없는 상황에서 그럴싸한 답을 내놓으려 시도하기 보단 진심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진심 어린 속죄는 무엇인지, 진심 어린 참회란 무엇인지 주인공은 20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 되묻는다.

 이 답답하고 반복적이고 지리멸렬하기도 한 여정은 후지슌이 생전에 가고 싶어한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스코그쉬르코고르덴 묘지공원에 유가족들이 찾아가며 결말이 난다. 어느새 주인공은 유가족들에게 같이 묘지공원에 가자고 권유를 받을 정도로 거리감이 사라졌지만 주인공은 한사코 동행을 거절한다. 어떤 식으로도 정리가 되지 않는 자신만의 감정, 어쨌거나 제3자로서의 감정은 유가족과 함께가 아닌 혼자서 정리하는 게 더 맞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시간이 흘러 아들이 생기고서야 후지슌이 자신을 '절친'이라 한 이유를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은 주인공에겐 언젠가 진심으로 자기 감정을 정리할 순간을 상상하며, 또 오래전에 먼저 떠난 아들을 떠올리며 공원에 갔을 후지슌의 아버지와 남동생의 모습을 상상하며 소설은 끝맺어진다.


 모든 감정이 명확히 규정되지 않는 소설임에도 여운이 남는 이유는 한결 같이 진지하고 솔직했기 때문일 것이다. 계속 몰입하며 읽기엔 답답하고 불편했지만 작가만큼은 고개 돌리지 않고 집필한 덕에 후반부의 여운이 상상 이상으로 짙었다. 시게마츠 기요시의 작품은 꽤 어린 시절부터 접했는데, 타성에 젖지 않고 연차에 어울리게 더 깊이가 있는 작품을 써내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게 바로 작가의 내공이리라. 

 오랜만에 작가의 작품을 접했는데 예전에 느꼈던 감동이 빛이 바래기는커녕 더 짙어져서 실로 반가웠다. 최근에 우타노 쇼고의 작품을 읽을 때도 느낀 거지만 한 작가를 시간을 두고 오랜만에 접하니까 만감이 교차한다. 특히 시게마츠 기요시는 뻔할 정도로 자주 동일한 소재에 천착해온 작가라 그의 진화하는 모습이 더욱 남다르게 다가왔다.

상처를 입지 않은 것은, 남에게 상처를 준 것보다 죄가 무거울 때가 있으니까. - 21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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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의 살인사건, 실로 무서운 것은
우타노 쇼고 지음, 이연승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10월
평점 :
품절


9.4







 우타노 쇼고의 작품은 오랜만에 읽는 것 같다. 한때 작가의 신작이 많이 소개됐지만 그 유행도 어느샌가 시드는 것 같고, 또 가끔 출간된 신작의 재미가 예전만 못해서 잘 찾아 읽지 않았다. 이 책의 경우엔 '우타노 쇼고 X 에도가와 란포, 꿈의 콜라보레이션'이라는 문구가 있긴 하지만, 예전에 <시체를 사는 남자>라고 이미 비슷한 컨셉의 작품이 출간한 적 있어 뭘 또 새삼스럽게 에도가와 란포인 건가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아직 에도가와 란포를 접하지도 않은 주제에 벌써 란포라는 테마가 질린 것이다. 이게 뭔...

 이 책엔 우타노 쇼고가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을 자기 스타일대로 재해석한 7편의 단편이 수록됐다. 오마주한 작품 중엔 에도가와 란포를 한 번도 접하지 않은 나도 몇 번인가 들어본 제목도 있었고 국내에 아예 소개도 되지 않은 제목의 작품도 있었다. 하여튼 <시체를 사는 남자> 때완 다르게 란포의 작품을 아예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단편을 읽노라니 지금까지 이상할 정도로 관심이 안 가던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작가의 란포에 대한 애착을 반영하듯 작품들의 퀄리티도 출중하고 재미의 편차도 적은 편인데, 그래서 그런가 작가는 이 이후로 란포를 테마로 글을 쓰지 않겠다고 한다. 글쎄, 이 정도면 몇 번 더 써봐도 괜찮을 듯한데 워낙에 지금 내놓은 결과물이 걸출해서 만족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이건 좀 개인적인 얘기지만, 오랜만에 읽는 작가의 작품이 이전에 작가의 작품을 접했을 때 못지않은 즐거움을 안겨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우타노 쇼고가 이렇게 반갑다니, 이보다 다행일 수 없었다.



 '의자? 인간!'


 처음을 강렬하게 장식했던 이야기. 우타노 쇼고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비호감 달변가 캐릭터가 작중 화자와 독자의 마음을 종횡무진 후벼판다. 참 섬뜩하기 그지없는 캐릭터였는데 오마주한 작품을 얼마나 참고했는지 몰라도 이 작품은 가장 우타노 쇼고답게 쓰지 않았나 싶다. 작가의 대표작 '밀실살인게임' 시리즈가 떠오르기도 했다.



 '스마트폰과 여행하는 남자'


 막판에 이해가 잘 안 갔지만 대체로 현대 기술을 잘 다뤄내 흥미진진하게 읽혔다. 오마주한 작품 '오시에와 여행하는 남자'에선 어떤 설정이었을지 가늠이 안 되는데, 작중에서 다루는 기술이 지금 기준으로도 워낙에 하이 테크놀로지라 우타노 쇼고가 어떻게 변주시킨 건지 궁금해졌다. 이 작품도 '밀실살인게임' 시리즈의 어떤 트릭을 연상시켰는데, 확실히 이 작가도 히가시노 게이고 못지않게 현대 기술에 관심이 많구나 싶었다. 오히려 요즘 히가시노 게이고를 생각하면 더 잘 다루는 듯하다.

 여담이지만 나가사키를 두 번 간 사람으로서 개인적으로 작중 전개에 따라 거론되는 지명이 반가웠다. 여행 생각이 많이 났다.



 'D의 살인사건, 실로 무서운 것은'


 작중 핵심 트릭이나 캐릭터 묘사는 그냥저냥이었는데 결말 때문에 상당히 오싹했다. 오마주한 작품에서도 이런 결말인지, 아니면 우타노 쇼고의 폭주인가... 작가의 다른 작품 <여왕님과 나>와 유사한 걸 보니 아마 후자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야기의 주역 둘의 감정의 골이 상하는 게 너무 급전개인 감이 있어서 이 부분은 좀 아쉬웠다. 먼저 관계에 금을 내버린 쪽의 심리가 너무 급작스러워 이 부분에 좀 더 공을 들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세이 등장]을 읽은 남자'


 대놓고 '나, 이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말하는 작품. 설정이며 결말까지 거의 유사하지만 시간 배경이 현재이므로 좀 더 교묘하고 기술적인 방식이 가미된 게 인상적이었다. 어떻게 보면 가장 현대적인 재해석에 충실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지막 문장도 인상적이었다. 작가가 해당 작품을 인상 깊게 읽은 모양이다. 생각해보니 그래서 작가의 작품이 그렇게 씁쓸하고 비관적인지도 모르겠다.



 '붉은 방은 얼마나 바뀌었는가?'


 대놓고 '나, 이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말하는 두 번째 작품. 짧고 굵다. 처음엔 정신 없었고 뒤돌아 생각해보면 뻔한 반전이라고도 생각하는데 막상 다 읽은 직후의 기분은 유쾌했다. 연극의 묘미를 살린 설정이 일품이었다. 연극업계 종사자들의 고민을 이해한 작가가 자기 스타일대로 풀어낸 이야기였는데 단발성이긴 하지만 확실히 재밌었다.



 '음울한 짐승의 환희'


 에도가와 란포의 특징 중 하나로 특유의 음울한 분위기를 꼽곤 하는데 그 분위기를 제대로 재현한 게 바로 이 작품이다.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우타노 쇼고 스타일의 비호감 작렬인 캐릭터와 설정도 빠지지 않는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콜라보레이션이라 할 수 있겠다. 솔직히 가독성으로 따지면 이 작품이 단연 최고였다. 의외로 결말이 허무하다면 허무한 편이었지만 특유의 음울함은 제대로 풀어냈으니까.



 '비인간적인 사랑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작중 암호 해독을 이해하며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지만 작가도 그걸 아는지 질질 끌지 않고 속도감 있게 풀어냈다. 결말은 예상대로였지만 중간중간 드러나는 인물들의 감정선이 괜찮았다. 오마주한 작품이 국내에 소개가 안 된 작품이라는데, 그 작가의 작품 세계가 정말 방대하단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이 작품까지 읽으니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을 하나라도 접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이 하도 많이 출간해서 뭘 읽을지 고민이 되던데, 한 번 찬찬히 살펴보고 읽어봐야겠다. 그래, 이제라도 읽는다면 그건 늦는 게 아닌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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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의 엘리베이터 살림 펀픽션 1
기노시타 한타 지음, 김소영 옮김 / 살림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9.6






 스포일러 대놓고 많음



 상당히 연극적인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소설로 특유의 몰입감 덕에 펼치면 그대로 결말까지 읽을 수밖에 없다. 적어도 10년 전에 처음 읽을 당시엔 그랬다. 다시 읽은 지금은 그간 적잖은 작품을 접했기 때문인지 처음 읽었을 때처럼 신선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엔터테인먼트 소설로는 뭐 하나 빠지는 구석이라곤 없었다. 연이어 터지는 반전이며 너무나 개성적인 캐릭터며, 심지어 무대가 확장되는 3부에선 원래부터 요상했던 이야기가 더욱 요상해지면서 코믹함과 스릴이 폭주해버렸다. 이 부분은 지금 봐도 놀랍다. 웃음과 섬뜩함을 이렇게까지 동시에 절묘하게 취하는 경우는 흔치 않으니까.

 저자인 기노시타 한타는 본래 일본 영화계와 연극계에서 활동한 인물이라는데 그러한 경력이 고스란히 작품 속에 녹아들었다. 이를테면 한정된 공간에서의 진행이나 연극 대본을 연상시키는 현란한 대사들은 저자를 소설가보단 극작가로 보이게 만든다. 물론 진짜 희곡과는 달리 인물들의 대사와 상황 이면의 심리 묘사도 일품이라 작중 상황이 앞뒤가 맞지 않음에도 몰입도를 높이는 효과가 지대했다. 허술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 사부로 일당의 연극은 오가와 입장에선 그보다 현실감 넘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고, 일당 안에서 그나마 판단력이 있다고 여겨졌던 마키도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니 그저 망상이 심한 호모;;에 불과했던 것 등 시점 분할을 활용한 스토리 텔링의 묘미를 제대로 선보인 작품이 아닐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에 낯선 사람끼리 갇혔다는 심플하고 식상할 수 있는 설정을 극한까지 몰아붙여 탄생한 이 기묘한 코믹 서스펜스는 아마 소설가나 극작가 지망생이라면 부러움을 금치 못할 시나리오겠다. 근데 부러운 것에서 끝내야지, 무단으로 도용하면 안 될 일일 것이다.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는 이유는 대학로에서 오픈런 중인 한 연극이, 정확히 '코믹추리극'을 표방하는 어떤 연극이 이 작품과 상당히 유사한 플롯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 초 우연히 그 연극을 봤을 때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는데 이 책을 읽으니 완전히 판박이였다.

 그 근거를 끝도 없이 열거할 수 있다. 주인공이 불륜을 저지른 것, 호모 외양의 남자가 '신체를 만지면 그 사람의 과거를 알 수 있다'는 초능력을 가졌다는 것, 오늘 자살할 예정이라는 이상한 여자가 등장하는 것, 각자가 꺼림찍한 과거를 고백하는 것 , 알고 보니 주인공 빼고 다들 아는 사이였고 이 모든 게 함정이었단 것, 그 사실을 안 주인공을 일당이 일단 마취약을 이용해 잠재우는 것, 그런데 알고 보니 마취약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약이라서 어처구니없게도 주인공을 죽여버린 것, 남편의 불륜 여부를 알아봐달라는 의뢰를 맡긴 주인공의 아내가 상술했던 '이상한 여자' 역할을 맡은 여자와 아는 사이였던 것, 결국 그 이상한 여자의 독자적인 계략에 의해 주인공이 죽었던 것 등... 오히려 다른 부분을 찾는 게 더 빠를 정도다.


 어쩌면 그 연극이 이 작품의 저자에게 정당하게 허락을 구했을 수도 있으나 그렇게 보기엔 플롯이 교묘하게 다르고 또 결정적으로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연극이 우리나라에서 공연된 적이 있어서 과연 내가 말한 문제의 작품의 시나리오가 과연 합법적인 결과물인지 의심이 된다. 반대로 우연히 비슷한 부분이 많다고 보기엔 너무 판박이라서 순진하게 그런 가능성을 검토해보거나 하고 싶진 않다.

 무엇보다 내가 그 연극을 볼 때 소설의 제목 <악몽의 엘리베이터>를 포스터나 팜플렛에서 발견하지 못해서 과연 정당한 허락에 의한 2차 창작인지 심히 의심스럽다. 그 연극이 제법 흥했고 오랜 기간 공연해서 섣불리 제목을 언급하긴 그렇지만 아마 내가 봤을 땐 표절이 확실해 보인다. 이 상황을 어떻게 넘겨야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네. 솔직히 이 정도면 너무 노골적인 눈 가리고 아웅이라... 시시비비를 제대로 가려야 할까?


 정작 소설 본편에 대한 얘기보단 표절 의혹이 드는 어떤 연극 얘기만 잔뜩 한 것 같은데... 하지만 두 작품을 비교하지 않기가 어려울 만큼 꼭 닮아서 부득이하게 작품 외적인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됐다. 매력적인 작품일수록 표절과 도작의 의혹이 강하게 든다지만 그걸 실천에 옮기는 경우는 소설 속에서나 가능하다고 봤기에 지금 이렇게 내 안에서는 너무나 명백한 이 의혹이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혹시 <악몽의 엘리베이터>를 읽어봤고 그 연극이 궁금한 사람은 따로 대화를 나눠봤으면 좋겠다. 나만 이런 의심이 드는 건지 궁금하다.



 p.s 소설과 연극 두 작품의 관계의 합법성을 떠나, 소설의 전개가 훨씬 깔끔하고 몰입도며 만듦새가 뛰어나니 둘 중 하나만 봐야 한다면 무조건 소설을 읽을 것을 강하게 권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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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일기 - 1등을 우대하지 않고 꼴찌를 차별하지 않는 '세계 최고 복지국가'의 빛과 그림자
나승위 지음 / 파피에(딱정벌레)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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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스웨덴 일기>라는 심플한 제목의 이 책은 지난 번에 읽은 저자의 책보다도 생동감 넘치는 내용이라 더욱 흥미롭게 읽혔다. 저번에 읽은 <스웨덴, 삐삐와 닐스의 나라를 걷다>는 스웨덴의 인문학적, 지리적 여행이었다면 요번 책에선 좀 더 일상적인 스웨덴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마냥 긍정적인 내용만이 아닌 어느 정도 스웨덴 사회의 어두운 부분도 짚어내고 있다는 게 주목할 만한 부분이었다. 특히 이 부분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공감이 갈 만한데 평생 나고 자란 환경을 공유한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저자와 나는 한국인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공통점이라곤 없지만 본문에서 끊이질 않는 스웨덴에서의 컬쳐 쇼크가 이렇게 공감이 가는 걸 보면 새삼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의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이 느껴졌다. 새삼스럽지만 저자의 스웨덴에서의 생활이 경이로웠다. 그래서 더욱 궁금해졌다. 이 책은 2년 전에 출간됐고 별 일이 없다면 저자는 계속 스웨덴에서 살고 있을 테지만, 요즘 근황은 어떨까? 알다시피 지금 스웨덴이 집단 면역으로 서서히 피를 보고 있으니...


 집단 면역을 택함으로써 복지 국가라는 기존의 이미지가 많이 실추된 스웨덴이지만 그럼에도 배울 점이 여전히 많은 나라다. 방역 면에선 반면교사로 삼아야겠지만;; 적어도 복지나 성교육, 그리고 안전에 관해선 우리의 압도적인 롤모델로 삼아도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스웨덴이 왜 세계에서 운전 면허 취득하기 어렵기로 손에 꼽히는지 설명하는 첫 번째 장은 여러모로 인상적인 서두였다. 각 나라의 교통 시스템이 생각 이상으로 천차만별이라 각각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한데 이렇게 운전 면허를 취득해야 하는 입장은 처음 접해봤다. 읽는 내내 우리나라에서 면허를 취득하기까지의 여정도 생각나 적잖이 흥미로웠다.

 안전에 대한 스웨덴의 철학은 이 나라 대표 자동차 브랜드 볼보에서 3점식 안전 벨트가 처음 개발됐다는 것에서 엿볼 수 있겠다. 이 벨트는 오늘날 기준으로 대단히 필수적인 안전 보호 장치인 만큼 개발한 당시에 특허를 신청해 돈을 벌 수도 있었겠지만 '안전을 위한 것이니 특허를 낼 수 없다'고 말한 점에서 안전은 특권이 아닌 기본이라는 스웨덴인들의 인식은 몇 번을 곱씹어도 놀랍기 그지없다. 아무튼 책에 실린 저자의 면허 취득하기까지의 여정은 역시 만만찮았는데 주행에 들어가기에 앞서 시행되는 필기 시험이나 강의 시청의 퀄리티가 듣는 것만으로도 빡세서 내가 다 한숨이 나왔다. 특히 우리나라 필기 시험은 우스갯소리로 한 번에 못 붙으면 가문의 수치라고 하지만 스웨덴의 시험 문제를 보면 한 번에 붙는 게 가문의 영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전에 관한 스웨덴의 철학을 시작으로 익숙한 듯하면서도 여전히 놀라운 스웨덴의 복지 이야기가 펼쳐진다. 내가 북유럽 문화에 관심이 많아 관련 책을 많이 접해서 그런 걸까, 이전만큼 컬쳐쇼크를 느끼진 못했지만 저자의 글솜씨가 맛깔나기도 하고 또 실제로 거기 살고 있기에 담아낼 수 있는 현장감이 있기에 식상하게 읽히진 않았다. 그런 와중에 스웨덴 사회의 안 좋은 점이랄지, 결점에 대해서도 얘기하기 시작하는데 저자가 보통 공부를 한 게 아닌 듯 꽤나 전문적이라서 혀를 내둘렀다.

 아마 서양권 문화를 듣다 보면 한국인으로선 과연 저들의 부모 자식 관계가 그토록 독립적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다들 한 번씩 품을 것 같다. 자녀가 성인이 되고도 계속 경제적으로 지원하거나 같이 살기도 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우리나라 기준에서 학교에서 독립하는 방법을 가르친다거나 자녀가 성인이 되고도 독립을 하지 않으면 월세를 받는 부모들의 이야기는 - 심지어 자녀들은 월세를 당연하다는 듯이 지불한다! - 한국인 입장에선 생경하게만 들린다. 이 독립에 대한 가치관은 부모 자식은 물론이고 연인 관계, 부부 사이에도 예외는 아니라서 이혼은 그 문화권에선 하나도 대수롭지 않은데 아직도 이혼이나 한부모 가정이 우리 사회에서 따가운 눈초리를 받는 걸 떠올리면 스웨덴의 '쿨'한 사고방식은 자못 부러움을 유발한다.


 그런데 이런 쿨한 얘기에 부러움이 드는 한편으로 막연하게나마 과연 그렇게 쿨해도 괜찮은지 하는 걱정도 들 것이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고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동물이라는데 혈연을 비롯한 가족 관계 안에서 개개인들이 독립된다면 그게 마냥 좋기만 한 걸까? 저자는 그 의문을 한 독거 노인이 사후 몇 년이 지난 뒤에야 겨우 발견된 뉴스를 통해 풀어나간다. 독립적인 개인의 영역이 소중해 당사자가 마음 먹기에 따라선 얼마든지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사회, 그렇기에 반대로 도움이 필요하거나 변고를 당했을 때 이를 감지할 만한 장치가 부족한 사회라는 분석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스웨덴 입장에선 아무래도 억울한 내용일 테지만 최근 집단 면역을 택한 정부의 정책이나 시민들의 반응을 보면 이 나라 사람들의 낙관주의 및 독립에 대한 가치관이 이런 식으로 엇나갈 수도 있으리란 생각에 참담함을 감출 수 없었다.

 모든 면에서 선진적인 나라도 없고 스웨덴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배울 점은 많지만 반면교사로 삼은 점 역시 존재한다. 내 나라에만 관심을 기울일 게 아니라 다른 나라 얘기도 들어보는 게 중요한 게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서 직접 발 붙이며 살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는 더욱 귀중하다. 저자가 책에서 풀어낸 이야기들은 모두 스웨덴 입장에서 이방인인 저자이기에 가능했던 내용들이다. 스웨덴 현지인들은 인식하지 못하거나 애써 무시하려는 것들도 저자는 조심스럽지만 냉정하게 분석해낸다. 물론 스웨덴이 괜히 스웨덴이 아니듯 대체로 좋은 이야기가 많았지만 결국엔 그런 스웨덴도 완벽하진 않고 그 점은 2년 전에 이 책을 쓴 저자보다 현재의 우리가 더 잘 알고 있기도 하다.


 그런 와중에 스웨덴 이야기를 접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 내 나름대로 이 책을 펼치기 전에 한번 생각해봤다. 해외를 못 나가니까 이런 식으로 갈증을 해소하는 거라며 말은 하고 다녔지만 내가 왜 이런 책에 관심이 가고 읽으려는지 그 본질적인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그래도 스웨덴은 여전히 선진국이라는 내 환상을 지키고 싶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렇게 선진국임에도 방역 대책은 왜 그 모양인지 비웃기 위해서 이러는지 자문해봤다.

 다 읽고 보니 내 감정은 꽤나 양가적이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3월에 방문해봤을 스웨덴이란 나라에 대한 내 안에서의 복합적인 감정을 골고루 헤아려보기 위해 이 책을 펼친 것 같다. 만약 이 책이 찬양이나 비판, 한쪽으로 치우쳐졌더라면 스웨덴에 대한 나의 인상 역시 치우쳐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저자의 논조나 분석이 완벽하게 객관적이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수박 겉 핥는 내용은 아닌 만큼 본질적인 스웨덴의 모습을 알아가기에 적합한 책이었다.


 만약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지금과는 다른 감상이 나왔을 텐데... 전에도 말한 적 있는 것 같은데 참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전염병 덕분에 가치관이 변해가는 것도 곱씹어볼 만한 일이다.



 p.s 책의 마지막 장은 스웨덴 정치의 근대사를 기술하고 있는데 중립을 표방하며 두 차례 세계전쟁의 화염에 휩쓸리지 않은 스웨덴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굉장히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한 지점인데, 다른 나라 입장에선 비겁했을지언정 결과적으로 자국민을 지키는 데 성공한 스웨덴의 선택은 현재 국경의 문을 닫은 세계의 모습과 겹쳐 보이기도 한다. 문을 닫아도, 의리를 지키기 위해 도움의 손길을 건네도 어느 쪽이건 존중할 만하다. 궁금한 건 미래의 평가다. 훗날 이 선택들은 어떤 평가를 받게 될 것인가. 미래에서의 논쟁의 여부가 벌써부터 궁금하다. 아마 그 논쟁은 끊이지 않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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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쫌 아는 10대 - 인공지능, 네 정체를 밝혀라 과학 쫌 아는 십대 1
오승현 지음, 방상호 그림 / 풀빛 / 2019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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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10대도 아니면서 뭐 이런 책을 다 읽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꼭 10대만이 아니라 인공지능에 관심이 있다면 누구라도 펼쳐봤으면 하는 책이 아닌가 싶다. 지나치게 10대를 겨냥하는 듯한 문체가 거슬리는 사람이 아니라면 꽤 읽은 만한 책일 것이므로. 특정 정보를 습득하기 위해 반드시 어려운 전공 도서로 입문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놓고 입문용으로 쓴 책이 더 효과적일 수 있는데 이 책이 딱 그랬다.

 로봇, 인공지능, 안드로이드 등 수많은 용어의 차이를 잘 모르겠거나 인공지능의 실질적인 필요성이 와 닿지 않은 사람에겐 특히 권할 만한 책이었다. 나는 만화나 영화, 소설로 인공지능에 관심을 가졌는데 사람에 따라선 인공지능 이야기가 마냥 허황되게 들릴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사람이 되고자 하는 로봇에 관한 이야기나 반대로 로봇에게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는 아직도 미래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로 여져지잖은가. 반면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에게 반기를 들어 종래에 우릴 멸망시키리란 전개는 최초로 로봇이 등장한 카렐 차페크의 희곡 <로봇>에서부터 그려지는 등 인공지능과 관련된 미래는 예로부터 영 암울하게만 느껴져 존재 자체만으로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소재라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알파고의 등장은 그러한 반감을 더욱 부추기기까지 했는데 한편으론 더 이상 SF 속 로봇의 도래가 그리 먼 미래의 일은 아니겠다는 생각을 심어줬기에 인공지능에 있어 그보다 기념비적인 사건도 없을 듯하다. 이 책에서도 알파고 얘기가 나오는데 저자는 그를 통해 인공지능의 장점과 단점을 명확히 기술해낸다. 알파고는 최고의 바둑 기사가 될 수 있지만 오직 바둑밖에 둘 줄 모른다. 그에 비해 인간은 알파고보다 바둑은 못 두지만 노래도 부르고 그림도 그리고 다른 다양한 일도 해낼 수 있다. 이는 인공지능에겐 불가능한 일이다. 말인즉슨 인간과 인공지능이 이인삼각으로 뛰듯 서로를 보완해주는 관계임을 뜻하는데 모두가 아는 예시로 평균 이상의 통찰력을 선보인 저자의 필력이 인상적이었다.

 인공지능의 순기능과 우리가 경계해야 할 지점을 이 책은 간단한 예시를 통해 쉽고 빠른 이해를 도와준다. 자동차 자율주행 시스템의 이점을 매력적으로 어필하는 동시에 인간에게 편리함을 안겨주기 위한 개인정보 수집이 왜 위험하고 어떤 점에서 불완전한가 하는 지적도 놓치지 않는 등 통찰력이나 시의성 면에서 빠지는 구석이 없었다. 유명한 인공지능 영화는 물론 실제 사례를 인용하는 것도 적절했다. 처음 보는 내용은 없었지만 <에이 아이>나 <바이센테니얼 맨>, <그녀>, 그리고 <터미네이터> 등 각 작품들에 담긴 담론은 모두 적확하게 짚어냈는데 이미 본 작품들임에도 한 번 더 보고 싶을 정도로 맛깔나게 인용했다. 사실 위의 작품들이 워낙에 많이 인용돼서 질릴 법도 했는데 그렇지 않은 걸 보면 정말 보통이 아닌 작가였다.


 인공지능에 관심이 많은 편이고 관련 책도 많이 읽어서 그렇게 신선한 책은 아니었지만 문학을 제외한 인공지능 도서들이 크게 기억이 나지 않는 걸 생각하면 이 책의 존재감은 무시할 수 없을 듯하다. 뭔가를 쉽게 전달하는 건 상상 이상의 재주를 요구하기 때문인데 이 책은 정말 막힘없이 해내기 때문이다. 10대를 위한 책이라곤 하지만 꼭 10대가 지나면 못 읽어줄 정도로 깊이가 얕은 책은 아니었다. 근데 가만 생각해보면 10대를 위한 책이라고 깊이가 얕다는 건 근거도 없는 편견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데...

 지식이란 건 사람의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내가 나이를 아무리 많이 먹어도 배우지 않거나 관심이 없으면 모를 수밖에 없는 지식이 이 세상에 태반이다. 그런 상황에서 10대를 위한 책을 읽는 게 대수도 아니며 오히려 그런 식으로 입문하는 게 더 효과적이리라. 비록 난 이 책으로 인공지능을 처음 접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런 내 눈에도 책의 전문성은 상상 이상이었으니 자신있게 추천해본다.

중요한 것은 뿌리가 아닐지 몰라. 어떻게 태어났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성장했는가를 봐야 해. 위대한 사람은 태어나는 게 아니야. 위대한 경험이 위대한 존재를 만들지. - 9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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