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시게마츠 기요시 지음, 이선희 옮김 / 예담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9.0







 이지메, 학교 폭력에 천착하기로는 일가견이 있는 작가 시게마츠 기요시는 한때 내가 가장 신뢰하던 작가 중 한 명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작품마다 하는 얘기가 은근히 비슷하다고 느끼면서 신작을 잘 안 찾아보게 됐는데, 그래도 이 책의 '고단샤 100주년 기념 걸작'이자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은 예사롭지 않아 집어들게 됐다. 다 읽고 나서 이 작가가 풀어내는 이야기가 은근히 비슷하다고 느꼈던 나 자신에 대해 반성을 하게 됐다. 같은 이야기라 하더라도 깊이가 이렇게 다르다는 것에 감탄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평생에 걸쳐 진지하게 자신이 천착한 바를 풀어내는 작가도 없어서 감히 비교를 불허할 정도였다.

 학교에서 벌어지는 문제는 어제오늘 사이에 불거진 일이 아니다. 안타깝지만 왕따 피해자가 자살하는 일도 작금의 세계에선 대수로운 일이라고 볼 수 없다. 아마 우리는 이런 사건사고에 대해 무뎌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을 것이다. 가령, 유서가 어지간히 충격적이지 않은 이상 쉽게 이슈화되기 쉽지 않은 세상이라 봐도 무방하겠다. 만약 이 작품에서 후지슌이 유서로 자신을 괴롭힌 동급생 두 명만이 아니라 생전에 좋아했던 여학생, 그리고 자신의 절친이 되어주어서 고맙다고 주인공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죽음이 그토록 이슈화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유가족은 언제까지고 그 슬픔과 충격에서 헤어나올 수 없겠지만 후지슌과 무관하거나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방관했던 학생들은 그 죽음의 무게를 실감할 수 없었을 테고, 이는 주인공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절친이라고 부를 정도로 친한 사이도 아니었던 사람이 유서에다 자기 이름을 적었다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십자가>는 주인공 사나다 유가 동급생 후지슌의 죽음 이후로 20년간 느껴왔던 심상을 적어낸 작품이다. 주인공은 다소 억울하긴 하지만 세상의 시선, 특히 후지슌 유가족의 시선과 마음을 배반할 생각을 못하고 얼떨결에 후지슌의 절친으로서 살아가게 된다. 후지슌의 장례식, 1주기, 가족 모임에도 주인공은 불편한 상황임에도 꼬박꼬박 유가족을 찾아간다. '절친이 자살을 할 때까지 넌 뭘 했는가?' 라며 후지슌 사건을 담당하는 경찰, 기차에게 불합리하다 싶은 취급을 받지만 주인공은 얼떨떨한 채로 감내하려고 한다. 처음엔 캐릭터 설정이 작위적인 게 아닌가 싶었지만 소설에선 '나이프의 말과 십자의 말의 차이'를 언급하며 속죄의 무거움과 개연성을 부여한다.

 비난의 말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나이프의 말은 순간적으론 아프지만 상처가 없어지면 사라진다. 그러나 십자가의 말은 평생 등에 지고 가야 한다. 내가 만약 평소에 친하지도 않다고 생각한 애가 유서에 내 이름을 적었다는 이유로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는 처지가 됐다면, 난 무척 불합리하다고 버티지 못했을 것 같다. 실제로 주인공도 결국엔 참다 못해 감정이 폭발했듯 십자가를 평생 짊어지길 강요하기엔 아무래도 잔인한 구석이 있다. 누군들 자신과 무관하다고 여긴 타인의 삶에 계속 책임감을 갖긴 쉽지 않으니까 말이다.


 주인공 선정이 참 절묘한 작품이었다. 작가는 실제로 자살로 자기보다 먼저 떠난 아들을 둔 어느 아버지의 인터뷰를 접하고서 이 소설을 집필했다고 한다. 그런데 작가는 실질적으론 사건의 제3자에 해당할 동급생 한 명을 주인공으로 설정했다. 피해자 본인이 아닌, 유가족인 아버지가 아닌, 가해자도 아닌 작가 본인과 마찬가지인 제3자를. 사나다는 후지슌과 동급생일 뿐 윤리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느냐 여부는 작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인물일지 모른다. 작중 사건을 취재하는 기자 - 약간 기레기 기질도 없잖았던... - 는 나름 사명감을 갖고 주인공을 비롯한 방관한 동급생들을 매도하지만, 결국 동급생들이 방관해서 후지슌이 자살했다는 얘긴 결과론적인 얘기에 지나지 않는다. 후지슌에게도 삶을 이어나갈 기회는 있었고 결국 자살을 최종적으로 실행에 옮긴 건 자살한 당사자니까. 어쩌면 후지슌을 도우려고 한 사람이 많았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렇다. 그렇게 생각하며 책임감에서 자유로워지긴 너무나 쉽다. 사나다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정확히는 시게마츠 기요시는 그런 식으로 글을 쓰지 않았다. 작가는 꽤 진지하게 글을 이어나갔다. 얼마든지 동급생 자살로부터 눈을 돌릴 수 있음에도 절대 그를 용납하지 않는다. 주인공에게 십자가를 지우려는 후지슌의 아버지와 기자를 더욱 부추긴다. 물론 작가는 이 두 인물에게도 어느 정도 스스로의 모습을 자각할 수 있게끔 여지를 남기긴 했다. 기자의 언론 플레이며 아버지의 냉담한 태도는 감정적인 걸 넘어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그렇지 않기가 어렵단 건 인정하나 느닷없이 절친이 된 주인공의 심정을 헤아린다면 그를 향한 어른들의 취급은 너무 가혹했다.


 나 역시 제3자에 불과하기에 주인공의 감정에 몰입할 수밖에 없던 걸까? 20년에 걸쳐, 고향을 떠나서도 떳떳함이라곤 없이 사는 주인공의 일대기가 불편하게 읽혔다면 너무 본질을 놓치는 걸까? 제아무리 주인공이 곤혹스럽더라도 삶에 비관해 자살한 후지슌에 비한다면 배부른 상황이니 언제나 그 책임에서 자유로워지면 안 되는 걸까? 소설은 답이 없는 상황에서 그럴싸한 답을 내놓으려 시도하기 보단 진심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진심 어린 속죄는 무엇인지, 진심 어린 참회란 무엇인지 주인공은 20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 되묻는다.

 이 답답하고 반복적이고 지리멸렬하기도 한 여정은 후지슌이 생전에 가고 싶어한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스코그쉬르코고르덴 묘지공원에 유가족들이 찾아가며 결말이 난다. 어느새 주인공은 유가족들에게 같이 묘지공원에 가자고 권유를 받을 정도로 거리감이 사라졌지만 주인공은 한사코 동행을 거절한다. 어떤 식으로도 정리가 되지 않는 자신만의 감정, 어쨌거나 제3자로서의 감정은 유가족과 함께가 아닌 혼자서 정리하는 게 더 맞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시간이 흘러 아들이 생기고서야 후지슌이 자신을 '절친'이라 한 이유를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은 주인공에겐 언젠가 진심으로 자기 감정을 정리할 순간을 상상하며, 또 오래전에 먼저 떠난 아들을 떠올리며 공원에 갔을 후지슌의 아버지와 남동생의 모습을 상상하며 소설은 끝맺어진다.


 모든 감정이 명확히 규정되지 않는 소설임에도 여운이 남는 이유는 한결 같이 진지하고 솔직했기 때문일 것이다. 계속 몰입하며 읽기엔 답답하고 불편했지만 작가만큼은 고개 돌리지 않고 집필한 덕에 후반부의 여운이 상상 이상으로 짙었다. 시게마츠 기요시의 작품은 꽤 어린 시절부터 접했는데, 타성에 젖지 않고 연차에 어울리게 더 깊이가 있는 작품을 써내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게 바로 작가의 내공이리라. 

 오랜만에 작가의 작품을 접했는데 예전에 느꼈던 감동이 빛이 바래기는커녕 더 짙어져서 실로 반가웠다. 최근에 우타노 쇼고의 작품을 읽을 때도 느낀 거지만 한 작가를 시간을 두고 오랜만에 접하니까 만감이 교차한다. 특히 시게마츠 기요시는 뻔할 정도로 자주 동일한 소재에 천착해온 작가라 그의 진화하는 모습이 더욱 남다르게 다가왔다.

상처를 입지 않은 것은, 남에게 상처를 준 것보다 죄가 무거울 때가 있으니까. - 21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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