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 교사 1 아름다운 청소년 21
이희준 지음 / 별숲 / 2020년 4월
평점 :
절판


9.5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성을 배우고, 인간들도 그 로봇을 통해 인간성이 무엇인지 깨닫는다는 스토리는 식상하다면 식상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식상하다고 해서 쓰기 쉬운 이야기는 아니다. 저자 이력이 양천구 토박이고 장르 소설과 영화에 심취했으며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들의 장점을 모아 썼다는 게 전부인 이 이희준 작가의 데뷔작은 일견 식상하고 어설플 수도 있었을 이야기를 패기 있게 써내려갔다. 등단도 하지 않고 집필 경력이 밝혀지지 않은 신인이 이런 소재로 이만한 작품을 써내다니, 그 패기와 재능이 부럽기 그지없었다.

 '추리, SF, 스릴러를 융합한 새로운 소설의 탄생!'이라고 책 뒤에 소개됐던데, 엄밀히 말해 비슷한 소재를 쓴 기성 작품들과 비교하면 그렇게 새로운 스타일의 소설은 아니고 위에서 말했듯 식상한 부분도 없잖았다. 아무래도 이 책이 청소년 독자를 대상으로 한 출판사에서 펴냈다 보니 상대적으로 독서 경험이 적은 어린 독자를 대상으로 저런 소개 문구를 쓴 것 같은데, 중요한 건 딱히 독서 경험이 적다고도 어리다고도 할 수 없는 내가 읽기에도 이 작품은 충분히 재밌었다는 것이다. '새로운 소설의 탄생!'이라는 문구에 현혹된 탓인지 기대만큼 압도적으로 새롭진 않았지만, 그래도 읽는 내내 청소년 독자를 비롯해 성인 독자들도 아우를 수 있는 깊이와 잠재력이 있는 작품이지 않은가 하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개인적으로 되게 높이 평가하고 싶은 부분은 바로 생동감 있는 캐릭터 설정이다. 최종 보스의 정체나 동기가 다소 시시하고 평면적이었던 걸 제외하면 로봇 교사 가우스나 가우스가 가르치는 보충반 학생들, 인간 교사 최인규, 그리고 누명을 쓴 가우스를 추적하는 선유한 할머니 등의 캐릭터의 개성과 존재감은 압권이었다. 특히 아직 학창 시절을 보낸지 얼마 되지 않은 작가라 그런지 학생들과 교사가 구사하는 언어들이 상당히 생동감 넘쳤는데 나도 작가와 세대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아서 이 부분이 무척 반갑게 읽혔다. 간혹 청소년 독자를 대상으로 쓴 글이라도 작가가 나이가 너무 많아 작중 청소년들이 구사하는 언어가 옛스러운 경우가 있는데 그때마다 묘한 괴리감을 느꼈던 것에 비해 이 책의 인물들의 대사는 정말 찰지게 읽혔다. 꼭 쿠엔틴 타란티노처럼 욕도 가감없이 구사하고 쓰잘데기 없는 드립도 끊이질 않아 호불호가 갈릴 것 같지만 내가 보기엔 그만큼 작가가 즐기면서 쓰고 있는 느낌을 받아 나도 모르게 킥킥거리면서 읽었던 것 같다.

 단, 문제가 있다면 학생들에 비해 어른 캐릭터, 노인 캐릭터의 대사는 어색한 부분이 있었는데 이는 아직 작가가 다양한 연령대와 직업의 인물을 그려보지 못한 경험 부족이 드러나는 부분이겠다. 또 학생들이 쏟아내는 로봇 관련 드립의 태반이 터미네이터나 트랜스포머와 관련됐는데 지금 봐도 철 지난 작품들이 대부분이라 드립의 적중률과 무관하게 거슬렸다. 작품의 시간대가 못해도 지금보다 몇 십 년 뒤일 걸 생각하면 학생들이 자기들 기준으로 옛날 영화로 드립을 친다는 게 더더욱 이질감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을 가르칠 수 있는 성능의 로봇은 물론이고 그 로봇을 학교로 배정시킬 정도의 사회 제도는 - 반발하는 사람들이 적잖지만. - 엊그제 터미네이터를 관람한 세대의 사람들이 만들 만한 것이 아니잖은가. 터미네이터 관련 드립이 한두 번 나왔으면 모르겠는데 주기적으로 나오다 보니 작가가 흥을 주체하지 못해 리얼리티를 놓치고 있어 자제를 하는 게 어떨까 생각했다.


 뭐, 그래봤자 이 작품의 너무나 많은 장점을 생각하면 위의 아쉬움들은 나의 일방적인 트집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사고하는 과정이 사람 같았던 가우스는 로봇 교사로 만들어질 때 사람을 잘 이해할 수 있고 잘 동화될 수 있게끔 프로그래밍이 됐기에 그리 어색하지 않다는 것, 아이들이 학교에서부터 깨닫게 되는 사회의 부조리를 가우스도 같이 깨달으면서 인간성과 감정을 습득하고 돌발 행동을 보이는 것, 누명을 쓰고서 진범을 찾아갈 때 로봇의 성능을 최대한으로 발휘해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추리력을 선보이는 것 - 셜록 홈즈가 연상됐다. 역시 그는 사람이 아니었다... - 등 개연성 있는 전개가 일품이었다.

 일전에 <가위남>에 대해 포스팅할 때 추리소설은 저마다 크든 작든 선입견에 도전하는 공통점이 있다는 말을 했는데 그 말은 이 작품에도 해당됐다. 로봇 교사와 그 교사의 제자들이 협동을 펼쳐 진범을 쫓는 전개는 익히 예상이 됐지만 피살된 학생의 할머니가 자신의 손자를 죽였다는 가우스를 뒤쫓는 전개는 충격적이었다. 그 전개와 캐릭터성을 황당하지 않게 묘사한 것과 피해자의 유가족 중에 특히 할머니는 연약하게 울기만 할 것이란 선입견을 깨부순 게 그렇게 인상적일 수 없었다. 비록 선유한 할머니의 개입이나 활약이 작중 전개에 있어서 예상치 못한 변수로 작용하진 않았지만, 사건이 완전히 해결된 뒤에 로봇 교사 가우스가 학교를 넘어 진정한 교사로 거듭나는 일련의 전개며 감정선엔 그녀의 존재감이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유한 할머니를 비롯해 최인규나 학생들까지 누구 하나 버릴 캐릭터가 없었다.


 캐릭터를 비롯해 이 작품은 거의 모든 요소가 뭐 하나 버릴 것 없이 준수하고 어색함 없이 어울렸다. 로봇의 추리는 인간이 흉내낼 수 없어서 경이로움을 선사했고 차량이 동원된 추격 장면이나 후반부의 격투 장면들은 쫄깃쫄깃한 긴장감과 쾌감을 안겨줬다. 로봇을 소재로 한 SF적인 상상과 통찰도 재밌었는데, 누누이 말했듯 로봇이 인간성을 배우는 것 자체는 아주 신선하진 않았지만 그 과정을 교사와 학생의 관계를 통해 깊이 있고 어색함 없이 그려내 주제의식이 효과적으로 와 닿았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다시 한 번 트집 아닌 트집을 잡아야겠다. 이 작품의 제목이 로봇 '교사' 대신 로봇 '선생'이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가우스가 태어난 연도를 생각하면 학생보다 어려서 어떻게 선생이라 부를 수 있겠냐 싶겠지만, 교사라는 호칭이 단순히 직함을 가리키는 것에 비해 선생은 보다 존경심이 포함된 단어인 것 같아 작중 가우스와 학생들의 유대감을 설명할 때 더 어울리는 단어라고 본다. 게다가 결말까지 생각해보면 먼저 살았다는 의미의 선생이란 단어가 그리 틀린 말이 아니게 된다는 걸 생각하면... 아까도 말했듯 트집이지만 뭔가 아쉬웠다.


 작가는 완전 초짜고 소재도 쉽지 않고 여러 장르가 혼합됐고 분량도 길어서 솔직히 읽기 전엔 불안했지만 놀랍게도 그 모든 불안함을 완전히 떨쳐낸 작품이었다. 등단이나 신인상 시스템 없이 주목을 받기 어려운 우리나라 문단에서 이 작품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출간해준 출판사의 결정에 절로 박수가 나온다. 이 작가가 이후에도 작품 활동을 이어갈지, 어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만한 작품을 쓴 사람이라면 앞으로 더 멋진 작품 활동을 선보이리라.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대해마지않는다.

하지만 슬프게도 어른들이 가장 요구하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앉아서, 인내하는 것. 물론 학생들이 그걸 견디지 못하는 건 학생들 탓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로봇으로 태어나지 않은 잘못밖에 없었다. 갑자기 현석이가 예전에 선생님은 공부를 안 해도 수능에서 만점을 받을 수 있겠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 정말 그렇군. 내 머리는 인터넷과 연결되어 있고 난 완벽한 암기력과 인내심이 있잖아? 아무래도 뭔가 반대로 된 것 같다. 그는 교사가 아니라 학생으로 태어났어야 했다. - 1권 262~26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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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스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10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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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전작 <팬텀>에서 상당히 충격적인 형태로 결말이 나버려서 후속작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렇게 결말이 나지 않았다면 이 시리즈를 계속 읽을지 조금은 고민했을지 모르겠다. 사실 <스노우맨>을 시작으로 '해리 홀레' 시리즈를 꾸준히 챙겨볼 것을 속으로 다짐하긴 했지만, 난 그리 충실한 팬이 아닌지 <팬텀>을 읽을 때는 잠시 흔들렸었다. 전작들에 비해 산만한 전개와 윤곽이 잘 잡히지 않는 스토리 라인 때문에 괜히 두껍기만 한 책이란 인상을 받았는데 당시엔 내가 컨디션이 좋지 않았나 하고 넘어갔지만 <폴리스>까지 읽으니 생각이 바뀌었다.

 <폴리스>는 전개 양상이 전편보다 산만하고 윤곽이 잘 잡히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 내 팬심에 위배되는 말을 담을 리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실망한 데엔 전편의 비정한 결말을 어떻게 풀어낼지 한껏 기대하게 만들어놓고, 막상 본편에선 그 결말을 다소 흐지부지한 방식으로 봉합해버린 탓이 크다. 어째 안 하느니만도 못한 느낌을 안겨줬는데... 아마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어지간하면 전편도 읽은 사람일 테지만, 혹여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대놓고 말은 못하겠지만 아무튼 요 네스뵈가 펼친 일종의 서술 트릭이나 반전은 생각할수록 허무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이걸 읽으려고 후속작을 집어들었나 싶었다.


 억지스럽긴 해도 이야기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선회한 건 독자들의 심리적 저항감을 배려하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작가가 더는 해리의 불행을 감당할 수 없었던 걸까, 그게 아니라면 시리즈를 억지로 이어가기 위해서 급하게 수정한 걸까. 나는 셋 다 맞는 얘기라 생각한다. 덕분에 경찰 대학 교수로 일하는 해리의 모습을 엿볼 수 있던 건 재밌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시리즈를 억지로 이어가려 모습은 응원하지 않지만 어쨌든 팬의 입장에서 앞으로 나올 작품을 계속 찾아볼 것 같다. <폴리스>는 <팬텀>보다 더 실망스러웠지만 그렇다고 후속작 <목마름>을 외면할 것 같진 않다.

 내가 이 책을 다시 읽는다면 어떨지 모르겠는데, 일단 지금으로선 전편에 비해 훨씬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시리즈의 전개 스타일에 너무 익숙해진 탓인지 범인의 정체도 너무 뻔하고 그 범인이 취한 행동도 하나하나 따져보면 당위성이 확 와 닿지 않는다. 작가는 작중에서 해리의 입을 빌려 '범인이 안도감을 얻을 거라 믿고 저지른 살인이 꼭 합리적이지 않다'고 말하는데 이 말은 독자를 위한 말이라기보단 작가 본인을 위해서 한 말처럼 들렸다. 마치 <테넷>에서 '이해하지 말고 느껴라'고 놀란 감독이 각본을 쓴 것처럼 이 작품도 일견 그럴싸해 보이지만 이 분량과 복잡한 플롯이 과연 적절했는가 누가 묻는다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다.


 아까 위에서도 말했지만 이 책을 읽는 독자 중 과연 시리즈의 팬이 아닌 사람이 몇이나 될지 모르겠다. 적어도 '해리 홀레' 시리즈를 한두 작품 이상 접한 독자들이 <폴리스>까지 읽을 듯한데, 그래서 그런지 혹시 작가가 쓰면서 팬심에 기댄 게 아닌가 하고 비관적인 생각이 들었다. 팬서비스적인 요소도 충실하고 작품의 결말도 전에 없이 행복해서 보기 좋았지만, 오히려 전편보다 더 비극적이고 찝찝한 면도 있어 이 부분에 대해 깊이 있게 묘사하지 못한 작가가 예전처럼 존경스럽게 비춰지지 않았다. 경찰 연쇄살인마가 등장한 건 신선했고 해리 주변 인물의 이야기에 집중한 것도 흥미로웠지만 막상 경찰에 대한 작가의 통찰이나 이후 해리가 펼치는 행보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해리가 일체의 수사 협조도 거절하려는 모습이나 행복에 익숙하지 않아 혼란을 겪는 심리 묘사는 꽤나 신박했지만 해리가 수사에 본격적으로 가담한 뒤부터의 전개는 거의 예측대로라 긴장감이 조성되지 않았다. 심지어 카타르시스가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는데, 문득 <스노우맨>에서 '좋은 이야기는 연이는 성공이 아니라, 처절한 실패에서 나온다'는 구절이 떠올랐다. 그 구절대로 해리가 꼭 처절할 필요는 없더라도 행복한 결말을 쟁취하기 위해 어느 정도 대가를 지불한다는 식의 장면이 있었다면 지금보다 덜 찝찝하고 쾌감 넘쳤으리라 본다.


 어쩌면 행복한 장면을 그리는 한편으로 독자에게 찝찝함을 주려는 게 작가의 의도였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다음 편을 읽으면 이 작품에서의 흐지부지한 봉합이며 떡밥이 제대로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킬지 모르니 섣부른 예단은 금물이긴 하다. 아마 그런 이유에서라도 다음 작품 <목마름>을 읽게 될 것 같다. 하지만 슬슬 기대보단 걱정이 된다.

 듣자하니 노르웨이 본토엔 <목마름>말고도 시리즈의 후속작이 한두 편 더 출간됐다는데, 이렇게 길어지다가 시리즈 전체의 인상이 점점 하락하진 않을지 불안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영원히 승승장구하는 시리즈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걸 알기에 시리즈의 장기화가 마냥 기대되진 않는다. 세상에, 내가 '해리 홀레' 시리즈를 두고 이런 말을 하다니.

‘왜‘라는 질문의 답은 ‘어떻게‘를 알아내지 못하는 한 무의미하다는 겁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요. - 225p




하지만 살인을 저지르고 실망한다는 것이, 범인이 안도감을 얻을 거라고 믿고 저지른 살인이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지만 복수는 상상 속에서 더 달콤한 법이죠. - 227p




그러니 자네가 느끼는 증오의 어머니는 사랑이야. 증오가 아니라고. 자네가 무슨 짓이든 하고 싶게 만들고 그 손으로 죄를 짓게 만드는 힘은. - 39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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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의 세계 - 청소년 성장 만화 단편선 창비만화도서관 4
라일라 외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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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의 단편이 수록돼서 기대했던 책인데 내가 기대했던 작품을 비롯해 수록작 전부가 기대에 못 미쳤다. 창비에서 펴낸 '청소년 성장 만화 단편선'에 속하는 책인데 단순히 성장 만화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좀 더 뚜렷한 키워드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그랬다면 작가로서도 뭔가 창작력을 자극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토요일의 세계'


 내가 기대했던 라일라 작가의 작품. 표제작답다고 해야 할지, 개성이나 주제의식 전달이란 측면에서 균형감 있는 전개가 돋보였지만 결국 작가의 <나는 귀머거리다>의 연장선상에 있어서 생각보다 인상적이진 않았다. 그 작품이 완결될 때는 200화는 너무 짧지 않은가 싶었는데 막상 비슷한 내용의 단편을 읽으니까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이 있듯 작가도 그걸 알기에 적당한 타이밍에 완결을 낸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토니오 크뢰거>를 소개하는 부분이나, 그 작품 덕분에 성장통을 견뎌냈다는 일련의 묘사에선 역시 클라스란 게 느껴졌지만, 이제는 일상물이 아닌 작가의 다른 작품도 궁금해진 터라 아무래도 아쉬운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청각장애인 서사가 꼭 일상물이어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작가가 한 번쯤은 도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여담이지만 '토요일의 세계'라는 제목은 진짜 잘 지었다.



 '캠프'


 이동은과 정이용 콤비의 작품은 이전에도 두 편 접했는데 그때마다 참 내 스타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고 <캠프>란 단편도 마찬가지였다. 동성애 코드가 거북해서라기 보단 전반적으로 하려는 말을 속시원하게 하지 않으려는 작풍이나 인과관계가 단번에 와 닿지 않는 초반부 등이 개인적으로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은 탓이다. 만화만이 아닌 영화처럼 다른 장르의 창작 활동도 겸해서 그런지 특유의 스토리텔링이나 감수성은 확실히 인정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냥 내 스타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건 뭐 어쩔 수 없지.

 기독교 캠프의 현실감 넘치는 묘사도 흥미로웠고 결말도 여운이 있었지만 작품의 전체적인 임팩트는 연한 편이라 돌이켜봤을 때 기억에 남는 게 없다. 그림 하나만큼은 발군이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작가 그림체가 구린 것도 아니니......



 '전학생은 처음이라'


 그림체가 상당히 '모에'한 작품인데 작품 속에 담긴 시골 학교에 대한 고증이나 통찰은 가볍지 않았다. 왠지 모에한 그림체의 만화는 한없이 가벼우리란 생각에 가볍게 읽기 마련인데 이 작품으로 말할 것 같으면 4컷 만화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나름 깊이 있게 해당 소재나 배경을 잘 그려냈다. 너무 갑자기 결말이 나버려서 허무했지만 - 수록작들 모두 분량이 정해졌던 걸까? 분량 상관없이 자유럽게 그릴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 그게 또 어느 정도는 깔끔하게 끝을 낸 것 같아 인상적이기도 했다.

 사실 그림체라고 하면 이 작품이 가장 돋보였는데, 꼭 그림체 때문은 아니지만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이런 그림체일까 싶어 궁금해졌다. 단행본으로 <풀 뜯어먹는 소리>란 작품이 출간됐던데 한 번 읽어볼까.



 '옥상에서 부른 노래'


 아주 교과서적인 성장 만화. 너무 교과서적인 나머지 창비의 여타 성장 소설이 연상되기도 했다. 아무튼 수록작들 중 작가가 소재에 대해 가장 고심하며 취재도 해가며 모종의 사명감도 품고서 무게감 있게 그린 작품일 듯한데 그래서 그런지 실제로도 작중 이야기가 묵직하게 전달이 됐다. 바로 이전 작품의 말랑말랑한 4컷 만화와는 상반된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는데 문제는 너무 교과서적이라 가독성 자체는 제일 떨어졌다. 교과서적이란 말이 잘 와 닿지 않는다면 전개가 판에 박힌 듯 흘러가 식상했다고 표현을 바꿔보겠다.

 뭐가 그렇게 식상했을까 생각해보니 작가가 자신이 취재한 내용을 너무 신경쓰느라 상대적으로 창작력이 덜 발휘된 감이 있었던 것 같다. 실제로 취재한 내용들을 참고는 하면서도 작가 본인만의 이야기로 재탄생시켰어야 했는데, 작가 후기를 읽어보니 고증은 잘 해냈을지언정 그 이상은 신경을 덜 쓴 기색이 역력해 왠지 김샜다. 단편이 아니라 장편이었다면 이런 느낌이 덜했으려나. 작가의 <반달>이란 작품이 있던데 그 작품은 어떨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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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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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9.7







 <GO>는 한창 우리나라에 일본 소설이 많이 소개될 때 제법 이름 좀 날렸던 가네시로 가즈키의 나오키상 수상작이다. 나오키상 역대 최연소 수상작가라는 타이틀을 가진 작가의 이 작품은 자전적인 내용이라 그런지 제목에서부터 결말까지 혈기를 왕창 내뿜고 있다. 주인공인 스기하라가 '재일'인 점을 제외하면 성장 소설, 청춘 소설의 전형을 따르고 있는데 관점에 따라선 작가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을 스기하라의 행보가 사뭇 폭력적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다. 주먹 좀 쓰고 태도도 불량하고 어른에 대한 공경심은 쥐뿔도 없다. 작중에서 말하듯 유교적인 마인드 안에선 스기하라는 상종 못할 인간이 분명하다.

 심지어 스기하라는 민족의 배신자기도 하다. 일본에서 나고 자라면서 북한을 따르는 재일 커뮤니티 속에서 스기하라 일가는 국적을 바꿈과 동시에 배신자로 낙인찍히게 된다. 용어가 은근히 헷갈려서 내가 지금 제대로 설명하고 있는 게 맞는 건가 싶은데 아무튼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 뿐이지 엄연히 살고 있는 곳은 일본이기에 스기하라는 고등학교부턴 일본인으로서 일본 학교로 진학하게 된다. 여러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일본 기준에선 아직 완벽한 일본인도 아니지만 스기하라는 여차저차 적응하며 재일과 일본 양쪽 커뮤니티를 왕복하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사유한다. 그렇게 스기하라는 겉에서만 봤을 땐 전혀 티가 안 나고 먼저 말해주기 전까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본인인 듯 일본인이 아닌 사람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주인공의 정체는 뭐냐고? 뭐긴 뭐겠는가, 스기하라는 다른 무엇도 아닌 스기하라일 뿐이다. 정말 어렵고 깊게 사유해도 결국 내려지는 답은 아주 간단하다. 굳이 인류의 피며 DNA의 기원엔 한 사람으로 귀결된다느니, 그게 아니면 사람은 물리적인 국적의 경계가 무의미할 정도로 이미 여러 피가 섞인 채 이 세상에 태어나는 존재라느니 따위의 언급은 위의 간단한 답 앞에선 전부 부질없는 것에 불과할 수 있다. 사람의 국적이나 정체성이란 게 이렇게 복잡하게 따지고 들어야 할 정도로 가치가 있느냐고 묻는 소설인 만큼 단순한 답이 나올 수밖에 없다. 스기하라의 말마따나 스기하라가 재일인지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 겉으로 티도 안 나고 한눈에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대개 좋은 소설이 그렇듯 이 소설의 매력도 글로 설명하기보다 직접 손에 쥐여주는 게 훨씬 효과적일 듯하다. <GO>는 <레벌루션 NO.3>와 함께 가네시로 가즈키의 대표작으로 꼽히는데 개인적으로 난 <GO>를 더 높게 친다.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보다 심오하고 어려운 주제의식을 빠르고 쉽게 와 닿게 만든다는 점에서 작가의 필력과 저력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인데 특히 전형적인 학원물의 특성을 따르면서도 깊이를 얕볼 수 없는 게 정말 대단하지 않았나 싶다. 솔직히 말해 주먹이 오가는 학원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그림으로 그린 듯한 매력적인 주인공이 등장하는 청춘물도 현실성을 문제삼으며 보지 않는 편이지만 이 작품은 경우가 달랐다. 어디로 튈지 모를 똘끼와 방심하면 훅 들어오는 품격은 물론이요, 특수하다면 특수할 주인공의 정체성 혼란에 일반 독자들도 감정이입할 수 있게 만드는 등 이 책의 진입 장벽은 꽤 낮은 편이다. 한마디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혈기 넘치는 재미를 선사해주는 작품이었다.


 작가가 작품 활동이 뜸해선지, 그래서 요즘 존재감이 많이 묻혔는지 이 작품이 이제 절판됐다는 게 나름 충격이었다. 잊을 만하면 더 예쁜 표지에 좋은 재질에 비싼 가격으로 다시 출간될 테지만 그래도 현재로선 절판됐다는 게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20년 전 작품에서 스기하라가 고민한 보람도 없이 일본이나 우리나라를 비롯해 어느 나라건 국적에 관란 논쟁은 답보 상태인데 이런 작품이 절판되고 잊혀진다는 게 점점 그 논쟁의 향방이 안 좋은 쪽으로 기울어지려는 전조인 것 같아 왠지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이게 괜한 기우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 다들 스기하라처럼 국적의 여부니 뭐니 하는 질문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이 작품이 절판된 거라면 작품의 만듦새와 별개로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겠다. 하지만 세상에는 사쿠라이의 아빠처럼 교양 있지만 근거도 없는 혐오 정서를 갖고 있고 그 정서를 자식들한테 주입시키는 사람이 적잖은 걸 생각하면 이 책의 절판 상태는 썩 비관적으로만 느껴진다. 부디 이 작품이 시의적절하게 재조명을 받는 날이 빨리 오길 바란다...



인상 깊은 구절


권투란 자기의 원을 자기 주먹으로 뚫고 나가 원 밖에서 무언가를 빼앗오고자 하는 행위다. 원 밖에는 강력한 놈들도 잔뜩 있어. 빼앗아오기는커녕 상대방이 네 놈의 원 속으로 쳐들어와 소중한 것을 빼앗아갈 수도 있다. 게다가 당연한 일이지만 얻어 맞으면 아플 것이고, 상대방을 때리는 것도 아픈 일이다. 아니 무엇보다 서로 주먹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그런데도 넌 권투를 배우고 싶으냐? 원 안에 가만히 있는 편이 편하고 좋을 텐데. - 65~66p


국적이라든가 민족을 근거로 차별하는 인간은 무지하고 나역하고 가엾은 인간이야. 그러니까 우리들이 많은 것을 알고 강해져서 그 인간들을 용서해주면 되는 거야. - 102p


가끔 내 피부가 녹색이나 뭐 그런 색이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다가올 놈은 다가오고 다가오지 않을 놈은 다가오지 않을 테니까 알기 쉽잖아요...... - 214p


나는 말이지, '사자'하고 비슷해. 사자는 자기를 사자라고 생각하지 않지. 너희들이 멋대로 이름을 붙여놓고 사자에 대해서 아는 것처럼 행세하고 있을 뿐이야. 그렇다고 흥에 겨워서 이름 불러가며 가까이 다가오기만 해봐. 너희들의 경동맥에 달겨들어 콱 깨물어 죽일 테니까. 알아, 너희들이 우리를 재일이라고 부르는 한, 언제든 물려야 하는 쪽이라구. - 26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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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 - 2010 제34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청춘 3부작
김혜나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6.8







 내가 이 작품을 9년 전에 읽었을 땐 아직 고등학생이라 그랬는지 작중 인물들의 이야기를 막연한 어른들의 이야기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시간이 흘러 작중 인물보다 나이가 좀 든 다음에 읽으니 그들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공감이 되지만 한편으론 공허하기 짝이 없는 작품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차를 두고 읽었다고 한들 왜 9년 전의 내가 이 작품에 10점 만점에 10점을 줬는지 이해가 잘 안 된다. 까놓고 말해서 야하니까 좋다고 읽어댔던 걸까? 절대 아니라고 하고 싶은데 솔직히 기억이 안 난다.

 이 소설의 성애 장면은 수위가 제법 센 편이다. 노래방을 전전하는 호스트, 속된 말로 선수인 '제리'와 가볍다고도 가볍지 않다고도 할 수 없는 관계를 이어가는 주인공 사이의 성관계가 생각 이상으로 적나라했다. 9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적나라하게 느껴지는데 작가가 이런 성애 묘사로도 용케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구나 하는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대 문학이 대체로 야한 경향이 있고 <제리>도 별 다를 바 없다고 볼 수 있겠지만, 성애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것치고 - 여러 체위를 시도하거나 강요당하는 여성의 고충을 판타지 없이 묘사한 것에서 야한 것 이상의 목적을 추구했다는 게 느껴진다. - 묘사가 너무 반복적이고 소모적이라 불쾌함을 느낄 독자가 많을 듯하다.


 개인적으론 작품의 성애 묘사가 그렇게 불쾌하지도 않았고 내심 어느 정도는 무탈히 읽어내려갈 수 있었으나 - 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지만. - 상술했듯 어렸을 때는 이런 묘사들에 눈이 번쩍 뜨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반면 지금은 그저 지루하고 공허하게만 읽혔다. 장래도 불안정하고 열정도 없는 인물들이 몸으로밖에 교감을 나눌 줄 모른다는 듯한 묘사가 상투적으로 다가왔고 주인공이나 제리나 작중에서 내내 삶의 목적이 불분명한 채 방황하는 편이라 결말에서 그들의 사이가 깨지든 뭘 어쨌든지 간에 크게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 체위로 사랑을 나눴든 어처구니 없이 헤어졌든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가독성 하나는 인정하지만 사실상 남는 건 별로 없는 작품이었다. 글쎄, 자세를 고치고 그 많은 성애 묘사 한 줄 한 줄까지 꼼꼼히 읽었더라면 뭔가 더 느껴지는 바가 더 있었을지 모르지만 딱히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 평소 지론이기도 한데, 정독을 요하는 주제에 정독을 하고 싶게끔 유도하지 못한다면 그 작품에 독자들이 꼭 의리를 다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차라리 진짜 작품 주인공과 동년배였을 때 읽었더라면 느낌이 또 달랐을 것도 같은데 내가 지금 애매하게 나일 먹어버려서 이것도 이미 해봤자 소용도 없는 후회가 돼버렸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후회되지도 않는다. 단지 9년 전에 내가 야한 것에 무지하게 환장했나 싶어 쑥스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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