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 교사 1 아름다운 청소년 21
이희준 지음 / 별숲 / 2020년 4월
평점 :
절판


9.5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성을 배우고, 인간들도 그 로봇을 통해 인간성이 무엇인지 깨닫는다는 스토리는 식상하다면 식상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식상하다고 해서 쓰기 쉬운 이야기는 아니다. 저자 이력이 양천구 토박이고 장르 소설과 영화에 심취했으며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들의 장점을 모아 썼다는 게 전부인 이 이희준 작가의 데뷔작은 일견 식상하고 어설플 수도 있었을 이야기를 패기 있게 써내려갔다. 등단도 하지 않고 집필 경력이 밝혀지지 않은 신인이 이런 소재로 이만한 작품을 써내다니, 그 패기와 재능이 부럽기 그지없었다.

 '추리, SF, 스릴러를 융합한 새로운 소설의 탄생!'이라고 책 뒤에 소개됐던데, 엄밀히 말해 비슷한 소재를 쓴 기성 작품들과 비교하면 그렇게 새로운 스타일의 소설은 아니고 위에서 말했듯 식상한 부분도 없잖았다. 아무래도 이 책이 청소년 독자를 대상으로 한 출판사에서 펴냈다 보니 상대적으로 독서 경험이 적은 어린 독자를 대상으로 저런 소개 문구를 쓴 것 같은데, 중요한 건 딱히 독서 경험이 적다고도 어리다고도 할 수 없는 내가 읽기에도 이 작품은 충분히 재밌었다는 것이다. '새로운 소설의 탄생!'이라는 문구에 현혹된 탓인지 기대만큼 압도적으로 새롭진 않았지만, 그래도 읽는 내내 청소년 독자를 비롯해 성인 독자들도 아우를 수 있는 깊이와 잠재력이 있는 작품이지 않은가 하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개인적으로 되게 높이 평가하고 싶은 부분은 바로 생동감 있는 캐릭터 설정이다. 최종 보스의 정체나 동기가 다소 시시하고 평면적이었던 걸 제외하면 로봇 교사 가우스나 가우스가 가르치는 보충반 학생들, 인간 교사 최인규, 그리고 누명을 쓴 가우스를 추적하는 선유한 할머니 등의 캐릭터의 개성과 존재감은 압권이었다. 특히 아직 학창 시절을 보낸지 얼마 되지 않은 작가라 그런지 학생들과 교사가 구사하는 언어들이 상당히 생동감 넘쳤는데 나도 작가와 세대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아서 이 부분이 무척 반갑게 읽혔다. 간혹 청소년 독자를 대상으로 쓴 글이라도 작가가 나이가 너무 많아 작중 청소년들이 구사하는 언어가 옛스러운 경우가 있는데 그때마다 묘한 괴리감을 느꼈던 것에 비해 이 책의 인물들의 대사는 정말 찰지게 읽혔다. 꼭 쿠엔틴 타란티노처럼 욕도 가감없이 구사하고 쓰잘데기 없는 드립도 끊이질 않아 호불호가 갈릴 것 같지만 내가 보기엔 그만큼 작가가 즐기면서 쓰고 있는 느낌을 받아 나도 모르게 킥킥거리면서 읽었던 것 같다.

 단, 문제가 있다면 학생들에 비해 어른 캐릭터, 노인 캐릭터의 대사는 어색한 부분이 있었는데 이는 아직 작가가 다양한 연령대와 직업의 인물을 그려보지 못한 경험 부족이 드러나는 부분이겠다. 또 학생들이 쏟아내는 로봇 관련 드립의 태반이 터미네이터나 트랜스포머와 관련됐는데 지금 봐도 철 지난 작품들이 대부분이라 드립의 적중률과 무관하게 거슬렸다. 작품의 시간대가 못해도 지금보다 몇 십 년 뒤일 걸 생각하면 학생들이 자기들 기준으로 옛날 영화로 드립을 친다는 게 더더욱 이질감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을 가르칠 수 있는 성능의 로봇은 물론이고 그 로봇을 학교로 배정시킬 정도의 사회 제도는 - 반발하는 사람들이 적잖지만. - 엊그제 터미네이터를 관람한 세대의 사람들이 만들 만한 것이 아니잖은가. 터미네이터 관련 드립이 한두 번 나왔으면 모르겠는데 주기적으로 나오다 보니 작가가 흥을 주체하지 못해 리얼리티를 놓치고 있어 자제를 하는 게 어떨까 생각했다.


 뭐, 그래봤자 이 작품의 너무나 많은 장점을 생각하면 위의 아쉬움들은 나의 일방적인 트집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사고하는 과정이 사람 같았던 가우스는 로봇 교사로 만들어질 때 사람을 잘 이해할 수 있고 잘 동화될 수 있게끔 프로그래밍이 됐기에 그리 어색하지 않다는 것, 아이들이 학교에서부터 깨닫게 되는 사회의 부조리를 가우스도 같이 깨달으면서 인간성과 감정을 습득하고 돌발 행동을 보이는 것, 누명을 쓰고서 진범을 찾아갈 때 로봇의 성능을 최대한으로 발휘해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추리력을 선보이는 것 - 셜록 홈즈가 연상됐다. 역시 그는 사람이 아니었다... - 등 개연성 있는 전개가 일품이었다.

 일전에 <가위남>에 대해 포스팅할 때 추리소설은 저마다 크든 작든 선입견에 도전하는 공통점이 있다는 말을 했는데 그 말은 이 작품에도 해당됐다. 로봇 교사와 그 교사의 제자들이 협동을 펼쳐 진범을 쫓는 전개는 익히 예상이 됐지만 피살된 학생의 할머니가 자신의 손자를 죽였다는 가우스를 뒤쫓는 전개는 충격적이었다. 그 전개와 캐릭터성을 황당하지 않게 묘사한 것과 피해자의 유가족 중에 특히 할머니는 연약하게 울기만 할 것이란 선입견을 깨부순 게 그렇게 인상적일 수 없었다. 비록 선유한 할머니의 개입이나 활약이 작중 전개에 있어서 예상치 못한 변수로 작용하진 않았지만, 사건이 완전히 해결된 뒤에 로봇 교사 가우스가 학교를 넘어 진정한 교사로 거듭나는 일련의 전개며 감정선엔 그녀의 존재감이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유한 할머니를 비롯해 최인규나 학생들까지 누구 하나 버릴 캐릭터가 없었다.


 캐릭터를 비롯해 이 작품은 거의 모든 요소가 뭐 하나 버릴 것 없이 준수하고 어색함 없이 어울렸다. 로봇의 추리는 인간이 흉내낼 수 없어서 경이로움을 선사했고 차량이 동원된 추격 장면이나 후반부의 격투 장면들은 쫄깃쫄깃한 긴장감과 쾌감을 안겨줬다. 로봇을 소재로 한 SF적인 상상과 통찰도 재밌었는데, 누누이 말했듯 로봇이 인간성을 배우는 것 자체는 아주 신선하진 않았지만 그 과정을 교사와 학생의 관계를 통해 깊이 있고 어색함 없이 그려내 주제의식이 효과적으로 와 닿았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다시 한 번 트집 아닌 트집을 잡아야겠다. 이 작품의 제목이 로봇 '교사' 대신 로봇 '선생'이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가우스가 태어난 연도를 생각하면 학생보다 어려서 어떻게 선생이라 부를 수 있겠냐 싶겠지만, 교사라는 호칭이 단순히 직함을 가리키는 것에 비해 선생은 보다 존경심이 포함된 단어인 것 같아 작중 가우스와 학생들의 유대감을 설명할 때 더 어울리는 단어라고 본다. 게다가 결말까지 생각해보면 먼저 살았다는 의미의 선생이란 단어가 그리 틀린 말이 아니게 된다는 걸 생각하면... 아까도 말했듯 트집이지만 뭔가 아쉬웠다.


 작가는 완전 초짜고 소재도 쉽지 않고 여러 장르가 혼합됐고 분량도 길어서 솔직히 읽기 전엔 불안했지만 놀랍게도 그 모든 불안함을 완전히 떨쳐낸 작품이었다. 등단이나 신인상 시스템 없이 주목을 받기 어려운 우리나라 문단에서 이 작품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출간해준 출판사의 결정에 절로 박수가 나온다. 이 작가가 이후에도 작품 활동을 이어갈지, 어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만한 작품을 쓴 사람이라면 앞으로 더 멋진 작품 활동을 선보이리라.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대해마지않는다.

하지만 슬프게도 어른들이 가장 요구하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앉아서, 인내하는 것. 물론 학생들이 그걸 견디지 못하는 건 학생들 탓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로봇으로 태어나지 않은 잘못밖에 없었다. 갑자기 현석이가 예전에 선생님은 공부를 안 해도 수능에서 만점을 받을 수 있겠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 정말 그렇군. 내 머리는 인터넷과 연결되어 있고 난 완벽한 암기력과 인내심이 있잖아? 아무래도 뭔가 반대로 된 것 같다. 그는 교사가 아니라 학생으로 태어났어야 했다. - 1권 262~26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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